25장 은혜의 왕 노릇의 권능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5:20-21)
이 두 절 가운데서 ‘은혜의 왕 노릇’의 힘이 죄의 세력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도는 은혜의 ‘더욱더’와 ‘넘침’과 ‘흘러넘침’으로 은혜의 압도적인 힘을 강조하고 나타내는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인류는 모두 마귀의 세력 안에 있다. 그럼 각 개인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사람이 죄의 가공할 힘과 노예 신분과 죄의 군주와 왕 노릇에서 구속되고 해방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대답은 죄와 마귀의 힘보다 훨씬 더 큰 은혜의 왕 노릇 밖에는 이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원에 있어서 은혜의 능력이란 하나님의 모든 전능하신 행위 중 가장 놀라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경의 대주제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구원을 확신하기를 원하고 있다. 또한 그것을 빼앗을 자가 아무도 없음을 알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 죄의 통치와 지배 아래 있는 한 잃어버린 영혼의 구원에 있어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은혜의 능력을 살펴보자.
1) 은혜의 세력이 정복해야 하는 첫 번째 것은 우리의 영적인 죽음이다.
“죄와 허물로 죽은 너희를 살렸도다”(엡2:1).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채 이 세상에 태어난다.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 죽음은 최종의 원수이다, 그 의미는 우리 모두는 영혼의 관심에는 죽어있고 하나님의 생명에 대하여 죽어 있으며 영적인 일에 대하여 죽어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은혜는 이 죽음의 상태를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밖에는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2) 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이 정복되어야 한다. 자연인은 영적으로 죽어 있을 뿐만 아니라 진리에 대해 반응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롬8:7).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다.”(고전2:14). 성경은 본질상 모든 사람이 그런 위치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핍박자요 모독자요 행악자인 다소 사람이 가장 큰 전도자가 되었는가? 오직 ‘은혜의 왕 노릇’ 때문이다. 우리가 구원받고 구출받기 위해서 우리의 영적인 죽음과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우리의 적대감은 정복되어야 한다. 그것을 이겨내는 것은 은혜이다. 그 은혜는 ‘불가항력적’이고, ‘효과적인 부르심’이다. 우리의 적대감은 제거되고 우리의 죽음은 우리를 소생시키고 우리에게 생명을 넣는 은혜의 권능 있는 역사에 의해 정복되는 것이다. 은혜는 단지 우리를 돕거나 보조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적이고 유효적인 것은 그것이 불가항력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9-10)
3) 은혜는 먼저 우리를 찾고 그리고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한다. 자연인에게 자기 죄를 인식하고 통회하게 하는데 얼마나 큰 힘이 필요한지! 오만한 다소사람 사울에게 무엇이 죄를 알게 하고 통회하게 할 수 있는가? 오만한 다소 출신 바리새인으로 하여금 “내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한 줄 안다”고 말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를 쳐서 땅바닥에 뒤집어 엎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은혜의 힘이다.
4) 은혜는 계속 우리에게 진리를 설득시켜 나간다. 우리의 생각과 이해 위에 역사한다. 그 결과 늘 조롱하던 진리를 보게 되고 갑자기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임을 알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을 붙잡기를 열망한다. “살리심” “중생”도 은혜의 불가항력적인 힘을 예증한다. 중생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던” 창조자의 사역이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에게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옙1:18-19)
우리를 신자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이 강력한 능력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살리시고 영광 가운데서 하늘에서 자기 오른 편에 앉히시는데 사용하신 것과 같은 능력이다.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믿는 것이 쉽고 간단한 것으로 생각하며 그들은 믿고 안 믿고 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은혜가 인간을 다루어 변화시키기 위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무덤에서 끌어올린 힘을 행사한다고 말한다(엡 1:19-23).
은혜의 힘은 찾는 것과 살리는 것, 중생시키는 것만 아니고 ‘제지하는 힘’이다. 은혜의 제지하는 능력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이 불가능할 정도로까지 자신들을 내버려 두지 못하도록 한다. 성령의 구원하는 역사를 훼방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자제하는 은혜의 능력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도 필요하다. 유혹과 시험 속에서 우리를 붙드시고 금하시는 은혜의 능력 그리고 우리의 불멸의 영혼을 상하게 하고 위태롭게 할 것들로부터 우리를 지키시는 은혜의 능력에 대해 감사하자.
5) 은혜의 능력은 성화시키는 은혜 혹은 우리가 성화하는 데 역사하시는 능력이다. 여기서 육체 안에 거하고 있는 죄에 대항하여 나타나는 은혜의 능력을 본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롬7:24). 나 스스로 구원하지 못한다. 그에 대한 유일한 답변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리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로다”(25) 이것이 바로 은혜가 역사하는 힘이다. 그것이 나를 성화하고 내 속에 거하는 죄에서 나를 건져내는 은혜의 능력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2-13).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속에서 역사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이루어나갈 능력을 가진 것이다. 우리는 “그의 능력이 우리의 죄를 다스리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자.
6) 우리가 끊임없이 필요로 하는 ‘지켜 주시는 은혜’이다. 우리는 내재하는 죄의 세력을 생각해 보았고 은혜의 능력만이 그것을 능히 정복할 수 있고 다스릴 수 있음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우리를 영원토록 공격하고 위협하는 우리의 대적자, 세상과 육체와 마귀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약4:5)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우리 편에 열심히 서서 우리를 위해 싸워 우리를 공격하는 세상의 영을 이긴다고 한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6)
마귀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 다음으로 세다. 마귀는 ‘세상 신’, ‘공중 권세 잡은 자’, ‘불순종의 아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 된 것은 그 때문이다. 미가엘 천사장이 모세의 시체를 놓고 마귀와 마주하고 있을 때 그는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유9)라고 한다. 거룩한 천사들은 마귀를 조롱하지 않는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마귀를 조롱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마귀를 물리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닫고 그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은 “그가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오직 은혜의 통치하는 권세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5:8-9) 우리를 ‘찾아 발견한’ 능력, 우리를 사망과 적대감에서 건져낸 능력만이 우리를 정결하게 지킬 수 있고 지킬 것이다.
우리에게 시련과 환난이 닥쳐오면 어떻게 되는가?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평탄하리라고 약속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기뻐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바로 그 점이 우리의 소망이 자리 잡고 있는 지점이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있어 그것을 제하여 주기를 세 번 간구했으나 가시는 없어지지 않지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주께서 말씀하신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약할 때에 강해진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바울은 환난이나 시련 가운데서도 ‘약한 것들을 자랑’할 수 있다고 한다.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13:5).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신33:27). 이것이 바로 은혜의 힘이다.
7) “권능을 주시고 견뎌내게 하시는” 은혜이다. 성도가 최종에까지 견뎌내는 것(성도의 견인)을 가능케 하고 보장해 주는 것은 오직 왕 노릇하는 은혜의 능력 밖에 없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그리스도께서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갈 수 없다”(요10:28)고 말한다. 은혜의 왕 노릇은 죄와 마귀의 그것보다 무한정하게 더 능력이 있다. 아무 것이나 아무도 우리를 그에게서 낚아챌 수 없고 그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이 순간에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하늘 보좌’에 앉아 있다. 견인케 하는 은혜, 권능 있게 지켜나가는 은혜! 만일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모든 조직이 무너진다. 그것은 ‘지울 수 없는 은혜’ 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 끝까지 견뎌낼 수 있다”라고 말한다.
- 우리에게 왕 노릇 하는 은혜의 능력을 베푸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이것이 확신의 터전이다. 주께서 결코 우리를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허드슨 테일러는 막11:22의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을 “하나님의 신실함을 붙잡으라”로 번역해야 한다고 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붙잡으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결코 놓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붙들고 있으라는 것이다. 그를 붙들고 있는 나의 약한 손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나를 붙잡고 있는 그의 강한 손이다. 그의 능력이 무한하고 영원한 능력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그의 손아귀에서 우리를 빼앗아갈 자가 없다.
오, 복되고 능력 있는 은혜의 왕 노릇이여! 그것을 느끼는가? 붙잡고 있는 그 힘을 느끼는가?
우리의 안전보장을 아는가? 그것은 모두 은혜의 능력 안에 있다. 하나님께 감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