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장 하나님의 정치를 위한 사역자(레이 페닝스)
오늘날의 정치 광장에서 칼빈주의자들은 자유를 제한하고 특수한 신학을 지지하려는 비밀스런 요구를 추구하기 위해 국가 권력까지 동원한다는 의심을 받는다. 우리는 반드시 칼빈주의가 근대 민주주의의 출현에 공헌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칼빈주의의 영향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개혁주의 전통이 불의한 권위에 대항할 용기를 주었으며,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 발견되는 교회 정치 형태인 회중교회와 국교회와 장로교회의 종교 회의가 평신도에게 자치를 위한 실습의 장을 제공했다”라고 주장한다.
1. 주요 주제들
칼빈의 통찰력은 그의 위치와 신학적 총명함뿐만 아니라 그의 웅대한 사상 때문에 더욱 영향력이 있었다. 그는 교부신학과 스콜라신학, 그리고 루터파 신학을 두루 섭렵하였으며, 전통적인 정치철학과 인문주의 문학과 역사와 법학에도 능통했다.
정부 관리들을 ‘그리스도의 완전하심 밖에 있는 육적인 자들’로 보는 제세례파와는 달리, 칼빈은 정부 관리들은 신적 권위를 부여받고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자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통치하는 자로,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대표하는 자로 보았다. 그러나 칼빈은 포학한 권세의 남용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허용했다. “그들이 자기들의 의무에 따라서 왕들의 맹렬한 방종에 대적하는 것은 절대로 반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지체 낮은 평민들에게 가해지는 군주들의 횡포를 눈감아 준다면, 그것이야말로 극악한 배신행위라고 선언할 것이다.” “누구든지 무력으로 최고 국가 권력을 찬탈한다면, 그것은 전제적 폭정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누구든지 세습적인 권리로 왕이 된다면, 그것은 자유의 원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청교도 토마스 케이스, 1641년 상원 의회에서, “종교 개혁은 반드시 전우주적이며 보편적이어야 한다. 모든 장소와 모든 사람들, 모든 생업을 개혁하라. 사법부와 하급 관리들을 개혁하라. 대학을 개혁하고 도시들을 개혁하고, 지방을 개혁하고 하급 학교들을 개혁하고, 안식일과 규례들을 개혁하고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개혁해야 한다. 제가 언급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 모든 시민 활동을 억제하는 것은 개혁주의의 풍성한 유산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인이 시민으로서 ‘그 삶의 질을 증진시키려는 목적으로 시민 공동체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책임’이라고 역설했다. 로이드 존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정치적, 사회적 관심의 결핍은 사람들을 분명히 복음과 교회로부터 소외시키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2. 역사적 견본
역사는 우리가 시민의 책무를 수행할 때 반드시 고찰해야 할 가치 있는 통찰력을 제시한다.
크롬웰(1599-1658)은 칼빈주의적 원리들을 융합하려 했던 사람들 중에 가장 잘 알려진 첫 번째 정치 지도자였다. 찰스 1세는 11년 동안이나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크롬웰은 이러한 행정부의 권력의 남용을 견제하고자 했으며, 감독제를 폐지하려고 노력했다.
청교도 일부는 영국을 떠나는 방법을 택했다. 뉴잉글랜드로 떠나는 것이 차라리 더 바람직한 일일 것이라 생각했다. 매사추세츠만의 시민들은 그들의 비전이 ‘언덕 위의 도시’ 즉, 온 세상의 모델이 되기를 기대했다.
그밖의 칼빈주의자들은 다른 방책을 사용했다.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던 수학자 토마스 찰머스는 사회적, 정치적 사안에 대해 지역교회의 접근법을 적용했다. 찰머스는 백성들에게 영적 필요와 함께 물질적 필요도 공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세기 후, 네덜란드에서 교육과 가난이 아브라함 카이퍼와 그의 반혁명당의 주요 의제가 되었다. 1878년에 온전한 기독교 정치정당을 조직했고, 1901년부터 1905년까지 네덜란드의 수상을 역임했다. 카이퍼는 노동 계급의 문제들을 옹호했고, 신앙에 기초한 교육기관들을 위하여 재정 지원을 장려했다.
이들의 접근법은 상대적으로 오래 가지 못했다. 더욱이 그들이 자신들이 일으킨 운동의 결과를 볼 때까지 살았더라면, 그들은 자신들의 유산과 영향에 대해 적잖이 실망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정치적인 수단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님을 일깨워주는 값비싸고도 소중한 교훈이다. 정치적 칼빈주의는 반드시 현세의 성공에 대하여 본질적으로 비관적인 종말론의 정황 속에서 추구되어야만 한다. 종말의 시대에 공공의 장에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노력에 따른 성공은 매우 드물어 보인다.
3. 오늘을 위한 교훈
가장 분명한 것은, 시민으로서의 활동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정치적 칼빈주의의 주장은, 그것을 적용하는 많은 시도들이 역사적으로 오래 가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민으로서 활동해야 할 우리의 책임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전 세대의 대부분의 칼빈주의자들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거나 당시의 정치적 뉴스를 맹종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사건들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에 순종하고 반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본 요소이다. 정치 문제에 참여하는 동기가 하나님을 향한 순종이며 모든 삶의 국면에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소망인 것이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우리가 시민으로서 참여해야 할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시민으로서의 참여가 공공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교훈은, 우리의 상황에 기여하는 일반적인 청사진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방식을 추구하든지 관계없이, 우리는 언제나 정치적 영역에서 기독교의 박애와 은혜와 겸손을 나타내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로이드 존스는 세 가지 위험에 대해 경고한다. 첫째, 그리스도인이 현상유지의 변호자가 될 수 있다는 위험이다. “기독교가 중산계급의 운동이 될 때 그리스도인은 정치적인 보수주의자가 되어 합법적인 개혁을 반대하며, 사람들의 합법적인 권리도 반대하는 자가 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둘째, 정반대의 극단으로 가는 위험으로서, 정치적 개혁에 초점을 맞추는 급진주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칼빈주의의 성향이 자유보다도 질서를 강조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성공을 다양한 삶의 국면을 ‘기독교화 하는 것’으로 정의하거나 또는 무법한 율법폐기론주의 정신을 통해 사람들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위험이 여전히 존재한다. 셋째, 다른 종류의 세속화에 빠지는 위험이다. 기독교의 세계관을 소유하는 것이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세 번째 교훈은, 정치가 대개 시사적인 용어로 논의되는 한편 근본적으로는 사상과 경향에 관한 논쟁이라는 것이다. 19,20세기 사람들은 계몽주의 사상과 프랑스 혁명이 성경에 반하는 것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카이퍼의 정당이 ‘반혁명당’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오늘날의 문제는 진리의 두 영역이라는 이론을 부지중에 채택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교가 개인적인 것이라는 세속주의자들의 주장에 분개하면서도 그들의 개인주의적인 체계를 받아들인다. 대중적인 지지가 약한 믿음의 증거와 함께 과학적 방법의 증거를 받아들임으로써 사실과 가치 사이의 구분을 수용한다.
정치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지나친 정치적 성공에 대한 기대를 경고하고, 개인 구원과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과도함을 피하고자 하는 소망이 무관심과 태만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칼빈주의자들은 삶의 다른 국면들과 마찬가지로 정부 역시 하나님 앞에서 회계해야 할 책임을 진다고 생각했다. 의와 공의를 통해서 하나님께 마땅한 영광을 돌려드려야 하는 것이다. 이 일에는 과거에 엄청난 행동과 책임을 요구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그러하다. 사무엘 루더포드의 말처럼 “달리고 싸우고 땀을 흘리고 씨름하지 않고서는 결코 천국을 쟁취할 수 없다.”
이러한 진리를 조나단 에드워즈보다 더 명쾌하게 파악한 사람은 많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무관심하시지 않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반드시 공공을 위한 마음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바른 영을 가진 사람은 마음이 좁거나 개인적인 관심만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공동체의 유익과 선, 특별히 자신이 거주하는 도시나 마을의 유익과 그가 속해 있는 사회의 진정한 복지를 위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신경 쓰는 사람이다.” 우리는 사는 동안 세상이 좀 더 나아질 수 있도록, 그 직무를 통해 반드시 공공의 선과 유익을 이루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으로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