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프랑스 위그노 신도들의 대량 학살을 기념하는 성 바돌로매의 날은
기도방식통일법령을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허락된 마지막 날이었다.
그 법령은 모든 비감독교회적으로 제정된 것들은 다시 제정되어야 할 것을 명령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기도서에 있는 모든 것들에 동의할 것을 요구하며, 고위성직자의 신성한 임명을,
또 세례에서의 성호와 성찬식에서의 무릎꿇음을, 그리고 교회 기준에 대한 순종을 선언할 것과
거룩한 동맹과 언약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법령이었다.
그리고 예배에 있어 다른 형식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엄격한 형벌을 가할 것을 요구하는 법령이었다.
그 날에 순응하지 않은 성직자들은 그들의 수입이 끊기게 되었는데, 그날에 아무런 혐의도 없이 강사와
목사를 포함한 2,000명의 성직자들이 그들의 성직에서 물러났고 그들의 정든 목사관에 등을 돌려야
했으며, 자신들의 신념을 더럽히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추방당하는 것을 택하였다.
그때 추방당한 사람들에 대해서 역사가 그린은 말하기를,
“추방당한 목사와 강사들은 학식이 많고 활동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국가로부터 많은 봉록을 받고 있었고, 런던의 성직자들 중에서 수위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 추방당한 목사와 강사들은 옥스퍼드 대학과 케임브릿지 대학의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제레미 테일러를 제외한 어떤 영국의 신학자들도 설교자로서의 호우(howe)와 경쟁될 수 없었다.”
어떤 목사도 백스터처럼 교구사제로서 그토록 성실하며 토론에 능한 사람으로 알려진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이외에도 성직에 몸바친 50명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열심과 노력은
예전에 진행된 것보다 더 큰 경건과 종교심으로 그 나라 전체에 확산되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의 축출은 그들 개인의 봉사를 손실하는 것보다 영국 교회에서 더 큰 손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교회의 생명에 가장 능동적이고 보편적인 부분에서 이루어졌던 종교개혁의 시대로부터 있어온 커다란 교회 부분의 명백한 축출이었다.
그것은 영국 교회를 대륙의 개혁교회와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최대한도로 국가의 종교적인 특징들을
조화시키려는 엘리자베스의 즉위 때부터 계속되어 온 노력을 결말짓는 것이었다.
영국 교회는 바로 그 순간부터 기독교세계의 모든 교회들 가운데서 고립되어졌다.
종교개혁은 교황권에 순종하기 위해 매달리는 것에서 도저히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감독교회의 질서 이외의 모든 것을 거부하는 기도방식통일법령은, 영국 교회를 루터교회나 개혁교회 같은 신교도교회들로 이루어지는 보편적 지체로부터 도저히 회복할 수 없게끔 단절시켰고, 모든 건강한 종교적인 교제를 잘라버렸고 정지된 상태로 침몰시켜버렸다.
청교도 성직자들을 추방시킴으로 인하여 개혁 이후의 모든 노력과 모든 변화가, 또 모든 합리적인 진보가 갑자기 정지되었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감독파 교회는 정치조직과 예배의 변경에 의하여 생기는
다양한 영적인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감독파 교회는 200년 동안이나 새로운 기도와 찬양의 예배를 생각해 내는데 실패한 채로
서구 기독교세계의 모든 종교적인 유기체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 제임스 헤론, 「청교도 역사」, pp 231-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