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5세의 짧은 통치 동안(1547-1553) 개신교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그러나 메리 여왕(1553-1558)이 사망할 즈음에 잉글랜드는 사실상 로마와 다시 손을 잡은 상태였다.
‘피의 메리’라는 별명을 가진 이 여왕이 다스리는 기간에
270명 이상의 개신교도들이 화형대에서 순교하였다.
자신들의 믿음 때문에 순교한 이들 중에는 기술자들과 일반 평민들과 유명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유명한 지도급의 인물로서는 존 브래드포드가 있었고,
감독들로서는 존 후퍼, 휴 라티머, 니콜라스 라이들리,
그리고 캔터버리의 대주교였던 토마스 크랜머가 있었다.
그리하여 메리 여왕 치하에서 잉글랜드의 가장 탁월한 인물들이 생명을 잃었다.
산 사람을 화형주에 묶어 태우는 끔찍한 장면은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혔을 것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이러한 사건은 1558년에서 1662년까지와
그 이상을 넘어가는 후속 청교도들의 정신을 형성하는데 하나의 주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 잔인한 박해는 백성들을 로마 가톨릭주의에서 개신교주의로 전향시키는 효과를 일으켰다.
이러한 결과가 낳은 영향은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심대하다.
메리 여왕의 통치 때에는 그녀가 잉글랜드에 있는 로마의 최대 자산이었다.
그러나 메리 여왕의 사후부터는 그녀에 대한 백성들의 부정적인 기억 때문에
메리 여왕은 잉글랜드에서 가톨릭이 세력을 유지하는데 가장 큰 저해 요인이 되었다.
순교자들의 증언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그들의 영향은 존 폭스(John Foxe)의 성실한 글들을 통해 크게 증가되었다.
폭스는 1517년 랜커셔에서 태어났다. 그는 16세에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가 석사 학위를 받을 즈음에 회심하였다.
그는 개신교의 확신 때문에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의 학자들은 가정 교사가 되어 주는 조건으로 숙식 제공을 해 줄 수 있는
부유한 후원자들에게 의존하였다.
폭스는 런던에서 그런 후원자를 찾을 수 없어 거의 굶어 죽게 되었다.
하루는 성 바울 대성당 정원에 처량하게 앉아 있을 때였는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그의 손에 후한 자선금을 쥐어 주었다.
그는 사흘 뒤에 라이게이트에 있는 써레이의 백작 집에 취직이 되어 백작의 자녀들을 가르쳤다.
메리 여왕이 왕위에 앉자 폭스는 유럽 대륙으로 건너가서 프랑크푸르트와 바슬을 차례로 다니며
잉글랜드 망명자들과 합류하였다.
그는 순교사(史)를 집필하기 위해서 벌써부터 자료 수집을 시작해 오던 중이었다.
그의 자료는 사도들의 시대부터 메리 여왕의 통치하에서 박해를 당한 사람들까지 포함하였다.
나중에 폭스의 순교 자료는 1,700쪽으로 늘어났다. 그는 원래 문장가였는데 세부 사항까지
면밀한 서술을 하였다. 그의 진술의 정확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반증되지는 못하였다.
드디어 1570년에 방대한 『순교자들의 책』 (Book of Martyers)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대성당들과 교구 교회들과 공공 회사들의 강단에 진열되었다.
과거에는 이런 규모의 영향을 끼친 책이 영어로 출판된 적이 없었다.
더구나 그처럼 중요한시기에 이런 책을 능가할 서적이 없었다. 다니엘 닐은 이렇게 평하였다.
“이 책만큼 교황 권에 치명타를 준 책이 없었다. 폭스의 순교사는 여왕에게 헌정하였다.
이 책은 너무도 평판이 좋아서 교회들마다 다투어 주문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는
그처럼 많은 무죄한 피를 흘린 종교에 대해 경악과 혐오를 느끼게 되었다.
폭스의 순교사는 성경과 함께 많은 가정에서 가족용 필독서로 사용되었다.
폭스의 행적과 기념비들(그의 방대한 순교사에 대한 공식 타이틀)은
잉글랜드를 개신교로 전향시키는데 사용된 실제적이고 주된 방편이었다.
혹독한 죽음을 당한 마리안(Marian) 순교자들에 대한 감동적 증언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고 그런 믿음을 일어나게 한 원인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었다.
또한 폭스의 글은 청교도들에게 크리스천 영웅들의 이상적인 모습을 새겨 주었다.
즉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에 대해 신실한 중인이 되는 것이었다.
순교자들이 마지막 원수인 무서운 죽음까지 이겨낼 수 있다는 사실은
청교도들에게 영광스런 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잘 죽어야 한다는 것이 청교도들의 정신에 박히게 되었다.
우리는 번연(Bunyan)의 『천로역정』에서
여러 종류의 인물들이 죽음의 강을 건너려고 나오는 장면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미스터 낙담을 기억하는가? 그의 마지막 말은 ‘밤이여 안녕, 낮이여 어서 오라!’였다.
폭스는 순교자들의 마지막 임종의 말들을 적어 불멸의 교훈이 되게 하였다.
예로써, 함께 화형주에 달렸던 휴 라티머 감독이 라이들리 감독에게 한 말을 들 수 있다.
“라이들리 감독이여 염려하지 말고 담대하시오. 우리는 오늘 잉글랜드에 하나님의 은혜로
누구도 끌 수 없는 촛불을 붙이게 될 것이라고 믿소.“
지금도 옥스퍼드에 이들을 태웠던 화형주가 세워졌던 장소에 하나의 기념비가 서 있다.
존 폭스는 잉글랜드가 선택된 국가면서, 성별된 국민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전파하기 위해서 특별히 부름을 받은 백성이라는 사상을 고취시켰다.
- 에룰 헐스, 『청교도들은 누구인가』, pp 4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