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탄을 건너다 (대마도 기행)
을미년 1월 27일 아침 7시 농협 앞에서 참가하지 못한 회원의 환송을 받고 모두들 즐거운 마음으로 차에 올랐다. 국제여객 터미널에 도착한 우리 민간안전망 일행은 반가운 얼굴로 27명이 모였다. 가이드 김양의 지시에 따라 입국 수속을 마치고 9시에 비틀 쾌속정에 올랐다. 출발 엔진 소리와 함께 배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부산항을 뒤로 두고 부산대교를 통과하면서 영도 아치 섬 태종대가 눈가에 서서히 사라지더니 삽시간에 망망대해의 현해탄에 떠가고 있다.
이 곳 바닷길을 통해 우리 동포들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으며 왜적들의 침략 야욕에 얼마나 가슴 아파 했나. 태평양 전쟁의 희생물로 관부 연락선에서 돌아오지 못한 이 뱃길, 해방과 동시에 태극기 앞세우고 조국을 찾아온 귀한 동포의 기쁨의 눈물도 우리는 기억하면서 그 뱃길을 가고 있다.
1시간 10분을 경과한 후 쓰시마 히타가스 항에 도착하여 육지에 올랐다. 관광버스에 올라 첫 번째로 찾은 곳은 섬 최북단 한국 전망대였다.
49.6km 앞에 부산 앞 바다가 보이는 곳이다. 우리나라 8각정과 꼭 같은 설계로 건축된 전망대이다. 위에 올라 바라본 부산은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전망대 안에 설치된 조명 사진을 보고 감탄했다. 태종대에서 해운대 동백섬까지 선명한 불빛이 볼 수 있었고 매년 광안리 불꽃 축제 때에는 주민 다수의 인파가 이곳을 메웠다고 한다. 다음 찾은 곳은 일본에서100경안에 들어가는 관광지로 미우자 하마 해수욕장에 들렸다. 협만으로 된 바다위에 섬 하나 우뚝, 금모래 사장으로 둘러싸인 조용한 천혜의 해수욕장을 뒤로 두고 관광버스는 남쪽으로 달렸다. 이 섬은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 사이에는 수많은 섬으로 된 바다 공원이었다. 섬 총 길이는 82km, 107개의 섬, 면적은 거제도 1.7배, 인구는 한때 7만 명이였으나 지금은 3.5만 명 정도이며 초등학교 27개교 중은 17개교 고는 3곳뿐이고 대학은 없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일본 본토로 일자리를 찾아 거의 떠난다고 하며 결혼 후 아이를 돌보는 나이 많은 노부모 돌봄의 인구가 다수로 차지한단다.
이곳 지형은 주로 산악지대로 남북을 통하는 도로는 하나뿐이고 대개 턴넬을 통과하면서 벼랑길로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니 속력은 40-50km밖에 낼 수 없다. 협만으로 된 지형이라 군데군데 올망졸망한 마을이 보일 뿐 평야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그 곳 주민들은 살아갈 땅이 적으니 눈앞에 보이는 우리 해안에 침투하여 저녁에 배를 몰고 와서 새벽에 떠나는 일명 해안 도적들이 자기들의 연명을 위하여 자주 노략질을 하였다.
한때는 그 빈도가 심하여 세종대왕께서 대마도 정벌을 했다. 그 당시에 우리나라가 대마도를 잘 관리하였더라면 우리 땅이 되었을 것을 그냥 방치하니 일본의 영역에 들어가고 말았다.
일본은 점점 발전하여 17-8세기 에도 시대(약600년)에는 조선과 결탁하여 부산에 왜관을 설치하여 우리와 무역을 하면서 우리 문물인 경전 도자기 기술 등을 전파해 갔다. 오직 그들은 대륙인 조선을 가까이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고 쓰시마 번주 지시에 따라 12번이나 조선 통신사를 불러들려 칙사 대접을 하면서 무역상대로 삼아 살아남겠다는 노력이 영역이 보였다.
다음 도착지는 일본 하롱베이라는 섬 군을 볼 수 있는 에보시타게 전망대에 올랐다. 내려다보이는 자연 경관은 대단했다. 일본은 군사 요새로 중요한 섬이며 다른 이용 가치는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이 곳 관광객들은 대부분 한국인 90%를 차지하며 낚시꾼들의 거점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 히타가니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하루 밤을 즐기다. 저녁한때 모두 2층 식당 앞에서 모여 싱싱한 횟감 해삼 등의 안주로 모두들은 취한 기분으로 이번 여행의 픽크를 이루었다. 다음 날 이즈 하라 시가지를 도보로 조선 통신사, 고려 문, 민속자료 등 귀중품 전시장을 관람했다.
다음으로 덕혜옹주의 결혼을 축하하는 뜻으로 건립된 결혼 비 , 최익현의 추모비가 있는 수선사도 보고 다음 왕인(학문의 신) 소서행장 딸인 마리아의 위패가 있는 팔 번금 신사도 관람했다. 다시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김양의 설명은 길었다.
중간 만강교가 있는 해협을 통과하면서 로 일전쟁의 승전 이야기 1940년 로 일 전쟁 시 발틱 함대 38척을 이 곳 해전에서 전몰시킨 역사 이야기, 고종 후처에서 태어난 덕혜옹주 애환이 스린 일생 이야기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사연, 전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창덕궁 낙천 정에 옹주의 혼을 모셔 놓고 있다.
우리는 왜 임진왜란, 한 일 합방이란 큰 변을 당해야했나?
대륙(조선)에서 쫓겨나서 일본으로 건너간 유민 남쪽에서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온 남방계 주민들이 모여 건설한 일본은 에도시대에 접하여 사무라이 정신으로 전국 시대를 통일한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그 저력으로 조선의 식량, 도자기를 갖기 위하여 전쟁을 일어 켜서 우리를 괴롭힌 것이 임진왜란이 아닌가.
근대에 이러러 일본은 서양 무기인 총 대포가 들어오니까 일본 칼 (립본도)로 대항이 역 부족하니까 메이지는 유신 혁명을 일으켜 서구 현대 문명을 주로 최강의 영국에서 받아 들여서 산업혁명으로 메이지 시대가 도래되어 최강국이 되었다.
청.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조선 반도를 손 안대고 코푸는 격으로 36년간 우리를 통치하였지. 조선은 사대 당파 싸움으로 일본 총칼에 넘어진 셈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다시는 남의 침략에 당해서는 된다는 각오로 국력 부강에 매진해야할 것이다. 지금 경제는 대국이 되었지만 젊은 층의 세대의 정신 무장이 다소 회의된 것 아닌가 마음 두렵다.
첫댓글 사려깊은 의식세계를 다시한번 새겨봅니다.
덕북에 역사 공부를 다시 되새겨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