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장 개관 및 분석
본 설교의 자세한 내용과 진술에 앞서 그것을 전체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유는 ‘나무들 때문에 숲을 보지 못하는’ 이 변함없는 위험 때문이다.
비유컨대 산상설교는 하나의 웅장한 음악과 같다. 만일 본 설교를 전체로써 이해하고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 속의 어느 특정 명령의 어느 하나도 적절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소위 ‘현대적 요구에 부응한 산상설교의 사회적 적용’이 그토록 완전한 허위가 되고 이단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본 설교의 순서야말로 가장 중요하다. 본 설교에는 일종의 논리적 연결이 있다. 그 뿐 아니라 영적인 순서와 연결이 있다.
주님의 이 말씀들은 어떤 기초 원칙이 설정되고 그것을 기초로 다른 원리들이 뒤를 잇고 있다. 그
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에게 산상설교를 살며 실천하도록 노력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게서 기독교인의 행위를 기대하는 것은 이단이다.
신약성경의 어느 서신이나 먼저 교리요, 그 다음에는 교리로부터 추론이 항상 이어져 ‘
그러므로’ 그들은 어떠 어떠한 일들을 하라고 권면을 받는다.
신약의 모든 서신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쓰여진 것이요, 비그리스도인에게 쓰여진 것이 아님을
우리는 늘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모든 서신의 윤리면에서의 호소는 항상 신자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된 사람들에게만 말씀되어진 것이다.
- 본 설교의 분류
일반적인 것) 5:3-16:
3-10, 기독교인의 본질적인 성격
11-12, 그에 대한 세상의 반응에 의해 증명된 기독교인의 성격(긍정적인 면, 부정적인 면)
13-16, 세상에 대한 기독교인의 관계.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특수적인 것) 5:17-48: 그리스도인의 의에 대한 대략적 서술. 여기에 내포된 원칙은 그리스도인은
율법조문보다 영에 더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바리새인의 과오는 그들의 기계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졌다는 데 있다.
6: - 하나님의 존전에서 그에게 능동적으로 순종하고 전적으로 의지하며 생활하는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항상 하나님 존전에 있음을 앎으로 타인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가지는 관계에 비추어 생각한다.
7: - 하나님의 판단에 비추어 항상 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사는 자로서의 기독교인.
- 그리스도인 특유의 자질, 매우 중요한 세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법과 관련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며 그 법을 지키는 데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다.
둘째, 하나님의 존전에 있음을 항상 인식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유로운 행위자가 아니다. 그
가 행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관점에서 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의식주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주요 관심사는 아니며,
이런 것들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나라와 다른 나라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로마 카톨릭의 수도원제도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 세상 밖으로 나가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설교는 우리의 태도가 비그리스도인의 태도와는 전혀 달라야 한다고 말씀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대한 관계 때문에 이 세상에서 환경에 대해 염려해서는 안 된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행하는 사람이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쫒기 때문에 비겁한 두려움 때문에서가 아니다.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사는 것이다. 주님은 양의 내부를 살피신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항상 이것을 기억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우리 현대 그리스도인을 고발할 최후의 죄는 얄팍함과 입담의 죄가 될 것이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살았다. 그
러나 현대 그리스도인은 이 교훈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육신과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을 하며 행해야 한다.
이것이 ‘좁은 문’이요, ‘좁은 길’이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 본 설교의 해석을 지배하는 원칙
중요한 원칙은 산상설교는 어떤 윤리나 도덕적인 규범이 아니라 어떤 성격의 서술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이 되게 되어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으로 간주 되어야 한다.
주님은 여기서 “너희가 이런 사람이니 너희는 율법을 이렇게 대해야 하며 율법에 따라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사람들은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는
명령을 예로 들며, 이대로 하면 옷장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본 설교가 거듭 우리에게 일러 주는 교훈은 우리가 어떤 주어진 환경과 조건 안에 있으므로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심령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계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규범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 뜻이요 주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나는 그렇게 할 태세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와 나의 모든 소유는 주의 것이니 이제 내 것은 하나도 없다”
이것이 본 설교의 전반원칙과 자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다.
어떤 구체적인 것에 대한 일반적인 것의 관계를 말로 나타내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정확히 연주하는 것이 그를 위대한 예술가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라해도 규칙이나 규례를 무시할 이유는 없다.
그를 위대한 예술가로 만드는 것은 그의 표현이요, 영이요, 생명이다.
기독교인은 영을 강조하고 있을 때에도 동시에 문자에도 관심을 가진다.
요약하면 이 설교에 의문이 들어 다투려 하게 될 때는, 심령 상태가 잘못되어 있거나 잘못 해석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산상설교는 매우 두려운 교훈이다.
그러므로 야고보의 말씀대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합시다”
만일 본 설교의 어느 명령이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면 해석과 이해가 잘못 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주님과 제자들도 산상설교대로 살았다.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은 사람들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던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이 설교는 그리스도인이 생활화해야 할 교훈이다. 이 교훈들과 다투는 심령이 되지 말라.
여기에 우리들이 살아야 할 삶이 있다. 만일 오늘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산상설교대로 산다면
세상은 쇼크를 받을 것이며 신기하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 원컨대 우리들이 본 설교의 심판 아래 있게 하옵시며 이 세상에서 세우고 있는 집이
주의 마지막 테스트와 어린 양의 엄위하신 눈 앞에서 넘어지지 않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