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이 저마다 내가 망국의 책임자인 동시에 또한 나라를 다시 찾을 책임자라고 자각할 때가 우리나라에 광복의 새 생맥이 돌 때요"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이 일제에 저항하는 마음과 책임에 대하여 깨닫는 순간 광복이 올 것이라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명언입니다.
지난 7월 22일, 저는 압구정에 위치한 도산안창호기념관에 다녀왔습니다.
▲ 안창호 선생 동상
압구정역에서 도보로 10여 분 거리에 위치한 기념관은 한적한 도산 공원 내에 있었습니다. 크지 않은 규모의 기념관이었지만, 안창호 선생의 기록들이 알차게 꾸며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요. 특히, 도산 안창호 선생의 생애에 관한 만화 안내 책자와 팜플렛이 비치되어 쉽게 안창호 선생의 약력을 볼 수 있었습니다.
▲ 팜플렛
그뿐만 아니라 내부에는 안창호 선생의 활동과 사진, 그리고 기록물들이 상세하게 배치되어 안창호 선생의 생애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전자시스템을 통한 안내로 안창호 선생과 관련한 간략한 동영상도 시청할 수 있어 이해를 돕고 있었습니다.
▲ 전자시스템 안내
도산 안창호 선생은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선생이 16세 되던 해 청일전쟁으로 황폐해진 평양 시내를 보면서, 그는 청과 일본이 조국에서 싸우는 것은 우리 민족에게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민족의 힘을 기르는데 평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이후 밀러 학당에 입당한 안창호 선생은 미국 유학 중 한인친목회 결성, 상해 임시정부 활동과 국내에서의 신민회 활동 등 구국 활동에 힘썼습니다.
특히, 임시정부의 내분이 깊어지자 독립운동의 방향에 대한 민족적 방향을 도출하기 위해 국민 대표회의 개최를 주도하기도 하였습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가 일어난 4월 29일, 일경에 체포를 당한 안창호 선생은 국내로 압송되어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1935년 2월, 가출옥하였습니다. 출소 후에도 안창호 선생은 일경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전국을 순회했지만 일경의 방해가 심해지자 평남 강서군 대보산에 은거하였습니다. 1937년 6월, 일제는 ‘동우회 사건’을 일으켜 동우회원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였는데요. 이때 다시 체포된 선생은 옥살이를 하던 중 중병이 들어 같은 해 12월에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습니다. 1938년 3월 10일, 안창호 선생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서거하였습니다.
이후 1973년 11월 10일, 서울시에서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던 도산 선생의 묘소를 도산공원으로 이전하였습니다.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해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평생을 조국을 위한 삶을 산 안창호 선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먼저 우리 민족이 깨어있어야 함을 주장하였던 그는 우리 겨레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쁜 일상에 치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터전, 대한민국에 대해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안창호 선생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을 생각해보면 죄송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데요. 우리가 안창호 선생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을 기리고, 늘 국가에 대해 올곧은 신념을 갖고자 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 나라사랑의 출발선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무더운 여름날, 더위를 피해 도산 공원을 방문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산책로와 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어 서늘한 그늘에서 더위를 피하며, 안창호 선생의 생애와 그의 업적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또한 애국심을 기르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생을 나라의 독립을 염원했던 안창호 선생. 그의 바람처럼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조국과 민족에 대하여 늘 깨어있는 생각을 지니고 생활할 수 있기를 염원합니다.
*참고사이트
도산안창호기념관 http://www.ahnchangho.or.kr
첫댓글 아하 도산이여 양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