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마태복음 16 : 1 - 12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종교심이 강합니다. 하나님께서 갈데아 우르에서 불러낸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자랑하였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자랑하며 지켰습니다. 선지자들은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여 년간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선지자가 없으므로 백성들은 율법을 듣지도 배우지도 못했기 때문에 암흑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외치는 소리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때 또 다른 한 청년이 나타났습니다. 요한은 그를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요1:29).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은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셨습니다. 가나 혼인집에 모자라는 포도주를 물로 만드는 것을 시작하여 많은 병든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모인 무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귀신 들린 사람은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도 살리셨습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갈릴리 지방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갈릴리 뿐 아니라 유대와 예루살렘까지도 퍼졌습니다.
예수님이 산에 오르시니 모인 무리가 장정 남자만 오천 명이였습니다. 여자와 아이들을 합치면 만오천 여명 이상이나 모였습니다. 한 아이가 가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사하시고 그 무리를 배부르게 먹이셨습니다(요6:10). 이후에 예수님은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고 하시며 일곱 개의 떡과 생선 두어 마리를 축사하시고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셨습니다. 떡을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명이였습니다. 먹고 남은 조각이 일곱 광주리였습니다.
오천명을 먹이신 것을 ‘오병이어’라고 하고 ‘사천명을 먹이신 것을 ’‘칠병이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고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는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칠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누룩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장로교에 통합, 합동, 고신과 같은 교파가 있는 것처럼 유대교에도 여러 교파가 있었지만 그중에 대표적인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형식주의와 율법주의였으며, 사두개인들은 기회주의와 물질주의였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다투어 적개심을 품고 있는 관계였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주장을 하며 적개심을 품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데는 함께 하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하여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시험하기를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이기를 청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보이신 표적을 보았습니다. 조금 전에도 떡 일곱 개로 사천명이 먹고도 일곱 광주리가 남는 표적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표적을 보이라고 한 것은 예수님의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수작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하시며 크게 책망하셨습니다(4).
그리고 건너편으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며 서로 의논하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에 대해서 경고하시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떡을 준비하지 못한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오해를 한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우리에게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부산에서 목회를 할 때 예배를 마치고 나가는 성도들과 인사를 하던 중 한 사람은 전과 다르게 상기된 얼굴로 외면을 하며 인사도 하지 않고 갔습니다. 그런데 전화로 설교 중에 자기 이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전혀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도 그 사람은 자기 이야기로 듣고 화가 났다는 것입니다.
누룩을 주의 하라는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떡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책망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동문서답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의논하느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9,10절에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은 것이 몇 바구니며’라는 말씀과 기적으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은 것이 몇 광주리’라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바구니’는 버들가지로 만든 음식을 담는 작은 그릇이며, ‘광주리’는 갈대로 만든 물고기나 과일을 담아 두는 큰 그릇입니다. 다메섹 성벽에서 사도 바울을 광주리에 달아 내린 일이 있습니다. 광주리가 바구니 보다 훨씬 큽니다. 그렇다면 오병이어 보다 칠병이어가 남은 것이 더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직접 그 떡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배부르게 먹고도 열두 바구니와 일곱 광주리나 남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계시므로 더 이상 떡에 대해서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야 할 것 입니다. 더 이상 먹는 것 때문에 걱정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예수님을 모신 성도는 먹을 것 때문에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공중의 새도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6:25,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떡이 없으므로 염려를 한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을 보시고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이 먹을 것을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작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먹을 것 정도는 더 이상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떡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하라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제자들은 떡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는 말씀인 줄 깨달았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바르지 못한 교훈을 ‘누룩’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누룩을 떡으로 이해를 한 것입니다. ‘누룩’은 빵을 만들 때, 밀가루를 발효시키는 이스트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룩’에 관하여 긍정적인 표현과 부정적인 표현 두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를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3:33). 누룩은 조용하고 은밀하게 퍼져서 밀가루 반죽덩어리를 온통 부풀게 합니다. ‘누룩’은 침투력이 강하므로 천국을 확장시키는 것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표현으로 바르지 못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누룩’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작은 누룩이 가루 서 말 전부를 부풀게 하는 것 처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주의하지 않으면 제자들도 잘못된 교훈에 빠져 들 수 있기 때문이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진리에서 떠나게 됩니다.
‘바리새인’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에 반발하여 떠나간 소위 ‘분리된 자들’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종교적이라고 자랑합니다. 율법과 함께 구전을 동등하게 여깁니다. 천주교가 성경말씀보다 교황의 말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도 손가락 끝에 물을 찍는 것(막7:4), 부모를 섬기는 것을 두고 ‘고르반’이라고 하여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는 것(막7:11,12), 금식하는 것(마9:15), 안식일에 노동의 일체를 금하는 일(마12:1-12) 등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끌리는 옷이나 사람들이 많은데서 손을 높이 들고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이나 제사나 구제 등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시며 화가 있을 것이라고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마23:27).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불법이 가득했습니다(마23:28). 이러한 잘못된 바리새인들의 교훈을 삼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에 바리새인의 누룩은 외식적인 믿음입니다. 겉으로는 잘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씀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화려하고 거룩해 보이지만 진리에서 벗어난 의식적인 예배입니다. 백일 아침금식을 한다고 자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침을 먹지 않습니다. 먹기 싫어 먹지 않는 것을 금식이라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금식은 믿음에 조금도 덕이 되지 않습니다.
사두개파는 제사장 가계를 중심으로 한 상류계급을 대표하였습니다. 본문과 같은 내용의 말씀이 마가복음 8장에도 있습니다. 그기에는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막8:15). 당시 정치 지도자들이 사두개인들 중에 헤룻 왕국을 지지하는 헤롯당원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사두개인들의 누룩은 죽은 자의 부활과 천사와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였습니다(행23:8). 그래서 바리새인과 신학적인 면에서 반대적이므로 적대적인 관계였습니다.
오늘의 사두개인들의 누룩은 무엇보다도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있고, 천사가 있고, 내세가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사두개인들의 누룩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했다는 사람들 가운데도 죽은 자가 어찌 살아날 수 있느냐고 합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천국이 어디 있느냐고 하며 내세를 믿지 못하고 세상적인 것만을 바라보는 것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두개인들의 누룩이 교회안에 많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삼가해야 합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 안에 알게 모르게 잘못된 교훈에 빠져 있습니다. 겉은 거룩해 보이지만 속은 부정한 것들로 가득찬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은 많지만 말씀을 떠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진리에서 떠나게 하는 누룩을 삼가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왜정시대 때 신사참배 문제로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해방 후에 한국교회는 양분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신사참배를 하지 않은 자와 신사참배를 한 자들이 다투었습니다. 경남노회에 신사참배를 반대하셨던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신사참배 했던 분들이 세를 가해서 경남노회를 총회 회원으로 받아들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경남노회가 총회로부터 쫓겨났습니다. 불법한 총회로부터 쫓겨난 자들이 한국 교회를 바르게 세워야 한다는 목적으로 뭉쳤습니다. 그것이 경남(법통)노회입니다.
경남(법통)노회를 중심으로 개혁주의 교단으로 고려파 고신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개혁주의 중심으로 세운 고신교회는 한국교회를 개혁주의 교회로 세우는 일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고신교회가 많이 변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안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이 침투하여 교회를 변질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왜곡되고 있습니다. 기복적인 설교가 인기가 있습니다.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한때 한국교회에 일천번제가 유행이였습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어 일천번제를 드림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왜곡하여 일천번 제물을 바치면 소원하는 것을 다 얻게 된다고 교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인들이 일천번 제물을 작정하고 드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비판하므로 요즘은 사라진 줄 압니다.
요즘 방송을 통해 목사가 병을 고치려면 헌금을 해야 한다고 해서 사기로 구속이 되었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복 받으려면 헌금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오늘의 ‘누룩’입니다. 헌금은 받은 복에 대한 감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받기 위해 드리는 것은 헌금이 아니라 ‘공양’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사람을 즐겁게 하는 예배가 되고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받는 예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오늘의 누룩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은 제자들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는 말씀으로 깨달았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잘못된 교훈을 삼가 해야 합니다. 그래서 진리위에 세운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
첫댓글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은혜의 설교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