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
알다시피 윤회의 관념은 불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도의 전통종교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카스트라는 강력한 신분제가 있는 사회에서, 많은 경우 현재의 삶을, 날 때부터 고정된 신분과 직업을 갖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그것을 참고 견디며 살게 해주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현재의 네 삶은 과거에 네가 살아온 삶이 만들어낸 것이고, 미래의 네 삶은 지금 네가 사는 삶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니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아, 그래야 다음 생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니 말야.’ 원래 ‘의지적 활동’을 뜻하는 ‘업’이란 말이 자신이 행한 것에 대한 처벌이나 응보처럼 이해된 것은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불교서 말하는 윤회 의미는 전생 탓하고 다음 기약하며 참고 견디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바꾸라는 가르침
윤회하는 생이 무엇보다 ‘고통’으로 표상되는 이유는, 그런 설명이 주로 겨냥하고 있는 이들이 현세의 삶을 고통스레 살아야 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고통을 직접 설명해주기도 하고, 브라만이나 크샤트리아 같은 상층귀족들의 삶도 알고 보면 고통이란 점에서 마찬가지라며 위로를 해주기도 하니까. ‘너희들도 이전엔 우리처럼 이렇게 살았고 다음 생 언젠간 이렇게 살 수 있을 거야’라면서 가능성의 세계로 모든 걸 떠넘길 수 있으니까.
참고 견디는 인고의 정신을 삶의 긍정이라도 되는 양 오해해선 곤란하다. 니체라면 ‘낙타의 정신’을 가르치고 있다고 비판했을 이 교설에 대해, 모든 것은 연기적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현재의 삶 또한 그때그때의 연기적 조건 속에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현행화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설했던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혁명’이란 말에 값한다고 할 것이다. 전생을 탓하고 다음 생을 기약하며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라는 선고(sentence, 문장)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긍정할 만한 삶을 살라는, 그런 능력을 만들어가라는 제안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니까. 이 경우 해탈이란 숙업에 따른 윤회로부터의 이탈만이 아니라, 업에 예속된 삶으로부터의 ‘해방’이 된다. 삶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삶 안에서의 해방이. 해탈이란 좋은 삶을 위한 해방인 것이다.
그럼에도 경전에서 읽게 되는 석가모니의 설법에는 윤회에 대한 얘기, 그로부터의 해탈이라는 얘기가 반복하여 등장한다. 그것은 아마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기대고 있는 연기적 조건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윤회의 고통, 죽어도 죽지 못하는 고통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 조건에서, 해탈의 가능성을 그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던져놓고 사유하는 조건에서, 중생의 물음에 응답하려는 깨달은 자(붓다)의 대답이 어떻게 그런 생각과 물음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붓다’란 해탈한 삶을 일반화된 그림으로 그려서 보여주는 이가 아니라, 중생들이 당면하고 있는 고통에서 벗어날 출구를 알려주는 이라면, 그들 중생들이 잠겨 있는 관념이나 생각,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물음, 그들의 삶의 조건 속에서 사유하고 말하고 가르치는 것이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렇기에 윤회를 벗어날 것을 설하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현세적 삶의 고통과 헛됨을 설파하며 그로부터 벗어날 것을 가르치는 니힐리즘이라고 한다면 아주 큰 오해라고 할 것이다. 털끝만치 벗어나면 천지간의 차이로 벌어진다는 말이 이런 경우일 것이다. 비슷해 보이지만 아주 다른 것에 속는 것이다. 물론 석가모니가 출가하게 된 과정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삶의 고통에 대한 자각이 등장하고, 그로부터 떠나기 위한 고행담이 등장하기에 쉽사리 오해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깨달음을 얻기 전에, 해탈한 삶을 향한 인도의 한 왕족의 아들이 던졌던 질문이고, 그런 만큼 당시의 깨인 영혼을 가진 젊은이라면 흔히 던졌을 질문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그것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석가모니의 여정의 출발점이었고, 그런 점에서 고통과 윤회로부터의 해탈은 석가모니 자신이 갖고 있던 물음 그 자체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석가모니 자신도 그 연기적 조건 속에서 수행하고 깨우쳐갔던 것일 게다.
그런데 알다시피 깨달음을 얻은 이후 석가모니는 ‘고통’을 4성제의 첫째가는 항목으로 제시한다. 물론 4성제는 고통의 원인과 그것을 멸하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지만, 고통 자체를 ‘성스런 진리’에 담았다는 것은 고통에 대한 이전의 통념과는 아주 다른 어떤 사고의 전환을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절대적 죽음을 통해 벗어나야 할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성스런 진리에 속하는 긍정의 대상이 된 것이다. 고통이 진리라 함은 단지 그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란 의미만은 아니다. 그것만으론 참고 견디라는 인고의 정신을 가르치게 된다. 고통이 긍정이 대상이 된다 함은 긍정할 적극적 이유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이는 고통 없이는 해탈을 향한 동인을 얻을 수 없기에 깨달음 또한 얻을 수 없다는 말에서 역으로 추론할 수 있다. 고통이란 깨달음을 향한 여정의 출발점인 것이다. 고통은 또한 그로부터 배우려고만 한다면, 깨달음을 향한 길을 알려주는 훌륭한 스승이라는 발상, 그럴 때 그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의 첫째 관문이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해탈이란 고통스런 삶의 바깥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고통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는 역설적 결론을 함축하고 있다. 알랄라 깔라마와 웃다카 라마풋다 밑에서 수행하여 공무변처정, 식무변처정, 무소유처정, 비상비비상처정이라는 선정의 단계에 도달했지만, 그로부터 나와 다시 삶으로 돌아오면 고통과 번뇌가 되돌아옴을 알고는 이는 해탈의 방법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들을 떠날 때의 석가모니의 문제의식도 그러하다. 색계(色界)를 벗어나고 고통스런 삶을 벗어난 별도의 영역으로 들어가 얻는 평안은, 현실 속에서 살아야 하는 중생들이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아닌 것이다. 현실을 벗어난 무색계(無色界)의 선정은 아무리 높아진다 해도 그것은 현실의 고통과 번뇌를 극복하는 길이 아니라 그것을 잠시 피해있는 것일 뿐이다. 고통스런 현세의 삶을 벗어난 곳에서 평정을 찾는 게 아니라, 그 고통스런 삶의 한 가운데에서, 그 고통의 이유들이 현존하는 세계 속에서 고통을 벗어날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고통을 외면하고 그로부터 도망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차분하게 직시하고 그 안에서 그것을 넘어서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석가모니가 새로운 깨달음의 길을 다시 찾아 나선 이유였고, 이것이 불교의 가르침을 이전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되게 해준 계기였다.
‘피안’이라는 말이 야기할 오해를 넘어서기 위해 피안 없는 차안의 삶에서 깨달음을 얻을 것을 가르치고, 윤회의 중단이란 말이 야기할 오해를 깨기 위해 윤회 없는 해탈이 아니라 윤회하는 삶 속에서 해탈할 것을 가르쳤던 ‘대승불교’의 근본적인 전환은 분명 이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불교‘로부터’ 벗어나는 전환이 아니라 불교 ‘안에서의’ 전환인 것은, 그것이 석가모니의 이런 문제설정 안에서 진행된 것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이란 번뇌 안에서 얻는 것이며 번뇌와 함께 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부처란 중생과 다른 존재가 아니라 바로 중생 자신임을 설하는 것도 모두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공이란 물질 없는 세계(무색계)에서 얻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세계(색계) 그 자체 안에 항상 존재하는 것이라는 개념 또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일 게다.
어쩌면 창시자의 말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근본적 전환을 과감하게 밀고 나갈 수 있었던 용기는 매우 놀라운 것이고, 창시자의 문제의식에 비추어 그가 한 말을 재검토하여 비판할 수 있었던 탁월한 능력은 실로 부러운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런 전환을 통해 현세적 삶을 부정하는 것처럼 오인될 수도 있던 불교의 가르침은, 고통이나 번뇌 없는 깨달음은 없음을 설하고 윤회하는 현세적 삶과 별개의 해탈이나 극락 같은 것은 따로 없음을 가르치는 극적인 긍정의 사유임이 분명해졌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윤회하는 삶은 떠나야 할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장으로 긍정된다. 그러나 그것은 업이란 이름으로 주어진 것을 참고 견디라는 인고의 가르침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삶을 긍정할 만한 것으로 바꾸어가라는 가르침으로서 긍정된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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