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장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 첫째 복,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처음에 오는 이 말씀은 뒤에 오는 모든 복의 열쇠가 된다. 심령이 가난해지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그리스도인과 천국시민의 기본 특징이다. 심령이 가난해진다는 것은 속을 비우는 것을 의미하며 나머지 복을 가득 채우는 것을 의미한다. 채우기 전에 먼저 비워야 한다. 복음에는 항상 이 두 가지 면이 있다. 세워지기 전에 먼저 넘어짐이, 개심에 앞서 뉘우침이 선행해야 하는 것이 복음의 본질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해방하기에 앞서 정죄를 선언한다. 첫째 복,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들만의) 것임이요”보다 더 완전한 믿음에 의한 칭의론은 없을 것이다. 이것이 다른 모든 것의 기초가 된다.
복음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마주 대할 때 뿐만 아니라, 특히 산상설교의 전 메시지를 대할 때 우리에게 엄중하고 철저한 테스트가 된다. 즉 산상설교를 우리 힘으로 행할 수 있다는 생각들을 즉각 정죄한다. 산상설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가늠해야 할 산이 있다. 너희는 그 산을 올라가야 한다. 너희가 이 산을 바라볼 때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너희가 혼자 힘으로는 이 산을 오를 수 없으며, 너희 자신의 힘으로 올라가 보려는 모든 시도는 너희가 아직 그 높이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 본문을 ‘가난한 자는 영적으로 복이 있다’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난이 영성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주님은 ‘가난’이란 말씀을 세속 정신에 지배를 받지 말라, 부귀에 의존하지 말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 부귀에 의존하는 정신은 정죄를 받은 정신이다. 주님께서는 ‘영의 가난’을 말씀하신 것으로 이것은 사람의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이다. 이것은 자연인과 그리스도인과의 본질적인 차이를 분명하게 가리킨다. 이 구절 이상으로 세속정신과 견해에 더 큰 반제가 되는 것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은 자기 신념과 자기 의지와 자신과 자기표현을 얼마나 크게 강조하는가? ‘세일즈맨쉽’의 본질은 자신감과 확신이라고 말한다. 고객에게 감명을 주고 싶으면 여러분도 이 방법을 따라야 하며, 이런 관념은 어느 영역에서나 통용되고 있다. 여러분이 직업에 성공을 원하면 여러분은 이미 성공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 우리는 이 비극적 자신감의 표현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우리는 서로 마주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과 얼굴을 대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하나님의 존전에서 철저한 가난한 영 이외의 다른 것을 느끼게 된다면 그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 축복은 오늘의 교회에서도 인기가 없다. 오늘의 교회와 과거시대, 특히 청교도시대와의 대조는 너무나 크고 놀랍고 유감스럽다. 오늘의 교회에 ‘개성’ 운운하는 말들처럼 어리석고 비기독교적인 것이 없다. 그것은 대체적으로 육적인 것이며, 일종의 외모를 두고 하는 말들이다. 위험한 것은 이런 태도는 대체로 참된 개성과 자신감, 자존심, 자기표현을 혼동하는데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가장 큰 덕목인 겸손이 올바르게 평가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세상은 끔찍하게도 ‘개성을 인정받으려’ 애를 쓴다. 바울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함이 아니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말한다. 위대한 사도인 바울은 고린도에 갔을 때 ‘약하여 두려워 떨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의 외모가 보잘 것 없고 말이 시원하지 않다’고 했다. 우리는 성경의 진리와 귀감에서 얼마나 멀리 떠나 방황하고 있는 것인가? 아! 교회가 세상과 세상의 방법으로 그 전망과 생활에 영향을 받게끔 허용하는 것은 얼마나 비극인가! 그리스인들은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 심리에 홀리지 않도록 하자. 우리는 이 악한 세상에 속하는 어느 것과도 전혀 다른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분명히 하자.
-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가 소심하거나 자신이 없어야 한다거나 용기가 부족하다거나 교제를 싫어하며 수줍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팔복에 나타나 있는 자질 중 생래적 자질로 되어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개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이름을 바꾸고 자신을 거짓되게 십자가에 못 박거나 다른 사람의 성격이나 개성을 가져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을 겸손한 것으로 가장한 것이다. 참으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큰 희생을 하는 사람이라거나 중들처럼 생활의 어려움과 책임에서 벗어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수가 있는데 그것은 성경적인 방법이 아니다. 여러분은 ‘심령이 가난하기 위해 삶의 길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어떤 것인가?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하게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57:15) 이것이 겸손의 특성이다.
그것은 모세의 정신과 같다. 그는 자기에게 부과된 임무를 수행할 자격이 없음을 깊이 느끼고 자신의 부족과 부적격을 의식했다. 다윗은 “주여 내가 뉘기에 당신이 제게로 오시나이까”라고 말했다. 환상을 본 이사야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했다. 베드로는 자신을 믿는 현대의 전형적인 세속인이었다. 그가 주님을 볼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담대했고 개성은 변함없었지만 동시에 그는 심령이 가난했다. 바울은 큰 능력을 가졌고 그 능력을 의식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서신을 읽으면서 그의 생애 끝까지 그가 싸워야 했던 싸움은 자만에 대항하는 싸움이었다. ‘자랑’이란 말을 계속 사용한 것도 이런 까닭에서였다.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뵙고 난 후 그는 모든 것을 ‘손실’로 여겼다. 그는 심령이 가난했으므로 자신이 부적격자라고 느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것을 우리 주님의 생애에서 보게 된다. 그는 사람이 되셨고, ‘죄인인 육신의 모양’을 입으셨다. 그는 신성의 대권을 쥐지 않으셨고 사람처럼 사시기로 결정하셨다. “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노라”고 말씀하셨다.(요14:10)
이것이 ‘심령이 가난하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자만심이 온전히 없음, 자신과 자기 의존의 완전한 없음을 의미한다. 가난 하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마주 대할 때에 느끼는 우리의 철저한 무능에 대한 이 엄청난 인식이다. ‘심령의 가난’은 우리가 철저히 복종한 상태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와 그의 은혜와 자비를 철저하게 의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밧모섬의 사도 요한처럼 필연코 ‘죽은 자처럼’ 느끼게 된다.
- 나는 심령이 가난한가? 나는 어떤 내용의 기도를 하는가? 결국 사람은 어떻게 해서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일까? 그 대답은 여러분이 자신을 바라보거나 자신을 위하여 일을 하려고 애쓰는 것에 있지 않다.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길이다. 주를 바라보면 볼수록 우리들 스스로는 무력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주를 바라보라. 그러면 자신을 위하여 할 일이 아무것도 없게 될 것이다.
“오 주여 당신의 십자가를 붙들 뿐입니다” 속이 비고 무력하고 벌거벗은 죄인이지만 주님은 항상 충족시켜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