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삼국유사』 단군(檀君)의 건국(建國)이야기
『삼국유사』 기이제일(紀異第一)편 고조선(왕검조선)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우리 민족 태초의 역사로서 『고기(古記)』를 인용하면서 환웅(桓雄)이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밑에 내려와 신시(神市)라 하고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시켰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古記云 昔有桓國(謂帝釋也) 庻子桓雄 數意天下貪求人世 父知子意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徃理 之雄率徒三千降於太伯山頂(即太伯今妙香山) 神壇樹下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糓·主命·主病·主刑·主善惡凡 主人間三百六十餘事在世理化.”
즉, 『고기』는 무슨 책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예부터 전해 내려온 기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상기한 문장에 관하여 현재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여러 종류의 『삼국유사』번역판들은 대체로 아래와 같이 번역되어 있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국[桓國, 제석(帝釋)을 말한다.]의 서자(庶子)인 환웅(桓雄)이 천하(天下)에 자주 뜻을 두고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白)을 내려다보니 인간을 널리 이롭게(弘益)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며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웅(雄)이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정상[즉, 태백(太伯)은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이다.] 신단수(神檀樹) 밑에 내려와 신시(神市)라 하고, 이에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하였다.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명(命)·병(病)·형(刑)·선악(善惡) 등 무릇 인간의 삼백 육십여 가지의 일을 주관하며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在世理化).”
상기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며 가서 인간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천부인(天符印) 세 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과연 천부인(天符印)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모두 충분히 이해하더라도 천부인(天符印)의 의미를 명료하게 밝혀내기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또는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서로 다른 해답을 찾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우선 ‘천부인(天符印)’이란 국어사전의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우리나라 건국 신화에 나오는 환인(桓因)이 그의 아들 환웅(桓雄)을 땅으로 보내면서 제왕(帝王)의 지위를 나타내는 표지로 주었다는 세 개의 귀한 도장’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또 『위키백과』 등 백과사전에 따르면, ‘천부인(天符印) 또는 천부삼인(天符三印)은 단군 신화에서 등장하는 신물(神物)인데, 천제(天帝) 환인이 아들인 환웅에게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데 사용하도록 준 세 가지 물건[인수(印綬)]이다. 즉, 고대 사회에서 지배계층의 권위를 상징하는 신물로서 보통 청동검, 청동방울, 청동거울 등 세 가지로 해석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에 따르면, ‘옛 역사를 고려해 볼 때, 단군의 건국이념과 천부삼인(天符三印)과는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있다.’고 하면서, ‘천(天)·지(地)·인(人) 등 삼재(三才)와 원(○)·방(□)·각(△) 등 삼묘(三妙)와 성(性)·명(命)·정(精) 등 삼진(三眞)과 인(仁)·지(智)·용(勇) 등 삼달(三達)의 표상(表象)으로 추정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일본어사전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자유와 평등의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는 사상’ 또는 ‘하늘이 사람에 대해 평등하게 부여한 권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천부인(天符印)에 관한 풀이가 제각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상기한 여러 가지 풀이가 서로 전혀 다른 의미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 공통적으로 인간의 삶과 사유(思惟)세계를 지배하고 관장(管掌)하는 최고의 철학(哲學) 또는 그 상징물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부인(天符印)’이 의미하는 핵심적 가치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기한 단군 건국신화의 원문(原文)을 곰곰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즉, 상기한 원문 중 ‘授天符印三箇’에서 수(授)는 ‘주다’의 의미이므로,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었다고 이해 할 수 있으며, 개(箇)는 물건의 수효를 세는 단위이므로, 천부인(天符印)은 물건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환웅이 태백산에 내려오게 된 동기(홍익인간)와 결과(재세이화)가 천부인(天符印)과는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환웅이 신단수(神檀樹) 밑에 내려와 신시(神市)라 하고, 인간의 삼백 육십여 가지의 일을 주관하며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한 역할과 그 결과를 고려해 볼 때, 천부인(天符印)은 환웅이 시도한 일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환웅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서 한 역할과 성과는 인간을 널리 이롭게(弘益人間)하고 세상을 다스려 교화(在世理化)시킨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천부인(天符印)은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세계(在世理化)’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천부인(天符印) 세 개(箇)를 단순히 상징적인 물건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요소도 숙고(熟考)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특히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에서는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인간의 철학적 사유세계(思惟世界)와 결부시키고 있으며, 일본어사전에서는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모든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자유‧평등의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는 사상’ 또는 ‘하늘이 사람에 대해 평등하게 부여한 권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어사전의 뜻풀이처럼 천부인(天符印) 세 개(箇)를 ‘하늘이 사람에 대해 평등하게 부여한 권리’라고 본다면, 세 개(箇)라는 숫자의 의미가 무색해지고 만다.
따라서 인간의 삶과 사유세계를 지배하고 관장하는 세 가지 요소로서 불변의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마다 또는 민족마다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서 해답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즉, 같은 시대에 살면서도 지역에 따라 경제적으로 또는 정신문화적으로 ‘삶의 진리(眞理)’라고 생각하는 사유세계(思惟世界)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서 공통적으로 인간의 삶과 사유세계(思惟世界)를 지배하고 관장하는 요소를 숙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천부인(天符印)을 아래와 같이 풀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첫째, 인간(人間)은 누구나 죽느니라.
둘째, 인간은 자연(自然)의 이치를 이해하고 인간으로서의 도리(道理)를 행하기 위해서 부단히 심성(心性)을 수련해야 하느니라.
셋째, 인간은 심성을 수련한 정도에 따라 환생(還生)하느니라.”
상기한 천부인(天符印)의 뜻에 관하여 혹자는 공감하기도 하고, 혹자는 코웃음을 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상기한 세 가지 중에서 일부는 동감하더라도, 일부는 동감하지 못한다거나, 심지어 코웃음 칠 수 있다면, 고견(高見)을 밝힘으로써 주위에 커다란 은혜를 베푸 는 계기를 만들 수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선 상기한 첫 번째 요소에 관해서는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요소에 관해서는 반은 공감하고 반은 전혀 공감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세 번째 요소에 관해서는 거의 대부분이 공감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옳은지, 그른지를 결정짓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어차피 각 개인마다 추구하는 가치관이 다르고, 쳐해 있는 환경이 다르며, 사람은 아는 것만큼 느끼며 보이는 만큼 사유(思惟)하며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고 공감대가 탄탄하게 형성되기 어려울 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이승에서 결코 경험할 수도 없고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전달할 수도 없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한편, '환생(還生)'의 의미를 윤회, 부활, 천국과 지옥 등의 이야기로부터 벗어나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후손을 이어가는 것으로 사유(思惟)한다면, 상기한 천부인(天符印) 세 개는 공감대가 매우 폭넓은 형성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단군의 건국이야기를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천부인(天符印)을 비롯하여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내용들을 좀 더 심오하게 음미하면서 숙고(熟考)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간 본 연구원이 중국 23사와 『삼국사기』 등에 근거하여 위사(僞史)를 솎아내고 남아있는 원본의 기록들에 따라 우리 민족과 관련된 역사적인 지명들의 본래 위치를 연구한 결과, [그림 1]과 같이 추정할 수 있었다.
즉, 『삼국사기』든『삼국유사』든 간에 고대 역사적인 지명들의 올바른 위치를 밝혀내야만 비로서 사서에 기록된 내용들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림 1] 태백산, 압록수, 환도성, 평양성, 읍루 등
이어서『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檀君)의 건국이야기가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에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신(神) 환웅(雄)에게 기도하되 화(化)하여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이에 신(神) 환웅(雄)은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百日)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형체를 얻을 수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곰은 그것을 먹으면서 기(忌)한 지 삼칠일(三七日)만에 여자의 몸을 얻었으나, 범은 기(忌)하지 않아 사람의 몸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웅녀(熊女)는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매양 단수(檀樹) 아래서 잉태하기를 빌었다.
이에 (환)웅이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그녀와 혼인하였다. (웅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하였다.
당(唐)의 고(高)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이 되는 경인[庚寅, 당(唐)의 요(堯)임금 즉위 원년은 무진(戊辰)인즉, 50년은 정사(丁巳)요, 경인이 아니다. 사실이 아닐까 의심스럽다.]년에 평양성[平壤城, 지금의 서경(西京)이다.]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하였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에 옮겼는데, 궁[弓, 혹은 방(方)이라고 한다.]홀산(忽山)이라고도 하며,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그 후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의 호왕(虎王, 武王)이 즉위한 기묘(己卯)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곧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 산신(山神)이 되었으니, 수(壽)가 1,908세라고 하였다.”
즉, 상기한 『삼국유사』의 기록은, 단군이 도읍을 평양성에 정하고 조선을 건국함에 따라, 단군의 건국(建國) 이야기로서 전래되어 왔다.
그런데 이제까지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를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매우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역사(歷史)는 인간(人間)이 살아온 기록인데, 역사책에 동물이 나오니 가장 손쉽게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토템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 당시 웅족(熊族)과 호족(虎族) 밖에 없었을까?
즉, 단군(檀君)의 건국신화에서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를 토템으로 해석할 경우, 예를 들면 그 당시 독수리, 용, 봉황, 매, 고래 등등 다양한 토템이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건국이야기에 곰과 호랑이만 등장시키고 있으므로, 건국이야기에서 토템을 주제로 하여 여러 종족 중에서 특별히 두 종족만 부각시키고자했던 의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특별히 웅족과 호족, 두 종족만을 거론하여 후손들에게 어떤 특별한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면, 두 종족간의 어떤 차이에 의한 인과응보(因果應報)가 구체적으로 설명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면, 두 종족간의 분명한 장단점을 열거하고, 환웅이 웅족(熊族)을 선택한 이유를 명백히 밝혀서 선택되지 못한 호족(虎族)이 어떻게 되었는지 설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즉, 환웅이 홍익인간(弘益人間)하기 위해 웅족을 선택한 것이라면, 호족은 다른 곳으로 쫓겨난 것인지, 아니면 노비(奴婢)라도 된 것인지 결과도 알려줘야 메시지로서 충분한 효과가 있지 않았을 것인가?
다시 말해서 환웅이 웅녀와 혼인한 후, 호랑이 한 마리는 어디로 갔는지 아무런 기록이 없다.
또 웅녀가 환웅에게 선택될 수 있었던 조건은 삼칠일(三七日)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쑥과 마늘을 먹었다는 것과 단수(檀樹) 아래서 잉태하기를 빌었다는 것밖에 없다.
즉, 우리 민족 선조님들께서 건국이야기를 통하여 후손(後孫)들에게 남기고자 한 특별한 메시지가 ‘햇빛을 보지 말고 쑥과 마늘을 열심히 먹어라’라는 것과 ‘단수(檀樹) 아래서 열심히 빌라’는 것이었겠는가?
다시 말해서 환웅이 곰과 호랑이에게 ‘햇빛을 보지 말고 쑥과 마늘을 열심히 먹어라’라고 한 것은, 후손들에게 실제 쑥과 마늘을 먹으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징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과연 후손들에게 전하고자했던 그 어떤 상징적인 메시지가 무엇이었겠는가?
그런데 상기한 건국이야기의 원문(原文)을 보면, 곰은 그것을 먹으면서 21일간 기(忌)하였으나, 호랑이는 기(忌)하지 못함으로써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꺼릴 기(忌)’는 ‘꺼리다’, ‘미워하다’, ‘질투하다’라는 의미이다.
만약 단순히 쑥과 마늘이 몸에 좋으니 싫더라도 열심히 복용하라는 가르침이라면, 현대 과학지식으로 볼 때, 쑥과 마늘이 건강에 아주 좋다고 하니 매우 타당한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햇빛을 보지 말라’는 것은 현대 과학지식으로 볼 때, 전혀 맞지 않는 가르침으로 볼 수 있다. 즉, ‘햇빛’, ‘쑥’, ‘마늘’ 등은 건국신화의 상징적인 소재일 뿐이지, 선조님께서 후손에게 남기는 본질적인 주제가 될 수 없지 않겠는가?
따라서 쑥과 마늘을 먹기 싫고 햇빛을 안 본다는 것이 참기 어려운 일이지마는, 참고 인내(忍耐)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 만약 호랑이도 기(忌)함으로써 사람의 형체를 얻을 수 있었다면, 웅녀처럼 여자의 몸을 얻었을까, 아니면 남자의 몸을 얻었을까?
즉, 그 당시 사람의 형체를 한, 제대로 된 인간(人間)이 별도로 없었던 것인가?
아니면 그 당시에 인간(人間)이 살고 있었지만, 곰과 호랑이가 유별나게 특별히 인간(人間)이 되고 싶어 했던 것인가?
그러나 현대 과학지식으로 볼 때, 곰과 호랑이가 인간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과 곰과 호랑이는 DNA가 서로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건국신화에서 왜 곰이 사람이 되었다고 기록했겠는가?
특히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환웅(桓雄)이 곰과 호랑이에게 참고 인내하라고 요구한 것이라면, 곰이 사람이 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는가?
즉,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人間)이 지켜야 할 도리를 지켜야 하며 지키기 싫고 어렵다 할지라도 참고 인내하라는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서 환웅이 태백산에 내려온 목적이 홍익인간(弘益人間)하고 재세이화(在世理化)하는 것이므로, 건국신화에 곰과 호랑이라는 상징적인 동물을 등장시켜 인간(人間)답게 살려거든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道理)를 지키라고 가르침을 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상기한 건국(建國) 이야기에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환국(桓國)’, ‘홍익인간(弘益人間)’, 이화세계(理化世界)’ 등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정신(情神)적 가치와 사유세계(思惟世界)의 대강(大綱)을 이미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또 『삼국유사』 제편(諸篇)에 걸쳐 기록되어 있는 내용들이 사람이 추구해야할 가치와 방법에 관한 내용들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상기한 단군(檀君) 건국이야기가 단순히 단군(檀君)이 나라를 세웠다는 신화(神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건국과 관련한 역사적인 사건들이 구체적으로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당(唐)의 고(高)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庚寅, 당(唐)의 요(堯) 즉위 원년은 무진(戊辰)인즉, 50년은 정사(丁巳)요, 경인이 아니다. 사실이 아닐까 의심스럽다.]에 조선이 건국되었는데, 건국한 년도가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또 평양성[平壤城, 지금의 서경(西京)이다.]에 도읍하였으며,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에 옮겼는데, 궁[弓, 혹은 방(方)이라고 한다.]홀산(忽山)이라고도 하며,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지명을 뚜렷하게 밝히고 있다.
또 조선이 건국된 후,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주(周) 호왕(虎王, 武王)이 즉위한 기묘(己卯)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곧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 산신(山神)이 되었으니, 수(壽)가 1,908세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삼국유사』기이(紀異) 제일(第一)편 고조선(왕검조선)의 기록에 따르면, 상기한 바와 같이 『고기(古記)』를 인용한 것 외에도 『위서(魏書)』, (구당서)『배구전(裵矩傳)』, 『통전(通典)』 등을 인용하면서 조선의 건국시기와 도읍지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있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였다[『경(經)』에는 무엽산(無葉山)이라 하고, 또한 백악(白岳)이라고도 하니 백주(白州)의 땅에 있다. 혹은 관성(關城)의 동쪽에 있다고 하니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 그것이다.]. 나라를 개창하여 조선(朝鮮)이라 했으니 고[高(堯)]와 같은 시대이다.”
“당(唐)의『배구전(裵矩傳)』에 이르기를, ‘고려(高麗)는 본시 고죽국[孤竹國, 지금의 해주(海州)이다.]인데 주(周)가 기자(箕子)를 봉하고 조선이라 하였다.
한(漢)이 3군(郡)으로 나누었으니, 현토(玄菟)·낙랑(樂浪)·대방[帶方, 북대방(北帶方)이다.]라고 하였으며, 『통전(通典)』에도 역시 이 설명과 같다[『한서(漢書)』에는 곧, 진번(眞番)·임둔(臨屯)·낙랑(樂浪)·현도(玄菟) 등 4군(四郡)인데, 여기서는 3군(三郡)이라 하며 또 명칭도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즉, 단군의 건국과 관련하여 여러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건국 시기에 관하여,
① ‘당(唐)의 요[堯, 고(高)]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정사년)’,
② ‘주(周) 호왕(虎王, 武王)이 즉위한 기묘(己卯)년의 1,500년 전’,
③ ‘지금(1145년)으로부터 2천여 년 전’ 등 세 가지 기록이 있는데 건국시점이 서로 다르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근거하면, 요(堯) 즉위 원년이 무진년(서기전 2333년)이라고 하므로, 요(堯) 즉위 50년은 정사(丁巳)년(서기전 2284년)이다.
그러나 우리가 단군의 건국시기를 서기전 2333년으로 알고 있는 이유는 『동국통감』에 근거하여 서기전 2333년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즉, 『동국통감』에서 단군의 건국시기를 요(堯) 즉위 원년(무진년, 서기전 2333년)으로 규정하였기 때문에 단군의 건국시기를 서기전 2333년으로 삼은 것일 뿐이다.
또 상기한 『삼국유사』에 근거하면, ‘단군이 조선을 건국하고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주(周) 호왕(虎王, 武王)이 즉위한 기묘(己卯)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하니, 이 기록이 옳다면, 단군의 건국시기는 주(周) 호왕(虎王, 武王)이 즉위한 기묘(己卯)보다 1500년이 앞서는 셈이다.
그런데 주(周) 호왕(虎王, 武王)이 즉위한 기묘(己卯)년이 서기전 1122년, 1062년 또는 1002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또는 주(周)가 은(殷)을 멸망시킨 해를 서기전 1046년경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단군이 조선을 세운 때는 서기전 2622~2502년 또는 서기전 2546년경으로 볼 수도 있다.
또 『위서(魏書)』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단군의 건국시기가 『삼국유사』가 편찬되던 당시(1145년)보다 2천여 년 전이라면, 단군이 서기전 855년경에 나라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는 셈이다.
아무튼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단군의 건국이야기가 의미하는 가르침을 인간(人間)이 되려거든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道理)를 지키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또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재세이화(在世理化)가 의미하는 것도 바로 인간(人間)다운 인간(人間)을 주제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따라서 환웅이 태백산에 내려오면서 가져온 ‘천부인(天符印) 세 개’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인간(人間)다운 인간(人間)의 삶과 밀접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홍익인간(弘益人間)하며 재세이화(在世理化)하기 위해서는 어떤 전제(前提) 조건 또는 반드시 지켜야 할 규율(規律), 또는 인간의 한계 등이 존재하고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生覺)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천부인(天符印) 세 개’는 무엇일까?
아마도 환웅이 홍익인간(弘益人間)하고 재세이화(在世理化)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들을 인간이 깨우치게 함으로써, 인간이 도리(道理)를 지켜가면서 인간(人間)다운 인간(人間)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즉, 단군(檀君) 건국이야기의 의미는 인간(人間)이 깨달음을 통해 참고 인내하며 인간(人間)의 도리(道理)를 행하는 사회로서, 정신적 사유세계(思惟世界)가 고귀(高貴)하고 높은, 인간사회의 건설을 뜻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역사책에서 이처럼 상징적이고 함축적으로 기록된 내용들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시대 별로 인간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마치 파도가 출렁이는 것처럼 백성들의 인식과 행태가 변해 온 것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