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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선생이 사색하며 걷던 청량산 길을 걷고자 합니다. 종택에서
육사 기념관 생가터, 퇴계 묘소, 낙동강 길을 따라 농암종택까지..>
풍기 소백산민들레님의 메시지에 따른 안동 나들이는 망설임 끝에
결행한 길이다.
연말연시의 삼백산 상봉이 목전인 시점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퇴계(退溪), 육사(陸史), 농암(聾巖), 세 이씨(李)의 인력이
워낙 커서 새벽같이 나섰다.
"안동에 서애(西厓 柳成龍)가 있다면 예안에는 퇴계(李滉)가 있다"
지금은 다 안동땅이지만 예전에는 그리 말했다.
87학번인 아들의 대학입학 축하프로그램 중 하나로 서애와 퇴계를
심방(尋訪)한 이후 실로 23년만의 나들이다.
"이백(二白:태백산과 소백산)의 남쪽에 위치한 예안(禮安), 안동(安
東), 순흥(順興), 영천(榮川), 예천(醴泉)등의 고을은 신(神)이 알려
준 복된 지역"이라고 이중환은 말했다(擇里志)
"서로 가까운 이 다섯 고을에 사대부가 가장 많으며..의리를 밝히고
도학을 중히 여겨, 비록 외딴 마을, 쇠잔한 동네라도 글읽는 소리가
들리며 헤진 옷을 입고 항아리창 집에 살아도 모두 도덕과 성명(性
命)을 말한다"고도 했다.
진성(진보)이씨 퇴계 이황(滉1501~1570)과 그의 14세손인 이육사,
영천이씨 농암 이현보(賢輔1467~1555)는 바로 예안산(産)이다.
(이조 태종 이후 줄곧 '縣'이던 예안은 고종때 '郡'으로 승격됐으나
1914년 군을 폐지하고 안동에 귀속되었다)
이 퇴계
우리의 여정은 옛 예안땅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陶山兎溪), 경북도
기념물 제42호인 퇴계의 종택(宗宅)에서 시작되었다.
종택 앞 내(川)의 이름이 토계였는데 퇴계가 이 냇가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菴)을 짓고 내의 이름을 퇴계(退溪)로 고쳤단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호(雅號)로 삼았다는 것.(아래 그림4 시조)
사당(위 그림2)과 종택 전경(위 그림3)
身退安愚分(신퇴안우분) / 學退憂暮境(학퇴우모경)
溪上始定居(계상시정거) /臨流日有省(임류일유성)
관직에서 물러나서 비로소 아둔하게도 편함을 알았으나
학문도 덩달아 후퇴하게 됨으로서 늙으막이 걱정된 듯.
조선 성리학의 대가는 시냇가에 마련한 거처(養眞菴)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자기 성찰을 하게 해주리라 기대했는가.
이런들 엇더하며 저런들 엇더하료
草野愚生이 이러타 엇더하료
하물며 泉石膏肓(천석고황)을 고쳐 므슴하료
퇴계의 도산12곡중 제1곡(위 시조)에 그의 초야에 묻혀 살고자 하는
간절함이 담겨 있다.
오리지날은 왜 망실되었는가.
현 종택은 1929년에 그의 13세사손(嗣孫)이 신축했다니까.
여기에도 일제의 화귀(火鬼)가 미쳤는가.
한데, 솟을대문에 붙은"하늘의 이치를 받들어 백성을 깨우치고 돌보
자"는 뜻의 입춘방 '奉天理' '啓民生'(위 그림1退溪先生舊宅)은 이해
되나 왜 아직도 건양다경?
건양은 1896년에 사용된 조선 최초의 연호(年號)다.
고종 32년(1895) 을미사변으로 정권을 잡은 김홍집(金弘集) 내각에
의해 양력과 함께 건양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게 된 것.
입춘방 건양다경((建陽多慶)도 이 때 처음으로 등장했다.
단어의 축자적 뜻은 봄의 따스한 기운과 함께 경사가 많으라는 기원
문이지만 새 나라에 경사가 많으라는 뜻으로 사용하라 강요했던 것.
그러나 이 연호는 1년짜리 단명(短命)으로 끝났다.
따라서 연호(건양)의 폐지와 함께 사라졌어야 할 방문이다.
더 좋은 기원문도 많으련만 하필...
더구나 퇴계의 종택 대문에?(아래 그림1)
게다가 多慶이 多景으로 바뀌었으니 봄볕에 구경거리가 많다?
智者千慮 必有一失인가.
나무에서 떨어진 원숭이, 대장간집의 녹슨 식칼을 보는 느낌이었다.
현판'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위 그림2)이 왠지 냉랭한 감이 들어서
알아보았다.
주자(朱子)의 시'齋居感興'(재거감흥)의 한 구절인'恭惟千載心 秋月
照寒水'에서 따온 이름이란다.
옛 성인(孔子)의 마음을 가을 달빛이 비치는 차고 맑은 물에 비유한
시인데 퇴계의 도학을 기리는 후학들이 정자를 세우고 스승의 마음
또한 '추월조한수'와 같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란다.
가을 달과 찬 물이 유유(類類)하기는 하나 너무 이지적이지 않나.
토계리 하계(下溪)마을 뒷산, 퇴계유택(幽宅)의 들머리 묘가 자부인
봉화금(琴)씨의 묘란다.(아래 그림3)
이승은 물론 저승에서도 시부모를 모시는 것이 자부의 근본이렸다.
그녀의 유언으로 퇴계묘 슬하에 묻혔다니까.
산 중턱에 위치한 퇴계의 유택은 당대의 대학자 묘치고는 검소하나
여느 묘와 달리 문패(묘비)가 모로 선 까닭이 무엇일까.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은 스스로 지은 묘비문이며 간소한 까닭도
유언이라니까 그의 인격이 짚어지는 묘비다.(아래 그림1. 2)
"선비는... 글과 도덕을 존중하고 의리와 범절을 세워 살아가는 모든
이를 말한다"는 <하계마을 독립운동기적비>비문(아래 그림4. 5) 중
한 구절이다.
그래서 선비의 고장답게 국란 위기때는 더욱 강렬히 항쟁했나 보다.
펜의 힘이 칼보다 강한 것이 아니라 붓이 곧 총칼이 되어서.
우리나라 전체 독립운동가 10.127명, 안동출신 317명 중 25명이나
작은 하계마을이 배출했다니까.(보훈처 자료)
이 육사
곧 또 하나의 독립운동가를 만나러 떠났다.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다.
육사(陸史)의 본명은 원록(源祿 또는活1904~44)이며 육사는 수인
(囚人)번호 '264'에서 비롯되었다.
월요일이라 육사문학관은 휴관이다.
육사의 생지 원촌(遠村)마을은 거개가 1970년대에 안동댐에 수몰되
었거나 이건하였다.
그의 생가도 댐만수선(滿水線)에 걸려 태화동 포도골로 옮겨졌단다.
아마, 포도나무가 많아 포도골이라는 곳과 그의 대표적 시 '청포도'
가 궁합이 맞아 그 곳으로 이건된 듯.
내 고장 七月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생가 터는 돋우어 소공원을 조성하고 육우당유허지비(六友堂遺墟址
碑)와 시비(詩碑)를 세워 생가지(址)임을 알리고 있다(아래그림1.2)
육우당은 그의 육형제가 태어난 곳을 의미하는 당호(堂號)다.
육사는 40년 생애에서 성장기를 제외한 절반의 세월을 검속과 고문,
투옥을 반복하며 일제에 항쟁해온 민족시인이다.
무려 17회나 투옥되는 동안 수인번호264를 이름으로 받아들일 만큼
숙명적인 저항시인이다.
그의 대표적 서정시'청포도'가 발표된 때는 일제의 무단정치가 극을
달리던 1939년.
알알이 들어와 박혀있는 민족혼은 청포입은 손님(광복)을 맞이하기
위해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수건을 마련하려 몸부림 쳤다.
때로는 몸으로, 때로는 붓으로,혼신을 다하여 싸웠건만 끝내 광복을
보지 못하고 먼 타국에서 옥사한 것은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녀던 길
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
고인을 못 뵈도 녀던 길 알페 잇네
녀던 길 알페 잇거든 아니 녀고 어쩔고.(도산12곡 중 제9곡)
출사(出仕)로 멀리 할 수 밖에 없었던 향리의 다니던 길 앞에서 밝힌
그의 귀거래사(歸去來辭)가 아닐까.
퇴계의 녀던(다니던) 길이라는 낙동강 단천교 앞으로 나아갔다.
낙동강 단천교 앞 녀던 길 안내판(위 그림1)과 낙동강물 따라 가는
녀던 길(2. 3)
當時에 녀던 길흘 몇해를 바려 두고
어듸 가 단니다가 이제야 도라온고
이제야 도라오나니 년듸 마음 마로리(도산12곡중 제10곡)
다니던 길에 미안했던가.
뒤 늦게라도 돌아왔으니 딴 곳에 마음 두지 않겠다고 퇴계가 다짐한
그 길을 따라 우리는 가는 것이다.
淸凉山 六六峯을 아나니 나와 白鷗
백구야 헌사하랴 못 믿을 손 桃花로다
도화야 떠나지 마라 漁舟子 알가 하노라
청량산 열두봉을 아는 이 자기와 백구뿐이라 단정할 정도로 아무도
모르는 이 청량산 길이 퇴계의 즐겨 녀던 길이었나 보다.
퇴계는 이 길을 노복을 대동했을까 혼자 걸었을까.
지척에서 교유(交遊)한 기록이 없으니 동반한 벗도 없었을 테고.
혼자 걷는 것이 편할 뿐 아니라 그래야만 성취감을 만끽하하게 되는
나로서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70을 수(壽)한 그는 얼마동안, 몇세까지 이 길을 즐겨 걸었을까.
내가 76세라 하나 당시에는 칠십고래희였으니까.
이런저런 상념이 미천장담(彌川長潭:전망대상류)을 읊은 시구(詩句)
卅年風月負塵寰(삽년풍월부진환) 앞에서 멎어버렸다.(위 그림2)
삼십년 세월을 속세에서 살았다니?
또 예의 내 병(?)이 도진 것인가.
퇴계는 1533년 성균관에 유학한다.
이후, 벼슬길에 올라 경향 각지에 머물다가 1546년에 토계의 동암에
양진암을 짓고 지명을 퇴계로 개명함과 동시에 아호로 정한다.
제목 '퇴계'의 시는 이때 지었으며 관직에서 물러났을 것이다.
이듬해에 안동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가 1548년 관직에
복귀했으나 4년 후(1552) 칭병 사임한다.
1558년에 공조참판이 된 수삭(數朔)에 병으로 환조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가 말하는 속세에서 자연을 등진 기간은 30년이 아니고
길게 잡아 20년이며 서거 직전까지 이 길을 걸었다 해도 10년이다.
앞의 도산 10곡에서도 "다니던 길 몇해를 바려뒀다"고 했건만.
하나의 길을 두고 대학자 퇴계는 왜 격차가 큰 과소와 과장을 했을까.
이해관계에 따라 늘고 주는 작금의 고무줄 숫자와 무관한 분인데.
이 무슨 부질없는 잡상인가.
상념 떨쳐버리고 만야님과 오순도순 걷기 시작했다.
단천교에서 미천장담까지 흙과 바위가 붉은 빛이다.
이 지역이 단사협(丹沙峽) 임을 의미하며 마을 이름도 단사리다.
아스라한 청량산 육육봉 사이에 걸쳐있는 구름다리가 가물가물한다.
호젓하나 완만하게 꿈틀대는 낙동강물이 파적을 담당한 이 오솔길이
나홀로길이였더라면 진정 무아경이었을 텐데.
정녕, 그 분도 홀로 걸으며, 간간이 시도 읊으며, 자기의 학문을 닦고
다듬어 갔을 것이다.
백운동(白雲洞), 경암(景巖), 미천장담(彌川長潭), 한속담(寒粟潭),
관란헌(觀瀾軒) 등 시(詩)도 막간의 산물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 시들은 메워져 기능을 상실한 소와 담, 허물어져 웅장함이
덜한 풍광, 풍수해로 훼손된 옛길 등을 우리의 상상에 예전의 상태로
복원해 주는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송별(석간대)에 이르러서는 단순치 않음을 직감하게 되었다.
이즈음이라면 호사가들의 저작(咀嚼)거리로 안성맞춤일 그의 염문
(艶聞)과 무관하지 않겠기 때문이다.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복귀한 1548년, 단양군수로 재임중에 나눴다는
관기(官妓) 두향(杜香)과의 애틋한 사랑이 떠올랐으니까.
君去春山雖共遊(군거춘산수공유)/鳥啼花落水空流(조제화락수공류)
今朝送別臨流水(금조송별임류수)/他日相思來水頭(타일상사래수두)
함께 즐길 님이 가버린 봄은 불사춘이다.
작별한 물가로 다시 간들 재회가 가능하리오 마는 그래도 그 물가로
다시 가고 싶은 그 마음이 오죽했겠는가.
실제의 송별이건, 상상송별이건 애절하지 않은가.
풍혈(위 그림1. 2)과 詩 송별(위 그림3. 4)
단애의 바위 틈에 뿌리박고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는 나무들을 볼
때마다 경이로운 생명력에 경탄을 넘어 두려움까지 느끼게 된다.
'意志의 나무' 라는 누군가의 표현(위 그림5)이 왠지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대안도 없이....
이 농암
그림같던 농암종택이 어느덧 눈 앞이다.
청량산 자락 가송리(佳松)올미재마을, 굽이굽이 흐르는 낙동강가의
현 종택은 분천리(汾川, 또는 汾江村)에서 이건한 건물들이란다.
1996년에 농암의 17세주손인 이성원이 이 마을에 새 터를 마련하고
복원했다는 것.
영천(永川)이씨의 집성촌인 분천리가 안동댐에 수몰당할 때 도처에
분산되었던 종택의 유적 유물들을 한데 모았다고.
그러니까,"어부가를 쓰며 강호지락을 추구했던 농암의 터전답다"는
어느 분의 찬사에는 고소불금이다.
가송리가 이름처럼 아름다운 소나무들이 있는 마을로 산촌, 강촌의
정취를 동시에 느낄 만큼 서정적, 목가적인 마을이라 하여도 농암을
비롯해 많은 인물이 대대로 배출된 유서깊은 분천에 비교될까.
더구나 분천, 분강과 분리해서는 의미가 상실될 유적,유물들임에랴.
바위를 때리는 물소리가 얼마나 요란했으면 '聾巖'(귀먹바위)이라고
명명했을 뿐 아니라 자기의 호(號)로 삼았을까.
물소리보다 더 요란하고 혼란했던 당시의 세상을 귀먹은 듯 초연히
살기를 얼마나 염원했으면.(아래 그림1도유형문화재 43호聾巖刻字)
가송리 농암종택 전경(위 그림4)과 도유형문화재자료 제64호 농암
신도비(위 그림5)
분강서원(위 그림6)과 도 유형문화재 제31호 농암사당(위 그림7)
분강에는 농암(바위)과 함께 ‘점석’이라는 자리바위가 강 가운데에
있었는데 농암은 이들 바위에서 자기 특유의 강호풍류를 펼쳤단다.
강, 달, 배, 술과 시가 있는 풍경에서 퇴계를 비롯해 내로라 하는 당
대의 인물들이 모여 낭만적이고도 탈속적인 강호지락(江湖之樂)의
풍류를 펼쳤다는데 가송리가 그 분위기를 대신해 줄 수 있겠는가.
가송리의 협곡을 끼고 흐르는 낙동강이 아무리 낙동강700리중 가장
아름답다 해도.
내게 농암 이현보는 이조 중기의 문신, 청백리, 문학가 보다는 때때
옷의 선비가 맘에 든다.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오른 그의 품계보다, 강호문학(江湖文
學)을 열었다는 공헌보다 그에게 내린 효절공(孝節公) 시호(諡號)의
주인공을 존경한다.
그는 노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경로당을 짓고 늙어가시는 것이
안타까워 하루하루를 아낀다는 뜻으로 애일당(愛日堂:위 그림2. 3)
이라 했단다.
90수의 부모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70노구에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며 재롱피우기를 주저없이 한 농암.
임금은 그의 효심을 가상히 여겨 그에 걸맞는 시호를 내린 것이다.
농암의 모친 권씨부인이 지었다는 선반가(宣飯歌)의 끝절은"가기도
좋구나 부모향한 길이여"다.
바로, 이 늙은山나그네의 思母曲의 일부가 아닌가.
<비가 온다고, 눈이 온다고, 춥다고, 덥다고, 교통체증 때문에, 일
때문에 가지 못하는 고향이 고향입니까?
이런 이유들 때문에 어머니 뵈러 가는 일을 미루거나 포기할 수
있습니까?>(한 늙은山나그네의 思母曲 중 한 절)
농암은 44세때(1501년) 고향집에 명농당(明農堂:아래 그림)을 짓고
벽에 貴去來圖를 그려놓으면서 귀향의 의지를 다졌단다.
사화로 얼룩진, 불안하기 그지없는 정세였으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1542년에 관직을 떠나 귀향하는 기쁨을 陶淵明의 귀거래에 비유한
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유형인 효빈가(效嚬歌)를 지어 읊었단다.
歸去來 歸去來 말 뿐이오 가리업싀
田園이 將蕪하니 아니 가고 엇덜꼬
草堂에 淸風明月이 나명들명 기드리나니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말뿐이오 간 사람 없어
전원이 황폐해지니 아니 가고 어쩔꼬
초당에 청풍명월이 나며 들며 기다리나니)
'긍구'는 "조상의 遺業을 길이 이어가라"는 뜻이란다.
도 유형문화재 제32호 긍구당(肯構堂)은 농암이 왔다(生) 간(死) 집
이며 농암종택의 제반門事가 여기에서 결정됨으로서 종택의 상징적
건물(중심)이란다.
농암이 난세에도 오랜 관직과 장수를 누린 비결이 그의 85회 수연을
맞아 그가 읊었다는 生日歌 안에 함축되어 있다 할까.
功名이 그지이실가 壽夭도 天定이라
金犀띠 구븐 허리에 八十逢春 긔 몃해요
年年에 오낫 나리 亦君恩이샷다
(공명이 끝이 있을까, 수요는 하늘에 달린 것
금서띠 굽은 허리, 여든 넘어 봄 맞음 그 몇 해인가
해마다 오는 날, 이 또한 임금님 은혜일세)
요순시절에 한 농부가 부른 격양가(擊壤歌)와 판이하지 않은가.
日出而作 해 뜨면 일하고
日入而息 해 지면 쉬고
耕田而食 밭 갈아 밥먹고
鑿井而飮 우물 파 물마시니
帝力何有 임금님 덕분이란
於我哉 내게 무슨 소용인가.
농암종택은 문화재의 보고인가.
유적 및 유물 중 보물 10점과 도유형문화재 6점, 문화재자료 1점 등
17점이나 된단다.(보물 중 9점은 하나로 묶여 있지만)
관광시즌에는 농암종택의 갖가지 당호가 붙은 문화재 방들이 높은
수익을 올린다고 누가 귀띔해 주었다.
반칙이 아니며 이상할 것도 없다.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선대가 물려준 고정유산들이 더없이 소중한
관광자원이 되어 후손들에게 대박을 터뜨려 주고 있지 않은가.
한데, 농암의 江湖之樂, 江湖之美의 생애와 문학이 그의 강호문학을
사랑하는 모든 현대인에게 행복한 삶에 대해 깊이 사색할 기회의 장
이 되기를 희망해 공동공간으로 개방하는 것이라고?
잘못된 포장이 좋은 상품의 이미지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우리는 농암종택 앞에서 돌아섰다.
가던 길을 되돌아 오다가 건지산을 향해 오름을 택했다.
밧줄 잡고 낙엽을 헤치며 철계단을 오르는데 웬 옹달샘?
두리번거리는 동안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 고소를 짓게 했다.
떡갈나무 솦속에 졸졸졸 흐르는, 아무도 모르는 샘물을 나홀로 마신
후 아무도 모르라고 도로 덮고 내려오는 것이 즐겁다면 가히 짖궂지
않은가.
파인(김동환) 작시 임원식 작곡의 우리 가곡 "아무도 모르라고"다.
퇴계도 이 샘물을 즐겨 마셨을까.
그는 당대의 대 도학자니까 설마 이런 짖궂은 마음일랑 없었겠지.
한여름, 장마철에 청량산에서 내려다 본 여기 낙동강은 마치 장대한
황구렁이가 유유히 꿈틀거리는 듯 가관이었던 기억이 새록했다.
녀던 길과 더불어 건지산 능선 타고 559m 정상 코앞까지 돌아 내려
오는 호젓한 낙엽길도 일품이다.
잠시나마 산내음을 맡음으로서 山 갈증을 조금은 푼 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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