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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黃眞伊)가 정(情)을 준 사나이들
♣ 小栢舟(소백주)/ 잣나무 배
황진이(黃眞伊)
생몰년 미상, 자칭松都三絶(송도삼절), 조선 중종대 개성 기생
汎彼中流小柏舟
범피중류소백주 저 강 한가운데 떠 있는 조그만 잣나무 배
幾年閑繫碧波頭
기년한계벽파두 몇 해나 이 물가에 한가로이 매였던고
後人若問誰先渡
후인약문수선도 뒷사람이 누가 먼저 건넜느냐 묻는다면
文武兼全萬戶侯
문무겸전만호후 문무(文武)를 모두 갖춘 만호후(萬戶侯)라 하리
※ 黃眞伊(황진이), 조선 중종대(1520-1560/추정) 개성 기생, 시조詩人
황진이는 박연폭포, 서경덕과 함께 松都三絶(송도삼절)이라 자칭했다.
재색을 겸비한 조선조 최고의 명기이다. 어디를 가든 선비들과 어깨를 겨누고 대화하며 뛰어난 한시나 시조를 지었다. 가곡에도 뛰어나 그 음색이 청아했으며, 당대 가야금의 묘수(妙手)라 불리는 이들까지도 그녀를 선녀(仙女)라고 칭찬했다.
황진사의 서녀라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라고도 하는데, 일찍이 개성의 관기가 되었다.
기생이 된 후 뛰어난 미모, 활달한 성격, 청아한 소리, 예술적 재능으로 인해 명기로 이름을 날렸다. 화장을 안 하고 머리만 빗을 따름이었으나 광채가 나 다른 기생들을 압도했다고 한다.
황진이(黃眞伊)가 정(情)을 준 사나이들
♣ 1.
15세 때 이웃의 한 서생이 황진이를 사모하다 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영구가 황진이의 집 앞에 당도했을 때 말이 슬피 울며 나가지 않았다. 황진이가 속적삼으로 관을 덮어주자 말이 움직여 나갔다. 이 일이 있은 후 기생이 되었다는 야담이 전한다.
♣ 2.
소세양(蘇世讓)이 이르기를, “남자가 여색에 미혹되면 남자가 아니다”라고 했다. 황진이의 재주와 얼굴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는 친구들에게 약조하기를 “내가 황진이와 한 달을 지낸다 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자신이 있네. 하루라도 더 묵는다면 사람이 아니네”라고 호언장담을 하였다.
그러나 송도로 가서 황진이를 막상 만나보니 과연 뛰어난 사람이었다. 30일을 살고 어쩔 수 없이 떠나려 하니, 황진이가 누(樓)에 올라 시(詩)를 읊었다. 이 시를 듣고 소세양은 결국 탄식을 하면서 “나는 사람이 아니다”라며 더 머물렀다.
이 때 황진이가 읊은 시가 바로 <봉별소양곡세양(奉別蘇陽谷世讓)>이다.
奉別蘇判書世讓(봉별소판서세양) 소세양 판서를 보내며
황진이(黃眞伊)
月下梧桐盡(월하오동진) 달빛 아래 오동잎 모두 지고
霜中野菊黃(상중야국황) 서리 맞은 들국화는 노랗게 피었구나.
樓高天一尺(누고천일척)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
人醉酒千觴(인취주천상)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流水和琴冷(유수화금랭) 흐르는 물은 거문고와 같이 차고
梅花入笛香(매화입적향) 매화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워라
明朝相別後(명조상별후) 내일 아침 님 보내고 나면
情與碧波長(정여벽파장) 사무치는 정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 3. 꿈길에서도 못잊는 부운거사(浮雲居士) 응선 김경원(應善 金慶元)
別金慶元 (별김경원) 김경원과 헤어지며
황진이(黃眞伊)
三世金緣成燕尾 (삼세금연성연미) 삼세의 굳은 인연 좋은 짝이니
此中生死兩心知 (차중생사양심지) 이 중에서 생사는 두 마음만 알리라
楊州芳約吾無負 (양주방약오무부) 양주의 꽃다운 언약 내 아니 저버렸는데
恐子還如杜牧之 (공자환여두목지) 도리어 그대가 두목(杜牧)처럼 한량이라 두려울 뿐.
상사몽(相思夢)
상사상견지빙몽(相思相見只憑夢)
농방환시환방농(濃訪歡時歡訪濃)
원사요요타야몽(願使遙遙他夜夢)
일시동작로중봉(一時同作路中逢)
☞ 생각고 보고픈 마음 만날 길은 다만 꿈길 뿐
님을 찾아가 반겨할 땐 님은 나를 찾아오네.
원컨대 이후부터는 서로가 어긋나는 꿈길을
같은 때 같이 떠나 길 가운데서 만났으면.
그립고 야속한 사람,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버린 김경원(金慶元)을
아무리 기다려도 만날 길은 꿈길 밖에 없는데
내가 꿈속에서 찾을 때는 당신은 나를 찾아 꿈속을 헤매고
언제나 서로가 어긋나 만나지 못하누나.
다음부터는 서로 같은 꿈을 꾸되 같은 시각에 꾸어서
찾아가는 길 가운데서 만났으면 오죽이나 좋을가 ...
김경원의 대한 연연한 정(情)이 아쉽게 그려져 있는 작품.
서로 각기 와주기를 말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같은 시각에 반대 방향에서 같은 지점을 향하여
중간에서 엇갈림이 없이 만나자고 하는 대목을 보면
표현력도 대단하지만 그를 향한 그녀의 절실한 심정을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다.
동짓달 기나긴 밤
황진이(黃眞伊)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혀내어
춘풍 이불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시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어져 내 일이야 그릴줄을 모로더냐
있으라 하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그렇게 부운거사(浮雲居士) 김경원(金慶元)과
사랑의 홍역을 지독하게 치르고 나서도
황진이는 그와의 추억을 모두 떨쳐버리지 못해
어느 봄날 만월대에 올라 인생무상과 허무를 슬퍼하며
지은 시가 또 하나 있다.
만월대회고(滿月臺懷古)/ 만월대 회고
황진이(黃眞伊)
古寺蕭然傍御溝(고사소연방어구) 옛 절은 쓸쓸히 어구 옆에 있고
夕陽喬木使人愁(석양교목사인수) 저녁 해가 고목 가지에 비치어 서럽구나.
煙霞冷落殘僧夢(연하냉락잔승몽) 연기 같은 놀은 스러지고 중의 꿈만 남았는데
歲月錚嶸破塔頭(세월쟁영파탑두) 세월만 첩첩이 깨진 탑머리에 어렸다.
黃鳳羽歸飛鳥雀(황봉우귀비조작) 황봉은 어디가고 참새만 날아들고
杜鵑花發牧羊牛(두견화발목양우) 두견화 핀 성터에는 소와 양이 풀을 뜯네.
神松憶得繁華日(신송억득번화일) 송악의 번화롭던 날을 생각하니
豈意如今春似秋(기의여금춘사추) 어찌 봄이 온들 가을 같을 줄 알았으랴.
♣ 4.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 마침 평안도사가 되어 가는 길에 송도(松都)에 들렀으나 황진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절망한 그는 그길로 술과 잔을 들고 무덤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다음의 시조를 지어 황진이를 애도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조정의 벼슬아치로서 체통을 돌보지 않고 한낱 기생을 추모했다 하여 백호(白湖)는 결국 파면을 당하며 얼마 지나지 않아 임종을 맞게 된다.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내가 이같이 좁은 나라에 태어난 것이 한이로다" 하고 눈을 감았다 한다.
♣ 5.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
황진이(黃眞伊)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蒼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 황진이(黃眞伊)의 기명(妓名)은 명월(明月).
☞ 황진이와 벽계수와의 이야기는 서유영(徐有英,1801~1874)의 금계필담(錦溪筆談)에 자세히 전한다.
황진이는 송도의 명기이다. 미모와 기예가 뛰어나서 그 명성이 한 나라에 널리 퍼졌다. 종실(宗室) 벽계수가 황진이를 만나기를 원하였으나 ‘풍류명사(風流名士)'가 아니면 어렵다기에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방법을 물었다.
이달이 “그대가 황진이를 만나려면 내 말대로 해야 하는데 따를 수 있겠소?”라고 물으니 벽계수는 “당연히 그대의 말을 따르리다”라고 답했다. 이달이 말하기를 “그대가 소동(小童)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가지고 뒤를 따르게 하여 황진이의 집 근처 루(樓)에 올라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타고 있으면 황진이가 나와서 그대 곁에 앉을 것이오.
그때 본체만체하고 일어나 재빨리 말을 타고 가면 황진이가 따라올 것이오.
취적교(吹笛橋)를 지날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 일은 성공일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오” 했다.
벽계수가 그 말을 따라서 작은 나귀를 타고 소동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들게 하여 루에 올라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한 곡 탄 후 일어나 나귀를 타고 가니 황진이가 과연 뒤를 쫒았다. 취적교에 이르렀을 때 황진이가 동자에게 그가 벽계수임을 묻고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 시조를 읊으니, 벽계수가 그냥 갈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다 나귀에서 떨어졌다.
황진이가 웃으며 “이 사람은 명사가 아니라 단지 풍류랑(風流郞)일 뿐이다”라며 가버렸다. 벽계수는 매우 부끄럽고 한스러워했다. 한편 구수훈(具樹勳, 영조 때 무신)의 <이순록(二旬錄)>에는 조금 달리 나와 있다.
종실(宗室) 벽계수는 평소 결코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말해왔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황진이가 사람을 시켜 그를 개성으로 유인해왔다.
어느 달이 뜬 저녁, 나귀를 탄 벽계수가 경치에 취해 있을 때 황진이가 나타나
“청산리 벽계수야...” 시조를 읊으니 벽계수는 밝은 달빛 아래 나타난 고운 음성과 아름다운 자태에 놀라 나귀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 6. 화답(和答)의 미학(美學),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화답(和答)이란 서로 화하여 답하는 것이다. 서로 화한다는 것이 얼마나 쉬운 것인가. 또 서로 화(和)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아주 쉬운 것이 어쩌다 보면 아주 어려운 것이며, 아주 어려운 것도 어쩌면 허망할 정도로 쉬울 때가 있다. 사람들의 일이 모두 그렇지 아니할까?
마음이 어린 후이니,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오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조선 시대 화담 서경덕의 시조다. 깊은 산중에서 가을바람에 떨어져 뒹구는 낙엽 소리가 오는 임의 치맛자락 끄는 소리로 들리는 것을 마음이 어리석으니 하는 일이 다 어리석다는, 겉으로는 후회와 반성이지만 내면으로는 아름다운 여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절절한 노래가 아닌가?
혹자는 이 노래를 전해들은 황진이의 화답 시(詩)가 있다 했다.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황진이(黃眞伊)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올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자신은 한밤중에 찾아간 일이 전혀 없기에 당신을 속인 일이 없지만 가을바람에 지는 입소리에 속은 것을 자신인들 어이할 것이냐며 겉으로는 발뺌을 하지만 내면으로는 자신을 그리워하는 화담을 못내 떨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일갈(一喝)/ 한 마디,
소리 없음에서 그것을 들어보라 ...
聽之於無聲, (청지어무성) 소리 없음에서 그것을 들음으로써
乃得其妙. (내득기묘) 그 미묘함을 체득하게 되느니라 ....
無絃琴銘(무현금명) 줄 없는 거문고에 새긴 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琴而無絃, (금이무현) 거문고에 줄이 없는 것은
存體去用. (존체거용) 본체(體)는 놓아두고 작용(用)을 뺀 것이다.
非誠去用, (비성거용) 정말로 작용을 뺀 것이 아니라
靜基含動. (정기함동) 고요함(靜)에 움직임(動)을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聽之聲上, (청지성상) 소리를 통하여 듣는 것은
不若聽之於無聲, (불약청지어무성) 소리 없음에서 듣는 것만 같지 못하며,
樂之刑上, (악지형상) 형체를 통하여 즐기는 것은
不若樂之於無刑. (불약악지어무형) 형체 없음에서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
樂之於無刑, (악지어무형) 형체가 없음에서 즐기므로
乃得其 , (내득기 ) 그 오묘함을 체득하게 되며,
聽之於無聲, (청지어무성) 소리 없음에서 그것을 들음으로써
乃得其妙. (내득기묘) 그 미묘함을 체득하게 된다.
外得於有, (외득어유) 밖으로는 있음(有)에서 체득하지만,
外得於無. (내득어무) 안으로는 없음(無)에서 깨닫게 된다.
顧得趣平其中, (고득취평기중) 그 가운데에서 흥취를 얻음을 생각할 때
爰有事於絃上工夫 (원유사어형상공부) 어찌 줄(絃)에 대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가?
서경덕을 위해서 황진이는 많은 시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나니 옛 물이 있을손가
인걸도 이와 같아 가고 아니 오노매라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라
녹수는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이 그리워 울어 예어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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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理)와 기(氣)에 대한 서경덕의 입장
서경덕의 산문집 [화담집].
이기(理氣)에 관한 그의 주장과 역(易)의 사생론 및 음양(陰陽)에 대한 논술이 실려있어 그의 이기철학을 살피는 데에 유일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기(氣) 바깥에 리(理)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리는 기를 주재한다. 여기에서 주재한다는 것은 밖으로부터 와서 주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기의 작용을 지시하여 그 작용이 바르게 저절로 그렇게 되도록 하기 때문에 주재한다고 하는 것이다. 리는 기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며, 기가 시작이 없기에 리도 본래 시작이 없다.
- [이기설] 중에서
서경덕은 위와 같이 리가 기와 별도로 존재하면서 기를 주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 스스로가 기의 작용을 바르게 이끄는 내재적이고 자율적인 작용 원리이자 이치라고 보았다. 굳이 서양철학식 표현을 빌리면 리는 기가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기(氣) 내재적인 속성’ 또는 ‘내재적 원리’에 가깝다. 서경덕의 이러한 입장에 대해 ‘기(氣)일원론’, ‘유기론’(唯氣論), ‘주기론’(主氣論) 등으로 일컫기도 하지만, 이른바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의 이분법이 유학의 이기론을 설명하는 틀로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의문과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사실이다.
‘죽음과 삶, 사람, 영혼은 다만 기(氣)의 뭉침과 흩어짐일 뿐이다. 모이고 흩어짐은 있을지언정 있고 없음은 없다. 그것이 기의 본질이다.…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같은 것일지라도 그 기는 마침내 흩어지지 않거늘, 하물며 사람의 정신 지각처럼 크고 오래 걸려 뭉쳐진 것이랴.…비록 한 조각 촛불의 기가 눈앞에서 꺼지는 것을 보더라도, 그 남은 기는 끝내 없어지지 않는다.’ - [귀신사생론] 중에서
서경덕의 위와 같은 입장을 접하고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나 질량 보존의 법칙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기론을 서양의 자연과학에 직접 견주는 것은 무리다. 그 배경과 맥락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서경덕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방편적으로 유용한 것만은 사실이다. 서경덕의 이러한 입장을 가리켜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유물론에 가깝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실체를 물질로 보느냐 정신으로 보느냐 하는 유물과 유심의 틀은 어디까지나 서양 형이상학의 맥락이라는 점에서 ‘서경덕은 곧 유물론’이라는 등식에는 무리가 있다.
율곡 이이는 서경덕의 학문이 독창적이며 특히 기(氣)의 미묘한 측면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 그러면서도 서경덕이 기(氣)를 리(理)로 알고 있는 병통을 지녔다며 비판한다. 퇴계 이황은 서경덕이 기(氣)를 리(理)로 잘못 알고 있으며, 사실상 기(氣)의 불멸을 주장함으로써 불교의 미망에 빠졌다고 비판한다. 본래부터 우주에 편재되어 있는 도덕적, 윤리적 원리이자 본성으로서의 리(理)를 강조하고자 했던 유학자들의 입장에서는, 리를 내재하고 있는 자연 그 자체로서의 기(氣)를 강조한 서경덕이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이황과 이이가 자연-도덕주의자였다면 서경덕은 자연주의자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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