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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부터 계획을 하고 용돈을 모으기 시작했는디...
갑짜기 일이 생겨 탈탈 털어버리니 아득한 심정
휴가보너스를 받게 되여 그돈과 합해 경비를 보내고 나니 이제야 백두산산행을 할 수있어 안도의 한숨.
드디어 백두산 가는 날 4시에 기상을 하려니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3시에 일어나 전확히 4시에 집을 나섰다.
집사람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우째겠노....같이 여행을 다닐 수 있는 날이 빠른 시일에 오겠지.
오리역에서 4시30분 첫차로 인천으로..주관하는 최대장이 보이고 시간이 되니 이번 산행 가족 14명이다. 초등학교 동창모임을 백두산이라 조금은 부럽다.
09:40 인천공항출발 중국대련에 1시간 시차가 있어 10시에 도착
마중나온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3박4일 같이할 관광버스에 탑승.
대련의 풍경은 비교적 깨끗하나 조명이 좀 어두워 을시년 스럽다.
오늘의 일정은 들으니 기가 찬다.
차량이동시간이 10시간이 훌쩍 넘는다고 하니
중국땅이 크긴 큰가보다.
연변에서 온 한국인 가이드(김국성)가 가르쳐준 간단한 중국어가 생소하다.
긴요하게 쓰일
기사...스프
수고하셨습니다...쉰콜라
재미있는 단어다.
중국의 고속도로는 도시구간이 편도 4차선이다.
땅이 넓어서인가 대국은 대국 같다.
환경의 차가 하늘과 땅차이가 나는 사람사는 풍경 또한 이채롭다.
고속도로 주변의 아파트들이 하나같이 지붕이 서구식이다.
16:00 심양을 좌측으로 두고 차선관광으로 비껴 지나고 푸슨(抚顺)을 거쳐
17:15 난자무(南杂木)을 지나 고속도로를 벗어나
심빈 도착(18:15)
이곳에서 교통수단의 하나인 삼륜차(국내에는 이미 운행이 되지 않는차)도 보이고
서서히 어둠이 대지를 덮기 시작한다.
메이헤이구시(梅河口市)에서 우측방향으로 돌아 어둠을 가르며 계속 달린다.
대련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길섶 눈에 드는
평원마다 옥수수 밭이 펼쳐저 그많은 곡식의 사용처를 물으니
일부는 가축사료 일부는 북한으로 수출을 한단다.
그리고
북한에서 목재를 수입한다고 하니
북한 땅이 민등산이 된게 그 원인인 듯 싶다.
20:30 통화도착 한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한다.
맛은 그런 대로 먹을 만했다.
통화을 질러 가는 강이 홍강 그 꼬리가 엄청나다.
23:00 백산도착(백산시호텔) 1박이다.
나는 월산악회 최대장과 함께하고 짝궁은 홀로 온 조영순님과 함께 방을 배정 받고 이른
새벽3시30분에 기상하여 4시출 발을 한다하여 곧바로 침상에 든다.
첫날부터 개고생이다.
대련공항에서 10시에 출발하여 백산에 도착 한 시간이 11시 오늘의 차량 이동시간이 13시간이다.
부산을 왕복하고
다시
서울에 온 시간 끔찍하다.
비소식이 우울하게 하지만 내일의 좋은 날씨를 기대하며 깊은 잠에 든다.
27일 모닝콜 3시30분 저녁에 풀지 않은 짐으로 간편하게 이동을 하여 4시에 백산 출발하여
서파(池西區)로 향하는 길 하늘이 펑둟인 것처럼 비가 계속 온다.
오늘 백두산 산행이나 하려나 걱정이 앞선다.
07시 길림 고려식당에서 아침 이곳 식사도 먹을 만하다.
식당 앞마다 조그마한 가게들이 있어
오는 손님(대부분 한국관광객)에게 물건을 사라고 하나 진열된 상품이 거의 없다.
스카프와 찐옥수수
암튼
미지의 나라다.
이곳에서 백두산산행 가이드탑승(이들 모두가 자격증을 소유하고 있다)
08:20분 서파 매표소 통과하여 백두산 천지행 버스로 환승하여
30여분 올라 보니 안개가 자욱하고
많은 산행객과 중국인들이 북적거린다.(5시간)
09:00 장백산 휴게소는
어둡고 담배연기로 숨이 턱에 차 밖에서 인원 점검을 하고
1200여 계단으로 이루어진
천지
가는 길을 오른다.
굳은 빗줄기와 안개
그리고
세찬 바람까지 동반하여
보수중인 계단을
오르기가 버겁다.
10:50 천지에 도착하니
제대로 서있을 수도 없는 바람에
카메라를 들 수가 없을 정도다.
렌즈에 물기가 서려 이상 작동까지
겨우 몇 커트 찍고
가이드와 동창일행과 협의하여 등정포기(입산금지조치)하고
대신
북파로 이동하여 천문봉과 장백폭포을 보고
나머지
일정을 소화하기로 하고 다시 원점으로...
(11:30)
내려 오는 길은 오를 때보다 더 힘이 든다.
힘든 여행객을위하여
인력거(두 사람이 들것 같은 곳에 의자를 만들어 사람을 이동하는 기구)가 보인다.
서파에서 북파로 이동하기 위해 다시 차에 탑승
티지해(梯子河):화산이 폭팔한 흔적을 보고 사진 한컷
그리고
금강대협곡으로 향한다.
천지에서 아침에 출발을 한 곳으로
내려서자니
마음이 무겁다.
석회석처럼 회색빛이 도는
깍아지른듯한 암릉의 모습처럼
여기저기
돌출되여 있는 것
또한 경이롭다.
동창모임의 총무격인 한분이 유난히 말이 많아 조금은 괴롭다.
허나 여행이란 모르는 객들과도
어울림이 있지 않는가?
금강대협곡의 아래에 흐르는 것이 압록강으로 연결이 된단다.
거대한 중국속의 최상의 관광자원이 되여
잘 정돈 된 산책로가 이채롭다.
산책을 마치고 나오는 곳은 남산에 있는 사랑의 열쇄걸이가 큰 고목을 가운데 두고 조성되여
한결 친근감이 든다.
모든 간판들의 색들에는 붉은색과 금색으로 쓰여져 중국인들의 기호 색을 감안 할 수 있다.
13:20
북파로 이동을 하면서 점심도시락을 차에서 해결하기로 하고
천천히 움직이는
차내에서 식사를 하지만
도시락에는 절인 오리 알
소시지와 무 무침과
밥
진짜 여행맛 난다.
15:20
북파 도착 이곳도 마찬가지로 입장권을 사서 입장하여
버스와 찦차로 기상대까지 이동하여
그곳에서 200여 미터 올라
16:20 천문봉(2670미터)에올라
못 볼줄 알았던 천지가 얼굴을...
모두들 탄성을 지르며
사진에 담기 바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경이롭다 잠시 열린 천지의 모습은 신비롭다.
짙은 물색이
너무나 청아하다.
오늘의 투숙지인 송강하로 이동을 하자면 빨리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 내려와
17:30분까지 시간이 주어져
장백폭포를 보기위해 간편한 복장으로
거의
달음질 수준으로
폭포 쪽으로 간다.
천지에서 내뿜는 물을 단고 낙하하는
장백폭포(17:10)모습은 그
간 내린 비로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며
물안개를 잔득 머금고 떨어져 흐르는 것이
가슴을 콩닥거리게 한다.
우측 성처럼 보이는 것이
1박2일 촬영시 올랐던 산행로이나
낙석이 너무 심해
현재는
통행을 통제.(3시간)
글로 표현이 어려운 벅참이......(17:50)
서파 쪽으로 이동 송강하(松江河)에 투숙(항혜호텔) 잠자리가 영 아니다. 객실에서는 곰팡내가 진동하고 안내데스크에 있는 종업원과는 소통이 안 되고.... 최대장과 함께 컵라면 요기...맛이 일품이다.
모닝콜 05:30 출발예정시간 06:00이란다.
28일 아참식사를 하려니 밥맛이 뚝...... 식단이 영 아니다.
오늘도 비다. 연 3일을 빗속에서 산행도 아니요 관광도 어정쩡 암튼 괴상한 백두산길이 열린다.
보고 느낀 점은 거대한 중국은 무한한 발전을 기다리고 있는 미지의 나라.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에 심어져 있는 옥수수와 해바라기
드문드문 보이는 마을마다
붉은색일색인
지붕이 이제는 새삼스럽지 않다.
중간에 급해 잠시 들른 화장실에 경악!
대소변을 함께 보는 칸막이 없는 곳 참 신기하다.
우리네 6.25사변시의 모습과 흡사하다.
08:50
백산시 통과하여 고속도로 진입하여
잠시 휴식을 하기위해 정차한곳은 작은 터전이
11:30
오녀봉 삼림공원
전설에 의하면 용과 싸우기 위해 다섯 딸들의 차례로 죽음을 맞이하다 마지막 딸이 용을 죽인것의
모습들이있는 공원 유적이긴 하나 시간이.....
12:00 집안시(集安市) 도착 태왕릉 관광 13:20 관광 종료(6시간)
참고자료:
중국 지린 성[吉林省] 지안 현[輯安縣] 여산(如山) 남쪽 기슭에 있는
고구려의 기단식(基壇式) 돌무지무덤[積石塚].
현재는 분구의 대부분이 무너져 내린 기단부와 그 위층의 방단부(方壇部) 일부만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1990년 이래 중국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어 복원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그 결과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무덤 기단의 한 변은 약 63m이며, 너비 약 1.75m, 높이 6m가량의 대형 석재 5개가 받치고 있다. 기단 위의 각 방단 내부는 막돌과 장돌로 채워졌다.
분구 정상부 가까이에 설치된 매장부(埋藏部)는 굴식 돌방[石室]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돌방의 방향은 서향이며 널길[羨道]은 널방[玄室] 서벽 한가운데에서 시작된다.
널방의 천장부는 3단의 평행굄으로 짜여졌으며,
천장은 지름 4.55m, 두께 0.8m의 대형 화강암 판석으로 덮여 있다.
널방의 동서길이는 2.82m, 남북너비는 3.16m이며 지면에서
분구 정상부까지의 높이는 16m 정도이다.
분구 정상부에서 명문전(銘文塼)과 와당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원래의 분구 위에 작은 사당이 지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명문전 중에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돋을새김된 문장이 있어 '태왕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무덤 주위에는 자갈이 깔리고 그 바깥으로는 무덤구역을 알리는 흙담이 둘러져 있다.
무덤의 남방 180m 지점에서 기와·전돌과 함께 건물의 초석이 발견되어 무덤의 피장자를 위해
제사지내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의 동북 500m 거리에는 유명한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가 있다.
명문전의 내용, 무덤의 규모, 근처의 건물터, 광개토왕릉비 등을 근거로
광개토왕의 능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자랑 광개토대왕릉비
집안에는 고구려 때의 무덤이 약 1만 2000여 기가 남아있다.
평양은 고구려 후기의 도읍지였다.
평양 근방에는 약 1000기의 고구려 무덤이 존재할 뿐이다.
집안의 고구려 무덤 숫자가 경이롭다.
집안시에서
고구려시대의 무덤떼는 약 70개 지역에 산재되어 있다.
당시 고구려인들은 무덤과 함께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덤의 크기도 놀랍다.
광개토태왕릉의 한변의 길이가 66m이고, 장수왕릉은 30m가 넘는다.
고국양왕릉은 2060평으로 고구려 무덤 중 가장 규모가 크다.
광개토태왕은 고구려의 용맹을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이다.
우리 국민이라면 광개토태왕을 우리의 위대한 조상으로 여긴다.
광개토태왕릉비는
우리민족의 자랑이다.
그러나 중국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고구려를 자신들의 역사 영역에 포함시키고 있다.
일명 동북공정이다.
그간 고구려 유적에 무관심했던 우리들의 역사인식은 엄청난 치욕의 결과를 안겨주었다.
우리 역사에 광개토태왕이 없었다면,
우리의 기상은 얼마나 왜소하고 나약한 존재였겠는가?
광개토태왕 시대는 영토 확장을 위해 전
고구려인이 목숨을 걸었으리라.
광활한 만주 벌판이 남북통일 후에 분쟁지역이 될 수 있음을 간파한 중국은 선제공격을 한 것이다.
현재 그들이 그 땅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개토태왕비는 언제까지 그곳에 서 있게 될 것이다.
1500년 전 그 땅은 고구려의 땅이었다. 아니 우리 민족의 땅이었다.
광개토태왕비는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증명해 주는 우리 민족에게는 중요한 비석이다.
광개토태왕비는 높이가 6.39m 이다.
중국에는 수많은 비석이 서 있다. 그
러나 광개토대왕릉비 보다 큰 비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석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모두 1,775자의 한자로 새겨져 있는데,
1,590자가 판독 가능하다.
19세말 일제의 역사학자들은 광개토태왕비를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탁본을 조작하여
자신들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근거를 찾기도 했다.
물론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그들의 비문 왜곡임이 드러났다.
그러나 아직도 일본의 국정교과서는 이를 시정하지 않고 있다.
광개토태왕비는 단순한 비가 아니다.
중국과 일본이 첨예하게 논쟁하며자신들이 유리하도록 벌이는
핵심적인
동북아 최대의 역사문화유산이다.
서길수 교수는 '광개토왕'이란 호칭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기록한 근거로 한다고 했다.
김부식은 사대주의 역사가다.
중국에 대한 사대의식으로 스스로를 낮춰 '왕'이라고 썼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모두루묘지에 쓰인 글에는 '국강상 광개토지 호태성왕',
그리고
경주 호우총에서 나온 호우에는 '국강상 광개토지 호태왕' 이라고 쓰여 있다.
서길수 교수는 '태왕(太王)'이라는 표현에 주목한다.
'왕중왕'이란 뜻의 황제라는 칭호는 진나라 때 처음 사용했다,
일본도 천황이란 호칭을 사용한다.
고구려에서는 천황을 '태왕'이라고 했다고 주장한 사람은 서길수 교수다.
서교수는 태왕이란 호칭이 황제에 버금가는 등급임을 고구려의 세계관을 통해 설명한다.
중국의 황제는 천자라 하여 하늘의 아들이다.
그는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유일한존재였다.
왕은 황제보다는 한 등급 낮다. 그러므로 하늘에 제사는 지낼 수 없는 존재다.
조선시대의 왕들도 사직에는 제사를 지냈다. 사직은 즉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을 칭한다.
그러나 하늘에 제사지내는 일은 중국의 황제의 영역이기에 그들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고구려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하늘에 제사지냈다.
연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고구려의 태왕은 황제에 버금가는 호칭이다.
‘고려태왕’이라는 호칭은
충주의 <중원 고구려비>에도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14:20 점심 후
출발 압록강을 좌측으로 끼고 달리고 있지만
강건너 이북땅을 보면서 안스런 생각이 든다.
한사람의 정치인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있는
북한주민들의 생활 상을 생각하면
안스럽다.
20:20 드디어 단동 (6시간)
단동기차역 앞에 거대한 모택동의 동상이... 모든 거대하다.
이곳에서
저녁을 먹지만 마지막 밤의 식단 또한 부실하다.
단동시내로 들어서는 초입에
우리내 탱크 저지선같은 콩크리트 구조물 무엇이냐 물으니
압록강이 범람을 하면 단들시내로 유입되는 물을 막기위한 물막이란다.
높이가 2미터는 족히 되는것 같다.
점심식사시 구입한 장뇌삼(1개가 1000원) 한뿌리식 술안주로....아~~~입속이 호강한다.
약간 속이 쓰리다.
중국에서는 장뇌삼을 인삼을 재배하듯이 대량으로 심어 재배를 하고 있으니 얼마나 싼가?
다행히 평지는 아니고 산속에다 만든다니....
나도 몇뿌리 샀다.
동창모임의 총무님께서 술한잔 하고자 하나 몸이 별로다.
조금은 미안하지만 어쩌겠는가?
철련호텔 3박중 제일 좋은 시설이다.
외출을 하려고 하니 또 비가 내린다.
방에 들어 텔레비를 틀으니
한국방송이.....
내일 아침 모닝콜 3시 그리고 3시30분 출발이란다.
전일정이 마무리 아쉬움은 많지만 악천후속에서도 북파에서 천지를 감상을 할 수 있어 행복했고 수량이 풍부한 장백폭포를 가까이 접할 수있었고 예정에 없던 금강대협곡을 관광하였으며
군대생활에서 북한군과 조우 한 후 처음으로 가까이 이북녘을 보게되여
변화하지 않는 폐새주의적인 북한..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마저 든다.
05:30 장하시 통과 중 좌측에 서해를 바라보며 쏟아지는 빗속을 여전히 우리는 달리고 있다.
모두들 이른 아침부터 움직여 깊은 잠속에 젖어있다.
西河港 양옆이 거대한 양식장이다.
이곳에서 양식되는 어물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국내에 수입이 되어
국내 어업을 종사하는 어민의 주름살을 깊게 한 곳.
06:30 드디어 하늘이 열렸다.
동쪽에서 비추는 햇살이 살갗스럽다.
하늘에 수놓은 운무를 보니 자연의 신비스러움에 가슴이 벅차다.
08:30 대련공항 도착 3박4일간의 긴 여정을 함께한 버스 기사님과 가이드에게 감사의 말을하며 헤여지려니
그간 정이 든 모양이다.
아싑다.(5시간30분)
차량이동시간 38시간 1900키로 무지하게 바쁜 여행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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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짱님 역사 공부 하는것 같아요..잘 보았읍니다..
역시 제3의 전성기를 보내고 계신것같습니다...........
역사공부는 언제나 즐겁네요....우리의 역사는 파란만장한것 같습니다.
차는 원없이 타보았어요. 중국 크긴 큰나라인가봐요. 그리고 깨달은것...집나가면 개고생이다!ㅋㅋㅋㅋㅋㅋㅋㅋ~~ㅎㅎ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