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죄책감은 기본적으로 건강한 감정은 아니다. 죄의식에 짓눌리는 느낌이 감각의 문을 막아버릴 때, 자아는 병들기 십상이고, 그것을 타인 앞에서 드러내면 위선이 된다.
책임감이란, 끝내 자기 자신을 향하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무엇을 책임질 수 있으며, 책임져야 한다는 말인가. 시대에 대한 책임감을 운운하는 이들 치고 가증스럽지 않은 이가 드물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치우 어르신이 분신자결한 지난 1월 16일 이후로부터 지금껏 나 자신을 이끌어온 감정을 죄책감, 책임감 이런 말 외에 달리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이 글 또한 끝내 위선과 가증스러움의 경계에 있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고향으로 돌아와 꽤 지역일을 열심히 하는 척(그렇다, 딴에는 깜냥껏 하기는 했다) 했고, 사회 문제에 관해 평균 이상의 관심과 열정을 가진 인간으로 스스로를 포장해 왔다. 그런 나에게 지난 1월 16일 이치우 어르신의 분신 소식은 말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본능적으로 바로 그 전 주말, 우리 <밀양두레기금 너른마당> 식구들과 함께 부북면 대책위 어르신들의 산막을 방문했을 때 그 어둑한 산막에 앉아 계시던 쪼글쪼글한 할머니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는 그때 지역에서 모금한 성금과 플래카드를 들고 산을 올랐고(아니다, 승용차를 나누어 타고 올라갔다), 그분들 앞에서 ‘지지 방문’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것은 우리가 이 문제에 관한 한 ‘남’이며, 다시 오지 않겠다는 의사를 무의식적으로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우리 손을 붙잡고 연신 ‘고맙습니데이, 고맙습니데이’ 하시는 그분들의 배웅을 받으며 산을 내려올 때 우리는 일말의 후련함을 느끼기도 했던 것이다. 며칠 사이 가끔 그 얼굴들이 떠올랐고, 이 추운날에 힘드시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우리는 그분들을 모르고, 그분들도 우리를 모른다.
그리고 나도 지금 할 일이 있고, 나름대로 빡빡한 일정이 있다. 지난 7년여동안의 싸움, 처음에는 나도, 지역 시민단체 사람들도 함께 했었다. 그러나, 지역의 동북쪽에서 서북쪽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이 사업은 금세 지역 전체의 이슈가 되었다. 지역 국회의원과 시장이 그들을 돕겠노라 했고, 자연스럽게 우리는 빠졌다. 관제 궐기대회와 서명운동이 벌어졌고, 온 시내가 플래카드로 도배되기도 햇다. 그러나 결국 국회의원도 시장도 여기서 빠졌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시내 여론은 썰물처럼 식었고, 그들만 남았다. 시청 앞에서 단식을 하고 있어도, 서울로 어디로 가서 공청회를 한다고 해도 우리는 보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대로 할 일들이 있었고, ‘그들의’ 일은 우선순위 바깥이었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이 일이 관이 나서야 할 일이라 생각했고, 시내에는 저들이 저렇게 버티는 것에는 보상금 더 받기 위한 수작이라는 악선동이 유포되어 있었다. 그런 흐름이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모두에게 외면당한 채 이 싸움 마지막까지 남은 어르신들의 한결같은 바람은 백지화, 그 자체였다.
그리고, 우리가 다녀간 얼마 뒤 그 일이 터지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때 어르신들은 석 달 가까이 계속된 한전의 공사강행에 맞서 싸우다 완연히 지쳐있었고, 마을마다 ‘누구 하나 죽어야 이 일이 끝날 것’이라는 절망적인 풍문이 떠돌고 있던 때였다. 그리고 그날 내가 만났던 부북면의 어르신은 아니었지만, 산외면에서 정말로 한 사람이 죽었다. 나는 내가 보았던 그 얼굴들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과 이치우 어르신은 다르지 않았다. 일흔 네 살 할아버지의 분신 자결,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용역과 맞서 싸우다 전기톱에 다리를 찢길 뻔했고, 한전으로부터 가장 많은 고소 고발을 당한 윤여림 할아버지의 말씀이다.
이치우 그 양반 돌아가신 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난다. 분신은, 운명이 안 되면 절대 못하는 일이여. 말로는 나도 따라 죽는다, 어쩐다 해도, 못해. 젊은 사람들 잘 모르는데, 나이 많이 먹을수록 죽음을 더 두려워해. 아나? 무서워서 못 죽는다고.
자신과 동생이 평생을 일구어온 논바닥 한가운데에 꽂히는 칠십육만오천볼트 초고압 송전탑, 농사도 지을 수 없고 내놓아도 살 사람이 없다. 보상금은 시가의 1/6에도 미치지 못한다. 칠십사년 인생을 하루아침에 메다꽂는 이 거대한 절망에 맞서서 젊은 용역아이들의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견디며 영하의 날씨에 질척이는 논바닥을 오가던 1월 16일 하루가 끝날 무렵, 내일 다시 이 일이 반복되리라는 생각에 완전히 탈기해버린, 죽음에 대한 의지만이 남아 있었던 한 노인의 분신자결.
어르신의 죽음이 나를 이곳으로 불렀다. 나도, 우리 너른마당 식구들도 모두. 그날 밤 우리는 오열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죄스러움, 죄책감. 그리고 나는 분신대책위원회의 사무국 일을 맡았고 우리들은 각자 하나씩 크든 작든 역할들을 맡았다. 노래패 분들은 촛불집회에서 노래를 준비했고, 시원어탕 사장님은 분향소 지킴이를 맡아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증언을 녹취했다. 아내는 재정을 맡았고, 목청이 좋은 우리 농민회 실장님은 집회 사회를 도맡았고 밀양촛불 위원장님은 연락책과 트위터, 페이스북을 맡았고 온갖 잔일들을 챙겼다. 그 사이 나는 예정했던 대로 학교를 그만두었고, 아이들과 헤어졌다. 우리가 준비한 집회와 회의 자리들, 온마음으로 우리에게 감사해하던 분들을 보며, 함성이라도 지르고 욕이라도 하면서 울분을 털어내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우리의 역할을 정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서서히 지치고 있었다. 한전은 예상했던 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부에 여러 가지 분열의 씨앗들을 뿌렸고, 주민들 속에서 소소한 분란도 있었다. 한전 사장 김중겸은 약속도 대책도 없이 뜬금없이 혼자 왔다가 헐리우드 액션만 남긴 채 돌아갔고, 핵마피아의 핵심으로 지목되는 조석 지경부 차관은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늉만 하다 올라갔다. 한전 직원들은 여러 채널로 공사를 재개하겠다는 의지를 살살 흘리고 있었다. 그 사이 유족의 일부는 장례에 합의했고, 볼썽사나운 소동만 남긴 채 3월 7일 이치우 어르신의 장례는 강행되었다. 끝내 가족장으로 치러진 장례 행렬, 한무리의 가족과 폭력사태를 우려한 경찰만 우루루 뒤따르는 장례 행렬을 지켜보며 나도 분한 눈물이 났다. 아, 세상 일은 왜 이렇게밖에 풀려질 수 없는 것인가.
세상은 여전히 큼지막한 일들로 가득찼고, 밀양의 싸움은 조용히 잊혀지고 있었다. 강정 구럼비 발파에, 총선에, 하루가 다르게 터져나오는 이 많은 일들에 밀양의 싸움이 낄 자리는 없었다.
이 싸움은 정치적인 사안이고 정치적으로 풀어져야 했다. 그리고 이 싸움은 탈핵 운동과 반드시 연대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 송전탑은 신고리핵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수도권으로 보내기 위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일단 지어놓고 보자고 했을 것이었다. 기존 송전탑보다 훨씬 크고 높은, 40층 건물 높이의 칠십육만오천볼트 초고압 송전탑을 마을 바로 앞에, 학교 옆에, 논바닥에 꽂히도록 노선을 만들어 놓고도, 아마 그들은 이 일이 이렇게 큰 사안으로 번져갈지 아무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일단, 핵발전소 짓고, 선을 죽죽 그어 송전탑 세워서 보내자, 우리가 하면 무조건 ‘된다’고 믿었던 자들의 어이없는 오만과 생각 없음이 이 모든 사태의 근원이었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너는 누구냐. 어떤 새끼인지 얼굴을 보여라! 예수께서는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실 것인가. 그러나, 우린 돌은 고사하고, 지금 일방적으로 맞고 있을 뿐이잖은가. 사람이 죽었단 말이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피아의 구별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얼굴이 곧 내 얼굴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슬슬 그 얼굴은 결국 나의 얼굴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내가 5년전 지금 사는 이 집을 건축할 무렵, 옥상에 3kw짜리 태양광 발전 시설을 달았지만, 그걸로는 난방을 할 수 없었다.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는 우리 지역에서 나무보일러를 떼기 위해 시내 한복판에 있는 우리 집에서 나무를 베어올 길도 난망했다. 결국 ‘심야전기보일러’로 결정했을 때, 나는 이 심야전기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남는 전기, 나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나 또한 이 핵발전소로부터 빠져나갈 길이 없었던 것이다. 저 핵마피아들의 배후에는 결국 ‘나’도 엉거주춤 끼여 있는 것이었다. 속으로 권정생 선생님께 여쭈어 보았다. ‘죄책감에 너무 빠지지는 마시게나. 대신, 할아버지 할머니 도와서 열심히 싸우거라.’
우리의 논리는 이러했다. 신고리핵발전소를 더 짓지 않으면 송전탑은 필요없다, 발전소는 발전소만이 아니라, 거기 사는 사람들, 그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거기서 만들어진 폐기물이 견뎌내야 할 10만년의 시간뿐만 아니라, 그 전기를 옮겨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지옥도까지 같이 그려야 하는 일이다. 우리가 얻은 깨달음이다.
그리고 우리들 안에서 서서히 희망버스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한진중공업 희망버스에는 우리 밀양 식구들도 함께 했고 그 벅찬 기억을 공유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반신반의도 없지 않았으나, 모두들 찬동했다. 이렇게 여론이 식어가고, 형식적인 협상을 거친 뒤에 저들이 공사를 다시 강행했을 때, 무슨 일이 생길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나를 포함한 우리 지역의 식구들이었다. 그리고, 벌목지에 나무를 심자는 제안을 했다. 볼 때마다 마음 아픈 것이 바로 그 벌목지였다. 인도의 생태주의 지식인 반다나 시바의 책에는 인도 여성들이 거대한 댐 건설 때문에 잘려나가는 나무를 지키기 위해 나무를 끌어안고 저항하는 대목이 나온다. 에코-페미니즘을 상징하는 의례가 되어버린 그 행동이 내가 사는 곳 칠십 팔십대 할머니들이 날마다 해야 했던 일이었다. 그렇게 베어져 나간 자리에 나무를 심자, 이것이 우리가 지금 해낼 수 있는 상징투쟁이다, 우리는 그렇게 마음을 모았다.
처음에는 큰 호응이 없었다. 예상은 했지만, 초조했고 긴장되었다. 다행히 진보신당과 녹색당에서 마음을 모아주었다. ‘탈핵공동행동’이라는 전국 단위 연대조직에도 제안했으나 큰 반향은 없었다. 선거에, 후쿠시마 1주년 기념 행사 준비에, 다들 너무 바빴다. 그래, 우리가 준비하자. 그리고 이 행사를 치러냈다.
집회는 먹을 거리가 많아야 한다는 믿음으로 우리는 많은 먹거리를 준비했다. 그리고, 날마다 시내를 돌아다니며 포스터를 붙였다. 그러다가 길거리에서 아이들을 더러 만났다. 아이들은 반가워했지만,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기도 했다. 왜 이런 일을 굳이 하시냐는 듯. 쑥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난 시절이 떠올랐다. 아이들 앞에서 영상 보여주면서, 신문 기사 스크랩해서 같이 읽으며 세상 이야기하던 시절, 입으로 떠들던 시절들이. 학교를 그만두면서 나는 무엇보다 ‘몸으로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탈핵 운동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학교를 그만 둔 내 앞에 이 일들이 펼쳐진 것이다. 바라는 대로 되었으니, 당혹스러웠지만 쑥스러워할 일은 아니었다.
지난 2개월여 동안 나는 때때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생각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 말이다. 강도당한 이를 만난 세 사람, 제사장, 레위인, 그리고 3등 국민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인. 오직 사마리아인만이 제 갈 길을 멈추고, 가진 것을 털어서 정성스레 강도당한 이를 돌보았다. 누가 그의 이웃인가? 선한 사마리아인이다. 그렇다, 내가 저 어르신들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물론 나도 학교를 그만두고 하고자 하는 일이 있었다. 탈고 직전에 와 있는 단행본을 마무리해야 했고, 농업과 기본소득에 관한 공부를 시작해야 했고, 너른마당 일을 좀 갈무리해야했다. 그러나 다 미루어야 했다. 그리고 우리가 내민 손을 잡아주기 위해 희망버스를 타고 수많은 선한 사마리아인들이 왔다.
2.
그 이틀의 시간은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이틀 내내 예고되었던 비가 전혀 오지 않았다. 그날 아침에도 우리들은 흩어져 행사장 주변과 밀양역을 포스터로 도배하다시피 했고, 아내는 서울쪽 억양을 구사한다는 이유로 징발되어 건설노조 밀양지회에서 빌린 방송차량을 타고 시내를 누비며 행사를 알렸다. 어린이책시민연대 밀양지회 회원들은 노란 조끼를 맞춰입고 나와 그 조끼에 오뎅 국물을 묻혀가며 뜨거운 오뎅국물을 퍼날랐고, 너른마당 조합원들은 부추전을 칠백장을 부쳤는지 팔백장을 부쳤는지, 두부를 몇 판을 썰었는지, 식용유를 몇 통을 썼는지 모를 만치 즐겁게 바쁘게 일을 했다. 우리 지역의 예술가 박작가는 희망술독 차량을 급히 제작하여 온 집회장을 돌아다니며 막걸리를 퍼 날랐다. 그가 내민 술을 받아 마셔 알딸딸해진 사람들이 급기야 가수 공연때 무대 앞에서 기차놀이판을 만들었고, 모인이 엄마는 연극 배우가 되어 이치우 어르신의 어머니 역할로 분해 모두를 울렸다. 대구의 독립영화감독 이경희 PD가 제작한 다큐 영화 ‘밀양의 전쟁’은 특히 많은 이들을 울렸다. 문화제에 자리한 천삼백명 참가자들이 눈물을 흘렸다.
유기농 펑크 가수 사이와 인디 밴드 요술당나귀는 밀양 아줌마 할머니들을 완전히 홀렸다.
웃음과 눈물이 흐드러지게 피어났고, 술과 음식이 쉴새없이 오고갔다. 서울, 부산, 대구, 온 대도시와 밀양의 시골 기운이 질펀하게 어울린 밤이었다.
열띤 분위기 속에서 문화제가 끝나고, 그 다음날 우리는 밀양 부북면 화악산을 올랐다. 여러 곳 마을 회관과 민박으로 분산했지만, 그 흥분된 시간을 보내고 간밤에 곱게 잤을 리는 없을 터, 그러나 다들 씩씩하게 산길을 오른다. 한전 용역들이 벌목해 놓은 129번 철탑 예정지, 거기에 우리가 생명의 나무를 심는다. 간밤에 비가 와서 따로 물을 줄 필요도 없고, 날시도 흐릿하니 나무심기엔 최고다. 사진을 찍고, 나무를 향해 큰 절을 하고, 구호들을 외치고 함성들을 지른다. 벌목지의 폐허 위에서. 진보신당과 녹색당 중앙당, 그리고 나는 희망버스 행사 며칠 전 한전으로부터 내용증명을 받았다. 한전이 배타적 사용권을 득한 벌목지에 식목행사를 강행할 경우 민·형사상 책임을 묻겠다는. 그러나 그 땅의 주인은 보상금을 수령하지도 않았고, 그들이 법원에 공탁금을 걸어놓고는 얻어낸 사용권이다. 세상에 이런 법도 있다. 전원개발촉진법이라고. 조까라마이신이다, 나는 우편물 수령도 하지 않았다.
나무심기를 마친 우리는 걸어서 산막으로 간다. 부북면 어르신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올라 한전과 맞선 산막이다. 나는 이번 행사를 기획하면서 이곳으로 참가자들을 꼭 한번 데려오고 싶었다. 나를 가장 크게 각성시킨 곳, 어쩌면 이 싸움의 의미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이 바로 이 산막이고, 거기 계신 어르신들이었다. 날마다 마을 경로당에서 뜨끈한 방바닥에 등을 지지셔야 할 어른들이 해발 300미터가 넘는 이곳으로 올라오시니, 전망도 좋고, 공기도 좋지만, 이게 대체 무슨 꼴이냐. 간장, 식용유, 후라이팬, 커피, 호박죽, 떡, 나무보일러의 연기가 피어오르는 컴컴한 산막 안에서 호물호물 뜯어 잡숫는 그 모습들이 애처롭다. 어르신들 앉으신 자리 앞에 우리가 모여 앉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청해듣는다. 그들의 증언을 들으며 사람들은 눈물을 흘린다. 아픈 무릎을 끌며 오르내리던 나날의 고통들, 그들이 겪었던 모욕, 모진 욕설들, 제발 이렇게 살다가 죽을 수 있도록, 저 철탑만은 들어오게 하지 말아 달라는 호소, 살 만큼 산 내가 더 무엇을 바라겠냐고,
다들 눈물바람이다. 이 야만 앞에서 그래도 내가 인간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이 눈물인 것을. 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대속하고 있는 세상의 죄, 너와 내가 나눠가진 죄, 자기도취와 자기애에 젖어 안으로만 침잠해온 우리를 후려치는 죄없는 이들의 고통.
정리집회장으로 돌아오는 산길은 다들 숙연하다. 피로하지만, 이 산길을 걷는 시간은 생각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 1박2일의 일정을 마무리하는 정리집회 자리, 화악산 중턱 주차장이다. 녹색당 비례대표 기호 1번 이유진 후보와 진보신당의 환경 실무자 장세명 님께 한 말씀씩 부탁했다. 이 분들이 가장 먼저 우리의 손을 잡아주었다. 수많은 탈핵 단체들이 있었다. 그곳 상층부들의 인식은 대체로 이런 것 같았다. 탈핵 희망버스, 좋은 일이다, 그러나 실무적으로 도울 여력은 없다, 그러니 일단 한 번 거기서 준비해보라는 것이다.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속상했다. 결국 3.10 후쿠시마 1주기 행사를 치르고, 총선 후보자들의 정책을 점검하고 압박하는 것이다. 나는 말하고 싶다. 싸우라! 현장에서 함께 싸우라!! 국회는 그 다음의 일이다. 언론사의 보도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이 현실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우리가 어떻게 이 현실과 부딪치고 있는가, 바로 그 구체성이다. 직접 고통의 손을 잡으라는 것이다. 왜 현대의 손들, 의회와 미디어의 손을 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녹색당 비례대표 1번으로 선출된 이유진 후보는 이 행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했다. 내가 관찰하기로도 그는 이틀 동안 내내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 실감을 바탕으로 탈핵을 위해 송전탑 백지화를 위해 온 힘을 다해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그 다짐은 참으로 진솔하게 다가왔다. 행사가 끝난 뒤 부북면 주민들이 후일담으로 이번 선거에 전국구는 꼭 녹색당 찍어야겠다고, 녹색당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고 이야기하신다. 녹색정치란, 바로 이런 게 아니겠는가.
가톨릭 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에서 오신 수녀님께 발언을 부탁드렸다. 차분하고 조용한 그분의 말씀에 어느새 화악산 중턱 정리집회장이 숙연해진다. ‘어두운 세상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사랑이 바탕이 되었으면 한다’는 한 말씀을 가슴에 새겼다. 사회를 보던 내가 그 말씀 뒤에 한마디 더 보탰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다. 우리가 이 자리에 온 것은 강도 만난 이를 돕기 위한 마음이겠지만, 그러나 돌이켜보면 우리들 자신이 바로 강도 만난 바로 그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시대의 어둡고 참혹한 생존 방식이 그러하다는 것. 그러므로 이 자리에 우리가 함께 하는 것은 강도 만난 이가 강도 만난 이를 돕는 일이다. 결국 이 모든 일들은 우리들 자신을 돕는 일이 아니겠느냐고, 같지도 않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대학생나눔문화에서 온 젊은 대학생들이 율동을 보여주기 위해 나왔다. 중앙에 선 여학생이 마이크를 잡았는데, 눈물부터 흘린다. 아까 산막에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잔상이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아닌게 아니라 어제 오늘, 사람들은 참 많이도 운다. 눈물이라.. 김현승의 시 한소절이 떠오른다.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우리에겐 눈물 밖에 없는 것이다. 정직한 눈물, 그러나 금세 말라버릴 눈물, 그러나 가슴 속에는 계속 흐르고 있을 눈물, 언젠가 기억을 뚫고 다시 반추하게 될 눈물, 우리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마지막 순서다. 나는 이틀간 행사를 하면서 한 번도 눈물을 글썽이거나 하지 않았다. 그럴 만한 심적인 여유가 없기도 했다. 그런데 헤어지는 시간이 다가오니,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사실, 지난 이틀은 조증 환자처럼 들뜬 상태였다. 그러나,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생각하니 나도 밀양식구들도 마음이 외로워진다. 돌아가시더라도, 이곳 밀양에서 만난 할머니들을 생각해 달라고 말하면서 나도 목이 메었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 주민들도 너른마당 식구들도 비슷한 마음인지 다들 눈시울이 붉다. 주민대책위가 마련한 따뜻한 주먹밥을 나누어 주면서 주민들이 우신다. 먼 길을 달려온 이들에 대한 고마움, 그러나 이들이 곧 떠날 거라는 실감에서 오는 외로움, 나도 여기저기서 온 벗들과 포옹을 하였다. 멀리서 참 많이들 왔다. 고맙다. 이 마음들, 잊지 않으리라.
이 싸움은 아직 진행중이다. 나도 일념이 있다. 우리는 자신감을 얻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싸울 것이다. 지난 시간 싸우면서 우리는 사람으로 살아있었다. 그 시간들이 우리를 앞으로도 살아가게 하리라.
첫댓글 너무 마음이 아프고 코끝이 시림니다. 어르신 명복을 빌며 투쟁없는 하늘나라에서 고이 영면하소서~~! 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