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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년 몽골군의 도륙, 125년간 몽골 고려 전쟁(5-1)
『고려사』에 따르면, 몽골군이 1231년 8월 29일(음)에 고려를 침공했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1231년 8월 29일(음) 몽고(蒙古) 원수(元帥) 살례탑(撒禮塔, 살리타이)이 함신진(咸新鎭)을 포위하고 철주(鐵州)를 도륙하였다."
"1231년 9월 2일(음) 재상(宰相)들이 최우(崔瑀)의 집에 모여 삼군(三軍)을 출동시켜 몽고군을 방어할 것을 의논하였으며, 대장군(大將軍) 채송년(蔡松年)을 북계병마사(北界兵馬使)로 삼고 여러 도(道)에서 군사를 징발하였다."
"1231년 9월 3일(음) 몽고군이 귀주성(龜州城)을 포위하였으나 (고려군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1231년 9월 10일(음) 몽고군이 서경성(西京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1231년 9월 14일(음) 몽고군이 황주(黃州)와 봉주(鳳州)에 도착하자 황주(黃州)와 봉주(鳳州)의 수령은 백성들을 이끌고 철도(鐵島)로 입보(入保)하였다."
"1231년 9월 20일(음) 북계(北界)에서 몽고군이 용주(龍州)를 포위하자 성 안에서는 항복을 청하였으며, 부사(副使) 위소(魏玿)는 포로가 되었다는 급보를 알려왔다."
"1231년 9월 29일(음) 몽고군이 선주(宣州)와 곽주(郭州)를 함락시켰다."
즉, 몽골군이 서하와 금을 공격한 후, 고려를 침공한 경로를 [그림 1]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그림 1] 몽골의 침략 추정경로
징기스칸은 1206년에 몽골의 대칸으로 추대되었는데, 1202년부터 서하를 6번이나 공격한 끝에 1209년에 몽골에 복속시켰다.
그후, 징기스칸은 1211년에 금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즉, 몽골군은 카라코룸에서 바로 남쪽으로 내려와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금의 건국지(상경)로 추정할 수 있는 현재의 산서성 대동시를 공격하였다.
이어서 몽골은 1215년에 금의 수도 중도를 불태워버렸는데, 그 위치는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그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런데 서하가 몽골의 서방 정복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거절하자, 몽골은 1227년에 서하의 백성을 잔혹하게 말살시켜 버렸다. 그 와중에 징기스칸은 병에 걸려 죽었다.
그 후, 몽골군는 1231년에 고려를 침공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서 『고려사』에 따르면, 몽골과 고려의 전쟁은 아래와 같이 전개되었다.
"1231년 10월 1일(음) 몽고인 2인이 첩(牒)을 가지고 평주(平州)에 도착하자 평주에서는 그들을 가두고 보고하였다.
조정에서 논의가 분분하였는데, 혹은 죽여야 한다고 하고, 혹은 그 연유를 묻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김효인(金孝印)을 보내 물었다.
그 첩(牒)에서 말하기를, '우리 병사들이 처음 함신진(咸新鎭)에 이르렀을 때 (우리를) 맞이하여 항복한 자는 모두 죽이지 않았다. 너희 나라가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끝내 돌아가지 않을 것이고, 항복한다면 동진(東眞)쪽을 향해 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1231년 10월 20일(음) 낭장(郞將) 지의심(池義深)이 평주(平州)에서 수감하고 있던 몽고인 2인을 압송하여 개경에 도착하였는데, 한사람은 몽고인이고 한 사람은 여진인이었다. 이때부터 국가에서는 비로소 몽고군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몽고군이 구주(龜州)를 공격하여 성곽 200여 칸을 파괴하였으나 구주 사람들이 바로바로 수리하고 쌓아서 (성을) 지켰다."
"1231년 10월 21일(음) 몽고병이 여러 성에서 항복한 (고려) 병졸들을 이끌고 (구주)성을 포위하고 신서문(新西問)의 요해처(要害處) 28곳에 포(砲)를 설치하여 성을 공격하였다.
또 성곽 50칸을 부수고 성을 넘어 들어와 교전하자 구주 사람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크게 물리쳤다.
이 날 3군(三軍)이 안북성(安北城)에 주둔하였는데, 몽고군이 성 아래에 이르러 싸움을 걸었다. 3군은 나가서 싸우려고 하지 않았는데, 후군진주(後軍陣主) 태집성(太集成)이 강제로 나가 싸우게 하여서 3군이 나가서 성 밖에 진을 치게 되었으나, 진주(陣主)와 지병마(知兵馬) 등은 모두 (성 밖으로) 나오지 않고 성에 올라가 바라만 보자 태집성 또한 도로 성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3군(三軍)이 곧 (몽고와) 싸우게 되었는데 몽고병이 모두 말에서 내려 부대를 나누어 대열을 이루고는 기병(騎兵)이 우리 우군(右軍)에게 돌격하였다. 화살이 비처럼 쏟아져 내려 우군이 혼란에 빠지자 중군(中軍)이 우군을 구하다가 중군 또한 혼란에 빠져 다투어 성으로 들어갔다.
몽고군이 승세를 타고 우리 군대를 추격하니 죽고 다친 자가 절반이 넘었고 장군(將軍) 이문언(李彦文)과 정웅(鄭雄), 우군판관(右軍判官) 채식(蔡識) 등이 죽었다."
"1231년 10월 29일(음) 동계(東界) 화주(和州)에서 급보를 보내 이르기를, '동진(東眞)의 병사들이 화주에 쳐들어와 선덕도령(宣德都領)을 사로잡아갔습니다.'라고 하였다."
"1231년 11월 11일(음) 북계(北界)의 분어대사(分御臺史) 민희(閔曦)가 돌아와 아뢰기를, '제가 병마판관 원외랑(兵馬判官 員外郞) 최계년(崔桂年)과 함께 3군(三軍)의 지휘를 받아 몽고군에게 가서 음식을 주고 왔습니다.
(몽고군에) 원수(元帥)가 한 명 있는데 스스로를 권황제(權皇帝)라 칭하며 이름은 살례탑(撒禮塔, 살리타이)이라고 합니다. 가죽 천막(氈廬)에 앉았는데 수놓은 비단으로 장식하였고, 부인들을 좌우에 열을 지어 두고 있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너희 나라가 굳게 지킬 수 있으면 굳게 지키고, 투항하려면 투항하고, 맞서 싸울 수 있으면 맞서 싸우되, 속히 결정하라고 하였습니다. 네 관직은 무엇인가라고 묻길래, 분대관인(分臺官人)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너는 낮은 관인이니 높은 관인이 속히 와서 항복하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1231년 11월 22일(음) 몽고군이 평주(平州)에서 그들의 (문서) 첩(牒)을 가진 자를 가두었다고 하여 먼저 평주를 섬멸하려고 하였다."
"1231년 11월 28일(음) (몽고군이) 날이 밝기 전에 갑자기 성 안으로 들이닥쳐 평주(平州)의 관리를 죽이고 성을 도륙하였는데, 민가를 모두 불태워서 닭과 개 한 마리도 남지 않고 텅 비었다."
"1231년 11월 29일(음) 몽고군이 평주(平州)에서 선의문(宣義門) 밖까지 와서 진을 쳤는데, 포도(蒲桃) 원수(元帥)는 금교(金郊)에 진을 쳤고, 적거(迪巨) 원수(元帥)는 오산(吾山)에 진을 쳤으며, 당고(唐古) 원수(元帥)는 포리(蒲里)에 진을 쳤다.
(몽고의) 선봉이 예성강(禮成江)에 도착하여 집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이니 수를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여서 경성(京城, 개경)사람들이 놀라고 동요하여 인심이 흉흉하였다."
"1231년 12월 1일(음) 몽고군이 개경[京城] 4문 밖에 진을 쳤으며 또한 흥왕사(興王寺)를 공격하였다."
"1231년 12월 2일(음) 어사(御史) 민희(閔曦)를 파견하여 (몽고군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화친을 맺었다.
다음날 민희가 다시 몽고군 주둔지에 가서 몽고 사신 2인, 하절사(下節) 20인과 함께 왔다. 지합문사(知閤門事) 최공(崔珙)을 접반사(接伴使)로 임명하여 의장(儀仗)을 갖추게 명하였더니, 선의문(宣義門) 밖으로 나가 (몽고 사신을) 맞이하여 선은관(宣恩館)으로 들어왔다.
그 때 살례탑(撒禮塔, 살리타이)은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역시 사신 3인을 보내와 강화를 설득하였다.
다음날 (몽고 사신들이) 궁궐로 찾아오자 왕은 대관전(大觀殿) 뜰로 내려와 북쪽을 향해 서서 사신을 맞이하였으나, 몽고 사신들이 만류하였으므로 왕은 그제야 남쪽을 향해 서서 (사신과) 절하는 절차를 마쳤다.
몽고 사신은 털로 만든 옷과 관을 썼으며 활과 칼을 차고 있었으므로, 우리 조정에서 자주색 비단으로 만든 도포와 허리띠를 주고 옷을 갈아입도록 하였지만, 몽고 사신은 따르지 않고 다만 겉에 걸치기만 하였다. 왕은 잔치를 베풀어 그들을 위로하였다.(중략)"
상기한 기록에 나타나는 평주(平州)는 『고려사』지리지에 따르면, 서해도에 속하는 지명이다. 즉,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인근지역으로서 현재의 황하인근 지역이다.
살례탑(撒禮塔, 살리타이)이 몽골군을 이끌고 온 침투로는 북계 방향이 분명한데, 평주(平州)가 나타나니 지명의 혼선이 있는 것 같다.
1231년 당시는 몽골군이 금의 중도를 함락시킨 후이기 때문에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금의 중도였던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 지역에서 동쪽으로 침투할 수도 있는데,
그 당시 산서성 남부지역에서 하남성 북부지역으로 침투하여 평주(平州)를 공격한 다른 몽골군이 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1231년 12월 2일(음) 몰골과 고려간에 화친을 맺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