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번연, 『죄인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 규장, 2009
이 책은 존 번연(1628-1688)의 솔직한 고백록이다. 이 책의 내용은 3단계로 기술되었다. 먼저 회심하기 전에 죄 가운데 빠져 지내던 모습이 가감없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다음으로는 회심의 과정이 진술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회심 후에 겪은 시련과 결단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이 마지막 단계에서 두려운 시험의 물결에 휩쓸려 약 2년 반의 세월을 괴로워하다가 자신이 그리스도를 팔았다는 자책감에서 절정에 이르지만, 번연은 이 시험을 뚫고 일어나 마침내 은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 그 확신은 성도들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감격적인 이상으로 표현된다.
번연의 초기 사역과 수감생활에 관한 이야기로 끝을 맺는 이 책은, 12년간의 수감생활(1660-1672년) 중 1666년에 기록되었다(그는 영국국교회 성직자 외에는 설교할 수 없다는 법조항을 어겼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 영국국교회 신앙에 반기를 든 비국교도라며 핍박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이 기록된지 12년 후인 1678년에 그의 불후의 명작 <천로역정>이 출판되었다.
<천로역정>은 알레고리의 가면을 쓰고 <죄인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의 플롯을 재현한 작품인 것이다. <죄인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에 묘사된 환상의 순간들과 낙심의 기간들이 <천로역정>에서는 비유적인 용어들로 묘사된다. 이 책에 언급된 ‘벽에 난 좁은 틈’은 <천로역정>에서 무거운 짐을 진 크리스천이 통과해야 하는 ‘좁은 문’이 되고, 번연 자신의 ‘좌절’이라는 은유적 사슬이 ‘절망 거인’과 ‘의심의 성’으로 전환되며, 번연이 베드포드 행정관들 앞에서 받은 재판은 ‘크리스천’과 ‘믿음’이 ‘허영의 시장’에서 ‘선을 증오해 검사’에게 받은 재판으로 길이 남는다. 그 자체로도 걸작인 <죄인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는 <천로역정>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서론이다. 이 두 책은 자매편이라고 할 수 있다.
300여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진정한 회심의 길로 이끈 이 책이 당신의 회심 신앙의 기반을 굳건히 다져줄 것이다. 아무쪼록 이 책을 통해 죄인 괴수조차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압도적인 은혜에 깊이 잠기기를 바란다. (이상은 규장 편집국장 김응국 목사의 글)
존 번연은 그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전시장’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1:27,28)라는 말씀처럼, 번연은 겨우 읽기와 쓰기만을 배운 가난한 땜장이 신분일 때 부름을 받았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욕설과 거짓말과 신성모독과 일락을 즐기는 것으로 허송세월하던 번연을 불러 수많은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셨다. 정말 죄인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가 임한 것이다. 그는 평생 치열하게 회심신앙을 추구했다. 자신의 영적 자서전이요 고백록 격인 <죄인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진정한 회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번연은 회심에서 천성에 이르는 과정을 결코 평탄한 과정이 아니라 유혹과 시련과 핍박을 이겨나가야 하는 고투의 과정으로 본다. 이 신앙은 온실의 화초처럼 신앙생활하는 오늘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참된 회심신앙이다.
- 同書, 겉표지와 서문에서
나를 부르실까? / 존 번연
그 무렵, 나는 모세가 정결하거나 불결하다고 평가해놓은 짐승들에 관해서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 짐승들은 사람들의 표상이었다. 정결한 짐승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했지만, 불결한 짐승들은 ‘그 악한 자’(마귀)의 자식들을 의미했다. 그리고 정결한 짐승들이 새김질을 한다는 내용을 읽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함을 그 짐승들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다. 또한 그 짐승들은 굽이 갈라졌다. 나는 그 의미를 불경건한 사람들의 길에서 떠나야만 구원받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 부분을 좀 더 읽다가 만약 가축처럼 새김질을 하면서도 개처럼 발톱을 지닌 채 산다면, 혹은 돼지처럼 굽이 갈라졌지만 양처럼 새김질을 하지 않고 산다면 여전히 불결한 상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서 말하면서도 여전히 죄의 길을 걷는 사람은 ‘토끼’와 같고, 더러운 행실은 그쳤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여전히 모르는 사람은 ‘돼지’와 같다는 생각도 했다. 믿음의 말씀이 없다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구원받을 길이 없는 것이다(신14장참조).
그후 말씀을 읽으면서 깨달은 바가 있었다. 내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화롭게 되려면 먼저 이 세상에서 그분의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말씀과 의에 참여하고, 성령의 위로와 첫 열매를 받아 누리고, 이 땅에서부터 하늘에 속한 일들에 힘써서 장차 하늘에 올라가 받을 안식과 영광의 집을 미리 준비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깨우침이 내게는 여간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깨우쳤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더욱이 내가 부르심을 받지 못했으면 어쩌나 두려웠던 것이다. 만약 내가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면 그런 깨우침이 무슨 소용이 있을는지 생각했다. 주변에 회심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내 눈에 얼마나 귀하고 사랑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들은 환히 빛났다. 천국의 큼직한 인을 받은 사람들 같았다. 그들에게 줄로 재준 구역이 실로 아름다웠고, 그들의 기업이 실로 좋았다(시16:6). 그러나 나를 아프게 한 구절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막3:13). 예수님이 원하는 자들을 부르신다는 이 구절이 나를 쇠잔하고 두렵게 했으나, 그러면서도 내 영혼에 불을 지폈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원하는 자들을 친히 부르시는 분이므로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주님은 내가 이런 상태로 여러 달을 지내도록 놔두신 채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으셨다. 그렇게 거룩하고 천상적인 부르심에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참으로 오랫동안 수없이 탄식하며 간구하던 내게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찾아왔다. “내가 전에는 ‘그들의 피 흘린 죄를 사해주지 아니하였거니와 사해주리니’(NKJV) 이는 나 여호와가 시온에 거함이니라”(욜3:21). 나는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더 참고 기다리라는 뜻에서 해주신 말씀이며, 내가 아직은 회심하지 못했으나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께로 회심할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이 말씀이 암시해 준다고 생각했다.
- 존 번연, 『죄인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 pp 56-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