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 한글 전용법 제정 운동
한글 학회는 1948년 9월 26일 일요일에 긴급 이사회를 열고,
헌법 조문을 한글로 쓰기로 결정한 국회의원들을 초청하여, 한글 전용 법률화에 대한 의견 교환을 하기 위한 다과회를 오는 10월 1일 오후 5시 15분, 안국동에 있는 풍문 여자 중학교 강당에서 연다.<주: '한글 학회' 이사회 회의록에서 베낌.>는 결의안을 가결하고, 10월 1일에 많은 국회의원과 학회 이사 전원과 회원 다수가 참석한 자리에서 다과를 나누면서 '한글 전용 법률화'에 관한 의견들을 교환하였다.
이보다 앞서, 한글 학회에서는 1948년 7월 18일 3시에 열린 이사회에서 최현배로부터 "한글을 국자로 정하고, 일반 공용문서를 한글로 할 것을 법률로 정하도록 건의하자"고 제안되자 만장일치로 가결 지어, 건의서 기초 위원으로 장지영 이사를 선정하는 한편, 또 각 일간 신문에 촉구 성명서를 내기로 하고, 그 기초 위원으로는 이희승을 선정하였다.
그 후에 1948년 7월 24일, 다음과 같은 한글 전용법의 제정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아래와 같이 발표하는 한편, "새 나라의 국회가 헌법 원본을 한글로 공포한 것은 자주 정신의 발로라."고 하며, 국회 문교 후생 위원회에 '한글 전용법 제정 건의문'을 제출하였다.
한글 전용법 제정 건의문
새 나라의 건설 대업이 바야흐로 본 궤도에 오르게 된 중대한 이 시기에 임하여, 우리의 할 일은 실로 백 가지나 천 가지만이 아니다. 그러나, 그 근본정신은 오직 하나가 있을 뿐이요, 또 하나가 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니, 이는 곧 태산 교악과 같이 움직임이 없는 '자주 정신'을 앞세우고 나가는 일이다.
과거 약 천여 년 동안, 우리는 남의 문화의 종노릇을 하고, 남의 정신에 사로잡히어, 제 역사가 혁혁하건만, 이를 덮어두었고, 제 문화가 찬란하건만 이를 묻어 버렸었다. 이것이 인습이 되고 고질이 되어, 남의 버릇을 흉내내면서, 부끄러운 줄을 모르며, 남의 장단에 춤을 추면서 오히려 자랑으로 알게까지 됨에 이르러 버린다면, 실로 보람있는 앞날을 기약할 수 없으며, 만대의 자손에게 노예의 굴레를 전하여 주는 민족적 반역 대죄를 면할 길이 영원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은 과연 그렇게 마비되었을까? 아니다. 먼지에 쌓인 거울이요, 구름에 덮인 태양이다. 닦으면 반드시 밝아질 것이요, 구름을 헤치면 다시 명랑해질 것이다. 과연이다. 참으로 과연이다. 이번 국회에서 공포한 새 헌법의 원본을 국문으로 기록한 것은 곧 우리 문화가 어엿함을 확인함이요, 우리 정신이 새로워짐을 증명하는 것이다. '훈민정음'의 창제를 자주 정신의 발로라고 한다면, 국문 헌법의 공포는 자주 정신의 부흥을 뜻한 것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문화와 정신을 부흥시키기 위한 노력과 공로는 오로지 이백의 국회의원의 민족적 자주 정신에 말미암은 것이매, 만강의 감사를 드리는 동시에 다른 모든 국사도 이와 같은 정신으로 의정할 것을 믿고 생각할 때, 우리 민족의 광명한 앞날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여, 마음에 든든함을 가득히 느끼는 바이다.
앞으로, 일반 법문을 전부 국문으로 제정하고, 모든 공용문서와 성명도 지명도 단연 우리 글자로 사용하도록 시급히 법적으로 정할 것을 믿고 바라며, 특히 이 정신의 실현이 촉진 완수되기 위하여, 앞으로 문교 행정을 담당할 부문에는 더욱 이 국문 헌법 공포의 정신을, 여실히 또 원만히 살리어 나가기에 확호한 신념과 역량이 구비한 인사가 전적으로 배치되어야 할 것을 또한 믿고 바란다.
이에, 본 학회는 감히 삼십 년 동안 오직 한 마음, 우리글과 우리말을 부둥켜안고 지키기에 온전히 바치어 온 붉은 피와 뜨거운 정성을 가지고, 이제 삼천만 형제 자매로 더불어, 우리 민족 문화의 급속한 향상과 국가 만년의 영원한 발전을 위하여, 이 자주 정신의 실천 궁행에 굳은 결의로써 일치 매진하도록 전력할 것을 선명하는 동시에, 또, 감히 책임 당국에 대하여, 이 거족적 행진 전도에 조금도 장애가 없도록, 길 인도를 잘 하여 주기를 거듭 부탁하는 바이다.
1948년 7월 24일
조선어 학회
(나) '한글 전용법' 제정
우리 한글 학회가 '한글 전용법'의 제정을 위하여 '한글 전용 법률화에 대한 의견 교환 다과회'와 '한글 전용법 제정 촉구 성명서'의 발표 및 '한글 전용법 제정 촉구 건의서'의 발표 등으로 말미암아, 1948년 9월 29일(수) 국회 의원 권태희 외 138명이 연시한 '한글 전용법안'을 국회 문교 후생 위원회에 제출하게 되었다. 문교 후생 위원회는 이튿날, 9월 30일(목)에 다음과 같은 법률안을 토의 끝에 성안하였다.
한글 전용법 (안)
대한민국의 공문서는 한글로 쓴다.
부 칙
이 법은 공포한 날부터 시행한다.
다음 날(10. 1. 금) 권태희 의원의 긴급 동의로 국회 제78차 회의에 상정되었다.
국회 제78차 회의는 '한글 전용법(안)'을 놓고, 찬성(권태희 김장렬 황두연 등 다수)과 반대(최운교 박해정 등 몇 명)의 양론이 맹렬히 벌어졌었다. 이때에 조헌영 의원이 법조문 주문 다음에 “다만, 얼마 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라는 단서를 붙이자는 수정안이 제안되어, 그 수정안이 재석 131명 중 86대 22로 가결되었다. 그 가결된 '한글 전용법'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한글 전용법(법률 제 6호)
대한 민국의 공용 문서는 한글로 쓴다. 다만, 얼마 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
부 칙
이 법은 공포한 날부터 시행한다.
한글 학회는 국회 제78차 회의가 한글 전용법을 통과시킴을 보자, 한글 전용법 통과된 그 날(10. 1.) 오후 7시에 긴급 임시 이사회를 열고, 역사적인 한글 전용법의 통과의 뜻을 널리 펴기로 하고,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사항을 결의하였다.
① 국회에서 한글 전용에 관한 법률(안)이 131명 중 86대 22표로 가결되어, 이의 실제 효과의 촉진을 위하여 성명서를 작성하고, 각 언론 기관을 예비적으로 예방하기로 하다.
② 각 언론 기관을 예방할 위원으로 장지영 이중화 최현배를 선출하다.
또, 역사적인 한글 전용법을 무의미하게 공포하는 것보다 널리 그 제정의 뜻을 알리기 위해서 성명서의 발표와 동시에 대통령에게 한글 전용법 발표식을 한글날에 거행하도록 건의서를 제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성명서는 다음과 같다.
한글 전용법 통과 실행 성명서
우리 한글을 쓰도록 하는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민족적으로 우리 문화의 향상을 위하여, 그지없이 반가운 일이다. 이를 계기로 하여, 전국적으로 각자가 분발 노력하여 실행하도록 하여야 하려니와, 우선 정부에서부터 하나의 법령으로서 그칠 것이 아니라, 급속히 실행하도록 영단이 있기를 바라 마지않으며, 특히 각 문화 언론 기관에서 솔선하여 이를 실행하여 주기 바라는 바이다.
(다) 한글 전용법 공포
정부는 한글 학회의 건의서를 받아들여, 10월 9일 한글날에 국회 의원과 관민 학생 다수가 참석한 자리에서, '한글 전용법(법률 제6호) 공포식'을 성대히 베풀었다.
그리고, 10월 1일의 이사회 결의대로, 장지영 이중화 최현배 3인이 언론 기관을 예방하였던 바, 방문 언론 기관마다 사설과 논설 또는 기사 기타 방법으로 '한글 전용법 제정의 뜻'을 잘 보도하여 주었다.
이 때 3인이 심방 했던 언론 기관은 다음과 같다.
조선 일보 독립 신문 서울 신문 동아 일보 한성 신문
평화 일보 경향 신문 국제 신문 대한 일보 자유 신문
현대 일보 민중 일보 대동 신문 민주 일보 새한 일보
조선 통신 합동 통신 공립 통신
(4) 한글전용 촉진 운동 단체 조직
한글 전용법이 공포되었으나, 한글 학회는 일반 사회생활에서 한글쓰기 운동에 힘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글만 쓰기 반대하는 일이 자꾸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글 학회는 한글만 쓰기를 반대하는 일이 일어나기만 하면, 때로는 홀로 또는 여러 단체들과 연합으로, 꾸준히 한글 전용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그 대강은 다음과 같다.
(가) '한글 전용 촉진회'의 창립
한글 학회는 한글 전용법이 발표된 지 1년이 넘도록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어서 한글 전용의 충실한 실천을 맡아 행할 주도할 기관과 단체가 없는 탓으로 보고, 1949년 5월 25일(수) 이사회에서 한글 전용법 실천에 적극 대응할 민간단체로서, 또, 한글 학회와의 협력 단체로 '한글 전용 촉진회'를 결성하기로 가결하고, 1949년 6월 12일 드디어 한글 전용 촉진에 뜻을 둔 인사들이 모여서 창립하였다. 이 회의 창립 목적은 다음과 같다.
ㄱ. 국어 교육 및 문화의 향상 발전에 관한 조사 연구
ㄴ. 한글의 보급 및 전용, 국어 정화에 관한 실천 운동
ㄷ. 한글 지도를 위한 강연회 강습회의 계획
ㄹ. 기관지 및 출판물의 간행
ㅁ. 그 밖에 본 회의 목적을 이룸에 필요한 일
이렇게 창립된 한글 전용 촉진회는 출발부터 재정난과 지방 조직의 미비로 사업 추진의 곤란을 받게 되어, 1949년 6월 26일(일) 오후 한글 학회 회원들을 중심 하여, 교육계 문화계 관공서 법조계 등 각계 각층의 한글 동지를 총망라하여, 회세 확장을 위한 임시 총회를 열고, 임원 진을 강화하였으며, 여기에 한글 학회는 촉진회의 활발한 운동 전개를 위해 촉진회 사업 기금으로 50만 원을 빌려주어, 한글 전용 촉진 운동을 크게 전개하게 하였다. 이 모임 부위원장에 이희승이 들어있다.
위 원 장: 최 현 배
부위원장: 정 인 승 이 희 승
총무부장: 정 태 진 사업부장: 김 진 억
조사부장: 유 열 보급부장: 옥 치 정
감 사: 안 창 화 공 병 우
위 원: 오 천 석 권 태 희 주 기 용 정 인 승 이 희 승
김 윤 경 정 태 진 김 원 표 김 진 억 권 승 욱
안 석 제 이 강 로 최 창 식 유 제 한 안 창 환
김 선 기 강 병 주 박 태 윤 이 홍 훈 이 강 래
공 병 우 옥 치 정 한 갑 수 유 열 서 형 호
최 봉 칙 윤 명 섭 조 진 만 이 창 우 안 신 영
박 창 해 정 열 모 정 희 준 윤 복 영 박 병 호
백 남 규 이 원 혁 조 병 희 여 상 현 김 정 혁
이 중 화 장 지 영 최 현 배
경상북도 지회 경상남도 지회 전라북도 지회 목포 분회 군산 분회
(지회와 분회는 1949년 7월 현재 조직된 것임.)
'한글 전용 촉진회'는 한글 전용뿐만 아니라, 국어 교육 강습회를 열어, 한글 전용의 생활화를 위해 노력하였는데, 1949년 여름에는 한글 학회 회원의 응원을 얻어, 서울 부산 전주 대구 목포 광주(전남) 진주 김포 광주(경기) 청주 기타 각지에서 열었다.
한편, 한글 학회는 행정 당국과 힘을 함께 하여, 우리말 도로 찾기 할 말을 정하였는데, 그에 발맞추어서 '한글 전용 촉진회'는 각 행정 기관을 통해서 행정상 협력을 얻기로 한 결과 많은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특히 경상 남도 양성봉 지사 같은 이는 한글 전용 생활과 강습 개최의 모범적 후원자라 할만큼 활동이 컸었다. 그는 "3일 한으로 간판이나 문패들을 국문으로 고칠 것, 공문서는 전부 국문으로 쓸 것"을 행정력을 통해 적극적으로 표시하였다. 또, 강원도와 전라 남도에서도 전국적인 모범을 보였으나, 자세한 기록이 없어 여기에 밝히지 못함이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서울 본부에서는 1949년 '한글날'에, 시내 각 대학의 학생들의 호응을 얻어, 가두 계몽 방송과 계몽 전단을 뿌리고, 전 시내 골목마다 다니면서, 음식점의 왜식 이름의 차림표(메뉴)들을 '우리말 도로 찾기'에 따라, '스시 우동 스끼야끼 소바 간즈메 오뎅'을 '초밥 가락국수 전골 모밀국수 통조림 꼬치안주' 등으로 갈아 써 붙여 주는 등,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이 때 한글 학회 부설인 '세종 중등 국어 교사 양성소(초급 대학 과정)'의 학생들은 전원이 참가하여, 눈부신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949년 11월 5일 국회에서는 25명의 긴급 결의안으로써 '한자 사용안'이 제출되어 토의되었고, 1950년 5월 국무회의에서도 이 한자 쓰기에 관한 토의를 하게 되었다. 이때 당시의 문교부 장관 안호상의 강경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각의는 내무부장관 김효석과 총무처의 주장을 채택하였다.
이로써, 총무처는 "경상 남도의 한글만 쓰는 공문서와 전라 북도의 순 한글로 내는 보도들이 좋지 않으니, 그래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였을 뿐만 아니라, 내무부 장관 김효석은 한글 전용법을 버리고, "각의에 따라 한자를 섞어 쓰기로 하라."는 통첩을 내려, 관공서 관계의 한글 전용 촉진 운동은 중단 상태에 이르렀다.
이런 혼돈한 상태에서 6 25사변이 터지자 모든 문화 운동이 마비되었었는데, 촉진회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더구나, 부산 지부 등지는 한때 국군이 후퇴하게 된 불만과 정부의 부산 이전 등에 대한 공산당에 대한 적개심에서, "한글 전용 운동가는 빨갱이라."는 과격한 말이 나돌아, 많은 동지들이 한글 운동에 많은 지장을 받았다. 게다가 6 25 전쟁으로 각급 학교가 정규 수업도 할 수 없게 되었고, 피난 학교는 여러 학교와 판잣집을 짓고, 통합 연합 수업을 하는 판에서 한글 문화 운동 단체들의 활동은 정지되고, 따라서 '한글 전용 촉진회'도 유명 무실한 단체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한글 전용 촉진회는 창립으로부터 6 25사변 때까지 짧은 기간이나마, 교과서의 한글만 쓰기, 공문서의 한글만 쓰기, 철도역의 한글만 쓰기,<주: 전국의 각 철도역의 구내(타는 곳)의 역 이름 표지판 글씨는 한갑수가 교통부 당국의 부탁으로 한글 글씨로 모두 써 주었다.> 음식점 차림표의 우리말 쓰기, 간판의 한글화와 우리말 쓰기 및 바른 맞춤법 쓰기 등 많은 실적을 쌓았었다. 또, 1948년 5월에는 교정부를 따로 두어서, 바른 국어 쓰기와 바른 맞춤법 쓰기를 위한 무료 봉사 활동을 하여, 당시 저술계와 출판계에서 많이 애용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