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이요,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신라 알지왕(閼智王)의 후예(後裔)에 왕자 주원(周元)이란 이가 있었는데, 강릉에 살았기 때문에 그의 자손들이 그 곳에 본적(本籍)을 두게 되었다. 그 뒤에 연(淵)과 태현(台鉉)이란 이가 있었는데 모두 고려의 시중(侍中) 벼슬을 하였다. 태현의 후손에 구주(久住)는 벼슬이 안주 목사(安州牧使)에 그쳤고, 그의 아들 겸간(謙侃)은 오위부장(五衛部將)에 그쳤고, 겸간의 아들 일성(日省)은 음사(陰仕)로 충순위(忠順衛)가 되었다. 일성이 선사 장씨(仙槎張氏)에게 장가들어 선덕 10년(1435, 세종17)에 한성에서 시습을 낳았다.
김시습은 나면서부터 천품이 남달리 특이하여 생후 8개월 만에 스스로 글을 알았다. 최치운(崔致雲)이 보고서 기이하게 여겨 ‘시습’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시습은 말은 더디었지만 정신은 영민하여 글을 볼 때 입으로는 읽지 못했으나 그 뜻은 모두 알았다. 세 살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고, 다섯 살에 《중용》과 《대학》에 통달하니 사람들이 신동(神童)이라 하였다. 명공(名公) 허조(許稠) 등이 많이 찾아와서 보았다.
장헌대왕(莊憲大王
세종)이 듣고 승정원으로 불러 시(詩)로 시험하니 과연 빨리 지으면서도 아름다웠다. 하교(下敎)하기를, “내가 친히 보고 싶으나 세속의 이목을 놀라게 할 듯하니, 그 가정에 권하여 드러내지 말고 잘 가르치도록 하게 하라. 그의 학업이 성취되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쓰리라.” 하고, 비단을 하사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때부터 그의 명성(名聲)이 온 나라에 떨쳐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다만 5세(五歲)라고만 불렀다. 시습은 임금의 권장(勸獎)을 받고 나서는 더욱 원대한 학업에 힘썼다. 경태(景泰
명 태종 연호) 연간에 영릉(英陵
세종대왕)과 현릉(顯陵
문종대왕)께서 차례로 훙거(薨去)하고 노산(魯山
단종)이 3년 만에 왕위를 손양(遜讓)하게 되었는데 이때 시습의 나이 21세였다. 삼각산에서 글을 읽다가 서울에서 온 사람으로부터 그 소식(
단종(端宗) 손위(遜位))을 듣고 즉시 문을 닫아걸고 3일 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다가 방성통곡(放聲痛哭)한 다음에 읽고 쓰던 서책을 모조리 불살라 버렸고, 광기(狂氣)를 일으켜 뒷간에 빠졌다가 도망하여 불문(佛門)에 의탁(依託)하고 승명(僧名)을 설잠(雪岑)이라 하였다. 그의 호는 여러 번 바뀌어 청한자(淸寒子)ㆍ동봉(東峰)ㆍ벽산청은(碧山淸隱)ㆍ췌세옹(贅世翁)ㆍ매월당(梅月堂)이라 하였다. 그의 생김은 못생기고 키는 작았으나 뛰어나게 호걸스럽고 재질이 영특하였으며 대범하고 솔직하여 위의(威儀)가 없으며 강직하여 남의 허물을 용납하지 못했다. 시세(時世)에 분개한 나머지 울분과 불평을 참지 못하였고, 세상을 따라 어울려 살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 드디어 육신에 구애받지 않고 세속 밖을 방랑하여 우리나라의 산천치고 그의 발자취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명승(名勝)을 만나면 곧 거기에 자리 잡았고, 고도(故都)를 찾아가면 반드시 발을 구르며 슬픈 노래를 불러 여러 날이 되도록 그치지 않았다. 총명하고 뛰어남이 남달라서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은 스승에게 배웠으나, 제자(諸子)와 백가서(百家書)는 배우지 않고도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번 기억하면 일생 동안 잊지 않았기 때문에 평일에 글을 읽거나 책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지만, 고금(古今)의 문적(文籍)을 꿰뚫지 않은 것이 없어 남의 질문을 받으면 응대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가슴에 가득 쌓인 불평과 강개의 용솟음을 풀어낼 길이 없어 세간의 풍월(風月)ㆍ운우(雲雨)ㆍ산림(山林)ㆍ천석(泉石)ㆍ궁실(宮室)ㆍ의식(衣食)ㆍ화과(花果)ㆍ조수(鳥獸)와 인사의 시비(是非)ㆍ득실(得失)ㆍ부귀(富貴)ㆍ빈천(貧賤)ㆍ사병(死病)ㆍ희로(喜怒)ㆍ애락(哀樂)이며, 나아가 성명(性命)ㆍ이기(理氣)ㆍ음양(陰陽)ㆍ유현(幽顯) 등에 이르기까지 유형ㆍ무형의 말할 수 있는 것이면 모두 문장으로 나타냈다. 때문에 그의 문장은 물이 솟구치고 바람이 부는 것과도 같고, 산이 감추고 바다가 머금은 것과도 같으며, 신이 선창하고 귀신이 답하는 것과도 같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실마리를 잡아내지 못하게 하였다. 성률(聲律)과 격조(格調)는 애써 마음을 쓰지 않아도 그 뛰어남은 사치(思致)가 고상하고 원대하여 상정(常情)을 멀리 빗나가고 벗어났으므로 문장이나 자질구레하게 다듬어 수식하는 자로서는 따라갈 바가 되지 못하였다.
도리에 대해서는 비록 완미(玩味)하여 그 진의를 구하는 것과 존양(存養)의 공부는 적었으나 탁월한 재능과 지혜로써 이해하여 횡담수론(橫談竪論)이 유가(儒家)의 본지를 크게 잃지 않았다. 선가(禪家)와 도가(道家)에 대해서도 대의(大意)를 알아서 그 병통의 근원을 탐구하였고, 선어(禪語
선문(禪門)의 말) 짓기를 좋아하여 그 현묘하고 은미한 뜻을 밝혀 천명하되 환해서 막힌 데가 없었기 때문에, 비록 학문에 깊은 노석(老釋)과 명승들도 그의 논봉(論鋒)에는 항거할 수 없었다. 그의 선천적으로 뛰어난 자질(資質)은 이것으로도 알 수 있다.
스스로 명성(名聲)이 너무 일찍부터 높았다고 생각하여 하루아침에 세상을 도피하여 마음은 유교에 있고 행동은 불교를 따라 시속(時俗) 사람들이 해괴하게 여겼다. 이에 일부러 광태(狂態)를 부려, 이성을 잃은 모양을 하여 진실을 가렸다. 학자(學子)로서 학문을 배우겠다고 하는 이가 있으면, 나무토막이나 돌멩이로 때려 보기도 하고, 또는 활을 당겨 쏘아 보려고도 하여 그의 성의를 시험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문하에 머물러 있는 이가 적었고, 또 산전(山田)을 개간하기 좋아하여 부귀한 집의 자식일지라도 김을 매고 거두어들이는 일을 시키는 등 매우 힘들게 하였기 때문에 끝까지 학업을 전수받는 자는 더욱 드물었다.
산에 가면 나무껍질을 벗겨 시를 쓰기를 좋아하였는데 한참 읊조리다가 문득 곡하고는 깎아 버리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종이에 써서 남에게 보이지 않고 물이나 불에 던져 버리기도 하였다. 또 어떤 때에는 나무를 조각(彫刻)하여 농부가 밭갈이하는 모습을 만들어 책상 옆에다 두고 종일토록 골똘히 들여다보다가 울면서 태워 버리기도 하였다. 때로는 심은 벼가 이삭이 패어 나와 탐스럽게 되었을 때에 취중(醉中)에 낫을 휘둘러 모조리 쓸어 눕히고, 그러고는 방성통곡하기도 하였다. 그 행동거지가 종잡을 수 없었으므로 크게 속세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산에 있을 때에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에 대한 서울의 소식을 물어보고, 자기를 통렬히 욕하는 이가 있더라고 하면 희색(喜色)이 드러나고, 거짓 미치광이로서 그 속에는 다른 배포가 있다고 하는 이가 있더라고 하면 바로 눈살을 찌푸리며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인망 없는 인물이 고위 고관에 임명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반드시 통곡하되,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어서 이 사람이 이 책임을 맡게 되었나.” 하였다.
당시의 유명한 대신(大臣)인 김수온(金守溫)과 서거정(徐居正)은 시습을 국사(國士)로 칭찬하였다. 거정이 막 조정에 들어가느라고 행인을 물리치고 바삐 조회에 들어가는데, 마침 시습이 남루한 옷에 새끼줄로 허리띠를 두르고 폐양자(蔽陽子
천한 사람이 쓰는 흰 대로 엮은 삿갓)를 쓴 채로 그 길을 지나다가 그 행차의 앞길을 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머리를 들고, “강중(剛中
서거정의 자)이 편안한가.” 하였다. 거정이 웃으며 대답하고 수레를 멈추어 이야기하니, 길 가던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서로 쳐다보았다. 조정의 벼슬아치 가운데 어떤 이가 시습에게 모욕을 당하고 분함을 참을 수가 없어, 거정을 보고 그 사실을 아뢰어 그의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하자 거정은 머리를 저으며, “그만두게. 미친 사람과 무얼 따질 필요가 있겠는가.
지금 이 사람을 벌하면 백대(百代) 후에 반드시 공의 이름에 누(累)가 되리라.” 하였다.김수온이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로서, “맹자가 양(梁)나라 혜왕(惠王)을 뵙다.[孟子見梁惠王]”라는 논제로 태학의 유생들을 시험하였다. 상사생(上舍生) 한 사람이 삼각산(三角山)에 있는 시습을 찾아가서, “괴애(乖崖
김수온의 별호(別號))가 장난을 좋아합니다. ‘맹자가 양나라 혜왕을 뵙다.’란 것이 어찌 논제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하였다. 시습이 웃으며, “이 늙은이가 아니면 이 논제를 내지 못할 것이리라.” 하더니, 붓을 들어 깜짝할 사이에 글을 지어서 주며, “자네가 지은 것이라 하고, 이 늙은이를 속여 보라.” 하여, 상사생이 그 말대로 하였으나, 수온이 끝까지 다 읽기도 전에 문득, “열경(悅卿)이 지금 서울 어느 산사(山寺)에 머물고 있는가?” 하였다. 상사생은 할 수 없이 사실대로 고백하였으니 이와 같이 알려져 있었다. 그 논지(論旨)의 대략은, “양나라 혜왕은 왕을 참칭하였으니 맹자가 만나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는데 지금은 그 글이 없어져 수집하지 못하였다.
김수온이 죽은 뒤에 그가 앉아서 죽었다고 말하는 이가 있었다. 그러나 시습은, “괴애는 욕심이 많으니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가령 있었다 하더라도 앉아서 죽는 것은 예가 아니다. 나는 다만 증자(曾子)의
역책(易簀)과 자로(子路)의
결영(結纓)을 들었을 뿐이요 다른 것은 알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수온이 부처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시습이 한 말이었을 것이다.
성화(成化) 17년(1481, 성종12)에 시습의 나이 47세였다. 갑자기 머리를 기르고 글을 지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제사를 지냈다. 그 글의 대략은, “순(舜)이 오교(五敎)를 베푸심에 부자유친(父子有親)이 으뜸이요, 죄가 3000가지나 되더라도 불효(不孝)가 가장 큽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살면서 양육(養育)하신 은혜를 저버리겠습니까. 어리석은 소자는 조상의 뒤를 이어 나가야 하는데 이단(異端
불교)에 빠졌다가 마지막에 와서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예전(禮典)을 상고하고, 성경(聖經)을 뒤져서 돌아가신 조상의 제사에 정성을 다하는 큰 의례를 강구하여 정하고, 청빈(淸貧)의 생활을 참작하여 간결하면서 정결하게 해서 정성을 다합니다. 한(漢)나라 무제(武帝)는 70세에 처음으로 전 승상(田丞相)의 말을 깨달았고, 원(元)나라 덕공(德公)은 100세에 비로소 허노재(許魯齋)의 풍화(風化)에 감화하였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안씨(安氏)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정을 이루었다. 벼슬을 하라고 권하는 이가 많았으나 시습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의연하게 세속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가기를 예전대로 하였다. 달밤을 만나면 이소경(離騷經)을 외우고, 외우고 나서는 반드시 통곡하였다. 어떤 때에는 송사하는 곳에 들어가서 굽은 것을 곧다고 궤변(詭辯)을 휘둘러 승소(勝訴)하게 하고 판결문이 나오면 크게 웃고는 찢어 버렸다. 장바닥 아이들과 어울려 거리를 쏘다니다 술에 취하여 길가에 드러눕기가 일쑤였다. 하루는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이 저자를 지나가는 것을 보고, 큰소리로, “이놈아, 그만두어라.” 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창손은 못들은 체하고 지나갔다. 이 때문에 모두 그를 위태롭게 여겨 친구들이 절교(絶交)하였는데 오직 종실(宗室) 수천 부정(秀川副正) 이정은(李貞恩)과 남효온(南孝溫)ㆍ안응세(安應世)ㆍ홍유손(洪裕孫) 등 몇 사람들은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효온이 시습에게 묻기를, “나의 소견은 어떠한가?” 하니, 시습이 답하기를, “창(窓)구멍으로 하늘 보기라.”
소견이 좁다는 말이다. 하였다. 효온이 다시 묻기를, “동봉(東峰)의 식견은 어떠한가?” 하니, 시습이 답하기를, “넓은 뜰에서 하늘을 우러러보는 거네.”
소견은 높으나 행위가 따르지 못한다는 뜻이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그의 처가 죽으니, 그는 다시 산으로 돌아가서 두타(頭陀)
중[僧] 모양으로 머리를 깎은 것을 말한다. 의 모습을 하였다. 강릉과 양양(襄陽) 등지로 돌아다니며 놀기를 좋아하고, 설악(雪嶽)ㆍ한계(寒溪)ㆍ청평(淸平) 등의 산에 많이 머물렀다. 유자한(柳自漢)이 양양 군수가 되어 그를 예로 대접하여 가업(家業)을 다시 일으켜 출세하기를 권하였으나 시습이 편지로 이를 사절하였다. 그 글의 대략에, “장차 긴 보습을 만들어서 복령[苓]을 캐리라. 온 나무가 서리에 얼어붙으면 중유(仲由)의 온포(縕袍)를 손질하고 온 산에 백설이 쌓이면 왕공(王恭)의 학창(鶴氅)을 매만지려 하네. 뜻을 얻지 못하여 세상에 사는 것보다는 소요하며 한평생을 보내는 편이 나으니 천년 후에 나의 속뜻을 알아주기 바라네.” 하였다.
홍치(弘治) 6년(1493, 성종24)에 병이 들어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생을 마쳤으니 그의 나이 59세였다. 화장을 하지 말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절 곁에 임시로 빈소 차림을 해 놓아두었다 3년 후에 안장하기 위하여 그 빈실(殯室)을 열어보니 안색(顔色)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승도(僧徒)들이 놀라 모두 성불(成佛)하였다고 감탄하고, 마침내 불교의 다비(茶毘)
불가에서 화장(火葬)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를 하여 그의 잔해(殘骸)를 취하여 부도(浮圖)
작은 탑을 말한다. 를 만들었다. 생시에 친히 자신의 늙었을 때와 젊었을 때의 두 개의 화상을 그려 놓고 찬(贊)을 스스로 지어 두었으니, 그 찬의 종장(終章)에, “너의 얼굴은 지극히 못생겼고 너의 말버릇은 너무 당돌하니 너를 구렁텅에 처넣어 둠이 마땅하도다.” 하였다. 그의 시문(詩文)은 거의 흩어져 십분의 일도 남아 있지 않은데 그것을 이자(李耔)ㆍ박상(朴祥)ㆍ윤춘년(尹春年) 등이 앞 다투어 수집해서 세상에 간행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사람이 천지의 기운을 받고 태어나는데 청탁(淸濁)과 후박(厚薄)의 차이가 있으므로 날 때부터 아는 것과 배워서 아는 구별이 있으니, 이것은 의리로써 하는 말이다. 시습과 같은 사람은 문장에 있어서는 나면서부터 터득했으니 문장에도 날 때부터 아는 자가 있는 모양이다. 거짓 미치광이로 세상을 도피하였으니, 그 은미한 뜻은 가상하나 굳이 윤리의 유교를 포기하고 방탕하게 스스로 마음 내키는 대로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록 빛과 그림자를 감추어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김시습이 있었던 줄 모르게 한들 무엇이 답답할 것 었겠는가.
그 사람을 생각할 때 재주가 타고난 기량 밖으로 넘쳐흘러서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였던 것이니 경청(輕淸)한 기는 지나치게 받고 후중(厚重)한 기는 모자라게 받았던 것이 아니었는가 한다. 그러나 그는 절의를 세우고 윤기(倫紀)를 붙들어서 그의 뜻은 일월(日月)과 그 빛을 다투게 되고, 그의 풍성(風聲)을 듣는 이는 나약한 사람도 용동하게 되니, 백세의 스승이라 한다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애석한 것은 시습의 영특한 자질로써 학문과 실천을 갈고 쌓았더라면, 그가 이룬 것은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바른말과 준엄한 논의는 기피해야 할 것도 저촉하였고, 공경(公卿)을 꾸짖고 매도(罵倒)하며 조금도 서슴지 않았는데 당시에 그의 잘못을 들어 말한 자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우리 선왕(先王)의 성대하신 덕과 높은 재상들의 넓은 도량으로 말하면 말세에 선비로 하여금 말을 공손하게 하도록 하는 것과 견주어 볼 때에, 그 득실이 어떠하겠는가. 아, 거룩하여라.
첫댓글 짙은 가을색과 고색창연한 역사유물과 사람들이 앙상불입니다. ^^*
단풍 절정의 무량사... 멋져요!
올 2월에 들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