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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26.일요일오전.봉화 축서사에서..
새처럼 훨훨 날아간 곳은 경북땅이다.
영월‧봉화‧안동‧영주
1편:영월주천면 요선정.요선암-판운리섶다리-선암마을-봉화군청앞 첫숙박
2편:숙소앞 둔치 아침산책-봉화지림사-축서사-이몽룡생가-닭실마을청암정
3편:봉화 청량산 청량사-청량산입구에서 둘쨋날숙박-안동농암종택
4편:안동퇴계종택-이육사문학관-도산서원-영주흑석사-서울 마이홈
2012.2.25.토~27.월(2박3일)
2편: 둘쨋날 이야기
깊고도 깊은 산속에서 만난 아름다운 축서사
봉화의 아침‧지림사‧축서사‧이몽룡생가‧닭실마을청암정
봉화의 새벽은 향긋했다.
따뜻한 방에서 숙면을 취했다.
상쾌한 기분으로 둔치에서 새벽 산책을 즐기다가
아침운동 나온 청둥오리도 만난다. 먼 발치에서 바라본다.
어젯밤 어둠속의 풍경관 다른 풍경을 보게 된다.
여러풍경을 담으며 경쾌한 걸음으로 산책이다.
걷기 운동은 보약인데 같이 산책할까요?
건넌마을 산책을 위해 길고 넓은 팻션다리를 건너 간다.
전날 밤에 본 생태수로가 밝은 새벽이 되어 전신이 훤히 드러났다.
열심히 아침조깅중인 지역민의 뒷모습을 보며 덩달아 경쾌다.
숙소 주차장으로 가려면 요 징검다리로 다시 건너야 한다.
토기뜀을 뛰면 풍덩이므로 돌다리도 두둘겨가며 건너란 말처럼
다리폭을 좀 넓히고 시선을 아래로 조심조심 건너야 한다.
물가 나뭇가지 새봄을 맞아 눈뜰 준비중이다.
건넌마을 산책을 마치고 요 징검다리를 건너다
"앗차!"
돌에서 미끌어졌다.
휴우~ 디카 손상없음은 너무 다행이었다.
전에 선자령 눈길에서 넘어졌을때도 이처럼 디카와 몸에
손상이 없어서 참 다행으로 생각했었다.
디카도 손상 안되고
다친데도 없고 오른쪽 앵글부츠와 발과 바지만 젖었다.
담은 사진이 한순간에 날아갈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얼마나 다행인가!
오늘하루 조심하라는 경고인가 보다.
차내에서 새양말과 등산화로 갈아신고 바지는 아랫쪽만 젖어
마르겠지 싶어 그대로 입고 있었더니 신기하게도
바지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더니만 지림사에 닿으니 다 말라 있었다.
손도 호호불며 다니는 영하의 추운날인데 언바지 입고 다닐 뻔 했다.
이동할 차량 점검을 마치곤 빨리 건너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다음일정은 축서사였는데
인터넷에서 읽은 여행전문가의 말이 생각난다.
축서사에 들리기전 국보도 한점 있는 지림사를 먼저 꼭 들려야 한다고..
마침 축서사 가는 길에 있어 들려본다. 공사중이었다.
지림사(智林寺)
호랑이가 걸터 앉은 것과 같은 형국이란 의미를 지닌 북지리
호거산에 자리한 지림사는 국보 제201호로 지정된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옛날, 수도하는 승려가 500명이 넘을 만큼 대사찰이었다고
전해지는 지림사는 축서사(鷲棲寺) 창건 설화에도 등장한다.
신라 문무왕 13년(673) 의상대사가 지림사에서 산 쪽을 바라보다
멀리 상서로운 빛이 비치는 것을 보고 그 빛이 나오는 곳에
지금의 축서사를 지었다고 한다.
조선 정조(18세기) 때 저술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지림사는 문수산에 있다(智林寺在文殊山)’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후기까지 사찰이 존속하며 불법의 전통을 이어오다가,
‘화재로 불타 없어져서’ 혹은 ‘축서사 때문에 사세가 기울어서’ 등의
이유로 폐사(廢寺)되었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지는 않다.
1949년경 권보훈(權普勳)이라는 승려가 현재 위치에 조그마한
법당을 세우고 수월암(水月庵)이라고 이름지었다. 그 후 국보로 지정된
마애여래좌상을 보호 관리하며 지림사의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경북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 지림사 전경
주차장에 주차시키고 다리를 건너간다.
국보 제 201호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
오른손을 가슴에 들어
시무외인(施無畏印:세상을 두려워 하지 말고)을 하고
왼손은 무릎에 내려 여원인(與願印; 소원을 들어 준다)을 짓고 있지만
오른손은 약간 마모되어 있다
이 불상은 원래 감실안의 본존불로 조성된
보기드문 신라시대의 거대한 마애불좌상이다.
현재 감실의 돌벽도 무너졌고,
불상에도 군데 군데 탈락이 있지만 아직도 부처님의 위용은
여전히 남아있는 편인데 거의 원각상(圓覺像)에 가깝게
높은 도드락새김(高浮彫)으로 새겼기 때문에
위엄스러운 모습이 더욱 돋보이고 있다.
더구나 네모진 얼굴에
내면적인 힘과 고졸한 미소를 은근히 나타내고 있는 점이나
오른손을 가슴에 들어 시무외인을 하고,
왼손은 무릎에 내려 여원인을 짓고 있는 큼직한 두손은
이 불상의 적정한 위용을 한결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넓은 무릎과 무릎을 덮어 내린 옷자락의 소박한 상현좌(裳顯座),
불상주위의 새긴 옛스러운 화불들과 함께 7세기 전반기의 삼국시대
불상양식을 나타내고 있지만 얼굴이나 체구에 표현된 부드러운
조소력(彫塑力) 때문에 실 제작연대는 7세기 후반기로 추정되고 있다.
불상은 7세기 중엽경의 위엄스럽고 자비스러운 불상미를 잘 보여주는
이 석불좌상은 큰절 본존불답게 신라조각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사진과 유물설명문..낭군님의 기록물에서 옮김
감실(龕室)의 돌벽이 무너져 보강공사중인 상태
문수산 축서사로 이동
문수산 축서사 일주문에 닿았다.
축서사는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개단리, 태백산맥의 줄기인
문수산(文殊山)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해발 1206m인 문수산은 한때 사찰들과 전설을 간직하고 있던
명산이었으나 지금은 불적들만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축서사(鷲棲寺)란 이름은 독수리 축(鷲), 깃들 서(棲),
즉 독수리가 사는 절이라는 의미인데, 독수리는 지혜를 뜻하며
이는 바로 큰 지혜를 가진 문수보살을 뜻하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독수리 축(鷲)를 옥편에서는 취라고 표기하고 있어 취서사가 되겠지만,
불가에서는 조선 세조때 간행된 법화경언해(法華經諺解)에
축자로 되어 있어 축서사가 된다.
축서사는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의상 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창건 연기 설화에 의하면
문수산 아래 지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 절의 스님이 어느 날 밤
앞산을 바라보니 휘황찬란한 빛이 발산되는 것을 보고 가보니
한 동자가 불상앞에서 절을 하는 것이었다.
물어 보니
나는 청량산 문수보살이라며 구름을 타고 사라지고 불상만 남았다.
이 소식을 들은 의상대사가 지금의 대웅전 터에 불상을 모시고
문수보살이 출현하였다 하여
문수산(文殊山)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는 창건설화이다.
굽이굽이 산골짜기를 돌아 돌아 달려 온
산속 깊은 곳에 숨겨진 축서사,
전날에 내린 눈으로 사찰 풍경이 한폭의 아름다운 동양화다.
너무 아름다워 눈이 시리다.
시린 눈을 내릴 줄을 모르고 계속 담기 바쁘다.
바로 예가 천국이 아니던가!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가득하여 중생들을 구제하는 곳 -寶塔聖殿-
영월 사자산 법흥사,오대산 상원사,태백산 정암사,영축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의 적멸보궁과 같은 역활을 한다.
보탑성전이나 적멸보궁에는 부처님 불상을 두지 않는다
부처님 진신사리가 있기 때문이다.
五層石塔
부처님 진신사리 112과(果)와 불상,경전등 聖物을 모신 사리탑
鷲棲寺 大雄殿 柱聯(축서사 대웅전 주련)
萬代輪王三界主 (온 시대의 전륜왕이시며 온 세상의 주인이신)
佛身普遍十方中 (부처님, 온 세상 두루 계시오며)
廣大願雲恒不盡 (넓게 크게 원하는 것이 구름처럼 끝이지 않으며)
三世如來一體同
(과거,현재,미래 혹은 비로,아미타,석가부처님은 모두 같은 부처님)
雙林示滅幾千秋 (사라쌍수에서 적멸하신지 몇 천년인가)
汪洋覺海渺難窮 (넓은 바다와 같은 부처님 지혜가 아득히 궁함이 없구나)
원효와 의상의 이야기 한토막
원효와 의상은 여덟 살 나이 차가 있었지만 숙명적인
라이벌이기도 했고, 함께 불법을 닦는 ‘도반(道伴)’이기도 했던
원효와 의상.
그들이 겹겹이 병풍처럼 둘러친 봉화의 산중 사찰에서 만나고,
또 비껴갑니다. 때는 바야흐로 신라의 삼국 통일을 전후한 시기.
신라에 통일전쟁은 승전의 역사였지만 그건 결론일 뿐이고,
정작 백성들은 전쟁의 격랑 속에서 무참한 살육의 공포와 생존의
고통으로 신음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종교로 구원의 빛을
밝히며 낮은 곳으로 내려가 백성의 고통을 덜어 줬던 이가 바로
원효와 의상이었습니다.
원효는 우화처럼 전해지는 ‘해골바가지 일화’부터 떠올리게 합니다.
원효가 도반과 함께 불법을 배우려 당나라로 향하던 한밤중에
무덤 곁에 유숙하다 고인 물을 달게 마신 뒤 이튿날 해골바가지의
고인 물이었다는 것을 알고는 구토를 했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알겠지요. 이때 원효는 인간의 만사가 ‘나의 생각 속에
있는 것’이란 깨달음을 얻고는 바랑을 메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당시 원효와 함께 유숙했던 도반이 바로 의상입니다.
원효는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의상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묵묵히 불법을 얻으려 길을 갑니다.
중국 3대 고승전 중의 하나인 ‘송고승전’에는 의상이 ‘한 그림자에
외로이 싸우며 죽음을 무릅쓰고 돌아가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이렇게 그들은 같지만 다릅니다. 나중에 요석공주를 만나서 설총을 낳아
파계한 원효는 직관적이되 감상적이었고,
평생을 구도에 바친 의상은 굳은 심지로 묵묵히 수행을 거듭했던
이성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축서사는 의상이 창건했다. 그게 신라 때인 673년이다.
이 절을 짓고 나서 의상은 3년 뒤에 영주 땅에 부석사를 짓는다.
그래서일까.
축서사는 부석사와 마치 쌍둥이 같은 모습이다.
절집의 앉음새가 어찌 이리도 닮아 있는지.
이 절을 ‘부석사의 큰 집’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축서사의 문루에 오르면 서쪽으로는 소백산이,
남쪽으로는 청량산이 우뚝 솟아 장엄하게 물결친다.
문화일보 박경일기자 '봉화 절집여행' 의 글에서 인용
벽시계는 10시 5분전을 가리킨다.
관람객은 우리 뿐 사찰이 고요하다.
눈내리는 보광전,석등및 대웅전의 모습
봉화 축서사의 솔방울
여긴 쌍방울
전날밤에 내린 눈으로 경내 뒤뜰이 은빛으로 변했다.
축서사에서 긴시간 관람을 마치고
일주문으로 내려와 도로의 표지판을 보고
이몽룡생가로 이동이다.
봉화군 물야면 佳平里 -溪西堂-
소설 춘향전의 이몽룡의 실제 모델인 광해군과 인조시대의 문신
成以性(1595~1664)선생이 실제로 살았던 집이다
다음 코스는 닭실마을 청암정으로..
철길 건너 멀리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닭실마을 옛가옥들이 보인다.
진정한 양반정신을 느껴 본 봉화의 닭실마을
조선후기 실학자인 이중환이 자신의 저서 '택리지'에서
안동의 내앞(川前),풍산의 하회(河廻),경주의 양동마을과 함께
삼남지방의 '4대명당'으로 꼽은 길지이다.
마을의 외관이 풍수지리학에서 귀히 여기는
'금빛의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金鷄抱卵形)'을 하고 있다하여
'닭실'이란 이름이 붙었다.
안동 권씨의 집성촌인 닭실마을은 조선 중종때
문신인 冲齋 권벌(權橃)선생이 기묘사화로 벼슬에서 물러난 후
낙향하여 터를 잡고 살던 곳이다.
청암정으로 들어가는 문
청암정(靑巖亭)
조선 중종때의 문신 충재 권벌선생의 유적지로
종가 우측에 위치하며 거북바위 위에 건립되었다.
정자둘레로 물이 흐르고 그 밖은 나무울타리가 쳐있으며
동.남.북쪽으로 3개의 문이 있으며 정자 1동외 충재선생이
공부하던 별채가 있으며, 바로 옆에는 충재유물 전시관이 있다.
청암정
아름다운 석교(石橋),돌다리
돌다리 2개를 잘 다듬어 가운데 석교각(石橋脚)을 세우고
돌다리 한개는 거북바위에 자연스럽게 얹여 교두보(橋頭堡)를 만들고
다른 돌다리는 인공적으로 축대를 쌓고 그위에 얹여서 가즈런히 놓았다.
청암정은 권벌(1478~1548)선생이
1519년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낙향해 있던 1526년(중종21)
거북모양의 바위 둘레에 연못을 파고, 바위위에 춘양목으로 지은 정자이다.
정자의 건축미도 빼어나지만,
둘레의 향나무.소나무.단풍나무.느티나무.왕버드나무 등이
정자의 풍광을 더 한층 아름답게 하고 있다.
현판글씨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글씨라고 전한다
청암정에 걸린 이황(1501~1570)선생의 '寄題酉谷靑巖亭'의 두번째 수를 읽어보자
酉谷先公卜宅寬 (유곡선생께서 복택인 길지에 터를 잡으시고)
雲山回復水灣環 (산에는 구름이 둘러 있고 물은 둥굴게 둘러 있네)
亭開絶嶼橫橋入 (정자는 외딴 섬처럼 가로놓인 다리를 통하여 들어가네)
荷映淸池活畵看 (연꽃이 맑은 못에 비치니 살아 있는 그림을 보는 것 같네)
稼圃自能非假學 (채소와 과수가꾸는 일은 학문이 아니라서 가능했고)
軒裳無慕不相關 (헌상 즉 벼슬길은 그리워 하지 아니하니 관계할께 없으며)
更惱巖穴矮松在 (다시 바위 구멍에 작은 소나무가 가련하게 있드시)
激勵風霜老勢盤 (바람과 서리 이겨내며 늙어가는 모양을 격려하네)
해석 : 반려자
권벌선생이 공부하시던 별채
별채와 청암정
별채와 청암정을 배경으로 반려자의 포즈..
청암정안에 온돌방을 놓았는데
온돌을 데우기위한 불기와 거북바위의 거북이 물을 상징하므로
서로 상극이되어 매년 고을에 가뭄이 들어 농사를 망쳤다.
권벌선생은 온돌방을 없애고 청암정 둘레에
더 깊이 파서 물이 회돌아 가게 했다는 전설이 있다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진 닭실마을은
한과로 유명해 한과 마을로도 불린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였던 충재 권벌(1478~1548) 선생이
마을에 자리 잡은 이후 지금까지 후손들이 지켜오고 있는
안동권씨 집성촌이다. 마을에는 충재박물관, 청암정,
석천정사, 삼계서원, 추원재 등 다양한 전통체험거리가 있다.
닭실마을은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를 말하며 동북으로
문수산, 동남으로 옥적봉, 서남으로 백설령으로 둘러싸여 있다.
조선후기의 인문지리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곳 닭실마을을
경주의 양동마을, 안동의 내앞마을, 풍산의 하회마을과 함께
‘영남의 4대 길지’의 하나로 꼽았다.
닭실마을에 있는 충재박물관은 1994년 충재유물전시관으로 시작하여
2007년 충재박물관으로 개관하였고, 보물 482점, 고서 및 고문서 등
총 5,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는 유교문화관련 중요한 박물관이다.
박물관에는
후손들이 소중히 지켜온 충재 선생의 발자취가 전시되어 있다.
2박3일 여행중 둘이 나란히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유리에 비친 사진이다.
금계포란형의 닭실마을 전경
물이 차가워 손 시리군!
갈땐 저어쪽으로 나가죠.
닭실마을 관람을 마치고 부릉~
굴다리를 지나 청량사쪽으로 달리다가 눈에 띄는 식당을 만난다.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3리278-5 (054) 672-8855
한정식 강순화된장집이다. 기사식당이기도 하다.
알고 보니 소문난 집이다.
직접 담근 된장 고추장으로 만드는데 된장찌게 맛이 끝내준다.
고추장맛 또한 끝내준다. 그 맛에 사람들이 들끓나 보다.
떡까지..1인 오천냥 싸고 맛짱인 그곳을 지날일이 있으면
된장찌게 꼭 드셔 보세요.
식사를 마치고 달린 우리애마는 안동청량산입구에 닿는다.
입구 계곡에 얼려 있는 폭포가 시선을 끈다.
얼음폭포를 배경으로 포즈도 취한다.
청량산 입구다.
둘쨋밤을 묵을 숙소부터 챙긴다.
청량산입구 유일한 모텔이다.
인터넷에서 미리 알았지만 우린 주말이 아닌 일요일밤을 보낼 것이기에
혹여 어찌 될지 몰라 예약없이 왔다.
위치는 잘 몰랐는데 바로 앞에 있어 찾느라 헤맬일이 없어 좋았다.
주말과 성수기엔 예약없인 이용이 어렵다 한다.
따뜻한 방부터 먼저 정하곤 청량산 김생굴까지 산행하다
청량사로 돌아 내려 올 예정으로 등산화와 간편한 옷을 챙겨 입는다.
www.청량산모텔.com 예약&문의(054-674-2267)
찾아 오는 길
동서울-신갈JC-<영동고속도로>-만종JC-<중앙고속도로>-영주IC
-봉화-유곡삼거리-명호-청량산(약3시간30분)
2편은 여기서 마치고
김생굴까지의 청량산 산행과 청량사 관람은 3편에 이어집니다.
풍경이 아름다워 사진을 많이 올렸습니다.
3편도 기대하세요..
감사합니다.
사진편집및제작찬란한 빛/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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