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도 한글날~, 군위 여행~. 군위군수상~.
오늘은 ★한글날이며, 그저께는 추석을 맞아 가족과 같이, 군위군 우보면 고향
선산(先山)에 성묘(省墓)를 다녀왔습니다. <43년 전 가을>이 생각났습니다.
당시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고, 그때까지 한번도 우보면과 이웃면(외갓집)을
벗어나 본적이 없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이, 완전한 산골 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1963년 한글날, 난생 처음 <군위군 백일장> 참가를 위해, 우보에서
<군위면>(*지금은 邑)까지 여행을 하였는데, 그때 감격이 몹시 컸었습니다.
우보에서 군위까지 25km 정도 거리이지만 <비포장>도로와 <완행>버스이어서
★한 시간의 <버스 타기>이었는데, <산골 소년>에게는 너무 좋았습니다.
군위군 8개 면(군위 의흥 효령 소보 부계 우보 산성 고로~)의 ★많은 학교에서
대표 학생들이 참석했습니다. 당시는 농촌학교에도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군위면에는 ★군청이 있고, 경찰서가 있고, 상가들이 있으니, <도시 분위기>가
있었고, 그것들 역시, 산골 소년에게는 여러모로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마음을 가다듬고, 산언덕에 있는 군위중학교 운동장에서, 주워진 제목을
따라, ★원고지에 <산문 글>을 써서, 제출을 하고, 다시 우보에 왔습니다.
^^며칠 뒤, 우보초등학교 운동장 조회(朝會) 때 군위군백일장에 대한 시상식을
하면서, 나에게 <산문부 3등>으로 ★군위군수 상장과 상품을 주었습니다.
당시, ★산골 소년인 나는 <우보면장>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군위 군수>이름이 쓰인 상장을 받았다는 것이 너무도 가슴이 벅찼습니다.
학교수업이 끝나자마자, 식구들에게 군수상장을 빨리 ★자랑하고 싶어, 단숨에
산골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모두 들에 나가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도 망태를 메고 <소>먹이풀을 뜯으러 들로 나갔습니다. 해가 지고 어두워서
식구들이 집으로 왔지만, 가을 일철이라, 모두 ★피곤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오늘 받은 군수 상장을 <자랑>했지만, 모두 ★무관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녁밥을 먹고는 모두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나는 <허탈>했습니다.
온 식구들이 깊이 잠든 밤에, 혼자 <호롱불>을 켜서, 군수 상장을 한참 보다가,
나는 그 상장을 손에 쥐고, 나 ★혼자 감격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습니다.
^^43년 전 당시, <순박했던 그 마음>을 ★회복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43년이
지난, 2006년 한글날과 가을을 만끽하며, 감격의 복을 누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세계여행을 한들, 그때 <한 시간 버스타기>만 하겠습니까!!
지금 내가 ★노벨 상(賞)을 받는다 해도, 그때 <군수 상장>만 하겠습니까!!
여행에 대한 감격, 상(賞)에 대한 감격의 ★크기는, 여행과 상의 질(質)이 아닌,
마음 상태가 결정합니다. 43년 전과 같은 <순박한 마음>이 되고 싶습니다.
^^성령님! 종(從)이 <굳은 마음>을 제(除)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짐(*겔.36:
26)으로, 범사에 감격하고, 행복하고자 하오니, 도와주옵소서. 아멘~.
★.사진- 43년 전, <군위군 백일장>에서 받은, 군위군수(郡守) 상장~ (*1963년 10월 12일)
첫댓글 정말 감개 무량했던 상장 같습니다 산골소년에겐 기뻐서 방방 뛰었겠습니다 나도 늦었지만 축하 드립니다.
지금의 노벨 상보다 더 어린 마음을 감동과 흥분이 되었을 그 군위군수의 상 받음을 축하합니다. 그 때부터 문학에 소질이 탁월했습니다.
군위군 우보면 농촌 순박한 소년에 그 큰 백일장에서 군수 상을 받았으니 경사가 날일이었습니다 그때 그 글솜씨가 있었기에 오늘의 명 칼럼을 쓰는것 갔습니다 노벨상보다 더욱 감격스러웠던 그때 그기분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놀라운 거는 아직도 43년전의 거이 생생하게 보관되고 있다는 역사적 사실이 더 놀라울 뿐입니다.
축하합니다. 잘보관하여 손자에게 물려주시기 바랍니다.
★.박태원목사 개인 사이트로 "스크랩" 해서, 옮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