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관포지교(管鮑之交): 관중(管仲)과 포숙아(鮑淑牙) 사이와 같은 사귐이란 뜻.
(管:대롱 관. 鮑:절인 고기 포. 之:갈 지. 交:사귈 교.)
시세(時勢)를 떠나 친구를 위하는 두터운 우정을 일컫는 말이다. 이는 춘추시대 초엽, 제(齊)나라에 관중(管仲, ?~B.C. 645)과 포숙아(鮑淑牙)라는 두 관리사이의 사귐에서 유래하였다. 두 사람은 죽마고우(竹馬故友)로 ‘관포(官脯)’란 제나라의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를 뜻한다.
관중(管仲)은 소홀(召忽)과 함께 양공(襄公)의 공자(公子)인 규(糾)의 측근이 되었고 포숙아는 규의 이복동생인 소백(小白)의 측근자가 되었다. 양공(襄公)이 사촌 동생 공손무지(公孫無知)의 반란으로 시해(B.C. 686)되자, 관중과 소홀은 규를 받들고 노(魯) 나라로 망명했고, 포숙아는 소백을 받들고 거(莒)로 망명했다. 이듬해 공손무지가 반대파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제(齊) 나라의 왕위는 비어 있었다. 규와 소백은 형제이긴 했지만, 먼저 제나라로 돌아온 쪽이 왕위에 오른다는 것으로 정적(政敵)의 사이가 되었다. 규는 서둘러 귀국하려 했지만 노나라의 격식으로 행동이 제한되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반면에 소백은 작은 나라인 거에 있었기 때문에 제약 없이 신속하게 행동하여 곧바로 제나라로 향하여 출발했다. 이와 같은 정보를 얻은 관중은 왕위에 규를 앉히기 위해서는 소백을 죽이는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도중에 매복하였다가 암살을 꾀했지만 화살이 조금 빗나가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후 소백은 제나라 도읍으로 들어와 포숙아와 대부인 고혜(高傒)의 도움으로 제환공(齊桓公.BC 685∼643)이 되었다. 환공은 왕위에 오르자 군대를 이끌고 노나라로 가서 규와 관중, 그리고 소홀을 인도할 것을 요구했다. 노나라에서 그 요구를 들어주니 규는 그 자리에서 죽이고 소홀은 호송될 때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주군의 뒤를 따랐다. 관중만이 제나라 군대에 인도되었다. 환공은 자기의 목숨을 노린 관중을 죽이려 하였으나 포숙아가 그것을 말리며 말하였다.
“전하께서 제나라 하나만을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고혜(高傒)와 제가 있으니 충분하겠지만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시기를 바라신다면 관중을 살려 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도량이 넓고 식견이 높은 환공은 신뢰하는 포숙아의 진언을 받아들여 관중을 대부(大夫)로 중용하고 정사를 맡겼다. 과연 관중은 대재상(大宰相)으로서의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안다(창름실즉지예절 倉廩實則 知禮節)’ ‘의식이 풍족해야 영욕을 안다(의식족즉지영욕 衣食足則 知榮辱)’고 한 유명한 정치철학이 말해 주듯, 그는 국민 경제의 안정에 입각한 덕본주의(德本主義)의 선정을 베풀어 환공을 춘추시대 제일의 패자(覇者)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환공이 패자가 된 데는 관중의 힘이 컸지만 원망(怨望)을 잊어버리고 관중을 크게 임용하여 마음껏 수완을 발휘하게 한 환공의 도량과 식견도 높이 평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관중이라는 인물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여, 환공에게 강하게 추천한 평생 동안 변함없는 우정을 지속한 포숙아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일은 관중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그래서 관중은 훗날 포숙아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사기(史記)> '관안열전(管晏列傳)'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젊어서 가난했기 때문에 포숙아와 함께 장사를 했었는데 늘 이익금을 내가 더 많이 차지했었으나 그는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가난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를 위해 한 사업이 실패하여 그를 궁지에 빠뜨린 일이 있었지만 나를 용렬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일에는 성패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나는 일찍이 임금에게 세 번씩이나 벼슬하여 그때마다 쫓겨났다. 그러나 포숙아는 나를 보고 못났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는 내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나는 세 번 싸워서 세 번 도망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포숙아는 나를 비겁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는 것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나는 공자(公子) 규가 패했을 때, 소홀은 죽었는데도 나는 사로잡혀 욕을 당했다. 그러나 포숙아는 나를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작은 절개를 지키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공명을 천하에 나타내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낳아 주신 것은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 준 사람은 포숙아였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淑牙)
· 출전])《史記》〈管仲列傳〉, 《列子》〈力命篇〉
* 비슷한 말로 ‘문경지교(刎頸之交)’, ‘금란지교(金蘭之交)’, ‘단금지교(斷金之交)’, ‘수어지교(水魚之交)’, ‘교칠지교(膠漆之交)’, ‘막역지우(莫逆之友)’등이 있고 반대말로는 ‘시도지교(市道之交)’가 있다..
첫댓글 우리는 흔히 우정을 말할때 관포지교를 말하곤 한다 . 관중과 포숙아의 교우를 뜻함이지만 상세 내용을 잘몰랐다 자네의글을 통해 관포지교를 깨우치게해서 감사하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