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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cher
대담
누가 훌륭한 교사인가
대담; 河 点生(서울시敎育監), 李 烘雨(서울대학교 師範大學 敎授)
정리; 吳 正煥( 敎育春秋 記者)
敎育監 중의 꽃
서울특별시교육위원회 교육감-. 비록 행정위계상으로는 지방자치단체의 長일 뿐이지만 교육행정 분야에 관한 한 그 권한으로 보나 집행하는 예산의 규모로 보나, 예하 교직원 수로 보나 명실공히 전국 최고일 뿐 아니라 교육감 중의 꽃이다.
서울시 교육감은 서울시내 수많은 학교, 그 중에서도 정규 초·중·고등학교만 6백여개, 교사 3만여 명, 사무직원 7천여 명의 총수로서 백 6십여 만 학생들의 교육을 총 책임진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밖에 유치원, 특수학교, 각종학교, 사설 강습소에 대한 지휘감독도 모두 그의 권한에 속하는 것은 물론이다.
서울특별시교육위원회 교육감 河 点生씨. 훤칠한 키 야위지도 부하지도 않은 적당한 몸매에 항상 단정한 모습이다. 언뜻 보면 쉽사리 접근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으나 어쩌다 한번씩 터뜨리는 웃음은 자상한 교장선생님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항상 진지한 표정이고 좀처럼 화를 내지도 않지만 신문방송이 교육을 곡해하거나 평소의 자기 소신이 도전받으면 불같이 노할 줄도 아는 정열이 숨어 있다.
교육위원회 직원들은 그를 흔히 '河監'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물론 자기들끼리 부르는 하 점생 교육감의 별칭이지만 그 별칭히 하필 '하감'이 되었는지는 모른다. 아마 그의 용모나 성격이나 언행에서 별칭을 붙여줄만한 특징을 발견하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하감'의 특징은 달변과 독서에 있다. 교육감 아니더라도 말못하고 책 안 읽는 사람 없겠지만 '하감'의 경우는 좀 다르다. 그의 승용차나 응접탁자 위에는 항상 책이 쌓여있다. 이건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결재 할 때와 말 할 때 이외는 늘 책을 읽고 있다. 아마 집에 가서도 노상 책을 읽는 모양이어서 누가 "바쁜 일도 많은데 웬 책을 그렇게 읽습니까" 하니까 간단히 "습관이 돼서"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읽는 책의 종류도 가지가지이다. '하감'의 응접탁자 위에는 늘 10여권의 책이 쌓여 있는데 교육학 관계 책은 어쩌다 눈에 띠는 것이고 대부분 철학서적, 문고판, 소설책, 잡지류 들이다.
그리고 그는 또 달변이다. 단둘이 이야기하건 청중 앞에서건 또렷또렷한 말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면서도 앞에서 한 이야기와 뒤에서 한 이야기들이 서로 아귀가 딱 맞아 떨어진다. 이야기 소재도, 인용하는 말도 역시 철학, 교육심리, 사회학 등 다채롭다. '하감'의 이러한 달변은 오랜 세월에 걸친 직책상의 필요에서도 연유하겠지만 아마 그의 막대한 독서량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 홍우 교수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교육의 현장과 상아탑 속의 연구실이 서로 연결되는 것이다.
敎養의 香氣
李 : 교육감께서는 지금 수도교육이 안고 있는 문제 중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평생을 교육계에 몸담고 계시면서 교육현장과 교육행정 양쪽에 중요한 경험을 많이 하셨을 터인데 교육감께서 교단에 처음 섰을 때 '교육을 보는 눈'과 지금 '교육을 보는 눈'이 달라진 것이라도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河 : 교사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은 교육감이 하는 것도 아니고, 교장이 직접 가르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교육감이나 교장들은 교사들이 더 잘 가르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해 줄 책임이 있는 것이지만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고 학생이 바람직한 행동변화를 일으키도록 지도하는 것은 교사들이기 때문이지요.
李 : 그렇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교사가 훌륭한 교사이냐, 훌륭한 교사는 어떠한 특성과 자질을 갖춰야 된다고 보십니까?
河 : 말하자면 '바람직한 교사상'이 될터인데 이것을 깊이 따지고 들어가면 '교사론'이 되겠지요. 그리고 교사를 보는 입장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고, 그 입장에 따라 훌륭한 교사가 무엇이냐도 달라질 것입니다. 학생들 입장에서 보면 선생님이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느냐는 기대가 있을 수 있고 학부모 입장에서는 선생님들이 자기 자녀를 어떻게 가르쳐 주기를 바라느냐는 기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육학자들이 생각하는 교사상도 또 있을 것입니다. 李 선생님의 교사상은 무엇입니까?
李 : 저는 바람직한 교사상에 대한 아이디어가 없는데 어떻게 하지요? 그러나 저는 이따금씩 기회 있을 때마다 이런 이야기는 해왔습니다. 바람직한 교사상이라면 일반적으로 사명감있고, 학생을 사랑하라는 등 감정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제가 가지고 있는 편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감정에 관한 것보다는 知的인 것이 더 중요하다, 이렇게 말해왔습니다. 이것이 보통 상식적인 통념하고는 전혀 반대된다고 저는 믿습니다마는 교사가 자기가 맡은 과목이 무슨 과목이라는 것을 잘 알고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는 구태여 학생을 사랑하고 사명감을 가져라 하지 않더라도 교실에서 열심히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또 봉급이 아무리 적다 하더라도 봉급을 얼마나 더 줘야 학생들을 잘 가르치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끝이 없을 것 같아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 교사들이 많은 반대 의견을 말 해 왔고 저도 이렇게만 말을 하면 안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河 :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입장에 따라서 교사상이 달라집니다. 고등학생들에게 훌륭한 교사가 어떤 사람이냐 물으면 거의 대부분 실력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실력이란 것이 무엇이냐. 아마 자기 전공과목에 대한 조예가 깊어 대학 강단에 설 정도의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학교 교사, 중학교 교사, 고등학교 교사는 자기 전공과목에 대한 실력만으로는 안됩니다. 교사는 문교부에서 정한 교육과정에 따라 가르쳐야 하는데, 이 교육과정이라는 것은 학생들 생활 전체를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사는 자기 전공과목에 대한 깊이 뿐만 아니라 학생들 생활 전부를 이끌고 가며 학생들 생활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 일반 교양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 교양이 자기몸에 배어서 교양의 향기가 풍긴다고나 할까, 그런 경지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무엇이 실력이냐
李 교수는 교육과정 전문가이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들이 생각해 오던 敎育課程에 대한 통념을 깨고 교육과정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발표하여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李 교수는 교육과정을 '目標模型'이라는 것과 '內容模型', 두 가지로 나누고 앞으로의 교육과정은 내용모형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李 교수는 이 두 개의 기본모형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는 '왜 가르치는가'하는 질문(즉, 敎育目標)에 대답하는 방식의 차이에 있다고 한다. 목표모형은 이 질문에 대하여 규범적인 의미가 없는 기술적인 용어로 대답하지만 내용모형은 '가르칠 가치가 있는 것만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하며 가르칠 가치가 없는 것은 교육내용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대답, 교육목표를 교육내용에 못박혀 있는 가치에서 직접 찾으려한다. 그리고 내용모형에서 '가르칠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은 인류의 진보에 빛을 던져준 '知識의 構造'라는 것이다. 따라서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기 전에 반드시 '왜 그것을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져보고그 가르칠 내용(즉, 敎科)에 대한 올바른 '觀點'을 세워야 하며 그 관점에 따라 그 교과의 一般原理 또는 一般槪念을 理解시켜야 한다는 것인데 그 가르치는 방법으로서는 가능한한 그 일반원리 또는 일반개념을 확립한 학자가 '그 것들을 발견하기까지에 이르는 過程(process)', 그대로를 따라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李 교수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 '교사가 자기가 맡은 과목이 무슨 과목이라는 것을 잘 알고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에는 구태여 학생을 사랑하고 사명감을 가져라 하지 않더라도 교실에서 열렬히 가르칠 것이다'라고 말한 뜻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河 교육감은 이 점에 대해 대학교수는 그렇게 해도 괜찮겠지만 초·중·고등학교 교사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李 : 말하자면 인간미가 있어야 된다. 그런 뜻인가요?
河 : 그렇지요. 그래서 교사라 하면 자기 전공과목에 대해서는 대학 강단에 설만큼 충분한 지식을 갖는 동시에 일반교양 분야에도 해박한 지식이 아울러 필요한 것이지요. 따라서 교사는 책을 많이 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되 철학서적이라든지 심리학 등 전공 이외의 과목들을 광범위하게 섭렵하는 것은 물론 시사문제에도 민감해야 될 것입니다. 초·중·고등학교는 대학하고 또 달라서 교사들이 늘 학생들과 접촉하고 생각을 교류해야 되니까 시사문제를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국가의 주요시책을 충분히 이해하여 학생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리고 교육과정이라는 것도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교사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내용 전부이다. 이것을 교육과정이라고 한다면 교사들은 교실수업만으로 할 일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나는 수학교수이기 때문에 수학시간만 잘 가르치면 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혹시 대학에서는 그렇게 해도 괜찮을 것같이 보이지만 초·중·고등학교에서는 전공과목만 잘 가르치는 교사가 훌륭한 교사는 아니라고 봅니다.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는 제자와 같이 고민하고, 그 고민을 이해하여 해결에 도움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하는 것이 교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아니겠나 생각됩니다. 그러자면 교사들은 교육과정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필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河 교육감이 원하는 교사
河 교육감의 이야기는 더 계속된다. 학생들에게 가르칠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점과, 그것을 위해 교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에 관해 일사천리의 교사론이 꼬리를 문다.
河 : 엊그제 서울시내 여자고등학교 학생간부 수련장에 가서 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들, 앞으로 남아있는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이냐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까? 인간의 평균수명을 80년으로 잡는다면 그것은 달수로 따져 9백 60개월이고, 날짜로 계산하면 2만 8천 8백일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스무살이 가까워지니까 80년의 1/4은 벌써 지나가 버린 것이고 앞으로는 약 7백개월쯤이 남았을 뿐입니다. 앞으로 살아야할 인생이 굉장히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생각해 보면 고작 2만일 정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제한된 인생을 어떻게 살 것입니까? 아마 여러분들 중에 대학에 들어가서 학문을 할 사람은 일부에 지나지 않고, 대부분은 가정으로 돌아가 살림을 맡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학문 그 자체보다는 가족의 살림을 맡는 것, 즉 衣·食·住생활에 필요한 지식과 기능과 이해가 더 필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것이 부인 못할 사실이라면 여자고등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 좀더 분명해지지 않을까요? 따라서 교사들도 이런 점을 깊이 통찰하고 나서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르치는 방법으로 "교수법, 교수법"하면서 학습지도안을 짜서 어떤 순서로 가르쳐야 한다는 식의 기술도 중요하지만 인간대 인간의 접촉을 통해 교사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을 학생들에게 불어 넣어주는 일도 교수법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이 본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교사들은 이렇게 학생들을 가르치고, 또 영향을 주고 내버려두면 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교사는 가르친 것을 반드시 평가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교과를 가르쳤으면 학생들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또 학생들의 체중이 얼마나 늘었으며, 키가 얼마나 자랐는지, 또 던지기하면 1학년 때는 얼마를 던졌는데 2학년 때는 얼마를 던졌는지 정확히 재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의 성적이 떨어지면 왜 떨어졌는지, 학생들의 몸무게가 늘었으면 왜 그런 변화가 있었는지를 알아서, 가르치는 방법을 개선해 나갈 줄 아는 교사가 바로 내가 바라는 교사상이다, 그렇게 말 할수 있지요.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학생들을 얼마나 사랑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도 교사는 늘 자각해야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봅니다.
李 : 이젠 이야기 할 거리가 충분히 나왔다 싶은데, 아주 좋은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아까 교육감께서 고등학교 학생들은 실력 있는 교사를 바람직한 교사로 본다고 말씀하셨는데, 교육행정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도 실력있는 교사가 바람직하다고 보십니까?
河 : 아마 그런 점도 있겠지요.
李 : 그 점에 관해서 학생들은 혹시 이렇게도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학생들이 실력있는 교사가 훌륭한 교사라고 믿을 때는 그런 교사들에게 배워야 대학 입시에 합격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 생각이 있는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河 : 그렇지요.
李 :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마 제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릅니다만, 대학입시에 잘 합격시키는 교사와 이제까지 교육감께서 강조하신 인간대 인간의 관계를 통해 어떤 영향을 주는 교사와는 다소 차이가 있지 않나 그렇게 보는데요...
학교와 강습소의 차이
李 교수가 던진 이 질문은 교사상이 무엇이냐에 대한 답변을 결정하는 핵심이 될만하다. 고등학교 교사가 학생들이 바라는 대로 대학입시에 백발백중 합격시키는 사람이라면, '교사는 전문직이다'는 주장의 근거가 흔들리게 된다.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으로 대학입시 잘 합격시킨다고 소문난 사설 강습소의 이름난 강사야말로 오늘날의 가장 바람직하고 훌륭한 고등학교 교사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河 : 학교는 소위 全人敎育을 하는 곳이고, 교사는 전인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학생들을 깨우치고, 밀어주고, 도와주는 사람이 아닙니까? 교사들은 지금 남의 귀한 자녀를 맡아 가르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교사도 우선 부모입장이 되어서 학생들의 신체발달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학생들이 탈 없이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라고 있는가. 학생들의 신체 발달 상황을 눈여겨 보살피고 관찰하고 기록해서 1년에 몇번 쯤, "당신의 자제는 1년동안 키가 몇㎝자랐고, 체중이 몇 ㎏늘었고, 달리기 능력이 얼마나 신장되었소"하고 알려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교사가 해야 할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야만 학부모들은 안심하고 귀한 자녀를 학교에 맡길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이상하게 학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의 신체 발달상황에 관심이 적은 것 같습니다. 아마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보기에는 이것은 교사들 쪽에서 보면 굉장히 귀찮고 힘든 일이지만, 학기말 성적을 내서 누가 공부를 잘했고 못했고 하는 식으로 등수를 매겨주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입니다.
학생들은 또한 학교에서 '社會生活'을 하는 것입니다. 친구들과 사귀고 놀면서 옳은 행동, 나쁜행동을 구별할 줄 알게 되는 것이지요. 만일 독학하는 천재와 학교 교실속의 평범한 학생과의 차이가 있다면 아마 이 사회성의 발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학교에서는 또 학생들의 情緖醇化에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단을 가꾼다든지, 환경정리를 한다든지, 토끼를 기른다고 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교과학습에도 도움을 주지만 실은 학생들의 정서순화에 꽤 큰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학교는 知的發達, 社會性發達, 情緖發達, 身體發達을 圖謨하는 道場이고, 교사는 이런 요소가 조화있게 발달하도록 뒤를 밀어주는 사람이지요.
李 : 그런데 부모들에게 물어보면 체신발달도 중요하고 정서, 그거 메말라 있는 것 풍부히 해 주는 것, 물론 중요하고 사회성 발달, 물론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들 대학에 합격시켜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학력은 왜 필요한가
河 : 네. 그것이야말로 어려운 문제이지요. 이 문제에 대하여 나는 부모님들의 생각이 바꾸어지도록 교사들이 노력해야되지 않나, 그렇게 봅니다. 교사들이 이 문제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부모들을 계몽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지금 지도급 인사들도 학력, 학력 하지만 학생들이 40대, 50대가 되었을 때 그들의 학교 성적대로 우열이 판가름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잘 알려진 이야기로 윈스톤 처칠 같은 분은 학창시절에 낙제를 했지만 패전의 난국에 처한 대영제국을 구했을 뿐 아니라 문장으로나 그림으로나 뛰어난 재질을 발휘했지 않습니까. 학교라는 곳은 결국 이렇게 폭넓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는 곳이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李 : 옳은 말씀입니다마는 교사들의 힘만으로는 학부모의 생각을 바꾸기는 벅차지 않겠습니까?
河 : 교사들뿐만 아니라 사회전체가 그런 방향으로 나가도록 힘써야 된다는 뜻이지요. 대학은 보통교육을 하는 곳이 아니라 학문을 하는 학자를 양성한다든가, 사회지도급 인사를 양성하는 곳인데 대학에 들어가서 그 교육과정을 이해하지 못 할 사람은 아예 대학에 가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미국같이 발달된 사회에서도 대학에 가는 학생들은 제한이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돈이 없어서, 물론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대학에 안가는 것이 아니라 대학에 갈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안가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미국같은 사회에서는 어떤 사람을 평할 때 어느 명문학교를 나왔는지를 묻지 않고 그 사람이 무엇을 할 줄 아느냐를 묻는 거지요.
우리나라 사회도 벌써 이런 생각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대기업체에서 신입사원을 모집할 때 이런 생각이 뚜렷합니다. 아무리 일류대학을 나왔다 해도 영어하나 제대로 못하는데다 무역실무 제대로 모른다면 그런 사람 뽑아서 무엇을 할 것입니까? 만일 미국 같은 나라가 대학교육에 대한 열망이 우리나라와 같다면 대학교육을 의무교육으로 했을거 아니겠습니까?
물론 하 교육감도 학력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학교가 학생들의 知力發達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학교가 해야 할 일이 지식교육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 교육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학력의 필요성이라든가 학력의 높고 낮음, 심지어 학력의 정당성까지도 오로지 대학입시의 성패로 판가름나는 것이 부당하다는 뜻이다. 학교에서 지식교육을 하는 목적은 학생들이 일류대학에 합격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장차 그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을 이해하고 그 이해의 바탕 위에 보다 더 가치 있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데에 있다는 것이다. 하여간 하교육감의 교사관은 그의 이러한 교육관, 인생관, 세계관의 바탕 위에서 도출된 것이다. 그러면 그는 교사들이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된다고 보는가. 이를테면 교사들의 마음의 준비태세가 되겠는데, 그는 언젠가 "여교사들은 지나친 화장을 하지 말라"고 관할 학교에 지시한 일이 있다.
"지나친 화장은 삼가라"
河 : 여자는 화장을 하긴 해야합니다. 그러나 교사가('하감'은 이 대목을 두어번 강조했다) 지나친 화장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남자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젊은 남자들은 요즘 유행대로 장발을 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사는 장발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사가 어떤 학급에 들어갔을 때 6,7십명되는 학생들은 일제히 교사를 쳐다보면서 일단 그 교사의 인상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뭐, 실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차차 밝혀지게 되겠지만, 일차적으로는 첫인상에 따라 그 교사에 대한 학생들의 태도가 결정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학생들은 그 교사를 모방하게 되기도 하고, 교사가 그런 차림을 하는데, 내가 못할 것이 무엇이냐는 생각을 갖는 것이지요. 이것은 학생들이 교사들의 별명을 짓는 것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지 않겠어요? 어떤 학자의 보고서를 읽어보니까 학생들이 교사의 별명을 짓는 이유는 첫째가 신체적인 특징에 있고, 둘째가 말씨, 셋째가 성격..등등 그렇게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키가 크면 '장다리 선생', 키가 작으면 '꺼꾸리 선생'이 일단 되고 마는 것이지요. 이토록 교사들이 학생들의 관심의 표적이 되어 있는데 교사가 짙은 화장을 하고 머리를 히피처럼 길러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키가 크다, 작다와 같은 선천적인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니 후천적인 것은 고쳐야 마땅하다는 것이지요. 나는 겨울에도 교사들이 잠바 못입게 합니다. 넥타이도 항상 단정하게 매야 되고, 와이셔츠 칼라도 늘 깨끗해야 합니다. 때가 꼬질꼬질한 와이셔츠를 입고 학생들 앞에 나갈 수 있겠어요? 바지, 그것도 주름 좀 세워라, 머리도 좀 감아라, 구두도 좀 닦아 신어라 합니다. 어느 교사를 보면 수염이 형편없이 긴 선생이 있는데 그거 안된다, 그 말입니다. 그런 교사는 교단에 서면 안되는 것입니다.
미국 같은 나라가 아무리 개방되어 있고 자유스럽다 하더라도 상류층 가정에 가보면 여자들 담배 못 피우게 합니다. 그리고 메니큐어 못 칠하게 합니다. 이를 보면 사회가 아무리 개방되어 있다 해도 그 저변에는 강한 보수성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교사들은 바로 이 사회의 보수성을 깊이 통찰해서 그것이 무엇인가를 늘 알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李 : 그렇지요. 아마 사회에는 보수적인 면이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교사라는 집단 그 자체가 보수적인 집단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교사들은 대개 용모가 단정하고 행동이 방정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술집에 가보면 종업원들은 어떤 사람이 교사인지를 금방 알아낼 정도로 그런 특징이 몸에 배어 있지요. 이건 아마 교사라는 신분 그 자체가 그렇게 되기를 요청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희노애락을 조절해야
河 : 또 있어요. 교사는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학교에 가보면 교사가 매를 들고 큰 소리를 꽝, 꽝, 치면서 학생을 다스리려고 하는데, 어떤 교사는 말한마디 표정하나로 학생들을 꽉 잡고 있거든요. 고운 말을 써야 되는 것 쯤은 교사가 아니라도 상식에 속하는 일인데 학생들에게 "이놈, 저놈"합니다. 이래가지고 학생들에게 교사를 존경하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교사는 또 喜怒愛樂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교장할 때 보니까, 어떤 선생님이 불같이 노해서 뺨을 치는 것을 봤습니다. 아마 그 학생은 자기가 왜 야단을 맞는지는 잘 모르면서 교사가 자기한테 화풀이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웃는다 해서 교사가 그들과 같이따라 웃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학생들이 정말로 교사를 '우습게' 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지요.
李 : 교사들이 이런 주문 받는다면 "야! 교육감님이 너무 하신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河 : 또 있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 글씨를 너무 못써요. 이는 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학교에 갔을 때 板書를 한 것을 유심히 봅니다. 그 때 보면 젊은 교사들은 글씨를 너무 성의 없게 써 놓았어요. 판서야말로 시청각 교육의 첫째인데 판서를 보면 글씨가 칠판에서 날고 기고 요란합니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 가면 교사들의 이력서를 봅니다. 이력서란 자기가 살아온 길을 남에게 보이는 것인데 도대체 성의 없는 글씨가 수두룩해요. 어느 정도 성의 있게 썼느냐를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을 짐작할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李 : 아마 그런 기준에 맞는 교사는 서울 시내에서 손꼽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닐까요?(이 대목에서 교육감과 이 교수는 다같이 크게 웃었다) 저는 교육감께서 말씀하신 여러 가지 조건 가운데 말씨에 대해서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교사들이 거친 말을 쓴다, 학생들이 욕을 많이 한다하는 것은 정서가 메마르고 사회가 각박해진 것도 한가지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어찌 보면 좋은 말을 할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좋은 말을 할 능력이란 좋은 생각, 아름다운 생각을 할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능력이 없으니까 입만 열면 욕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교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교사가 보통 화가 나지 않고서는 학생들에게 욕 할 사람이 없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마는 교사가 학생들 앞에서 거친 말을 쓴다는 것은 좋은 말, 아름다운 말을 쓸 능력이 없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해보면 도대체 아름다운 생각, 좋은 생각을 할 능력은 어디서 오느냐, 이런 문제가 남지 않겠습니까? 이야기가 훨씬 앞으로 되돌아가는데 교사는 자기 과목에 관해서 지식이 풍부할 뿐 아니라 일반 교양이 있어야 되고 인간미가 있어야 된다고 교육감께서 처음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교사들은 윤리학이라든가 철학에 관한 책을 읽어서 교양을 넓혀야 된다는 그런 점과 결부를 지어보면 교사들이 그런 책을 읽어서 생각이 고상해지면 거친말을 쓰지 말라 해도 거친말을 안 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지요. 교사들의 생각이 고상해지면 교육감께서 그토록 강조하시지 않더라도 교사들이 고운 말을 쓰고 판서도 정성들여 할게 아닌가...저는 그렇게 봅니다.
교직을 보는 '사회의 눈'
河 : 교사는 우리 선배들께서도 늘 강조를 해왔습니다마는 무엇보다도 가르친다는 프라이드를 가지고 동료들 간이나 학생들 앞에서나 言動을 조심해야 되는 거지요. 그래야만 학생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교사라는 직업에서 보람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李 : 이것은 제가 꼭 여쭤보고 싶은 것입니다마는 교사는 누구든지 자기 직업이 성직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을 겁니다. 그런데 프라이드를 갖지 않은 교사들이 상당한데 그런 교사들은 왜 그렇게 생각할까요?
河 : 두가지로 생각할 수 있지요. 첫째로는 사회가 이때까지 교사를 성직자로 대우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일부 학부모들이 '봉투'를 가지고 교사들을 귀찮게 하고 있습니다. '봉투'를 가지고 교사의 환심을 사 자기 자녀들을 잘 보살펴 달라는 저의가 깔린 것이지요. 말하자면 '봉투'를 가지고 스승의 자애를 사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식으로 '교사를 보는 학부모의 눈이 교사를 성직의 자리에 충실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있다고 봅니다. 둘째로는 교사들이 이런 유혹(?)에 의연하지 못하고 성직에서는 스스로 물러나고 있는 것이지요. 교사들은 이런 것을 의연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학부모가 교사를 보는 눈도 달라질 것이고 교사의 프라이드도 자연히 회복될거 아니겠습니까.
李 : 저도 교육학을 공부하는 사람입니다마는 교사들의 프라이드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인가, 이것은 아주 분석하기 힘들어요. 누구든지 교사는 자기 직업에 긍지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희망하고 있는데 그런데도 상당히 많은 교사들이 그 희망대로 행동을 하지 않는다...이게 무엇 때문에 그러하냐...그런데, 이런 생각은 혹시 틀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교사가 학생들을 앞에 놓고, 내가 지금 6십명이나 7십명을 앞에 놓고 하는 일이 '보통일이 아니다'하는 자각, 그게 있을 때는 학부형 앞에서도, 또 학생들 앞에서도 의연한 자세를 취할 수 있지 않을까...그러면 교사가 어떤 경우에 내가 하는 일이 보통일이 아니라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저는 이 문제에 대해 교육감님의 말씀과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습니다마는 학문이라는 것의 가치를 아는 교사라면 物理면 물리, 自然이면 자연을 비록 내가 내 입으로 학생들에게 뭣이라고 가르치기는 하지만 이것은 실은 '인류전체의 입'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라는 생각입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어에 '아랫대'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교육사 책을 읽다가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서 그리스 사람에게 직접 그 뜻을 물었더니 그가 펄쩍 놀라면서 그 말을 함부로 부르면 마치 神을 모독하는 것이나 되는 것처럼 그렇게 신성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아랫대'라는 용어가 영어로 쓴 그 책에도 이것은 도저히 영어로 옮길 말이 없다고 註를 달아 놓았어요. 그런데 가장 비슷한말로 옮긴다면 '秀越'이라는 뜻이다, 수월 중에서도 수월, 즉 최고의 경지를 통틀어 '아랫대'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 '아랫대'라는 말과 같이 그렇게 어마어마하지는 않습니다마는 물리교사, 자연과를 가르치는 교사가 지금 자기가 가르치는 내용은 동굴 생활을 할 때부터 지금까지 인류가 모든 知力을 總動員해 쌓아 올린 遺産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교사의 마음가짐이 달라지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교직은 왜 전문직인가
李 교수의 이러한 敎師觀은 교육과정 전문가의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李 교수는 그가 구상하는 바와 같이 內容模型에 의한 敎育課程이 편성되고 그에 따른 敎科가 선정되면 그것을 가르치는 행위는 '神性한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과 그 자체는 '人類가 洞窟 生活 時代 이후 모든 知力을 總 動員해서 이룩한 遺産'이고 이 유산을 가르치는 것은 '인류 전체의 입'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李 교수는 그저 막연하게 '교직은 성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교직이 왜 성직인가' 그 근거를 밝혀 성직의 당성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교수의 교사관에 관한 이러한 판단이 옳다면 교사라는 직업에는 본래부터(또는 자동적으로) 누가 뭐라하건 관계없이 프라이드가 붙어 있는 것이고, 聖職이라고 당연히 추앙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잘 가르칠 책임 막중하게 지워진 것이다. 이것은 현실적인 조건, 즉 '교사를 보는 사회의 눈'이라든지, '봉투'라든지, '봉급'이라든지, '잡무'라든지, 인센티브(유인)라든지...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사도 사람인 것이다. 봉급이 작거나 잡무가 많다거나 교사를 보는 사회의 눈이 비딱하다면 교사들이 아무리 성직의 당위성을 철저히 깨닫고 있다 할지라도 배겨나기 힘들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직에서의 도피를 꾀할 것이라는 뜻이다.
오랜 현장경험을 통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교육관, 교사관이 확립된 하 교육감은 교직이 성직인 동시에 전문직이라는 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 교육감의 이 말은 또 교사와 사설강습소의 강사가 어떻게 다른가를 밝혀주고 있다.
河 : 흔히들 교직을 전문직이라고 합니다. 교직을 전문직이라고 부르는 것은 택시운전사, 구두수선공과 같은 보케이셔날(vocational) 한 것이 아니고 법관, 의사와 같은 프로페셔날(proffessional) 하다는 뜻입니다. 법관은 법에 관한 고도의 지식과 자기의 세계관과 양심으로 사람의 행위를 따져 그 행위자를 처벌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관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의사 역시 의학에 관한 심오한 지식과 경험과 양심을 가지고 환자의 병을 진단하고 그 병을 치료하면서 환자의 생명을 좌우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아무나 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교직은 왜 전문직이냐...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 그들의 가능성을 무한대로 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교육이라는 것이 1, 2년에 끝나버려 당장 그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2, 3십년 후에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는 방향을 결정하는데 교사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학생이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일삼고 있어 타락의 벼랑에서 서있는데 교사가 그를 잘 지도하여 그가 올바른 인간이 되었다 하면, 교사의 역할이 어디 법관이나 의사에 못 미치겠습니까? <끝>
'敎育春秋', 1977년 7월 호. pp. 2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