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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한국의 불교학자 <5> 장원규 / 신규탁 | ||||
역사적 맥락의 화엄교학 연구 선도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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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원규 교수의 논문을 읽게 된 사연 읽었다. 그 과정에서 《주역》(왕필 주), 《노자》(왕필 주), 《장자》(곽상 주) 등 위진시대의 3현학도 부지런히 읽었고, 주자의 《사서집주》와 《주자어류》도 읽게 되었다. 나중에는 《성리대전》도 꽤 읽었다. 《화담집》 《율곡집》 《퇴계집》 《삼봉집》도 읽었지만, 그다지 재미있어하지는 않았다. 당시 나는 대학원에 수업이 있는 날이면 신촌으로 가고, 그렇지 않은 날은 광릉 봉선사에 주로 있었다. 절에서는 규봉종밀의 《원각경대소초》와 장수자선의 《대승기신론필삭기》 등을 주로 배웠다. 마침내 석사학위 논문을 써야 해서, 위에서 말한 그런 주제를 잡았다. 인간의 내면적 가치에서 도덕적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계열과, 한편으로는 형이상학적 원리에서 도덕적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계열이 확연하게 내게는 구별되었다. 공자라든가 자사 등 원시 유학자들은 인간 내면의 가치에서 도덕을 논하는 것으로 나에게는 읽혔다. 그리고 이런 양상은 중국의 화엄종 승려들도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육산상도 왕양명도 그래 보였다. 한편, 《주역》 〈계사전〉이나 《노자》(왕필 주) 그리고 남송 대의 성리학자들은 형이상학적인 원리에서 인간의 가치문제를 도출하는 것으로 보였다. 여기서는 간단하게 표현했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들 사이에도 약간씩 다름이 있다. 그리고 시대의 변천에 따른 변화들도 있다. 당시의 생각을 정리한 논문이 〈실천인식능력의 기초 및 그 정당성에 관한 논구: 중국의 ‘이학(理學)’과 ‘심학(心學)’의 도덕률을 중심으로〉이다. 석사논문 속에 ‘심학’의 범주 속에서 규봉종밀의 일부 사상을 거론하였다. 그러자니 자연 화엄에 관한 국내의 논문을 읽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장원규 교수의 〈규봉(圭峰)의 교학사상과 이수(二水)·사가(四家)의 화엄종재흥(華嚴宗再興)〉(《불교학보》 제16집, 1979)을 읽게 되었다. 이것이 장 교수의 학문과 처음 만남이다. 다음은 1984년부터 내가 대학 강사로 이 학교 저 학교 다니던 때이다. 이때 만난 책이 장원규 선생의 《중국불교사》(고려원, 1983)이다. 이 책은 1976년 동국역경원에서 처음 출판했다. 강사 시절 교재로 이 책을 썼다. 불교학을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생각해 본 적은 예나 제나 없다. 하나의 ‘학’이 되기 위해서는 ‘독자적 방법론’과 또 ‘고유 영역’이 있어야 하는데, 나로서는 불교학의 ‘학적 방법론’을 배워보지 못했다. ‘고유 영역’ 역시 나에게는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봉선사에 글을 배웠지만, 전근대적인 전통 방식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동경대학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참으로 우연한 기회였다. 중국의 불교를 연구하고 싶었다. 인도철학과에서 기무라 기요다카 교수에게는 주로 중국 화엄 관계 수업을, 스에키 후미코 교수에게는 주로 일본의 법화사상에 관한 수업을 주로 들었다. 오카야마 하지메 교수에게는 중국 정토 관계 수업을 들었다. 이분들은 ‘불교 자체’에 관심이 있었다. ‘중국의 불교’에 관심이 많았던 나로서는 재미가 없었다. 나의 이런 경향을 아신 기무라 교수께서는 중국철학과의 미조구치 유우조 교수에게 보내주었다. 언제나 생각해도 고마운 일이다. 그때부터는 중국에 푹 빠져서 살았다. 선어록도 중국어로 읽고, 중국 지성사 탐구의 일환으로 중국불교 텍스트를 읽고, 지역학으로서 중국학 연구 방법론을 배웠다. 유럽의 동아시아 인식도 비판하고, 도대체 우리 앞에 주어져 있는 ‘중국’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고, 글 쓰고 이러면서 세월을 보냈다. 백서·죽간·목간을 비롯한 출토문헌과, 돈황사본과 각종 문집 등 고문서를 읽었다. 중국철학과와 동양사학과와 중국어문학과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한적(漢籍) 코너’에 박혀 살았다. 이렇게 해서 쓴 박사 논문이 〈규봉종밀의 ‘본각진심’ 사상 연구〉이다. 중국 지성사 연구를 밑에 깔고, ‘본각진심’의 사상사적 출현을 규명하였다. 그리고 이 개념으로 종밀의 철학사상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했다. 좋은 평가를 받았다. 무엇보다 운이 좋았다. 학위증 받기 한 달 전인 1994년 3월 1일 자로 연세대에 발령을 받았으니 말이다. 이 대목에서 다시 장원규 교수에 관해서 이야기해야겠다. 이 궁금함은 단지 남에 대한 궁금함을 넘어,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이었다. 나는 왜 ‘중국의 불교’를 연구하는가? 이것이다. 대학 시절에도 그랬지만, 나의 중국 관심은 ‘호기심’이다. 그 사람들의 역사가 궁금했고, 말이 궁금했고, 문자가 궁금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이 궁금했다. 나에게 중국은 단순한 ‘외국’이다. ‘외국학’으로서 중국이었다. 이 점은 ‘중국의 불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소위 말하는 ‘진리 탐구’라는 발상을 나는 별로 해보지 않았다. 서양의 철학에 대한 내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이 모두를 한마디로 말하면,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한 호기심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학문을 시작한 내가, 사상이나 철학을 해당 지역과 시대의 역사적 지평 위에서 연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얼굴도 뵙지 못한 장원규 교수를 기억하는 것도 이런 점에서이다. 역사 속에서 개별 사상이나 인물을 연구하고, 다시 이렇게 연구된 결과로 역사를 다시 재구성하는 변증적 과정이 필요하다. 분명, 장원규 교수에게는 ‘사상의 역사’라는 학문적 반성이 있었다. 나는 그게 좋았다. 장원규 교수에게는 두 권의 불교사 책이 있다. 하나는 《인도불교사》(동국역경원, 1973)이고 다른 하나는 위에서도 말한 《중국불교사》(동국역경원, 1976)이다. 이 두 책은 모두 장 교수께서 동국대학교에서 강의하던 강의안으로 쓰던 노트를 정리한 것이다. 노트로 때로는 프린트본으로 있던 원고가 책으로 정리되는 과정에는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권기종 교수의 수고가 깃들어 있다.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나는 권 교수님과 전화 통화를 했다. 당시 권기종 교수는 장 교수님을 지도교수로 모시고 박사학위 과정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권 교수님의 최종 박사 지도교수로는 이지관 스님이 되셨지만, 처음은 장 교수님이었다고 한다. 장 교수님께서 1975년 정년퇴직하시고, 또 당시 ‘구제(舊制)박사 제도’가 ‘신제(新制) 박사 제도’로 바뀌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권 교수님은 《불교학보》(제7집)가 장 교수님의 ‘회갑 기념호’이니, 거기를 보면 장 교수님의 약력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도 해주셨다. 아래에서 그 책에 실린 장 교수님의 약력과 정년 후의 행적, 그리고 저술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런가 하면 교무처장 재직 시에 교양과목과 전공과목을 나누어 특화시켜 운영하였다. 교양과목은 그 범위를 대폭 늘려 전공과 관계없이 대학생으로서 기초 교양을 넓힐 수 있도록 배려했고, 전공과목은 사회 진출과 학문탐구를 고려하여 그 폭과 깊이를 동시에 강화했다. 이런 장원규 교수에 대해서 일곱 살 연상인 김동화(1902~1980) 박사는 이렇게 찬사를 보낸다. “선생의 학역(學域)을 본다면 그것은 물론 불교학이지만, 불교학 범위는 실로 광범위하며 연구 업적과 내용에 있어서 당당히 알찬 논문을 발표하였다. 단순한 교수라는 직업감 외에 불교계의 선각자로서, 교도로서 의무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김동화 박사의 말 속에 나온 ‘교도’는 ‘불교도’의 뜻일 것이다. 스님으로서 당연했겠지만, 불교를 좋아했다. 일반 불자들의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대원불교대학’으로 유명한 대원 거사 장경호 이사장을 많은 사람은 기억할 것이다. 대원 거사는 1972년 2월부터 매주 토요일 정기 좌담회를 개최했다. 그 좌담회에는 스님과 동국대의 교수, 방송인 등 당시 유명한 분들이 많이 참석했다. 장원규 교수도 이 좌담회의 단골이었다. ②에서는 대승보살의 출현을 비롯하여 《화엄경》의 10지 사상이 출현하게 된 경전 발달사적 내력에 대해서 연구 조사하고 있다. 그리고 ⑦에서는 인도의 《화엄경》의 성립과 용수와 세친 등에 의한 화엄 연구를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⑧에서는 《화엄경》의 한역과 초창기의 연구사를 정리하고 있다. 십지를 연구하던 남도파와 북도파의 아뢰야식설을 비교하고, 또 섭론학파의 의식설을 해명하고 있다. 그런 다음에는 두순과 지엄의 교학사상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⑩과 ⑪에서는 현수법장의 화엄교학을 서술하고 있다. 법장의 교판론을 비롯하여 교학사상을 다양한 각도에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⑫에서는 청량징관의 화엄교학을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⑬에서는 규봉종밀의 교학사상과 송 대의 진수정원과 장수자선의 교학사상을 서술한다. 끝으로 ⑨에서는 신라의 원효와 의상의 화엄사상을 비롯하여, 당나라의 거사 이통현의 화엄사상을 서술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결국 중국 화엄의 대가들에 대해 장원규 교수는 거의 섭렵하고 있는 셈이다. 거기에다 해동의 원효와 의상까지도 말이다. 그런데 참으로 아쉬운 점이 있는데, 아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일본에서 연구된 학설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다. 간혹 일본 연구자의 성명과 게재된 출전을 제시하지만, 대개는 그렇지 못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일본에서 중국 화엄을 연구해온 성과물을 한글로 잘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주목하는 개념도 일본 연구자들의 그것을 반복하고 있다. 예를 들면 종취론, 교체론, 5교, 10종, 교판론, 삼성동이설, 인문6의, 상즉상입, 10현 연기, 6상원융, 성기론, 선교일치론, 일념삼천설, 4법계관 등등으로 말이다. 이 점은 같은 화엄을 연구하면서도 독자적인 견해를 보였던 김잉석 교수의 《화엄학개론》(동국대학교출판부, 1960)과는 다르다. 김 교수의 이 책에는 조선 후기 전라도 일대에서 성행했던 우리나라 강사들의 화엄교학 연구 성과가 곳곳에 노출되어 있다. 장원규 교수는 젊은 시절 출가하여 전통 강원에서 이력을 마친 사람이다. 그리고 동경 유학을 통해서 근대적 의미의 학문을 접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근대적인 방법을 도입하여, 이 지역에서 화엄을 연구하던 특히 조선 후기의 화엄교학 연구 결과를 본인의 연구에 결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석전 박한영과 혜찬 진진응 두 강백에게 수학했음은 위의 생애 부분에서 보았던 대로다. 석전 박한영은 전통 강사로서 조선 숙종 이후 이 지역 화엄전통을 한 몸에 이어오는 대가이다. 간단하게 그 내력을 보기로 한다. 80권본 《화엄경》이 조선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역시 숙종 7년(1681)에 임자도에 대장경을 실은 배가 난파된 사건 이후이다. 당시 순천 송광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백암성총(1631~1700) 선사는 5,000여 판에 달하는 화엄교학 계통의 서적을 판각한다. 이때 청량의 《대방광불화엄경소초》가 판각되어 낙안의 징광사에 소장되었지만, 81년이 지난 1770년 소실된다. 그 후로 영조 연간에 설판상언 강백이 영각사에서, 또 철종 연간에 영기 선사가 봉은사에서 판각한다. 백암성총의 전통은 제자 무용수연(1651~1719)에게 이어져 화엄의 강의가 점점 확산되어 갔다. 한편, 편양언기(1581~1644)의 문하에 화엄 학승들이 많이 배출된다. 편양의 문하에서 풍담의심(1592~1655)이 나왔고, 다시 풍담 문하에 월담설제, 월저도안(1633~1715), 상봉정원 등이 배출되어 화엄강학이 계승된다. 다시 월담설제의 문하에는 환성지안(1664~1729)이 출현하여 영조 원년(1725) 금산사에서 화엄 대법회를 열고, 다시 환성의 문하에 ‘화엄십지이구지보살’로 칭송되는 설파상언(1701~1769) 강백이 출세한다. 한편, 월저도안의 문하에 설암추붕(1651~1706)이 나와 해남 대둔사에서 강학을 했고, 설암추붕의 문하에 회암정혜(1685~1741)가 출세하여 순천 선암사에서 화엄을 강한다. 한편, 상월새봉이 영조 30년(1754) 순천 선암사에서 화엄 강회를 연다. 상월새봉의 강석에는 묵암최눌(1717~1790), 연담유일(1720~1799), 사암채영, 용담조관(1700~1762) 등도 참석한다. 이 중 묵암최눌의 《화엄품목회요》는 지금도 화엄 강사들의 손을 떠나지를 않는다. 《화엄품목회요》는 청량의 《대방광불화엄경소초》(荒字卷)에 나오는 ‘화엄10종분과’를 정리 소개하면서, 한편으로는 미진한 부분을 보충한 것으로, 간경의 지남이 되어 왔다. 묵암최눌과 쌍벽을 이루는 화엄 종장은 연담유일인데, 연담을 길러낸 화엄 종장이 바로 설파상언이다. 설파상언은 호암체정과 회암정혜 회상에서 화엄과 선을 배운 당대 최고의 학승으로, 경상도 안의에 있는 영각사에서 《화엄경수소연의초》를 판각하기도 했다. 연담이 비록 법계상으로는 설파와 사형사제간이지만, 실제로는 설파의 문하에서 30여 년간 화엄을 배운 제자이다. 한편 영남 출신이지만 설파상언을 흠모한 인악의첨(1746~1796)이 설파의 화엄 교학을 계승한다. 인악의첨은 설파의 《화엄은과》를 바탕으로 《청량소초》에 대한 사기(私記)를 내기도 했다. 한편 설파의 은법 제자로 백파긍선(1767~1852)이 출세하여 화엄과 선문(禪文)의 ‘설화(說話)’ 전통을 이어간다. 백파의 학문은 다시 세월이 한참 지나 구한말의 석전 박한영에게 이어진다. 이들은 화엄을 분석하는 전통 방법을 서로 전수했다. 그 대표적인 방식의 하나가 ‘화엄10종분과’이다. 《화엄경》 전체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기 위한 연구자들의 ‘궁리’의 산물이다. ‘10종’이란 ①본부삼분과(本部三分科) ②문답상속과(問答相屬科),③이문종의과(以文從義科) ④전후섭첩과(前後躡疊科) ⑤전후구쇄과(前後鉤鎖科) ⑥수품장분과(隨品長分科) ⑦수기본회과(隨其本會科) ⑧본말대위과(本末大位科) ⑨본말편수과(本末遍收科) ⑩주반무진과(主伴無盡科)이다. 이 ‘화엄십종분과’는 《대방광불화엄경소초》(荒字卷)에 실린 것으로, 18세기 이후 조선 화엄 강사들의 간경의 지침이 된다. 조선 후기에는 《화엄경》의 경문 전체 체계를 꿰뚫기 위한 각종 ‘과(科)’와 ‘도(圖)’가 만들어진다. 이런 전통은 석전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런 전통 속에서 최근 만들어진 것이 《화엄경소초과도집》(월운,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1998)이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조선 후기의 《화엄경》 연구의 역사와 인맥을 소개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장원규 교수는 이런 ‘이력’을 승려 시절에 다 배운 사람이다. 게다가 동경에 유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또 동국대 교수로 재직했기 때문에, 조선 후기 이래 이 땅의 전통 속에서 중국의 화엄을 연구하는 기반을 마련할 기회가 있었다. 중국의 화엄교학에 대해서는 중국은 물론 일본, 서양 그리고 한국에서 연구된다. 조선 후기에 내려오는 이 지역의 연구 전통을 살린 화엄교학 연구가 절실하게 기대된다. 나의 화엄교학 연구는 조선 후기 이 땅의 전통을 계승하려고 한다. 그 첫 작품이 졸저 《규봉종밀과 법성교학》(올리브그린, 2013)이다. 가까운 시일 내에 일본에서 수입된 시각이 아닌, 조선의 시각에서 화엄교학에 대한 정리서를 낼 계획이다. 지난 6월부터 조계종 전법회관에서 매주 월요일 청량소초를 강의하는 것도 이런 계획의 연장선에서이다. 이 책은 모두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래되어 경전이 번역되던 시대이다. 제2장은 연구시대라고 이름을 붙였다. 여기에서는 삼국시대와 위진남북조 시대의 불교 사상과 승려 사원 등에 대해서 다루었다. 제3장은 건설시대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장에는 주로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를 안배했다. 수 대의 삼론종·천태종·삼계교를, 비롯하여 당대의 정토종·화엄종·율종·법상종·선종·밀교 등의 교리와 인물들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제4장은 계승시대라고 이름을 붙였다. 주로 5대와 송 대와 원·명 시대를 배치했다. 여기에서는 앞 시대의 계승 차원에서 설명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송 대에 만들어진 대장경에 관한 서술이 들어간 것이다. 제5장은 쇠퇴시대라고 이름을 달아, 청 대의 거사 불교와 청말 민초의 사정을 아주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 내용은 기존에 일본에서 나온 중국불교사를 간략하게 요약한 수준이다. 특히 중국불교를 13종으로 나누어서 이해하는 시각이 그렇다. 13종이란 비담종, 성실종, 열반종, 지론종, 섭론종, 삼론종, 천태종, 정토종, 화엄종, 율종, 법상종, 선종, 밀교(진언종)이다. 그리고 시각도 일본 명치 시대와 쇼와 시대의 일본 학자들이 중국불교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대로 소개된다. 이런 시각은 이 책의 〈서설〉에 잘 드러나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해 보자. “이와 같이 중국불교는 인도불교가 전래 발전한 것이기는 하나 아시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고 있다. 따라서 중국불교의 지식이 없이는 인도불교도 바른 이해를 얻기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이것은 결코 단순히 인도불교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거의 한역(漢譯)으로 보존되어 있기 때문만 아니라, 교리조직의 흐름과 인도로부터 중국에 주입된 과정이 한층 더 중요한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위의 인용문 중 “중국불교의 지식이 없이는 인도불교도 바른 이해를 얻기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는 당시 일본 학계의 관점이 그대로 노출된다. 이런 시각은 다음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중국불교의 교리조직을 보면, 인도불교의 제 논사의 학설은 거의 중국불교의 제 학자의 학설보다 깊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중국불교의 정화라 불리는 천태종·화엄종의 교판 및 교리의 강격(綱格)으로 보면, 용수·제바 및 무착·세친의 학설 및 그 학계(學系)의 학설은 별교(別敎) 또는 종교(終敎)의 분제(分齊)에 머물러 있고, 결코 대승원교(大乘圓敎)의 영역에 들어가 있지 않다. 아무리 광대해석하더라도 대(帶) 또는 겸(兼)의 원교이거나 동교일승의 교리이지 순원독묘(純圓獨妙)일 수가 없고 별교일승일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인도불교의 발달을 고찰할 경우에는 이런 견해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도불교와 중국불교를 함께 연구해야 불교 전체의 교리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음을 말해둔다.” 장 교수가 이 인용문의 말미에서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지역 불교사에 대한 설득력 있는 사관을 갖추었다고 보기 힘들다. 중국의 불교를 바라보는 한국에서 연구하는 학자로서 독특한 시각도 보이지 않는다. 또 인용한 〈서설〉에서 드러낸 중국불교를 바라보는 관점이, 이 책의 내용에 수용되어 있지는 않았다. 이 책은 강의 노트에서 출발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건이나 인물 내지는 개념의 나열하는 서술식이지, 어떤 사상이나 사안을 논증적으로 증명해간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좋아하는 것은 위에서도 말했지만, 역사적인 맥락에서 사상을 연구하려는 장원규 교수의 시각 때문이다. 역사적 탐구를 소홀하게 하지 않는 장원규 교수의 시각은 《인도불교사》(동국역경원, 1973)에도 드러난다. 이 책의 〈머리말〉에서 장 교수는 이렇게 시작한다. “불교학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불교사는 필수불가결의 것이다. 더구나 인도불교사야말로 불교의 연원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4)의 시각은 불교 연구에만 국한하는 영향이 아니라는 점에서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 문화권 밖에서 생성되어 유행하는 사상을 기준으로 불교를 거기에 짜 맞추는 시각의 밑바닥에는 서양은 선진화되었고 더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것은 서양의 어떤 사상에 입각하여 불교를 분석하고, 불교에도 그런 요소가 있음을 논증하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양자역학의 이론으로 불교를 설명하여 불교의 과학성을 논변하는 것 등이다. 불교와 민주주의를 비교하는 연구도 이런 시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시각은 중국과 북한의 경우는 역사유물주의 입장에서 불교를 분석하는 쪽으로 드러난다. 2)의 문제점은 아주 뿌리 깊은 것으로, 오늘날도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 단적으로 표현하면 이런 시각에 의한 불교연구는 ‘승학(僧學)’이지 엄밀한 ‘학(學)’으로서 ‘불교학(佛敎學)’이 될 수는 없다. 3)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중국 불교에서 ‘종파’라는 것이 과연 지금처럼(특히 일본처럼) 확연하게 구별되었던 것인지를 되물어봐야 할 것이다. 결론을 미리 말하면 중국불교에서 ‘종(宗)’ 개념의 유래는 ‘교상판석’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일본처럼 애초부터 폐쇄적 요소는 없었다. 중국불교 내지는 중국 선종을 교파별로 나누어 이해하는 것은 오히려 일본불교의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으로, 중국이나 한국의 경우는 그와 전혀 다르다. 우리는 종파라는 분파주의에 의한 불교 연구를 하루빨리 청산해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제시한 문제점과 해결을 위해선 필자는 우선 문헌을 허심탄회하게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사실에 의해 문헌의 진위를 가리고, 각 문헌이 어느 시대의 사상계에서 만들어진 것인지를 확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개념 혹은 한 어휘라도 소홀히 여기지 말고 엄밀하게 그 역사성과 사상적 배경을 밝혀야 불교학 연구가 바른 괘도에 오를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싶다. 끝으로 불교 자체를 ‘방법(方法)’으로 이해하는 시각을 제안하고자 한다. 즉 불교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불교를 방법으로 삼아 동아시아 사람들이 외래 사상인 불교를 어떻게 이해했고 자기화했는지를 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교를 바라보는 이 지역 사람들의 사유를 추출해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불교라는 보편성은 그것대로 유지되면서, 불교를 매개로 전개된 그 지역 사람들을 특수한 이해 방식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특수성이 모여서, 서로의 특수성을 각각 확인하고 인정하는 데서 진정한 동아시아론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
신규탁 / 연세대 철학과 교수. 연세대학교 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 동경대학 대학원 중국철학과 박사. 주요 저서로 《화엄의 법성철학》 《규봉종밀과 법성교학》 《선문답 일지미》 《벽암록》 《선과 문학》 《원각경·현담》 《선학사전》(공저) 등의 저서와 번역서가 있다. 불교평론 학술상, 연세대 공헌교수상 수상. | ||||
첫댓글 감사합니다 지심귀명 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