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관산에는 지금 억새가 지천이다.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 그 위에 점점이 박힌 수많은 섬, 굽이굽이 이어진 해안선이 억새와 어우러진다. 가을 천관산은 한 폭의 그림이다.
소설가 이청준, 한승원, 송기숙을 동시대에 한꺼번에 쏟아놓은 장흥은 분명 살진 땅이다. 기름진 땅, 풍성한 갯벌, 비릿한 바닷바람이 그들의 장래를 살찌웠을 것이다.
가을이 되면 장흥은 또 다른 이름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억새의 고장’으로 말이다. 그리고 억새의 무대가 되는 곳이 바로 천관산(723m)이다. 다도해를 바라보며 우뚝 솟은 천관산은 빼어난 풍광으로 지리산, 내장산, 월출산, 변산과 더불어 호남의 5대 명산으로 꼽힌다. 높진 않지만 아래에서 올려다본 모습이 웅장하다.
천관산 능선에는 요즘 억새가 지천이다. 가을 바람에 일렁이는 억새의 바다로 뛰어들었다. 하산로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산행 코스는 10여 개나 된다. 관산읍에서 장천재를 끼고 오르거나 대덕읍에서 탑산사를 거쳐 연대봉까지 올라가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억새 산행’이라면 대덕읍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 정상까지 걸리는 시간이 짧기 때문이다. 게다가 4푼(分) 능선쯤인 탑산사까지 자동차로 오를 수 있어 산행 초보자에게도 부담 없는 코스다. 탑산사에서 닭봉이나 구룡봉을 거쳐 오른 뒤 환희대, 연대봉을 지나 불영봉으로 하산하는 것이 적당하다. 산행 시간은 2~3시간. 오늘은 닭봉을 지나 정상에 오르기로 한다. 천관산문학공원이 등산로 입구에 자리한다. 국내 유명 문인 54명의 육필 원고가 새겨진 문학비가 객을 맞는다. 질박한 글귀를 가슴에 담고 본격 산행을 시작한다.
길은 시작되면서 금방 가팔라진다. 두 사람이 나란히 오르기가 어려울 정도로 폭이 좁다. 돌이 많아 전진하기가 쉽지 않다. 잡목이 우거졌다. 하지만 나무가 크지 않아 햇빛을 보는 데는 문제가 없다. 숲길은 약간 지루하다. 그 지루함이 사라진 것은 8부 능선인 닭봉에 도달했을 때다. 닭 볏 모양의 바위가 있어 ‘닭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관목이 줄어들면서 시야가 트인다. 멀리 다도해와 시골마을의 단아한 풍경이 눈을 사로잡는다. 호남정맥이 다도해를 향해 질주하다 천관산에서 잠시 호흡을 고르는 것처럼, 발아래 절경을 바라보며 한숨을 돌린다.
덤으로 얻는 풍경, 바다와 섬
닭봉을 지나 10여 분을 가니 드디어 억새가 한두 개씩 모습을 드러낸다. 바람에 얌전하게 흔들리는 모습이 소박하다. 이내 억새밭이다. 길도 완만해진다. 은빛 물결을 감상하며 쉬엄쉬엄 오르기에 좋다. 억새는 허리 높이까지 자라 있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 도착한 곳은 환희대와 연대봉 사이의 능선. 온통 억새다. 연대봉과 구룡봉 사이 2.8km의 억새밭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하다. 억새밭은 변화무쌍하다. 바람이 일면 파도치는 바다가 되고, 바람이 잔잔해지면 눈 덮인 평원이 된다. 게다가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구룡봉을 비롯해 배의 돛대를 닮은 진죽봉, 환희대, 노승봉 등 하늘로 삐죽이 솟은 기암절벽이 운치를 더한다. 마치 하늘을 덮어쓴 면류관 같다. 그래서 산 이름이 천관산인가 보다. 남쪽으로만 보이던 바다도 어느덧 동쪽까지 뻗쳤다. 구절양장 같은 해안선은 고흥반도와 보성을 꿰뚫고 강진, 해남까지 휘돌아 달린다. 그 뒤로 다도해가 호수처럼 자리를 잡았다. 고금도, 조약도, 신지도, 금당도, 소록도 등 크고 작은 섬이 바다 위에 떠 있다. 그 자체가 한 폭의 수채화다. 바다를 배경으로 끝없이 펼쳐진 억새밭은 가을 천관산의 백미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등 뒤로는 온통 산이다. 억불산에서 시작해 해남 두륜산, 영암 월출산까지 고봉이 줄을 잇는다. 다도해를 배경으로, 또다시 겹겹이 선 능선을 배경으로 억새를 보는 방향을 이리저리 바꿔본다. 똑같은 억새가 금빛과 은빛으로 우아한 자태와 도도한 모습으로 색깔과 모양을 달리한다. 가냘픈 억새지만 수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
고흥반도 뒤로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억새밭에는 붉은 비단이 깔린다. 붉은 비단을 밟고 선 모든 것이 붉게 물든다. 낮 동안 은빛으로 반짝이던 억새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기암괴석도, 그 사이를 신나게 누비던 등산객도 온통 붉은빛이다. 푸른 다도해, 푸른 섬, 푸른 산도 모두 발갛게 변한다. 낙조가 천관산을 보듬고 천관산은 억새를 보듬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억새에 안겨 가을을 만끽한다.
산행 Strategy 구룡봉 코스 탑산사→구룡봉→환희대→연대봉(2시간 소요) 닭봉 코스 탑산사→닭봉→연대봉(1시간 20분 소요) 불영봉 코스 탑산사→불영봉→연대봉(1시간 30분 소요)
맛집 회진항 청송횟집(061-867-6245)은 전어회, 물회가 유명하다 장흥읍에 모텔이 밀집해 있다. 숙소 리버스 모텔(061-864-9200)은 시설이 깨끗한 곳. 피아노 모텔(061-864-8802)은 인터넷 시설이 갖춰져 있다. 가격은 3만~3만5000원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목포 IC로 나온 후 2번 국도를 타거나 호남고속도로 동광주 IC로 나와 1번, 23번 국도를 차례로 타면 장흥까지 갈 수 있다 천관산 도립공원 사무소 061-867-7075 입장료 500원, 주차료 별도 2000~3000원(탑산사 쪽은 무료)
[<천년학> 세트] 주막집에서 학의 비상을 보다
낙조를 감상한 후 하산길은 다소 위험하다. 손전등을 챙겨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구룡봉이나 닭봉, 불영봉 등 어느 코스를 타더라도 한 시간 정도면 출발점에 도달할 수 있다. 산 아래에 도착하니 허기가 밀려든다. 회진포로 차를 몬다.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회진포는 한때 목포까지 배가 다닐 정도로 번성했지만 지금은 작고 아담한 어촌마을로 남았다. 요즘은 전어가 물이 좋을 때니 고소한 전어회로 허기를 달랠 작정이다. 그뿐 아니다. 더위가 가시긴 했지만 광어 등을 넣고 된장을 풀어 시원하게 만든 물회도 생각난다. 게다가 최근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의 세트가 지척이고, 그 영화의 배경이 된 소설인 <선학동 나그네>를 쓴 이청준의 생가가 있는 진목마을도 가까우니 여독을 풀기에는 좋을 듯하다. 하루 묵어갈 숙소도 있으니 너무 늦으면 다음 날 아침에 둘러보고 장흥을 벗어나도 괜찮을 듯하다. 회진의 외곽 방파제 끝에 <천년학> 세트가 있다. 이곳에는 현재 주막집이 한 채 들어서 있을 뿐이다. 하지만 주막집은 소설이나 영화에서 중요한 소재가 된다. 포구에 물이 차면 그 물에 비친 동네 뒤쪽 관음봉의 그림자가 날아가는 학의 형상을 띠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선학동.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학이 사라졌다. 더 이상 포구에 물이 차지 않기 때문이다. 주막집 주인은 우연히 이곳에 묵게 된 ‘나그네’에게 과거 소리꾼 아비와 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면서 학의 비상을 다시 보게 된다. 주막집 대청마루에 앉으면 멀리 완도대교를 배경으로 푸른 다도해가 펼쳐진다. 학을 벗 삼아 소리를 했을 아비와 딸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20년 만에 나타나 아비의 유골을 들고 소리를 했던 여인, 홀연히 떠난 여인을 찾아다니는 나그네. 그들에겐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