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법스님과 야단법석
2012년 5월 6일 사랑어린 배움터 저녁 7시
이렇게 진지하고 고상한 자리인 줄 몰랐어요. 평화학교에서 사랑어린학교로 바뀌는 과정에 대해 들었어요. 이사한다는 소식을 듣고, 와 본다 하면서도 못 오고 있었는데, 기도 100일째 오면 좋겠다고 해서 오게 되었습니다. 와서 보니 대단히 진지하네요. 대단히 고상하고요 (웃음). 조계종단에서 45년간 밥을 얻어먹고 살았어요. 나머지 인생도 거기서 밥을 먹고 살 것 같고, 그렇게 귀중한 인연이 맺어졌는데 마음에 안 드는 게 너무 많아요. 불평도 하고, 비난도 하고, 항의도 하고 살아왔고, 내가 동의할 수 있는, 혼연히 수긍할 수 있는 불교가 뭘까 하는 관점에서 고민한 지 20년이 되었어요. 연륜이 쌓이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이것이 아니구나...’하는 부분을 정리할 수 있었어요. 아닌 것이 정리되니까 더불어 ‘이것이 불교구나..’하는 부분이 정리되기도 하고요. 종단에서 ‘이것이 불교다’고 한 것의 90%는 불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엄정하게 생각하면 그래요. 내가 ‘이것이 불교’라고 생각하는 것도 정말 그런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좌충우돌 살아왔는데 조계종단, 제도권에서 <화쟁위원장>과 <자정과 쇄신 결사 본부장>을 맡아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매주 서울에 올라갑니다. 월급도 받고요.(웃음)
<화쟁위원회>가 무슨 일을 하는고 하니 이런 저런 이유로 편 가르고 싸우는 것을 말리는 일을 합니다, 좌와 우로 나누어 죽기 살기로 싸우는 있잖아요. 남북분단, 한국 사회 안에서도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싸우고, 기독교와 불교, 편 갈라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싸움을 말리는 역할을 못 하고 있어요. 싸움만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이 있어도 사는 것이 편안하지 않아요. 이긴 놈도 그렇고 진 놈도 그렇고..
<자정과 쇄신결사위원회>는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툼을 화해시키고 융화시켜나가겠다는 것입니다. 조계종단에도 그동안 수많은 모순과 혼란, 오류가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성찰하여 건강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 보자고 스스로 성찰하고 정리하고 스스로 변화해서 희망적인 미래를 만들어가겠다는 것이에요 1000년 전, 신라 때 불교 내에서도 종파주의적 갈등이 첨예했어요. 원효스님이 종파주의로 인한 첨예한 갈등과 다툼을 어떻게 화해시키고, 융화해 함께 할 것인가 고민하면서 ‘화쟁사상(和爭思想)’을 이론적으로 정리해냈어요. 막상 자정과 쇄신결사위원장이라는 제안을 받아들여서 하니까 한 사람도 동의하지 않아요. 모든 사람이 걱정하고 실망하고 심지어 “노망했냐?”고 하기도 했어요. 주로 비난하고 실망하는 사람들은 진보적인 사람들, 나랑 가깝고 나를 아끼고, 잘 아는 사람들이예요. 한 사람도 동의하지 않았어요. 왜 그런 일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거예요.
<자정과 쇄신 결사>를 해 보자는 것도 구성원들의 충분한 논의를 거쳐서 나온 것이 아니에요. 조계종단 행정 수반이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뭔가 활력을 얻고자하는 아이디어로 시작된 것이에요. 그러니 다들 비웃고 앉아 있어요. 정치적 쇼라는 거죠. 제가 그걸 덥석 하겠다고 하니 사람들이 혼란스러운가 봐요. 저는 지리산 운동 하면서 모색한 것도 있고 불교가 그런 쪽으로 가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렇게 민족화해, 평화통일, 한반도 생명평화 공동체 실현을 위한 1000일 기도정진을 제안한 지 7-8개월 됐어요. 지난 4월 28일 조계사에서 시작 됐지요. 첫째, 생명평화 천일 정진 둘째, 사부대중 야단법석 셋째, 시민초청무차대회를 진행합니다.
생명평화 천일 정진은 뭐냐면 불교가 지나온 세월을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자면 정성스럽게 뭔가를 해야겠다. ‘민족화해, 평화통일, 한반도 생명평화 공동체 실현’을 위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사찰 조계사라는 절에서 21세기 문명이 갖고 있는 모순과 부작용과 위험성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불교인으로서 무언가 구체적인 것을 해보자고 했어요. 21세기 문명을 고민하는 불교인-이런 것을 조계사에서 실제 해보자는 취지에서요.
두 번째 사부대중 야단법석은 불교의 주체는 부처도 아니고 주지스님도 아니고 사부대중과 종단 구성원이 주체라는 것입니다. 한국불교의 과거를 정리하는 것도 주체적으로 하고, 새로운 미래도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거예요. 어떤 의제라도 중요하고 필요한 의제가 있다면 짚을 건 짚고, 바꿀 것은 바꾸고, 조계사가, 대중이 주체가 되어, 한국 사회 문제와 불교문화 같은 것에 관하여 1주일에 한 번 이야기 마당을 펼치며 한국불교를 건강하게 만들어보자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이라면 어떤 주제건 다 다룹니다.
시민초청 무차대회는 우리 사회 아픔이 큰 소외계층을 초청해서 이 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 분들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응당 할 수 있으면 어떤 역할을 하자는 겁니다. 시민을 부처님으로 모시는 거예요. 초청하고 기도하고, 같이 공양하고 그 분들 이야기를 듣는 자리입니다.
현재 이루어지는 것은 기도를 진행하는 것과 6월초부터 사부대중 야단법석이 있습니다. 무차대회는 첫 대상으로 강정마을이나 쌍용자동차 문제를 다룰까 하다가 청년문제를 선택했어요. 청년의 선택, 청년의 고민을 들어보고 이것들을 공론화시켜보자는 것이죠. 1000일간 지속해 가노라면 우리 스스로 정리하고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쌍용차 친구들, 죽음의 행렬 22명의 문제 심각하게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측할 수 없는 사건과 사고가 아니고 예측이 되는 죽음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예측되지 않는 거라면 변명이라도 하겠는데, 예측되는 것을 해답을 못 찾으면 그건 문제가 있잖아요?
진보와 노동자는 자본가가 나쁘다 하고, 불만하고 비판하고, 책임을 묻고, 요구합니다. 보수와 자본가는 진보와 노동자가 문제라며 해고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쪽저쪽에서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는데 해답은 안 나오고 죽음은 진행되고 있어요. 그 와중에 국민은 없고, 진보진영과 보수진영만 있어요. 민족은 없고, 좌익과 우익만 남아서 싸우던 과거처럼. 이건 고약합니다. 사회통합적 관점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지, 서로 분노를 조직하고, 조직된 힘으로 싸우려 해서는 해답이 없습니다. 그런 방식을 넘어서야 합니다. 통속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여서 해결하자는 것이지요. 어떻게든 승부는 나겠지만, 패자는 피눈물을 흘리잖아요? 뭔가 승부가 아니라 해결해 내는 이런 흐름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여서 해결해 나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제도권종교가 그 일을 할 수 있겠다고 보는 거예요. 제도권 종교계에 그 제안을 했어요. 진보와 보수가 사회통합적 관점에서 해결책이 나올 수 있도록, 국민의 관점에서 죽음의 행렬을 멈출 수 있도록, 사람들이 자기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합리적인 대안을 찾아내 보자고요. 제도권불교계가 함께 해보자고 해서 기본적으로 조계종단 총무원장 초청하여 종교대표 간 오찬하며 사회통합적인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어요. 어떻게 죽음의 행렬을 멈출 수 있는가? 진보니 보수니 진영의 논리를 넘어서, 승부의 논리를 넘어서, 어떻게 해결의 논리로 풀어낼 것인가? 이런 것이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신난다 - 네, 잘 들었습니다. 조금 전에 돌린 질문지가 열 개 정도 들어왔는데요. 저희 학교에서는 무언가 선택을 할 때 제비뽑기로 합니다. 스님이 뽑아 주십시오.(웃음)
질문-스님~사람에게 실망스러운 모습이 보이면 머뭇거려집니다. 스님은 그럴 때 어떻게 해결하시는지요?
도법스님-고민이 많지요. 실망스럽고, 허탈하고, 기분이 나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저는 그럴 때는 빨리 포기합니다. 그래 인생이 그런 거야! 스스로 정리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습니다. 그런 것으로 상처받고, 동요하고, 분노하고, 실망하고, 절망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결국은 내 실력이 부족해서 생긴 현상이에요. 치밀하게 천착해 보면 자기 실력과 역량이 부족해서 나타난 것임이 드러나요. 저 사람이 기분 나쁘게 해도 절대 기분나빠하지 않을 거야! 마음먹으면 화 내지 않을 수도 있거든요. 내가 실력이 부족한 탓이지, 이유가 저 쪽에 있지 않다는 거죠.
질문-저희학교는 학교에 등교할 때 40분을 걸어서 들어옵니다. 아이들이 건강도 좋아지고 여러 면에서 좋아지고 있는데 처음에는 피곤한 데 걷는 것을 원치 않았어요. 학부모도 교사도. 그런데 그냥 진행했습니다. 스님은 5년 동안 3만리를 걸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걷는 것이 좋은지요? 또 걷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말씀해 주십시오.
도법스님-걸음 자체에 많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3만리 걸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기억을 더듬어보면 우리는 태어나서 두발로 일어서서 걷기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몰라요. 왜 죽기 살기로 걸으려고 했을까? 우리가 얼마나 많은 걸음으로 살아냈는지 몰라요. 살 길이 그 길 밖에 없기 때문이에요. 안 걸으면 못 살아요. 걷는다는 것은 자기 존재를 온전하게 하기 위한 몸짓입니다. 자기 존재가 온전하게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그러기 위한 몸짓이 걸음이죠. 그런데 현대 사회에 와서 다 잃어 버렸습니다. 현대인이 그것을 되찾아야 합니다. 어릴 때 일수록 그런 것을 생활화 시키는 게 필요해요. 매를 때려서라고, 패서라도 걷게 해야 합니다(웃음). 다른 하나는 걸음을 생활화 하는 것이 아이 인생을 좌우 한다고 봅니다. 지금 왕따, 폭력 문제도 걷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예요. 만약 자연 속에서 한 달에 1주일만 묵묵히 걷게 한다면 왕따, 폭력, 자살문제 많은 부분 달라지리라고 봅니다. 테크닉으로 되지 않아요. 자연과의 단절이 1차적인 문제라고 봅니다. 현대사회는 자연과 단절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폭력성으로 나타납니다. 또 하나는 온 몸을 쓰지 않아서 나타납니다. 자연에서 온 몸을 써야 전인적인 인격이 형성되는데 관계가 단절되고, 균형의 파괴가 성격과 기질을 이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현대인에게 자연 속에서 걷는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것이 가장 거룩한 행위라고 가치부여 되어야 합니다. 만병통치하는, 만병치유하는 행위로서의 의미가 있어요. 패서라도 걸음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신난다- 그럼 어른들은 어떻게? (웃음)
도법스님-어른들도 패서라도 걷게 해야 합니다(웃음).
질문-隨處作主 立處皆眞이 학교철학인데요. 제멋대로 살고 될 대로 되라는 말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도법스님-隨處作主 立處皆眞은 임제선사 어록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제일 유명한 이야기는 살불살조(殺佛 殺祖),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라는 말입니다. 임제선사는 불교 역사 속에서 부처님의 정신을 가장 잘 계승한 분이고, 부처님의 은혜를 가장 잘 갚은 분이라 할 수 있지요. 수처작주, 입처개진은 주체적으로 하는 것만이 진짜다, 주체적으로 하지 않는 것은 가짜다, 나라 때문에 하고, 부모 때문에 하는 것은 다 가짜라는 거예요. 우리는 누구 때문에 한다고 그러는데 그건 노예가 하는 거예요. 주인은 그렇게 안합니다. 학교에서 시키니까, 권력이 요구하니까, 대부분 그리 살고 있죠. 1등을 하고 싶은 것도 이 사회가 요구해서 그러는 거죠. 내 마음대로 한다고 해서 멋대로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내 주머니에 돈이 10억이 있습니다. 그 돈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다. 또는 내 마음대로 쓸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이 돈을 쓸 수 없으면 그 돈은 내 돈 입니까? 아닙니까?
네, 그렇지요? 내 마음대로 쓸 수 있어야 내 것이지요. 지금 여러분은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쓰십니까? 아니면 누구 마음대로 쓰십니까?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쓰는 것이 주체적인 것입니다. 입이 내 것이 되려면 입을 내 마음대로 써야 합니다. 입을 내 마음대로 쓰십니까? 누구를 미워하고, 분노하고, 욕심을 내고 이런 것들이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쓰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내가 지금 시기질투 할 거야 하고 마음먹고 합니까? 작심하고 합니까? 자기도 모르게 나온다면 우리는 주인으로 못 사는 거예요. 주체적으로 마음먹고 미워한다면 미워해도 돼요. 작심하고 시기질투 하는 것은 괜찮다고 봐요. 100%에 가깝게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못하고 삽니다. 주체적으로 못 살고 있는 거죠. 여러분 주체적으로 욕 합니까? 주체적으로 하는 것은 성질대로 하는 것은 아니고, 냉철하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내 의도대로 쓰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살 때 그 삶은 참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질문- 스님. 자신이 옳다고 느끼는데 벽이 느껴지고, 힘이 들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법스님- 잘 모르겠는데요? 여기 아시는 분 있으면 이야기 좀 해 주세요.(웃음) 제 경우는 거듭 생각하고 확인하고 검토했음에도 옳다, 바람직하다, 틀림없다는 판단이 그대로 지속되면 계속 해야 해요. 벽에 부딪치는 것도 당연하게 보고, 그것이 나의 이익이 아니라 나의 자존심이나 명예가 아니고, 너와 나,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고 도움이 된다면 해야지요. 상황에 맞는 대응해야죠. 때에 따라 눈물로 호소하고,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지를 수도 있고, 하나의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겠죠. 상황에 따라 정말로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바람직하고 유익한 것이라면 해야 합니다. 일이 되고 안되고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고 봐요. 좋은 의도로 좋은 내용으로 노력했으면 노력한 만큼 이루어집니다. 나쁜 의도로 나쁜 내용으로 노력했으면 그 또한 노력한 만큼 이루어집니다. 잘 안 되는 것은 내 욕심대로는 안 됩니다. 노력한 만큼 이루어지는 것이 진리죠. 내 기대만큼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면 좌절감, 패배감에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해요.
질문-한 명은 괜찮은데 여럿이 모이면 말썽이 생기는 이유는 뭘까요?
도법스님- 절 집은 여럿이 모이면 탈이 안 나는데요..(웃음) 아주 친한 친구는 단 둘이 함께 살지 마라는 말이 있어요. 단 둘이 토굴에 들어가 살면 나올 때는 반드시 원수가 돼요. 여럿이 있어 탈이 나는 경우는 사리사욕으로 장난을 치니 탈이 나는 거죠. 많은 문제의 원인이죠. 4대강 문제, 제주 강정문제, 환경문제도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서 탈이나요. 민주주의가 잘 작동 되어야 합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 되어야 수긍이 가는 해답도 나옵니다. 대중이 모이면 탈이 나는 것은 서로서로가 얼마나 중요하고 무서운 존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이용하고 장난쳐서 생기는 일입니다. 대중을 존중한다면 탈이 날 수 없지요. 바보 셋이 모여 지혜를 모으면 문수보살을 이긴다는 말이 있어요. 대중은 그렇게 지혜롭습니다.
질문 - 민주주의를 다수결의 원칙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이 정말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요?
도법스님 - 그것이 진짜 민주주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몇 가지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어요. 정보가 투명하게 제공되어야 하고, 충분히 논의, 검토해서 합의를 도출해야지요. 이해의 관점에 따라 동의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거쳐도 합의가 안 되면 다수결로 결정해야지요. 다수결은 민주주의 방식이지만 합의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지요. 다수결이 민주주의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요. 그런 조건이 전제되어야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문 - 스님이 생각하는 화해는 무엇인가요? 경쟁만 생각하는 사회에서 진정한 화해는 무엇인가요?
도법스님 -좀 쉬운 것을 물어야지(웃음). 내가 점쟁이도 아니고, 하느님도 아니고 망신 줄라고 그래요? 불교적으로 해답이 나와 있어요.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자. 이해하자.” 그것이 해답입니다. 사실은 뭐냐? “너 없는 나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보통 너 없이도 내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너와 나는 함께 존재하는 것이죠. 너를 인정하는 것이 너를 존중하는 거죠. 너에 대해 고마워하면 화해가 되겠습니까, 안되겠습니까?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 존재 하나 하나가 갖고 있는 개성을 인정하는 거죠. 원효스님은 “융이이불일(融二而不一), 둘을 융화 시키지만 하나로 만들지 않는다.”고 했지요. 존재 하나 하나를 인정하고 다양한 것을 융화시키지만 하나로 만들지 않아요. 한국사회에서 다문화가정 이야기 하면서 그들을 한국 사람을 만들려고 합니다. 작심하고 하나로 만들려고 해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죠.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해답입니다.
질문- 천일기도가 끝나고 나면 뭐하실 건가요?
도법스님 - 나는 다음은 잘 모릅니다. 오늘이 제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려고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날 가서 더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 하는 것이죠. 다음 이야기는 부질없는 이야기라고 봐요.
질문 - 스님께서는 생명평화운동을 오래하고 계시는데 생명평화운동을 하게 된 계기를 듣고 싶습니다.
도법스님 - 80년대 민주화운동이 광범위하게 격렬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학생들은 데모를 하고 전경들은 막고, 우리의 젊은이가 편을 갈라서 불신, 분노, 적개심으로 치고 박고, 이 현상을 보며 이것이 대체 뭔 짓인가, 다 같이 사람이고 같은 민족 구성원이고, 한국 사회에서 함께 살아야 할 이웃이고 동반자인데 편을 갈라서 싸우는 진보고, 보수가 이해가 안됐어요. 그런 모순현상들을 보며 고민했고 불교계에서 인생의 해답을 찾고자 했으나 마음대로 안 되고 회의와 갈등만 커져갔죠. 그때 화엄경이라는 경전을 만났어요. 화엄경을 읽고 온 우주가 유기적 생명공동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생명이라는 주제를 만난 거지요.
그리고 또 하나는 어쩌다 텔레비전을 보게 됐는데 드라마 내용이 일제 때 일이예요. 그날 방영된 내용이 아들이 징용당해 끌려가는 것인데 아버지가 아들에게 무슨 수를 써도 살아남으라고 하는 거예요. 제목이 ‘노다지’라는 드라마였는데 인간에게 노다지는 생명과 같은 거잖아요? 생명은 국가, 민족, 이념보다 더 우선되는 거룩한 가치이죠. 80년대에 그렇게 생명의 문제와 만났어요. 90년대 불교로서도 대안이 뭔가, 사회로서도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을 찾기 위해 지리산에 들어왔고요. 좌우대립, 남북문제, 그 아픔을 해결해 갈 수 있도록 문제를 다루려면 생명의 문제로 해답을 찾을 수 있겠다 해서 오늘날까지 왔습니다.
질문 - 마음 속 깊이 상처를 치유하고 싶습니다. 불교적인 관점에서 이야기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도법스님 - 상처가 여러 가지 있잖아요?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죠. 자기 안으로 냉철하게 들여다보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하며 치료하기도 하고, 또 다른 관점에서 나보다 더 약한 사람, 더 어려운 사람, 외로운 사람, 슬픈 사람, 이런 대상을 향해 진정으로 관심을 갖고 그의 아픔을 치유해 주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노력하면 그 과정에서 자기 아픔도 치유된다고 봐요. 대체로 자기 안으로 파고드는데 그런 것보다 누군가에게 진정성을 갖고 전심전력으로 노력하면 자기문제는 저절로 풀리기도 합니다. 그런 걸 부지깽이 수행론이라고 합니다. 부지깽이는 자기 자신이 타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다른 나무를 잘 타게 하기 위해 노력하면 다른 나무도 잘 타고, 자기도 잘 타게 되는 거죠. 나 아닌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고 지극정성으로 치유하고 보살피면 내 아픔도 연소되고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이 부지깽이 치유론입니다 (웃음).
질문 - 기도만 하고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어떤가요?
도법스님 - 그런건 기도가 아닙니다. 행동하지 않으면 기도가 아니죠. 거기에는 진실성이 없는 거예요. 그런 게 어찌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까? (박수-박장대소)
질문 - 불교의 핵심이 공(空)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우려고 해도 비워지지 않잖아요?
도법스님 - 불교는 과학적인 사고와 삶의 방식이다, 그렇게 이해하면 가장 좋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자는 겁니다. 사실에 맞게 살자. 이것이 불교입니다. 불교적인 눈으로 나와 너의 관계를 봤을 때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너 없어도 나는 살 수 있다, 너가 없는 것이 내게 좋겠다, 너 없이 나만 살면 좋겠다는 것은 극단적인 소유욕이고 독단적인 거죠. 불교적인 눈으로 보면 너 없는 나는 존재할 수 없어요. 너에 의지해서만 나는 존재합니다. 너와 나는 함께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야!’ 이때 너의 존재하고 ‘너와 나는 서로 의지해서 함께 존재 해’ 이때의 너의 존재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청중(머뭇머뭇) - 다릅니다.
너 없는 나는 존재 할 수 없어요. 더 이상 설명 않겠습니다. 空이란 별것 아니에요. 너는 너대로 존재하고 나는 나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너에 의지해서만 나는 존재한다면 나누어야지요. 살려면 나누어야 합니다. 고상해지기 위해 나누어야 합니다. 품격 있는 인생을 살기위해 나누어야 합니다. 먹으면 똥을 누어야 합니다. 안 누면 아파요. 죽어요. 아프면 찡그리니 폼이 안 나고. 사실을 사실대로 보자면 나누지 않을 수 없어요.
질문 - 생명의 길을 걷기 위해서 일상에서 어떤 마음을 내고 실천하면 좋을까요?
도법스님 - 사람은 많이 보고, 들은 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자기의 소리를 듣지 않아요. 자기 자신을 보지 않아요. 나 아닌 다른 것을 보니 여기서 길을 잃고 있습니다. 내면, 양심, 생명의 소리, 이런 소리를 자주 듣고 크게 들을 경우 어떤 삶을 살겠어요? 자주 들으면 그 소리를 따라 살 수밖에 없어요. 이익, 권력, 탐욕의 소리를 많이 들고 살면 그 소리를 따라 살게 되고요. 앞엣것은 참된 것이고, 뒤엣것은 조작된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자기 자신을 보지 않죠. 온통 다른 것만 보고 다른 소리를 듣고 있죠. 돈의 소리를 들은 사람은 돈을 따라, 권력의 소리를 들은 사람은 권력을 따라, 온통 조작된 것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자기 소리를 많이 듣고 살아야 합니다. 자기 소리를 잘 듣고, 자기 소리에 떳떳하고, 자기 소리에 당당하게 사는 것이 생명평화의 길입니다. 묵묵히 걷는 시간을 가져서 묵묵히 걸으면 생명의 소리, 영혼의 소리가 울려옵니다. 그 소리를 크게 들으면 다른 유혹에 안 끌려갑니다. 영혼의 소리를 크게, 많이 듣기 위해서 자연 속에서 온 몸을 써서 생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만 해도 많은 부분이 풀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질문 - 불교든 기독교든 참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주는 것이 많습니다. 이론적으로라면 참세상이 올 것 같은데요. 그런데 세상은 복잡하기만 합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는 것인지?
도법스님 -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없다고 봅니다. 실력이 부족하거나, 때가 맞지 않거나, 적재적소에 일을 못해서 못한 것일 뿐이죠. 그것은 아무렇게나 되는 것은 아니죠. 가수 박진영이 먹고살기 위해 30억을 벌어야겠다고 30억을 벌었는데 인생살이가 충분하지 않았답니다. 뭔가 더 있어야겠다 싶어 명예로 채우고 그래도 충족이 안 되어 봉사를 하면 폼이 날 것 같아 봉사를 했는데도 1%가 부족하더래요. 그 부족한 1%를 채우기 위해 요즘은 철학과 종교를 공부한다고 합니다. 저기 벽에 <걸어서 별까지>라고 적혀있는데 저 별이 어디에 있는 거예요?
화엄경에 보면 구도자가 등장합니다. 1%만 채워지면 해결되는데 그 1%를 채우기 위해 온 우주를 더트고 다녀요. 신비하고, 오묘하고, 기적 같은 좋다는 것을 다 찾아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을 다 만나요. 그런 과정 속에서도 해결이 안 돼요 그 과정에서 딱 누구를 만나는데 거기서 끝나요. 누구를 만나겠어요. 그래요 “나” 자기 자신을 제대로 만나면 끝납니다. 돈, 참선, 기도로 안 되는 것은 자기 존재를 잘 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저 그림을 볼까요? (생명평화 로고) 저 그림이 뭘 그리고 있나요?
청중 - 우주, 달, 해, 자연.....
도법스님 - 다 틀렸어요. 자신의 본래 면목을 시각화한 거예요. 나는 어떤 존재인가? 너는 어떤 존재인가? 나의 본래 면목은 본래 부처라는 거죠.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것을 시각화한 겁니다. 내가 곧 우주고 우주가 곧 나라는 것이죠. 화엄경은 그물코의 논리예요. 온 우주는 하나의 그물코로 연결되어있다는 겁니다. 나라고 하는 그물코를 잡아당기면 온 우주가 따라옵니다. 내가 곧 우주고 우주가 곧 나라면 존재 자체가 충만이죠. 내가 곧 우주고, 우주인 자기 자신을 만나는 것을 터득하는 순간 끝나는 거죠.
질문 - 성찰과 깨달음, 수행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부처나 예수 같은 성인의 삶을 살기위해서입니까?
도법스님 - 부처의 삶은 부처의 삶이지 내 삶이 아닙니다. 다만 참고사항입니다. 먼저 살아 간 사람일 뿐이죠. 내 인생을 내가 살아야지, 아무도 못 살아줘요. 숨 쉬는 것을 부처님이 대신 할 수 있나요? 내 인생의 주인은 내 자신일 수밖에 없어요. 부처님에게 들은 해답이 천개라 해도 진정한 대답이 될 수 없죠. 참고는 되겠지요. 스스로 찾고 터득해야 진짜 해답이 될 수 있지요. 내가 곧 우주고 우주가 곧 나다, 이것 말고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달나라에 계수나무에서 옥도끼를 찾는 거죠. 달나라 계수나무 옥도끼를 찾기 위해 참선한다고 계수나무가 찾아질까요? 우리들의 관념이 만들어낸 겁니다. 실제인 것처럼 죽고살기로 찾아도 안 되죠. 전도몽상의 삶입니다. 달나라에 뭔가 있을 거라고 갔죠? 아름답고 특별한 것을 찾으러 갔는데 달나라에 가서 발견한 것이 뭡니까? 딱 하나, 지구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거죠. 선제동자가 온 우주를 돌고 돌아 자기 자신의 완성됨, 거룩함을 발견한 것처럼 달나라에 가서 지구의 아름다움을 발견했어요. 21세기 첨단과학시대에도 지구만큼 완성된 별은 못 찾았죠. 인간만큼 거룩한 존재는 못 찾았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렇습니다. 경전 상에서 이야기 하는 것 대단합니다. 시간적으로 가장 거룩한 시간은 지금입니다. 공간적으로 가장 거룩한 공간은 여기, 가장 거룩한 존재는 지금의 나, 그리고 그대, 그것 말고 거룩하고 신비하고 오묘한 것을 찾는 것은 관념으로 만들어 낸 환상을 쫒는 겁니다. 불교에서 소를 타고 있으면서 소를 찾아 가는 그림이 있지요. 천일기도한다고 소가 만들어집니까? 도는 닦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 이미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것은 이미 이루어진 거룩함이지 뭘 보태서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종교가 말하는 것이 그거예요.
“지금의 거룩함을, 이곳의 거룩함을, 존재의 거룩함을 현재 삶으로 온전히 살라”
그것이 스승의 가르침입니다. 매우 과학적이죠.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 했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여러분 내 말 믿으면 안돼요. 괜찮은 것만 추려서 들으세요.
첫댓글 칭찬 받을라고 겁나게 열씨미 두 손가락으로 타자 쳤습니다. ㅋㅋ 유쾌하고, 통쾌하고, 즐겁고, 고운 자리 고맙습니다.
당신도 겁나게 고맙습니다.
정말 훌륭하시고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도법스님의 말씀 하나하나 놓치지않고 이렇게
완벽하게 기록하여 올려주신 손길위에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아무쪼록 고생많으셨고,
스님의 좋은 말씀을 좋은 글로 다시한번 마음속에 되새기며, 항상 범사에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십시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