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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words: 문화류씨, 연안차씨, 류차문제, 류차동원설, 차원부설원기, 위서, 류릉 사진 저작권
I. 들어가는 말
이 글은 최근 필자에게 제기된 류차문제를 비롯한 몇 가지 종사(宗事) 관련 사항들을
정리한 것이다. 필자는 문중의 구성원 중 한 사람일 따름이기에 개인적인 관점에서,
객관성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쓴 글이다. 이하에서 '류문'은 문화류씨 문중을, 그리고
'차문'은 연안차씨 문중을 지칭한다. 또한 객관적 표현을 위해 존칭을 생략한다.
대개 "차원부설원기"라는 문헌이 위서(僞書)임이 판명된 지금의 시점에서 제기될 수 있는
반론이나 의문점들에 대한 해설이 대부분이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다소 긴 글이다.
1. 류차문제의 변화
2. 원파록의 남은 문제
3. 류문과 차문의 공동 토론 제안
4. 류차문제와 세상 그리고 조상
5. 설원기의 위서 단정
6. 설원기의 위작자
7. 류릉 사진 등의 저작권
II. 본론
1. 류차문제의 변화
류차문제는 차문에서 류문의 시조의 성씨가 가성(假姓: 가짜성)이라고 주장하며
연안차씨유래비(대전 뿌리공원) 등에 그 내용을 명기함으로써 시작된 류문과 차문간의
갈등이다. 류문에서는 차문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 근거가 무엇일까를 깊이 연구하였고,
근본적으로 400여년 전부터 전해 내려온 류문과 차문의 조상이 같다는 믿음(류차동원설:
필자의 명명)은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냈다. 이것은 역사학계의
연구논문에서도 확인이 되어, 류문은 이상의 내용을 족보와 문화류씨유래비(대전 뿌리공원),
종보(유주춘추) 등에 공표하고 차문과 함께 구성했던 공동 문중 모임인 '차류대종회'를
해체하여 차문과의 관계를 해소하였다.
그동안 류문의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차문에서는 여전히 류차동원설에 입각한 주장을
되풀이하며 류문을 비난해 왔다. 그런데 근자에 종친회에 '차류화합위원회'를 설치하고
연안차씨유래비의 수정도 검토하는 등의 변화가 있다고 한다. 곧 차문에서는 그간의 일련의
사태를 일개 문헌(차원부설원기)에서 시작된 차문의 몇 사람이 일으킨 불화로 보고 있고,
류씨에 대해 가짜성 운운한 것을 수정한 후 앞으로는 예전과 같이 동족이성(同族異姓)으로
사이좋게 지내자는 입장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 자체로 큰 모순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문헌에서 시작된 불화'라는 것은
조선 중기에 행해진 역사조작, 곧 원래부터 없던 류씨와 차씨간의 혈연관계의 조작에서
시작한 것인데, 이것을 인정한다면 동족이성으로서 사이좋게 지내자는 말은 아무런 근거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차문의 입장을 받아들이면, 문화류씨 시조의 모독(시조께서 원래
차씨라서 그렇게 표기해야 한다는 주장)의 불씨가 여전히 크게 남아 있게 되며, 잘못된
역사를 사실로 인정하자면서 류문의 동의를 구하는 행위에 동조하는 결과가 될 따름이다.
또한 류문과 차문 간의 일련의 사태를 단지 불화라고만 볼 수는 없다. 즉, 역사학자들과
관련 기관들마저 역사조작이라고 언명하는 사실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예를 들어 우리
할아버지의 제사를 다른 집안에서 무단으로 지낸다면 그대로 둘 수는 없음은 삼척동자도
이해할 수 있는 사안이다.
결국, 화목하게 지내는 것은 어느 가문 사이에서나 필요한 일이고 그것은 류문과 차문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류문과 차문 양문이 '동족이성으로서' 화목하게 지낸다는 것은
세상의 비웃음을 살 일일 따름이다.
한편 잘못된 믿음을 갖고 수 백 년을 내려온 류문도 통렬한 반성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것이 어디서 시작되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정말 반성하고 역사를 바로잡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곳이 어딘가는 자명해진다.
마지막으로, 간혹 "오래전부터 이어온 양문 관계를 한 두 사람이 없앨 수는 없는 법"이라며
마치 소수만이 양문이 혈연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며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암시하는 듯한
발언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이 또한 진실이라는 하늘을 손바닥 하나로 가리려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류문의 종친회 총회, 종보, 족보, 문화류씨유래비, 공식 인터넷 사이트
등에서 거듭 천명된, 류문 구성원 전체가 동의한 사항이며, 사안을 인지하고 있는
세상사람들뿐만 아니라 역사학계에서도 연구를 통해 인정하고 있는 사항인 것이다.
2. 원파록의 남은 문제
만일 류차동원이 근거가 있다고 믿는다면 그에 대해 누구나 수긍할 수 있을 만한 학술적인
논거를 제시하여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에 찬동하지 않는 많은 사실적 논거들을
남김없이 조목조목 반박해야만 한다. 몇 년 동안 지켜본 바로는 차문에서는 이런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원색적인 비난과 단순한 과거 주장의 반복만이 있어왔다.
역사적으로 보면, 문화류씨의 족보 중 하나인 기사보(1689년)에 실린 '원파록'에서
류차동원설이 적극적으로 제시되었다. 이 원파록이 제시한 류차동원설의 근거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문헌적인 가치가 있는 것은 차원부설원기뿐이다. 그런데 차원부설원기가
내용과 저자 등이 모두 조작된 위서임은 이미 규명되어 있다.
그러나 차문에서는 원파록에 설원기 말고도 다른 근거들이 있는 것을 들어 류차동원설이
사실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곧 기사보가 나온 1680년대에 족보에 대한 자료가 지금보다
많았고 당시 선조들이 연구하여 내린 결론을 지금 믿지 않는 것은 선조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이런 주장에 대해 상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류차동원설 관련으로 원파록에 제시된 것들 이외의 다른 자료가 있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대상은 원파록의 내용뿐이다.
기사보의 원파록에는 류차동원의 근거로 (1) 차원부설원기의 내용, (2) 류지원이란 분이
중국출신 류용수라는 사람에게서 받았다고 하는 성씨 내력과 계보 (이하 '류용수의 계보'),
그리고 (3) 차식의 묘비명의 세 가지를 들고 있다. 기사보는 이들의 내용을 정리해서
종합계보를 만들었다. 여기서 (3)은 (1)과 같은 맥락이라 따로 논의하지 않아도 되며,
(1) 설원기는 위서로 공인되었으므로 전적으로 배제할 수 있다. 참고로 후대의 원파록에는
19세기에 등장한 왕배조의 강남보라는 계보가 더 추가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은 차문의
"연안차씨강렬공파세보"에서조차 구체적으로 실명까지 들어 그 거짓을 증거하고 있으니 그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으며 지금 논의의 대상이 될 수조차 없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류용수의 계보에 대한 검토뿐이다.
원파록에 따르면, 류지원은 계보를 얻게 된 내력을 소개한 후 '류씨가 아니면 그 세대가
멀고멀어 알기 어렵다', '세계를 과장함으로써 어리석다고 여길 것이 분명하다'고
밝히면서도 류용수가 (a) 문화류씨임(족보에서는 확인되지 않음)과 (b) 글로 적혀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의 계보에 가치를 두고 있고, 나아가서 (c) 권문해의 말과 그 기록이
일치함을 들어 계보를 인정하고 있다.
이 가운데, 우선 (c)의 권문해란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알려진 "대동운부군옥"의
저자로서 그 안에 위서 설원기의 내용을 그대로 전재하고 있을 따름이기에, (c)는 계보의
인정의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부정의 근거가 된다. 그리고 (b)의 '글로 적혀 있다'는 사실은
조작하여도 글로 적힐 것이므로 아무런 사실 판단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a)의
경우는, 류지원이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겠고, 류용수라는 사람이 문화류씨
족보에 나오지 않지만 그 자신의 말대로 문화류씨임은 받아들이는 데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 사실 역시 진실 증명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수 백 년을 실질적으로 문화류씨 전체가 류차동원설에 속아왔음을 보면 더 말할
여지가 없다. 오히려 '세대가 멀고멀다'는 것이나 '세대의 과장'이란 말들은 지금 보면 그
계보가 조작임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류용수의 계보의 사실성에 대한 류지원의 증명은 실패했다. 그러면 지금 와서 다른
방식이나 논리로 증명할 수 있을까? 무슨 가능한 주장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이
아니라는 증명이 간단히 이루어질 수 있어서 그럴 필요가 없다. 곧, 설원기나 그 위서의
내용을 싣고 있는 대동운부군옥이나 류용수의 계보 모두 구체적으로 언급된 내용의 범위는
다른 점도 있지만 모두 내용이 서로 상통하며 같은 시기에 세상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그 어떠한 문헌에서도, 현존하는 문화류씨 최고(最古)의 족보인 가정보에서도,
금석문에서도 그런 대단한 사실이, 심지어 최소한 그 중 극히 일부라도 뒷받침할 만한
내용이 실린 적이 없다. 또 현존하지 않지만 가정보가 근간을 삼았음이 증명된 우리나라
최고의 족보인 영락보에서도 없다. 따라서 설원기나 류용수의 계보 모두 같은 시기에 같은
목적으로 조작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기사보의 원파록 기사 말미에는 설원기와 류용수의 계보에 대한 토론이 있다. 거기서도
그 계보들이 여러 모순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배경 혹은 근거로 (1) 예전에는 문헌이 많았을 것인데 중국으로 들어갔고,
(2) 조영규, 정도전, 함부림 등이 계보를 불태웠기 때문에 전하지 못했고, (3) 서긍,
정지상, 김방경의 책에 일부 차씨 계보가 나타나 있고, (4) 설원기의 기록의 존재한다는
등을 들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1)은 단순한 추정일뿐더러 그 후 지금까지 중국에서 아무런 관련 근거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2)~(4)는 위서 설원기에서 나온 것들인데, 완전 무시할 수 있으며,
특히 (3)은 설원기가 사실성을 높이려고 동원한 조작 수법 중 하나이다. 고려 이전의
역사서의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 차씨가 대대로 최고위층을 차지해왔다는 설을 지금 어떤
역사가가 받아들이며 그런 것을 적었다는 문헌의 존재를 그 누가 받아들일까. 따라서
원파록에서 류차동원의 계보를 인정한 근거는 모두 타당하지 않음이 증명된다.
또한 기사보의 토론에는 가정보에 그 계보가 실리지 않은 이유에 대한 추정도 하고 있다.
우선 가정보의 편찬자가 계보의 존재를 아예 몰랐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리고 혹시
알면서도 확신이 서지 않아 싣지 않았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이에 대해, 지금까지 연구되고
밝혀진 사실들을 종합하면 후자는 단순한 추정일 뿐이며 전자가 사실이다. 그 계보라는
것이 설원기의 제작과 같은 시기에 누군가에 의해 조작되어 세상에 유포된 것이기 때문에
가정보 편찬 시기에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근자에는 심지어 가정보의 편찬자가 차씨들을 차별하기 위해 일부러 류차동원 계보를 싣지
않았다는 음모론까지 제기되는 웃지 못 할 일도 벌어졌다. 기사보 이후의, 차씨에서 류씨로
이어졌다가 거기서 또 차씨가 나왔다는 류차동원설에 대한 류문의 전폭적인 지지를 보면
그것은 억지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기사보의 기자는 계보에 대해 상당하고 구체적인 의심들을 제기하면서도 일거에 류문을
중국의 전설적 황제(黃帝)의 후손으로 만들어주는 그 계보를 차마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잘못된 판단은, 비록 정교하고 철저한 혹세무민에 속아 넘어간 결과이지만,
후세에 커다란 악영향을 미쳤다. 또한 족보에 관심이 지대했던 사류(士類)조차 설원기뿐만
아니라 여타 조작된 계보들의 정체를 깨닫지 못하게 만든 대의명분에의 지나친 경도(傾倒),
비판의식의 결여, 그리고 '대명천지'로 상징되는 극심한 사대사상도 당시 사회 전체의 암
덩어리였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는 류차동원설을 지지하는 역사적 기록이 전무함을 살펴본 것이다. 그러면 단 하나
남은 논점은 역사적 기록이 없다고 해서 모두 사실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물론 역사적
기록은 완벽하지도 않고 모든 사실들이 기록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성씨 같은 큰 집단
사이에는 사실로 인정할 수 있는 정황이 큰 명확한 기록이 없다면 관계를 설정할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기록이 없지만 거의 모든 대한민국 성씨가 핏줄로 이어졌음은 누구나
느끼고 있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문화류씨가 일부 류씨를 제외한 어떤 성씨, 예를 들면
김해김씨나 밀양박씨 등과도 서로 동원(同源)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연안차씨와도
동원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앞으로 류문과 차문 양문이 좋은 사이를 유지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김문이나
박문과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자 하는 바람과 동일한 성격이다. 다만 류문과 차문의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얽힌 악연을 풀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앞서 있기 때문에
차문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하는 것이다.
3. 류문과 차문의 공동 토론 제안
필자는 오래전부터 차문에 토론을 제안해왔다. 대개 류차문제에 대한 류문과 차문의 대화는
의견의 접근을 해나가는 토론 방식으로 이루어진 적은 없고, 차문이 어떤 주장을 종보
차원에서나 개인 차원에서 하면 류문에서 종보나 인터넷 등을 통해 열심히 반박하고 다음에
차문에서 다시 이전 주장을 다음 종보에서 되풀이 하는 식의 일들이 반복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소모적인 대응들은 자제하여야 한다. 나아가서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 자신의
주장에 잘못된 점이 밝혀지면 자신을 고치면서 서로 가타부타 정리하고 결론을 내는 과정이
있다면 더욱 바람직할 것이다. 필자가 제안한 토론이라 해도 특정한 개인 대 개인의
토론만을 상정한 것은 아니고, 누구나 의견이 있으면 참여할 수 있는 자리를 생각한
것이다. 이런 토론에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 중 하나는 잘못일 수도 있는 문중의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증거와 논리에 입각한 개인적인 의견들을 활발히 개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이런 토론이 이루어진다면 그 토론 장소는 어떤 인터넷 사이트여도 무관하다. 더
적극적으로는 차문이나 류문의 공식 사이트에서 진행해도 좋을 것이다. 공개되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최소한 토론이 시작되고 1년은 올린 글들을 삭제하지 않고 원상태대로
유지한다는 등의 몇 가지 약속을 하고 시작하면 장소는 어디건 누가 운영자의 권한을 갖고
있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의 토론 제안이 차문에서 받아들여진 적은
없지만, 그럼에도 제안을 받아들이기를 기대하고 있다.
4. 류차문제와 세상 그리고 조상
류차문제가 세상에 알려진다면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 류차문제는 선조들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등등의 주장도 있다. 그러니까 류차문제를 더 이상 논의하지 말고 덮어버리자는
뜻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거짓, 조작,
그리고 심지어 더 심한 말로도 묘사되는 일을 당사자가 덮어버리자고 하다니.
정말 수치스런 것은 거짓을 감추어 더 큰 수치로 만드는 일이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가문사를 정립하여 사회와 국가에 기여하는 가문이 되자는 주장이 부끄러울 수는 없다.
오히려 사회의 왜곡과 해악을 바로잡고 없애는, 의미 있고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일이다.
필자는 앞으로도 공개적으로, 여러 방면으로 사실 전파에 힘쓰는 것에서부터 조만간
이루어질 것으로 관계기관이 약속한 국사사전의 개정에 이르기까지 미력한 힘을 다할
예정이다.
류문과 차문이 밀접한 관계가 된 것은 약 400여년 전부터이다. 류문(대승공)에게서 형이
류씨에서 연안차씨가 되었고 동생이 아버지를 이었다고 해서 차문은 형님집안, 류문은
동생집안이라며 같은 집안으로서 서로 통혼도 하지 않고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왔던
것이다. (여기서 이 말을 다시 덧붙이지 않을 수 없는데, 지금 보면 류문이 아버지집안,
차문이 아들집안이라고 해야만 했다. 이왕 거짓 내력에 속았다 해도 류문이 이렇게까지
철저히 차문에 휘둘린 점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양문의 관계는 이제 완전히
해소되었다. 류차문제는 십 몇 년 전에 구체적으로 그 분란의 씨앗이 심어졌고, 2000년대
전반에 전면적으로 표면에 부상했으며, 2000년대 후반에 류문의 입장정리가 완료되었다.
그런데 필자는 이런 일련의 과정이 오히려 다행스런 일이라 평가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가문을 중시하시던 선친께서 기회 있을 때마다 가르쳐주시던 집안 내력을 듣고 자랐다.
그런데 그 중 선계에 관한, 신앙에 가까운 설명들이 단지 꾸며진 허위의 이야기일
따름이었음을 깨달은 현재, 잘못 알고 지내왔던 시절이 유감이긴 하지만, 지금이라도
진실을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후손들에게 그 진실을 전해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천우신조요 천만다행이라 여기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가문의 소중함을 역설하시던 선친을 필자가 조금이라도 소홀하게 여기지
않는다. 필자도 자식이나 제자들을 진심으로 가르치지만 부지불식간에 잘못 믿고 있는 것을
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그런 잘못을 그대로 따르기를 바란다면
필자는 필시 세상없이 우둔한 자일 것이다. 나아가서 후손들이 그런 잘못을 깨닫는데도
고치지 않는다면 후손들을 심하게 책망할 것이다.
필자는 선친도, 그 위의 조상님도, 가문을 위해 충심을 다하신 기사보의 기자님도 모두
존경한다. 결단코 잠시의 곤란함 때문에 조상을 바르게 하고 후손을 바르게 하는 일에
소홀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 경주되는 만큼 더 조상을 위하는 일이 되고,
세상에도 솔직하고 반듯한 모습으로 비춰지고 나아가서 칭송받을 수 있을 것이다.
5. 설원기의 위서 단정
설원기에서 몇 군데 잘못이 발견된다 해도 전체를 위서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 가운데 설원기를 가장 옹호하는 주장은 "설원기가 임의첨삭이 이루어졌지만
원래는 진실을 담고 있는 문헌이다"라는 식의 주장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설원기는 전체가 위서이다.
우선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단지 류차 선계(先系)를 조작했다고 해서 설원기를 위서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필자의 설원기 비평 글에서 상세히 다루었지만, 이수건
교수의 표현을 빌면 "이 책은 편찬체제, 내용서술, 등장 인물들의 행적이나, 序 · 記文,
四十八人의 應製詩 등 어느 것을 막론하고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이 없"다. 임의 첨삭 정도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실제 이 구절이 나온 이수건 교수의 해당 논문보다 필자의 글이 먼저
나왔다. 필자의 설원기 비평은 단지 류차문제의 관점에서 쓴 것이 아니라 설원기 자체의
진실성과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는 문헌비평적인 관점에서 쓴 것이다.
설원기는 그 저작 의도부터 왕의 참칭과 인물들의 행적 조작은 물론 등장하는 에피소드
하나하나까지 정말 이런 악의적인 문헌이 있을까 탄식할 정도이다. 감히 악의적이라고 한
것은, 그 문헌이 처음부터 소설로서 세상에 나왔다면 그래도 조금은 나았을지 모르겠지만,
역사적 조작을 위해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만일 필자의 주장이나 사실 제기 가운데 잘못되었다고 객관적으로 판명되는 것이
있다면 그에 대해 사죄하고 정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 차문에서 설원기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설원기에 대한 논리적이고 학술적인 옹호의 글을 고대한다.
간혹 일성록과 조선왕조실록에 설원기 관련 내용이 있다고 한 필자의 말을 오해하여
그것이 설원기가 허구가 아니라는 증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성록과 실록에 대한
필자의 글들을 보았다면 도저히 이런 주장이 나올 수는 없을 것이다. 일성록은 왕명으로
설원기의 내용 곧 설원기를 '믿을 수 없다'는 취지로 확실하게 세 번이나 확인하고 있는
문헌이다. 또한 실록에는 '차원부'의 성명이 성은 없이 명(名, 원부)만, 그것도 인용된 상소
가운데 또 인용된 구절 하나에서 나왔을 따름이어서, 실록에는 차원부의 존재를 인정하는
기록이 전무하다. 그가 조선의 태조에서 세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왕들과 최고위층
신하들의 지대한 관심 대상이었다는 설원기의 주장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따라서 일성록과
실록은 설원기가 완전 허구임을 증명하고 있다.
필자의 판단에는, 필자가 설원기 관련 사료로서 최초로 발굴해 낸 일성록 하나만 해도 그
내용을 넘어갈 논리는 있기 어렵다. 과연, 경우에 따라서는 실록 이상의 가치를 인정받는
국보인 일성록 전체를 부정할 것인가? 감히, 설원기는 위서임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 다음
대응을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6. 설원기의 위작자
이미 조선시대의 18세기에 설원기를 위작으로 단정한 선인들이 있었다. 그러면 그
위작자는 누구일까 하는 의문은 자연적으로 제기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지금도
설원기의 위작자를 어느 한 사람(혹은 공동저작자들)으로 사진을 찍듯이 100% 확실하게
특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은 대개 어느 역사적 논의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가 모호함으로 점철되는 것만은 아니다.
조선시대 선인들은 설원기의 위작자로 어느 한 사람을 지적하지 못하고, '차식 혹은 그
윗대(軾或其先)', '차천로 부자형제(天輅父子兄弟)' 등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위작자는 한 사람일 수도 있고 여러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데 설원기가 세상에 나온
시점을 추적해보면 설원기를 명시적으로 다룬 "대동운부군옥" 제작 직전임을 알 수 있다.
만일 설원기가 그 전에 만들어져서 내려오다가 그때 세상에 드러난 것이라고 한다면,
선인들의 추정을 바탕으로 하여, 위작자로 '차식 혹은 그 윗대'를 지목하는 것도 가능하며,
만일 제작되면서 곧 세상에 나온 것이라 한다면, 차식은 이미 사망한 상태이었으므로
차천로 형제로 좁혀진다. 이 중에서도 후자의 타당성이 더 높은데, 이는 설원기 자체가
본문의 저자를 박팽년으로 위조하여 사육신 변고를 배경으로 이용하고 있으므로, 역적의
글을 다루는 것이 금기였던 사실을 감안하면, 제작시기는 위로 올라갈수록 그 성립가능성이
더욱 떨어진다는 것도 고려한 결과이다.
더 상세하게 논의해 보자면, 실제 설원기가 "군옥" 이후에 적극적으로 사용된 것은 차식의
신도비(1619년)가 최초이다. 당시 과거급제를 통해 '한미한' 차문을 일으킨 것도 이들임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항일 것이다. 이런 사실들과 함께, 조선시대 사대부들조차 완벽하게
속여 온 설원기의 비상한 문장력이나 내용조작력을 고려할 때 '차식 삼부자' 이외의 사람이
위작자일 가능성은 무척 낮다. 차천로와 차운로는 3살 차이였는데, 각각 1577년(22세)과
1579년(21세)에 과거급제를 한 능력자들이므로, 설원기가 세상에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군옥"의 발행 시기(1589년) 이전에 이미 둘 다 그 위작자로 충분히 가능하다. 두 사람이
함께 공동저술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설원기 자체에서도 그런 증거는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이수건 교수는 그 논문에서 "車天輅의 사람됨과 문장력을 미루어 보아 車氏 三父子
가운데서 그가 주역을 맡아 僞作했다고 짐작된다"고 쓰고 있다. 여기서 선조임금까지
탄식한 차천로의 강상의 어지럽힘과, 여러 차례 탄핵으로 이어진 과거부정이나 신분상승에
대한 열망, 인품 등에 대한 실록의 기록이 이런 추정의 근거들 중 하나로 이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추정에 추정이 거듭되면 자칫 삼천포로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뒤의 추정이 앞의 추정을
사실로 확인해 주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면 그 반대가 된다. 이상의 배경에서 설원기의
위작자로서 크게는 '차식 삼부자', 좁게는 '차천로'를 단정적으로 추정하는 것은 타당성이
높은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차문에서는 후손으로서의 큰 어려움은 있겠지만 단순히 모함이나 루머나 누명이라는 말로
배척하지 말고 두루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설원기가 위작임은 분명한데, 그 위작자에
대해 이런 결론 말고 어떤 다른 결론을 제시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7. 류릉 사진 등의 저작권
최근의 류릉(대승공묘) 사진의 저작권은 재일교포인 류영효씨에게 있다. 저작물은
저작권자의 사용 허락을 받지 않고 무단으로 사용하면 법적인 문제가 된다. 류릉 사진을
사용하고자 한다면 문화류씨대종회를 통해 류영효씨에게 연락하여 사용허락을 얻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물론 문화류씨들도 마찬가지이다. 류릉 관련 동영상 역시 류영효씨가
저작권을 갖고 있으며, DVD의 경우는 그 편집자, 제작자 등에게도 2차 저작권이 있다.
대개 인터넷이나 종보 등의 공개된 곳에 글을 게재할 때는 타인의 저작권에 특히 주의해야
한다. 타인의 저작물을 전부 자신의 것으로 무단 사용을 하면 물론 큰 문제가 되지만 몇
문장만이라도 자신의 것처럼 도용하는 것도 얼마든지 문제가 될 수 있다. 종사(宗事)라고
해도 기본적인 원칙은 따라야만 하므로 주의가 요망된다.
III. 맺음말
지금까지, 필자에게 최근 제시된 종사 관련 의문점들을 중심으로 몇 가지 사항을 생각나는
대로 정리해 보았다. 혹시 이상의 내용에 대한 이의나 반론이 있다면 언제든 환영이다.
다만, 어떤 논의에 있어서나 사실을 제시하고 논증을 하여야 하며 단지 근거가 없는 말이나
관념적 표현이나 감정만 제시하면 수박 겉핥기가 되고 자칫하면 말싸움과 감정싸움으로
비화하게 될 따름이기에, 가급적 구체적인 사실과 그 근거들을 적시하고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판단에는 신중과 신중을 거듭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늘의
해처럼 명백한 증거제시와 논증의 수용마저 언제까지고 미룰 수는 없는 일이다. 류차문제는
미미하나마 어떤 변화를 보이고 있는 듯도 하지만, 아직도 아무런 근거 없이 심정적으로만
위서(僞書) 설원기를 두둔하고, 나아가서 설원기뿐만 아니라 여타의 조작된 문헌들에까지
매달려 류차동원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계속 남아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이런 것을
설득하고 문헌이나 인터넷 등에 만연한 역사적 오류들을 수정하는 일은 한 두 사람만의
힘으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여러분의 지속적인 관심은 물론 관계자들의 지혜로운 판단을
기대해 본다.
2010년 11월 21일
채하 류주환(彩霞 柳朱桓)
첫댓글 채하님 너무나 수고가 많으십니다!! 어릴적 부터 채하님 처럼 부모님으로 부터 류차동원설을 들어 와 믿고 있던터라 이에 대한 사실 규명에 대하여 반신반의 하는 분들이 많이 있을것입니다.더구나 종친회등의 종사에 잘 참여치 않는 종친들은 이 분명한 사실들을 모르고 류차동원설을 그대로 믿고 있을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종문 일부는 좋은게 좋다는식으로 채하님의 걱정 처럼 차문과의 화해를 들고 나와 저항에 부딪칠지도 모릅니다.종친회와 여러 경로를 통해 홍보를 많이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듭니다. 종문을 위해 헌신노력 하시는 류 교수님께 감사를 드리며 힘찬 응원을 보냅니다.
위와 같은 사실을 류문의 개개인이 얼마나 많은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지 의심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타성에 젖어 무관심이 많습니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차문의 사과를 기다리고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차문에서도 왜곡된 가계를 아는 이들은 얼마나 곤욕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엉터리로 꾸며진 역사로 차문의 가계가 드러난 이상 부끄러움을 아는 이는 가슴을 치고 통탄하고 있을것입니다. 없는 조상을 꾸며 잔을 올리다니 말입니다. 류문에서도 채하교수님의 열정에 박수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말없는 다수가 있습니다. 계속 험로를 개척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건투를 기원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또 논리적으로 많은지적 잘하셨습니다. 가문에 채하종원님 같은분이 계시다는것이 자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