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수리고분
흥곡1리(마조리) 출토 동인 동예 부족장에게 진이 준 인장
우각리 오의정
회재 이언적의 손자이고, 충무공 이순신의 막료였던 오의정 이의잠의 간찰(1595, 20세)
불국사에 진을 치고 있는 의병장 황희안에게 보낸 오의정 친필 간찰.
토성리 냉수리신라비
비학산 법광사지 석가불사리탑(삼층석탑)
법광사 석가불사리탑 사리호, 탑지석
법광사지 석불
법광사지 석불
법광사지 출토 금동여래입상(호암미술관 소장)
1898년 음력 6월 2일(양력 7월 21일) (표영삼, <해월신사연대기>(해월 최시형과 동학사상, 예문서원, 1999))
교수형 당하기 직전의 해월 최시형 선생
동학괴수최시형이라는 이름표가 뒷벽에 붙었고
수감 중에 퉁퉁 부은 선생의 두 발이 보인다.
선생은 교수형으로 처형 직전에 힘이 없어서 바로 앉지도 못하고 쓰러지셨다.
1898년 7월 21일 처형 당하기 전에 수감, 재판 중에 촬영한 사진
죄목은 大明律 祭祀편 禁止師巫邪術條를 적용하였다.
1894년 동학혁명 당시 해월 선생이 직접 새겨 쓴 인장. '海月'이란 글자체가 대단히 좋다.
해월 선생의 고향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의 만석리 신광온천탕 다리 옆 하천 가에 있다.
1998년 해월 선생 순도 100주년에 세웠다.
글씨는 신광중학교 이향미 학생이 썼다.
해월 최시형 선생님 말씀
사람을 대할 때에 언제나 어린 아이 같이 하라. 항상 꽃이 피는 듯이 얼굴을 가지면 가히 사람을 융화하고 덕을 이루는데 들어가리라. 누가 나에게 어른이 아니며 누가 나에게 스승이 아니리오. 나는 비록 부인과 어린아이의 말이라도 배울만한 것은 배우고 스승으로 모실만한 것은 스승으로 모시노라.
일이 있으면 사리를 가려 일에 응하고 일이 없으면 조용히 앉아서 마음공부를 하라. 말을 많이 하고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은 마음공부에 해로우니라. 남을 훼방하고 배척하여 삶을 상하게 하는 것은 군자가 이르기를 불효라 하였으니, 사람의 장단을 말하는 것은 도덕에 크게 해로우니라. 잘하는 목수는 구부러진 나무를 거절하지 아니하고 명의는 병든 사람을 거절하지 아니하고, 성인의 도를 배우는 자리에는 어리석은 사람을 거절하지 아니 하느니라.
말은 행할 것을 돌아보고 행동은 말한 것을 돌아보아, 말과 행동을 한결같이 하라. 말과 행동이 서로 어기면 마음과 한울(하느님=천지생명, 천지신명)이 서로 떨어지고, 마음과 한울이 서로 떨어지면 비록 해가 다하고 세상이 꺼질지라도 성현의 지위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만물이 시천주(侍天主, 천지생명을 모심) 아님이 없으니 능히 이 이치를 알면 살생은 금치 아니해도 자연히 금해지리라. 제비의 알을 깨치지 아니한 뒤에라야 봉황이 와서 거동하고, 초목의 싹을 꺾지 아니한 뒤에라야 산림이 무성하리라. 손수 꽃가지를 꺾으면 그 열매를 따지 못할 것이요, 폐물을 버리면 부자가 될 수 없느니라. 날짐승 삼천도 각각 그 종류가 있고 털벌레 삼천도 각각 그 목숨이 있으니, 물건을 공경하면 그 덕이 만방에 미치리라. (영월 직동(稷洞) 설법: 대인접물(待人接物))
수운, 해월선생은 천도교가 아니라 동학을 하고 동학 가르침을 폈으니
안내팻말을 천도교가 아니라
동학이라 해야....
천도교라는 이름은 1905년 손병희 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해월 선생 집터의 홍시
2004년 7월 31일(음력 6월 15일) 오후 4시경
마북리 상마북지 안쪽의 검등골
화전민이었던 해월선생이 수도했던 집터가 남아 있다.
2017. 11. 12. 오후 2시경
龍潭水流四海源 용담의 물이 흘러흘러 네 바다의 근원이 되고,
劍岳人在一片心 검등골에 한 사람 있으니 일편단심이로다.
죽음을 예감한 수운 선생이 1863년 8월 14일, 추석 전날에 찾아온 3살 아래의 해월에게
'修心正氣'(수심정기) 넉 자를 주며 내린 대련. 도통이 수운에서 해월에게 전수된 것이다.
2004년 7월 31일(음력 6월 15일) 토요일 오후 5시경
검등골 해월선생 집터의 감나무에 걸린 궁을기(弓乙=태극)
지금도 동학인이 순례오고 기도한다.
해월 선생 그랭이 축대 집터에는 5그루 정도의 감나무 노거수가 있다.
아직도 감이 열리고
개개비 같은 산새들이 감을 쪼아먹는다.
산새가 쪼아먹은 감과 바람에 떨어진 감
해월 선생은 새소리도 어린이 말도 하늘의 소리라 하셨다.
해월 선생은 머무는 곳마다 감나무를 심었다.
이 감나무도 해월 선생이 심었을 것이다.
해월 선생 집터 동쪽 울타리는 시누대숲(산죽)이다. 기록에도 대숲이 등장한다.
해월 선생 집터
집터 입구에 걸린 궁을기
도올 김용옥 교수 검등골 답사 시
비 구름속 비구름을 가니
검악의 억류에도 바닷달은
흐리지 않는다
땅빠딩이 따기 흘린 땀
못을 이뤄있고
감나무밑 쌓인 그랭이
편심 애오라지 정성일러라
몰래 쌓인 검불은
천기를 가리우고
썩어난 듯 늙은 솔은
아직 그 남은 힘을 버티고 있어라
병중선주(甁中仙酒) 가활백만(可活百萬)인데
검등용골 한수(寒水)에 묻힌 몸은
천지신명 불렀으니
내 어찌 입을 열랴
되돌아가자 마개 막아두고
*땅빠딩이: 마북 저수지 안쪽의 현재의 마북리 지명.
마북리 큰 마을은 마북저수지에 수몰되었고
이 마을의 노거수는 위쪽에 옮겨져 있다.
해월은 외가인 경주 황오리에서 태어났고
고향은 기일이다. 15세에 부친이 돌아가실 때까지
서당에 다녔다. 17세에 기일 저수지 아래의 오금당의
한지제조소에서 노동을 하였다.
19세에 매산리의 손씨와 혼인하여 살다가
10년 뒤에 마북리에서 집강(집강, 마을 이장)을 하였다.
골짜기에 소출이 없어서
땅빠딩이 안쪽의 검등골로 들어가
화전을 일구며 살다가 동학에 입도 하였다.
*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
-(포덕130(1989)년 7월21일)
수운선생 공식 영정. 한국 최초 서양화가 고희동 작
1893년 4월18일자 일본 동경일일신문에 실린 수운 최제우 선생 영정
1905년 의암 손병희 선생 사진
관군에 체포되어 압송되어가는 전봉준 장군
첫댓글 첩지에 사용했던 도장의 글씨는 '월해'이고 '해월'이라 읽습니다. 전형적인 전각 글씨체로
더없이 아릅답습니다.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드래그 금지 해제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