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루터
이것들은 아무도 말로 표현할 수 없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기도들이다. 탄식이 너무도 깊어서,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라는 시편 38:9의 말씀처럼, 오직 하나님만이 그 기도들을 바르게 보시고 제대로 알아들으실 수 있다. 우리가 간구하는 제목들에 대하여 그 정반대의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쁜 징조가 아니라 가장 좋은 징조이다. 역으로 우리가 기도하는 데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으니라”는 이사야 55:8.9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모략과 뜻은 사람의 모략과 뜻 위에 높이 우뚝 솟아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것을 요청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 시작하면, 하나님은 너무도 자주 우리의 간구하는 내용들에 역행하는 경우가 많아서, 우리는 기도하기 전보다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더 화가 나 계시고 우리의 간구한 것들을 전혀 들어주실 의향이 없으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 속에 있는 것(우리 자신의 지혜와 의지)을 먼저 멸하시고 근절하신 다음에 하나님의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길)이기 때문이다. 사무엘상 2:6에서는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정말 자비로우신 모략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선물과 역사(投事)를 받기에 합당하게 만드신다. 우리 자신의 계획들이 다 무너지고, 우리 자신의 행위들이 다 멸해지고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전적으로 수동적이 된 후에야,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와 모략을 받기에 합당하게 준비된다.
교만한 자들(불신자들)은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한다.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처럼 완전하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 아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나란히 두고자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어떤 모양으로 자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불가능한 일이다. 이사야 64:8에서는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한다. 그러나 자기들이 구한 것과 정반대의 일이 그들에게 일어나는 것을 볼 때에.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갖는다. 하나님의 역사(投事)는 사람의 생각 및 이해와 모순되는 어떤 다른 형태 속에 감춰져 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 어거스틴의 어머니의 수많은 기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녀가 요청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그녀에게 주기 위하여 성 어거스틴이 점점 더 깊이 잘못된 생활로 빠져들도록 내버려 두셨다.
- 『로마서 주석』, pp 162-163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 마틴 루터
헬라어 본문에서는 ‘합력하여’(sunergei)라는 단어가 단수로 되어 있는데, 이 동사의 주어가 성령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이 더 본문에 적합하다. 왜냐하면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성도들이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성도들과 합력하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이 우리를 위해 간구한다는 말을 의아해해서는 안 된다. 이 구절은 “성령이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는 말씀에 대한 진짜 해설이다. 성령은 다른 모든 일들에서 우리와 합력하듯이 이 간구에서도 우리와 합력하신다. 사도는 여기에서 어떤 유보조건도 붙이지 않은 채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아는 단 하나의 목적, 하나님의 목적이 존재한다. 하나님 안에는 그 밖의 다른 목적이 없고, 하나님의 구원의 한 목적 외에 그 어떤 다른 목적이 수행되지도 않는다.
이 구절은 사도가 이 장의 끝에 이르기까지 말하고 있는 모든 내용이 딛고 서 있는 토대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택함 받은 자들에게는 성령이 모든 것들, 즉 질병이나 박해 등등 그 자체로 나쁜 것들조차도 선을 이루도록 바꾸어 버리신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사도의 의도이기 때문이다. 사도는 여기서 예정 또는 선택 교리를 거론한다. 이 교리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고 오히려 택함 받은 자들과 성령을 받은 모든 자들에게 주는 마음 편한 위로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 교리는 육체의 지혜를 고수하는 자들에게는 참으로 혹독하고 힘든 말이 된다.
그러나 사도는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8:33,34,35)라고 말함으로써 택함 받은 자들이 운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따라 구원받았음을 나타내 보인다. 그들은 수많은 악착같고 지독한 적들과 그들을 지옥에 빠뜨리려는 헛된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는다. 사도는 육체의 지혜가 아무것도 아니며,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만든다. 하나님은 운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운을 얘기하는 자는 오직 사람들뿐이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는 잎사귀 하나도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우리의 일생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세 가지 생각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성경 말씀들과 하나님의 역사(投事)들에서 수집된, 하나님의 변치 않는 택하심에 관한 증거들이 있다. 사도는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뜻”은 하나님의 예정이나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 또는 개개인들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의미한다. 나중에 9장에서 사도는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를 예로 들어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예시한다(8절 이하). 사도가 분명히 보여주듯이, 이 사람들 서로간의 운명이 달라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예정 때문이다. 끝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과 관련하여 사도는 두 구절을 인용한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9:15);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9:18). 9장과 10장에도 이와 비슷한 구절들이 나온다.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과 관련하여 우리가 고찰해 보아야 할 두 번째 생각은 예정에 대한 모든 반론들은 육체의 지혜(인간의 이성)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뜻에 계속해서 복종시키는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 문제에 대한 해답을 결코 찾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는 육체의 어리석은 지혜는 스스로를 하나님 위로 높이고 마치 하나님의 뜻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이유로 사도는 모든 반론들을 두 개의 짤막한 말로써 논파한다. 먼저 사도는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롬9:20)라고 되물음으로써 우리의 오만을 확인시켜 준다. 그런 후에 사도는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21절)라고 반문함으로써 하나님의 선택을 옹호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과 관련하여 우리가 고찰하여야 할 세 번째 생각은 이 교리는 이 교리에 맞서 반기를 들고 심지어 이와 관련해서 신성모독을 서슴지 않는 육체의 지혜에게는 정말 혹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구원이 결코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행실에 달려 있지 않고 오로지 우리 밖에 있는 것, 즉 하나님의 선택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런 마음은 씻은 듯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성령의 지혜를 지닌 자들은 이 교리로 말미암아 말할 수 없이 행복해지는데, 사도 자신이 바로 그 표본이다. 택함 받은 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은 이사야 35:4에서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은 도처에서 떨림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자들을 칭찬하고 격려한다. 그들이 스스로 절망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서 역사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노심초사하며 떨고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사실 좋은 징조다.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 앞에서 떠는 것은 패역한 자들의 특징이 아니라 택함 받은 자들의 특징이다. 패역한 자들은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을 멸시하거나 적어도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거나 아니면 나 모르겠다는 식의 오만함으로 “그래, 내가 저주받았다고, 좋아, 난 저주받았어”라고 기탄없이 말한다.
우리는 택함 받은 자들을 세 가지 부류로 구별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로는 현재 상태의 하나님의 뜻에 만족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불평을 하지 않으며, 자기가 택함 받았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저주받기를 원치 않는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고 마음으로 그것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다. 적어도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지 않으시고 거부하신다고 해도 만족하고자 한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기들이 정죄를 당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스스로의 뜻과 육신의 지혜를 대체로 다 비운 자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라는 아가서 8:6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체험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한 사랑은 항상 십자가 및 환난과 결합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없다면 영혼은 해이해져서, 하나님을 구하지도 않고 생명의 샘인 하나님을 갈급해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 마틴 루터, 『로마서 주석』, pp 163-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