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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도학의 대종, 한훤당 김굉필
도동서원은 현재 행정구역상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로 되어 있지만, 옛날로 치면 경상우도의 우뚝한 유림(儒林)의 고장인 현풍(玄風)에 있다.
도동서원은 도산․옥산․병산․소수서원과 함께 조선 5대 서원 중 하나로 손꼽히며, 그 권위와 명성은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1454~1504)로부터 나온다.
역사책에 나오는 김굉필의 인간상은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유배 가고 갑자사화 때 사사(賜死)당한 사림파의 문인으로 되어 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역사 서술이란 간혹 이렇게 가볍고 잔인한 데가 있다.
옛 사람들이 훌륭한 유학자를 표현할 때는 거유(巨儒)․굉유(宏儒)라고 하는데, 이것으로도 김굉필을 말했다고 할 수 없다.
동양화에서 달을 그릴 때는 달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주위의 달무리를 그려 달이 드러나게 하는 공염법(空染法)이 있는데, 한훤당의 주위를 보면 점필재 김종직이 그의 스승이고, 벗으로는 일두 정여창, 추강 남효온, 임계 유호인이 있고, 제자로는 정암 조광조를 비롯하여 이장곤․성세창․김일손․김안국 등이 있으니 일세의 거공명유(鉅公名儒)들이 망라된다.
한훤당 김굉필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퇴계가 한훤당을 가리켜 “근세도학지종(近世道學之宗)”이라고 말했듯이 그는 우리나라 도학(道學)의 대종(大宗)이다.
그리하여 중종 때부터 근 50년간의 논의를 거쳐 광해군 2년(1610)에 문묘(文廟)에서 제향할 유학자로 동국 5현(東國五賢)이 결정될 때 그 순서가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등의 순이었으니 한훤당은 오현 중에서도 수현(首賢)이었던 것이다.
한훤당은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나서 1507년(중종 2년)에 신원(伸寃)되어 도승지로 증직받고, 1575년(선조 8년)에는 다시 영의정에 증직되고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리고 1610년(광해군 2년)에 문묘에 동방 오현의 수현으로 받들게 되었으니 생전에 받지 못한 대우를 사후에 더 없는 영광으로 받은 셈이었다.
16세기 중반 서원이 곳곳에 세워지기 시작할 때 퇴계 이황과 한훤당의 외증손이자 예학에 밝았던 한강 정구는 1568년(선조 2년) 한훤당을 모시는 쌍계서원을 현풍현 비슬산 기슭에 세웠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1604년(선조 37년) 지금의 자리에 먼저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고 이듬해 강당과 서원 일곽을 완공하였다.
선조는 이 서원에 도동서원이라는 사액을 내려주니 그 뜻은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의미였다. 도동서원은 1865년 흥선대원군이 전국에 47개 서원․사당만 남기고 모두 철폐할 때도 훼철되지 않아 조선 5대 서원의 하나로 손꼽히는 것이다.
도동서원은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대니산(戴尼山) 밑에 있다. 본래 이 산의 이름은 태리산(台離山) 또는 제산(梯山)이라고 불렸는데 한훤당 선생이 이 산 아래 들어와 살게 되면서 사람들이 대니산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대(戴)는 머리에 인다는 뜻이고, 니(尼)는 공니(孔尼)를 뜻하는 것이니 공자님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처럼 높이 받드는 산이라는 의미가 된다(공자는 짱구여서 공구/孔丘라고도 했고, 니구산/尼丘山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공니’라고도 불렸다).
도동서원 가는 길은 병산서원 가는 길 못지않게 아름답다. 현풍에서 대니산 너머 도동서원으로 가자면 다람쥐처럼 보인다는 다람재가 제법 높고 험하여 나는 걸어서 간 적은 없다.
그 대신 고개 마루에서 반드시 차를 멈추고 거기서 도동서원을 조망하고 간다. 요새는 여기에 한훤당의 시비도 세워놓았고 정자를 지어 도동서원과 도동리 옛 마을을 품에 안고 먼 산자락 사이로 돌아가는 낙동강 가의 그림 같은 강마을 풍광을 만끽할 수 있다.
김굉필의 일생
김굉필은 단종 2년(1454), 무관으로 어모장군(御侮將軍)이었던 김뉴(金紐)의 아들로 서울 정동(貞洞)에서 태어났다. 자는 대유(大猷)였다. 본관은 황해도 서흥(瑞興)이지만 예조참의를 지낸 증조부가 현풍 곽씨와 결혼해 처가인 현풍으로 내려오면서부터 현풍인이 되었고, 할아버지가 개국공신인 조반의 사위가 되어 서울 정동에 살게 되어 여기서 태어난 것이다.
그의 집안은 상당한 재력을 갖추었던 중소지주로 알려져 있다. 어렸을 때 그는 호방하고 거리낌 없어 저잣거리에서 잘못된 것을 보면 그 자리에서 메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19살에 순천 박씨와 결혼해 합천군 야로(冶爐)현에 있는 처갓집 개울 건너편에 서재를 짓고 한훤당이라는 당호를 붙이고 지내다 뒤에 현풍으로 돌아와서는 지금 도동서원 뒷산인 대니산(戴尼山) 아래에 살았다.
이 시절 한훤당은 서울의 본가, 야로의 처가, 성주 가천(伽川)의 처외가 등지를 오가며 선비들과 사귀고 학문에 힘썼다.
1474년 봄 20세의 한훤당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었는데, 그때 한훤당이 <독소학(讀小學)>이라는 시를 지으면서 “소학 책 속에서 어제까지의 잘못을 깨달았네(小學書中悟昨非)”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고 점필재는 “이 구절은 성인이 될 수 있는 근기(根基)”라며 찬탄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오로지 <소학(小學)>만 공부했고, 소학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했다. 10년 동안 <소학>만 읽고 다른 책은 보지 않았으며 스스로 소학동자라고 했다. <소학>이라는 책은 일상생활에서 실천해야 할 윤리를 말한 교과서다.
내용인즉 가정예절부터 부모를 사랑하고(愛親), 어른을 공경하고(敬長), 임금에 충성하고(忠君), 스승을 높이고(隆師), 벗과 친하는(親友) 길(道) 등이다. 이 지루하고 평범한 일상의 몸가짐을 이야기하는 <소학>만 10년간 읽고 다른 책으로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은 불가(佛家)로 치면 거의 수도승의 자세와 같은 것이었다. 비유하자면 그는 학승(學僧)이 아니라 수도승(修道僧)의 자세였고, 이렇게 해서 얻은 그의 도력(道力)은 주위로부터 자연히 존경받게 되었다고 한다.
나이 36세 되던 1480년(성종 11년)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가고, 1494년에는 학문에 밝고 지조가 굳다는 점을 들어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되어 남부 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을 시작하였다. 이어 여러 낮은 관직을 거쳐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기 직전에는 형조좌랑까지 올랐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에서 유발된 무오사화 때 한훤당은 오직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 때문에 같은 도당(徒黨)이라는 혐의를 받고 곤장 80대에 원방부처(遠方付處)라는 유배형을 받고 평안북도 희천(熙川)으로 귀양 갔다. 그때 한훤당은 나이 45세였다. 여기서 한훤당은 운명적으로 조광조를 만났다. 당시 조광조는 열네 살로 찰방인 아버지를 따라 평안북도 어천(魚川)에 가 있었는데, 인근에 한훤당이 유배 왔다는 것을 알고 찾아가 사제의 연을 맺게 된 것이었다.
47세 되던 해 한훤당은 전라도 순천으로 이배(移配)되어 북문 밖에서 조용히 지냈다. 그러나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가 일어나 무오사화의 관련자들에게 죄를 추가하여 한훤당은 사사당하니 7년간의 귀양살이 끝에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향년 51세였다. 묘소는 현풍 선영 가까이에 모셨다.
선생의 저술은 무오사화 때 이미 후환이 두려워 모두 불태워버렸고 친지간에 오간 글의 소장을 꺼렸기 때문에 집안에 내려오는 <경현록(景賢錄)>이 전부인데, 10여 수의 시와 네댓 편의 문(文)이 전부이기 때문에 그의 도학을 문헌으로 알아볼 길이 없다.
그러나 사후 문묘종사 등 사림의 논의가 있을 때마다 그의 도학에 대해서는 거의 이론이 없는 칭송으로 가득하여 이를 모두 모아 편집한 <국역 경현집>(1970, 한훤당기념사업회)은 900쪽에 달하니 한훤당은 역시 몸으로 도학을 세운 분이라 할 것이다.
한훤당 선생을 입향한 전국에 현존하는 서원은 이곳 도동서원과 전남 순천 옥천서원 ,나주의 경현서원, 화순의 해망서원, 상주의 도남서원이 있다. 전남 쪽에 입향 서원이 많은 것은 아마도 유배지에서도 많은 지방 유생들에게 성리학을 전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노방송(路傍松)--다람재에 있다.
일노창념임로진,/노노영송왕래빈,/ 세한여여동심사, /경과인중견기인
한훤당의 시조
삿갓세 되롱이 닙고 세우(細雨)중에 호믜 메고
산전(山田)을 흣메다가 녹음에 누어시니
목동이 우양(牛羊)을 모라 잠든 날을 깨와다
(낱말풀이)
1. 되롱이 - 도롱이, 풀을 엮어서 만든 비옷. 한자로는 녹사의(綠蓑衣)라고 한다.
2. 세우(細雨) - 가느다란 비, 가랑비.
3. 산전(山田) - 산 속의 밭
4. 우양(牛羊) - 소와 염소
5. 깨와다 - 깨우는구나
(현대번역)
삿갓 쓰고 도롱이 입고 가랑비가 촉촉히 내리는 가운데 호미를 들고
산 속의 밭을 매다가, 나무 그늘에서 점심을 먹고 누웠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혼곤한 잠에 빠져 들어 갔다.
얼마나 되었을까, 목동이 몰고 가는 소와 염소의 울음 소리를 듣고 문득 깨어났다.
(감상)
흙냄새 풍기는 한 농부의 모습이 떠오른다. 산 속의 밭을 매고 낮이 되면 점심을 먹고 낮잠도 잔다. 느릿한 소 울음 소리에 정신이 들었을 때는 가랑비도 개고 하늘이 높고 푸르렀을 것이다. 평화로운 농민의 바쁘면서도 한가한 생활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작가는 선비로서 벼슬 자리에 있는 몸이지만 파쟁과 권모술수에 얽힌 정계를 떠나 이런 전원에서의 생활을 항상 그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무오사화에 연좌되어 죽었으니 정말 애석한 노릇이다.
한훤당과 점필재의 결별
. 한훤당의 벗이었던 추강 남효온이 <사우록(師友錄)>에서 기록으로 남긴 한훤당과 점필재의 결별 사건을 소개해 주었다.
“점필재가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조정에 건의하는 일이 없자 김굉필이 시를 지어 올렸다.
‘도(道)란 겨울에 갖옷을 입고 여름에는 얼음을 마시는 것입니다. 날이 개면 나다니고 장마 지면 멈추는 것을 어찌 완전히 잘할 수야 있겠습니까? 난초도 세속을 따르면 마침내 변하고 말 것이니, 소는 밭을 갈고 말은 사람이 타는 것이라 한들 누가 믿겠습니까(誰信牛耕馬可乘)?’
이에 점필재 선생은 그 운(韻)을 따라 화답하기를 ‘분수 밖에 벼슬이 높은 지위에 이르렀건만, 임금을 바르게 하고 세속을 구제하는 일이야 내가 어떻게 해낼 수 있으랴. 후배들이 못났다고 조롱하는 것 받아들일 수 있으나 권세에 구구하게 편승하고 싶지는 않다네(勢利區區不足乘).’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점필재가 한훤당을 덜 좋게 생각한 것이다. 이로부터 점필재와 갈라졌다(貳於畢齋).”
기본적으로 한훤당은 철저히 도학으로 나아갈 수 있었지만, 점필재는 사정이 좀 달랐다는 것이다. 점필재는 사림파의 힘을 키워야 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싫어도 훈구파 한명회의 압구정에 붙인 찬시도 지을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한훤당의 눈에는 이것이 거슬려 이런 시를 지어 비판하고, 종국에는 갈라서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두 분이 갈라섰다는 ‘이어필재’에 대해서는 퇴계와 남명 같은 이들이 나름대로 해석한 것이 있으니 후대 학자들이 이 문제를 본 요체는 스승과 갈라선 한훤당의 처신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있었다.
사실 한훤당이 스승과 결별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윤리적 배반이다. 그가 그렇게 열심히 읽었다는 <소학>의 윤리강령에 ‘융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점에서 한훤당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퇴계와 남명까지 나서서 그를 두둔했다. 퇴계는 학문상의 이유로 갈라설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스승과 제자 사이라 할지라도 지향하는 바가 조금이라도 다르면 갈라질 수 있는 것이다. 점필재 선생은… 그 뜻이 항상 문장을 위주로 하였으며, 학문을 강구하는 면에 종사한 것은 별로 볼 수가 없다. (그러나) 한훤당은… 마음을 오로지 옛 사람의 의리를 힘써 행한 것은 분명하니… 추강의 말에 심히 놀라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남명은 학문의 문제가 아니라 처신의 문제로 보면서 한훤당을 지지했다.
“점필재의 행동은 뒷세상에 비난받지 않을 수 없었으니 만일 한훤당이 점필재와 갈라지지 않았더라면 또 뒷날의 비난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실상 선생이 갈라서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비록 옛날이야기이지만 그 행간에 서린 의미를 보면 우리 현대사회에서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원칙론과 현실론 사이의 괴리, 후배들의 선배에 대한 가혹한 비판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 새겨들을 수 있다.
한빙계(寒氷戒) ~ 얇은 어름을 밟듯이 경계하라
소학동자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한빙계(寒氷戒) 선비정신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선생(1454, 단종 2년~1504, 연산 10년)은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수제자(首弟子)가 되시며, 정암 조광조의 스승이 되시는 분입니다. 한훤당 선생은 평생 소학(小學)을 존숭하여 스스로를 소학동자(小學童子)로 자처 하셨으며, 동방오현(東方五賢)의 수현(首賢)으로 조선의 선비로는 최초로 문묘에 배향되신 분입니다. 아래 내용은 경현록과 남명집에 나오는 남명 조식 선생의 한훤당 선생에 관한 글입니다.
<경현록> 뒤에 씀, 남명 조식
"김굉필 선생께서는 일찍이 뜻을 같이 하는 벗과 함께 지내면서 첫 닭이 울면 함께 앉아 콧숨을 헤아리는 호흡법을 행하셨다. 남들은 겨우 밥 한차례 지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자세가 흐트러졌으나 유독 선생만은 횟수를 낱낱이 헤아렸고 먼동이 트도록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이 일은 이상(二相) 이장곤에게서 들었다." <남명집>
한빙계(寒氷戒)
한훤당(寒喧堂) 선생이 가르침을 청하는 대사헌(大司憲) 반우형(潘佑亨)에게 직접 전해준 18조목으로 이루어진 계(戒)로써 한빙(寒氷)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얇은 얼음을 밟듯이 더욱 경계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 한빙계는 제자 조광조를 비롯한 이 황, 이 이 등 후대 선비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계심(戒心)이 되었다고 합니다.
1. 동정유상(動靜有常) : 움직임과 움직이지 아니함에도 떳떳한 법칙이 있다.
하늘의 道는 둥글어서 움직이며, 땅의 道는 반듯하여 움직이지 아니한다. 양(陽)은 생기면서부터 움직이며, 음(陰)은 생기면서부터 움직이지 아니한다. 그런즉, 고요함은 곧 활동의 기본이다. 그러므로 하늘은 땅을 기본으로 삼으며, 양(陽)은 음(陰)을 기본으로 삼는다. 천하의 모든 물건이 기본이 없이 생기고 이루어지는 것은 없는 것이니, 하늘의 바람, 비, 우뢰, 번개가 변화하며 움직이지마는 만물이 땅에 의존하니 이것은 고요함에 기본을 두는 것이다. 사람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가 변화하며 움직이지마는 하나의 이치가 몸에 갖추어 있어, 고요함을 바탕으로 한다. 곧 하늘, 땅, 사람이 그 움직임과 움직이지 아니함에 떳떳한 법칙이 있는 것이다. 공자(孔子)는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그릇을 몸에 간직하였다가 때를 기다려 쓴다."하였으니, 그릇을 간직한다 함은 도(道)의 본체니 곧 조용함이요, 때를 기다린다는 것은 도(道)의 작용이니 곧 활동함이다. 조용하지 아니하면 그릇이 몸체를 이루지 못하여 활동할 때에 쓸 것이 없다. 조용한 가운데서 그릇을 이루어 놓았다가 때를 기다려 활동한다면 무엇인들 되지 아니하리요.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마땅히 조용함 속에 주장을 삼고 함부로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2. 정심솔성(正心率性) : 마음을 바르게 하고 타고난 본성을 따르라.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사사로운 욕심이 들어와서 해치고, 타고난 본성에 좇아 따르지 않으면 나쁜 생각이 함부로 침범한다. 엄하고 꿋꿋히 성찰하여 사사로움을 물리치고 악을 다스리기를 적소(赤하늘기운소)로 뱀을 베며 황간(黃間)으로 범을 쏘듯 하여야 한다. 그런 뒤에는 내가 이겨 내지 못할 염려가 없을 것이다. 사욕과 나쁜 생각이 생긴 뒤에 이를 퇴치하는 것은 미리 방지하는 것의 요긴함만 못하다. 마땅히 두 번 생각함으로써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 세 번 반성하여 타고난 본성을 따르게 할 것이다. 인심(人心)은 위태로우며 도심(道心)은 은미한 것이니, 바로 잡아서 수양해야만 위태로운 것이 편안해지고 은미한 것이 나타난다. 습관에서 생기는 성격은 참을성 없이 급하며, 타고난 천성은 바른 것이니, 본성에 좇아 따라 습관을 이끌어준다면, 조급한 것이 바르게 되고 바르게 하면 밝아지리라
3. 정관위좌(正冠危坐) : 갓을 바로 쓰고 무릎 꿇고 앉아, 자세를 바르게 하라.
마음속에 이치가 곧으면 밖에 몸이 반드시 단정하여 지나니 거처를 공손히 하면 평안 할 때에 반드시 위태 할 것을 생각하게 된다. 눈길을 존엄하게 하는 것이나 앉기를 시(尸)와 같이 하라는 것은 모두 공경함을 이른 것이다. 어찌 감히 방자하고 태만하리요, 갓을 바로 쓰지 않은 것을 보고 버리고 가는 이도 있고, 다리를 뻗고 앉은 것을 보고 감정을 품은 이도 있었으니, 위의(威儀)를 잃는 것은 학문하는 데에 큰 병통이니 공경히 하고 공경히 하라.
4. 심척선불(深斥仙佛) : 선과 불을 깊이 배척하라.
신선(神仙)이란 방사(方士)들의 허탄(虛誕)한 말인데 진시황(秦始皇)이 약(藥)을 캔다는 데에 속임을 당하였으며, 부처(佛)란 것은 적멸(寂滅)의 도(道)인데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불경(佛經)을 수입해 들어왔으므로 후세에 비방을 듣는다. 이로부터 그 뒤에 간간이 거기에 빠져서 돌아오지 못하니 좌도(左道)가 사람을 미혹시킴이 심하도다. 우리 동방이 신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사찰이 더할 수 없이 번성하고, 최고운(崔孤雲) 같은 높은 선비로도 신선과 부처에게 의탁하였으니 어찌 해괴하지 아니한가. 나는 매양 안회헌(安晦軒=安裕)의 《향(香)과 촛불로 곳곳마다 다 부처에게 기도하고 퉁소(簫)와 피리(管)로 집집마다 다투어 굿을 하는데, 오직 두어 간 공자(孔子)의 사랑에는 봄풀이 뜰에 가들하고 적막하게 사람이 없구나.》한 시를 욀 때마다 세 번 되풀이하여 외며 탄식하지 아니하지 못하였다. 학자는 항상 사도(邪道)를 배척하는 마음이 있으면 자연히 도(道)에 향하여 바른 데에 점점 물들 것이다.
5. 통절구습(痛絶舊習) : 옛 버릇을 철저히 끊어 버려라.
지금의 벼슬하는 자들은 대개 출세에 조급하여, 의리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구멍을 뚫고 담을 넘어(鑽穴相窺) 서로 엿보아 첩들과 같은 행동을 즐기고 있다. 벼슬을 얻으려고 걱정하며 놓칠까 걱정하여 못 할 짓이 없나니, 이것이 어찌 도에 뜻을 둔 자가 할 짓이랴. 어려서 배워 장성해서 실천하려던 뜻은 허탕으로 돌아가고, 버릇이 타고난 본성처럼 되어 일생을 마치도록 깨닫지 못하니 딱한 일이다. 이 버릇을 철저히 없애야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으며, 점점 도(道)의 맛있는 경지(蔗境)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6. 질욕징분(窒慾懲忿) : 욕심을 막고 분한 마음을 참어라.
사람의 욕심은 음식과 남녀 관계보다 더한 것이 없다. 예(禮)를 가지고 억제하지 아니하면 누가 탐(貪)하고 음란한 짓을 하지 않겠는가. 사람의 분노는 벼슬과 재물을 다투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의(義)로써 재단하지 아니하면 누가 간악하고 낭패(狼狽)되는 데에 이르지 아니하랴. 그러므로 성인이 예의로 이를 제약하여 가르치며 지도한다. 공부하는 사람이 언제나『무죄한 사람 하나를 죽이고 천하를 얻을 수 있어도 그것은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면 분함과 욕심이 스스로 없어지고 도리가 절로 밝아지리라.
7. 지명돈인(知命敦人) : 하늘의 뜻을 알고 어짐에 힘쓰도록 하라.
공자(孔子)가 말씀하시기를,『명을 아는 고로 걱정하지 아니한다.』하였고, 또 말씀하시기를, 인(仁)에 돈독한 고로 능히 사람을 사랑한다.』하였다.…(이하 원본의 글이 유실되어 문장이 끊어짐)
8. 안빈수분(安貧守分) : 가난함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분수를 지키도록 하라.
하늘이 뭇 백성을 내고 각각 나누어 준 직분을 갖게 하였으니, 감히 어기고 넘지를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모두 부자가 되기를 원하나 부자가 되기는 어렵고 가난하기가 쉬운 것은 분수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사람들은 천기(天機)가 높지 못하여 가난함을 싫어하고 부자 되기를 구하여 분수 밖의 일을 지나치게 행한다. 비록 용한 꾀를 교묘히 행하고 마침내 법망에 걸림을 면하지 못하여, 심하면 몸을 망치고 자손이 끊어지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가히 두려워하지 아니하랴. 공자(孔子)는 말씀하시기를,《부귀를 만일 구하여 얻을 수 있다면, 비록 말(馬)채찍을 잡는 천한 일이라고 내가 하겠다마는, 해서 되는 것이 아닌 바에는 내가 좋아하는 바 도덕(道德)을 따르리라.》하였다. 또 말씀하시기를,《선비가 도(道)에 뜻을 두면서 좋지 못한 옷을 입으며 좋지 못한 음식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는 더불어 말할 것도 없느니라.》하였으니, 구한다고 반드시 얻지 못할 바에야 도리어 나물밥에 굵은 베 옷으로 지내는 나의 생활을 만족히 여기면서 도(道)를 즐기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아름답도다. 어진 선비는 주로 그의 처지(處地)를 생각하라.》하였으니, 궁(窮)하여서는 홀로 그 자신을 착하게 하고, 출세(出世)하여서도 천하(天下) 사람에게 모두 착하게 하라.
9. 거사종검(去奢從儉) : 사치를 버리고 검소하게 지내라.
공자(孔子)는 말씀하시기를, 《사치스럽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하게 하라.》하셨으니, 어찌 예절만이 그러하리요. 지금 풍속이 옛날과 달라서 사치와 하려함을 다투어 숭상하여, 정원을 넓고 크게 하고 바단옷을 입고 진수성찬을 먹는 것을 호걸스러운 풍치로 생각하므로, 선비들의 풍습도 거기에 따라 빠져들어 가서 도(道)를 아는 자가 적으니 애달픈 일이다. 사치라는 것은 하늘이 만든 물자를 함부로 없애는 도둑이다. 옛날로부터 사치를 숭상하여 그 끝가지 사치스런 생활을 보존한 자는 없었다. 검소하고 절약하는 것은 사람과 물자를 유지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검소함을 숭상하면서 검소하기 때문에 잘못되는 일은 듣지 못하였다. 도(道)에 배반하는 자로서 검소하는 자는 적고, 도를 지향하는 자로서 사치를 버리는 자는 많다.
10. 일신공부(日新工夫) : 날마다 새로워지는 공부를 하라.
오늘에 당연한 이치대로 행하고 내일에 당연한 이치대로 행하여 일상생활이 당연한 이치대로 하지 않음이 없으면, 날이 달이 되고 달이 해가 되어 곧 인(仁)을 쌓고 의(義)를 쌓아서 그의 극치에 이르게 되는 것이, 강물을 터놓음과 같아서 쫙 쏟아지는 것을 막을 수 없음과 같게 될 것이다. 공자(孔子)는 말씀하시기를,《날마다 새롭게 되는 것, 이것이 성(盛)한 덕(德)이다.》하였다. 이것을 두고 이름이다. 벌써 내일까지 기다려 보자고 한다면 그것은 매우 옳지 않다.
11. 독서궁리(讀書窮理) : 책을 많이 읽고 깊이 생각하도록 하라.
글을 읽는 법은 많이 보기를 탐내고 널리 읽기를 힘써서는 안 된다. 넓기만 하고 요령이 적은 것보다는. 간추려서 요령을 얻도록 하는 것이 옳다. 무릎을 끓고 단정히 앉아 공경히 책을 대하여 익숙히 읽고 뜻을 음미하면 그 이치가 스스로 나타날 것이고, 이치가 나타나면 곧 육미(肉味)가 입맛에 좋은 것과 같을 것이니, 단단히 씹어서 소화시킨 뒤에 곧 다른 책을 읽을 것이다. 만일 성인(聖人)의 글이 아닌 것을 읽는다면, 비록 하루에 만자(萬字)를 왼다 할지라도 우리의 무리가 아니다.
12. 불망언(不妄言) : 말을 함부로 하지 마라.
공자는 말씀하시기를《방안에서 말을 하여도 그 말이 착하면 천리 밖에서 이에 호응하는데, 하물며 그 가까운 데서야. 방안에서 말을 하여도 그 말이 착하지 아니하면 천리 밖에서 이에 반대하는데, 하물며 그 가까운 데서야. 말은 몸에서 나와서 백성에게 퍼지고, 행실은 가까운 데서 출발하여 먼데에 나타나는 것이니, 말과 행실은 군자(君子)의 추기(樞機)인 것이다. 추기의 출발은 영화롭고 욕되는 기본이다. 말과 행실은 군자가 천지를 움직이는 것이니 삼가지 아니하면 되겠는가.》하였고, 또 말씀하시기를,《난(亂)이 생기는 것은 언어(言語)가 그 매개가 되는 것이다. 임금이 기밀을 지키지 못하면 신하를 잃고, 신하가 기밀을 지키지 못하면 몸을 잃고, 기사(機事)에 기밀을 지키지 못하면 해(害가) 생기는 것이니, 이러므로 군자는 삼가고 비밀히 하여 함부로 내지 않는다. 말과 행실이 이렇게 엄하고 어려운 것이다. 지금 많은 선비들은 그 기개를 높이 올리며 의논이 바람 일 듯하여 꺼리는 바가 없으니, 그들에게 환란(患難)이 닥칠까 염려된다. 그러나 집집마다 다니면서 타이를 수는 없다. 그대는 조심할지어다. 말을 삼가는 방법은 정성스러움과 공경함에 있다. 그러므로,《정성스러움과 공경함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하였다.
13. 주일불이(主一不二) :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두 갈래로 하지 말라.
주부자(朱夫子)가 [경재잠·敬齋箴]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기를, "그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고 눈길을 존엄히 하라. 마음을 안정하고 있으면서 상제(上帝)를 대한 듯 하라. 발(足)의 모양은 반드시 무거우며 손(手)의 모양은 반드시 공손 하라. 땅을 가려서 밟아 개미굴에도 걸음을 꺾어서 돌아라, 문(門)에 나설 때에 큰손(賓)을 보는 듯 하고, 일을 대하면 제사지내는 것 같이 하라.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혹시라도 감히 경솔히 하지 말라. 입(口)으로 지키기를 병마개 닫듯 하고, 뜻을 방비하기를 성(城)과 같이 하라. 삼가고 삼가서 혹시라도 감히 경솔히 말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하지 아니하며, 남쪽에서 북쪽으로 하지 말라. 일을 대할 때에는 <마음을>거기에 두고 다른 데로 가지 않아야 된다. 두 갈래로 하여 둘이 되게 하지 말고, 세 갈래로 하여 셋이 되지 않아야 한다. 오직 마음이 한가지로 하여 일만 가지 변화를 주장해야 한다. 이러한 방면에 힘을 쓰는 것을 '공경함을 가지는 것'이라 한다.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다를 것이 없고 겉과 속 또한 서로 바르게 하라.
잠깐만 틈이 생기면 사욕(私慾)이 만가지로 일어나서, 불이 아니면서 뜨거우며, 얼음(氷)이 아니면서 차다. 털끝(豪釐)만큼만 틀림이 있으면 하늘과 땅이 자리가 바뀐다. 삼강(三綱)이 이미 없어지고 구법(九法)이 또한 무너지리라. 아. 소자(小子)여, 생각하며 공경하라. 묵경(墨卿)이 경계함을 맡아서 감히 영대(靈臺)에 고한다."하였다. 어떤 이가 묻기를,《두 갈래로 하여 둘이 되게 하지 말고, 세 갈래로 하여 셋이 되지 말아야 한다 하며, 동에서 서로 하지 말고, 남에서 북으로 하지 말라는 것은 어떻게 구별되는 것인가.》하였다. 나는 답하기를, "모두 하나의 경(敬)을 형용한 말이다. 경이란 하나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것인데, 처음에 한가지의 일이 있는데 또 한가지를 보탠다면, 이것은 곧 두 갈래로 하여 두 가지가 되는 것이요, 세 가지가 되는 것이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하지 말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하지 말라는 말은, 다만 일심으로 동쪽으로 가다가 또 서쪽으로 가려 한다든지, 또는 북쪽으로 가려 한다는 것은 모두 하나에 집중함이 아니다. 이것은 마음이 이리저리 달리지 않을 것을 설명한 것이니, 이것은 곧 마음을 전일하게 하는 공부가 극치에 달해야 되는 것이다. 앉는 옆의 벽에다 써 붙여 두고 아침 저녁으로 보고 반성하는 자료로 삼아 힘쓰고 힘써서 쉬지 아니하면, 능히 천하의 도리를 모두 연구하여 알아서 전일하게 되는 데에 이를 것이다." 하였다.
14. 극념근근(克念克勤) : 잘 생각하고 부지런히 하라.
생각하지 아니하면 잊어버리고, 부지런히 하지 않으면 폐지된다. 그러므로…(이하 원본의 글이 유실되어 문장이 없어짐)
15. 지언(知言) : 말을 알라.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사람을 알아보는 이는 철(哲)이니, 제(帝)도 그것을 어렵게 여겼다."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을 알려면 반드시 그 말을 살펴야 한다. 말은 마음의 표현이다. 공자(孔子)는 말씀하시기를, "장차 배반하려는 자는 그 말이 부끄럽고, 마음에 의심을 가진 자는 그 말이 지엽(枝葉)이 많고, 길(吉)한 사람의 말은 적으며, 조급한 사람의 말은 많고, 착한 이를 무함하는 사람은 그 말이 들떠 있으며, 그 지킴을 잃은 자는 그 말이 비굴하다."하였고, 맹자(孟子)는 말씀하시기를, "편파된 말에는 그가 속이는 것임을 알고, 음(淫)한 말에는 그의 빠진 데가 있음을 안다."하였으니, 이 말들을 자세히 깊이 유의하면, 곧 말을 알아듣는 방법은 정말 사람을 아는 거울이다. 배반한다 함은 반역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저버리며 신의를 버림이 모두 그런 것이니, 말이 신의에 배반되고 진실함과 어긋나므로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요, 길(吉)한 자는 안정하므로 말이 적고, 조급한 자는 동요하므로 말이 많다.
의심을 가진 자는 자신이 없으므로 발이 지엽이 많고, 모함하는 자는 남을 망치므로 말이 들떠 있고, 지킴을 잃은 자는 스스로 패하였기 때문에 비굴하다. 맹자의 말씀도 역시 이 여섯 가지로써 미루어 알아 낸 것이다. 대저 사람의 정상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인(仁)한 자는 침묵하고, 용맹스런 자는 떠들고, 말을 잘 하는 자는 믿음성이 적고, 순하기만 한 자는 결단이 적고, 꾀 있는 자는 음험함이 많고, 글 잘 하는 자는 중심이 적다. 이러한 이치로 미루어보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며,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면 사람을 알아 볼 수 있다.
16. 지기(知幾) : 일의 징조를 알라.
공자(孔子)는 말씀하시기를, "일의 징조를 아는 이는 신(神)이로다. 징조는 움직임의 미세한 것이요, 길(吉)하고 흉(凶)한 것이 먼저 보이는 것이다. 군자는 징조를 보고는 일어서서 그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지 아니한다."하였고,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돌 보다 굳고 단단하고, 징조를 보거든 그 날이 마치기를 기다리지 않으면 바르고 길하다."하였으며, "굳기가 돌과 같으니 어찌 하루해를 마치랴. 단정코 알 수 있을 것이다.
군자는 미세함을 알고 드러남을 알며, 부드러울 줄을 알고, 강(剛)할 줄을 아는 것이다. 일만 사람의 신망을 가진 자로다."하였다. 그러나 위태로운 징조를 알고도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있으니,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루어야 할 곳이 있으면 죽음을 보기를 집에 들어가듯 하여 구차스레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웃사람에게 교제하는 자는 반드시 공손하되 아첨이 되는 징조를 알아서 조심하고, 아랫 사람에게 사귀는 자는 반드시 화평하고 간소하게 하되 위신 없고 실없게 될 징조를 알아서 조심하여, 일에 대해 징조를 알고 사건에 따라 징조를 알아서, 일마다 사건마다 다 그 징조가 있으니 각기 그 도리대로 진퇴하여 미세한 것, 드러난 것, 부드러운 것, 강한 것을 막론하고 이를 모두 안다면, 어찌 뭇 사람의 큰 신망을 얻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17. 신종여시(愼終如始) : 마지막을 시작할 때처럼 조심하라.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처음 시작은 없는 사람이 없으나 마지막이 있는 이는 적다."하였으며, 주역(周易)에 "처음을 추구하여 마지막 있기를 구하라."하였으며.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처음을 잘 하는 이도 마지막을 잘하지 못한다."하였으니, 진실로 마지막을 시작할 때처럼 조심한다면 어찌 성현(聖賢)의 지위에 이르지 못할 것을 걱정하랴.
18. 지경존성(持敬存誠) : 공경하는 마음을 지니고 성실함을 지켜라.
'공경한다', '정성스럽다' 하는 것은 모두 이 마음의 오묘한 것을 밝히는 바이다. 인의예지(仁義禮智)가 공경하지 않음이 없고 효제충신(孝悌忠信)이 정성스럽지 않음이 없나니, 정성스러움과 공경함은 곧 수신(修身)하고, 제가(齊家)하고, 나라를 다스리고(治國), 천하를 태평하게(平天下) 하는 요긴한 도리이다. 자사(子思)는 말하기를,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至誠)이라야 능히 천하의 큰 일을 경륜(經綸)한다."하였으니, 정성스러움과 공경함의 작용이 지극하고 큰 것이다. 천지의 조화를 통할 수 있고 귀신의 덕을 감동시킬 수 있고, 그것을 마음에 새겨서 잃어버리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믿어지고 행하지 않아도 이르러지는 것이니, 천하의 지극한 정성이 아니면 그 누가 능히 이 지경에 이르리요. 삼강(三綱), 오륜(五倫), 육예(六藝), 팔정(八政)이 그 도구(道具)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요긴한 것이다. 그 요긴한 것이 여덟 가지가 있으니, 천하를 평하게 하는 요긴한 도리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있고, 나라를 다스리는 요긴한 도리는 제가(齊家)함에 있고, 제가하는 요긴한 도리는 몸을 닦는 데에 있고, 몸을 닦는 요긴한 도리는 마음을 바르게 함에 있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요긴한 도리는 뜻을 정성스럽게 함에 있고, 뜻을 정성스럽게 하는 요긴한 도리는 치지격물(致知格物)함에 있다.
송(宋)나라의 옛 학자는 그 뜻을 부연하고 해설하여 황제에게 아뢰기를, "제가(齊家)하는 요긴한 도리가 네 가지이니, 배필을 소중히 여길 것, 궁내의 처리를 엄하게 할 것, 나라의 근본(태자)을 정할 것, 척속(戚屬)을 교양할 것이요, 몸을 닦는 요긴한 도리는 두 가지가 있으니, 말과 행실을 삼갈 것, 위의(威儀)를 바르게 할 것이요,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요긴한 도리는 두 가지가 있으니, 공경함과 두려워함을 숭상할 것이며, 안일함과 욕심을 경계할 것이요, 치지격물(致知格物)의 요긴한 도리는 네 가지가 있으니, 도술(道術)을 밝힐 것, 인재(人才)를 분별할 것, 정치의 대체를 살필 것(審治體), 인정(人情)을 알아 살필 것입니다."하였으니, 이 여덟 가지 요긴한 도리는 곧 성인(聖人)과 성인들의 서로 전하는 심법(心法)이므로, 마땅히 거처(居處)하는 좌석 옆에 서 두고 소학(小學)의 가언(嘉言), 선행(善行)을 참고하여 밤으로 외며 낮으로 보아서 간단(間斷)할 때가 없이 부지런히 노력하여, '이욕의 한 근원을 끊으면 만 배나 군사를 쓴다(絶利一源用師萬倍)'는 효과를 얻을 것이다.
참조문헌 : 1. 國譯 景賢錄 全(寒喧堂先生記念事業會 刊) | 景賢附錄上 遺書 寒氷戒
거제 반씨(巨濟潘氏)와 옥계(玉溪) 반우형(潘佑亨)의 후손 반기문
거제 반씨(巨濟潘氏)의 시조 반 부(潘阜)는 중국 남송 사람이다. 그는 몽고의 침입으로 연경이 점령당하자 몽고군에 잡혀간다. 그 뒤 고려 원종 때 김방경이 몽고에 갔을 때 세자 충열왕의 부탁으로 반 부와 함께 우리나라에 왔다. 반 부는 이듬해 임연의 반란을 평정하여 원종을 복귀시킨다. 삼별초의 난 때는 원수(元帥)로 공을 세우고 여몽(麗蒙) 연합군의 일본 정벌에도 참가했다. 후에 기성부원군에 봉해진다. 기성은 거제의 옛 이름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거제를 본관으로 삼았다. 한편 지금도 기성 반씨를 쓰는 후손도 있다. 후손들이 번창하면서 거제 반씨는 남평. 광주 등 몇 몇 본관으로 갈라진다. 2,000년 현재 광주 반씨는 6,600명, 기성 반씨는 3,194명, 남평 반씨는 2,227명이다.
거제 반씨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 반 부의 증손 익순이 고려 우왕 때 문하평리를 거쳐 좌시중을 지냈고, 그의 아들 덕해, 복해 형제가 뛰어났다. 특히 복해는 정몽주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밀직부사를 거쳐 문하찬성사에 이르렀으며, 청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조선조에 와서는 태종 때 효자로 이름을 날린 반 유와 수군절도사 반 희가 뛰어났다.
대사헌(大司憲) 반우형(潘佑亨)은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선생의 제자인데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으로 이성군(利城君)에 봉군되었다.
반석평은 당대에 이름난 학자 한훤당 선생의 제자인 조광조에게 글을 배워 중종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한성부 판윤, 형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거쳐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선무공신으로 병조참판에 추증된 반중경과 군자감 첨정 반인후가 유명하다. 효자 반 충과 반희언은 순국지사 반하경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한편 거제시 고현리 서문마을의 문절사에는 거제 반씨의 시조 반 부의 사당이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거제 향교가 자리했던 길지(吉地)로 신현읍의 상징적인 장소였다. 문절사에는 시조의 위패를 중심으로 좌우에 반관해(潘觀海)와 반중인(潘仲仁), 반중경(潘仲慶) 등 반씨 문중의 임진왜란 3공신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해마다 음력 10월 20일이면 이곳에서 제향을 모신다. 또 매년 음력 9월 9일에는 거제시 아주동 국사봉에 있는 시조 묘소에서 시향제를 모신다. 거제 반씨의 집성촌을 이뤘던 신현읍 고현지역은 조선산업의 발달로 공업화가 계속됐다. 그러면서 이주를 하는 후손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아직도 신현읍 장 평마을과 둔덕면 마장마을, 장승포동 덕포마을, 장목면 궁농마을 등지에는 30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다.
한편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씨는 거제 반씨 후손이다. 192개국이 회원으로 구성된 유엔은 미국 뉴욕 소재 유엔본부에서 각 나라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 8대 유엔 사무총장을 결정했다. ‘세계의 CEO’ ‘지구촌 재상(宰相)’이라고 불리는 차기 유엔 사무총장에 한국의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을 선택한 것이다. 이번 사무총장 선출은 과거와 달리 공개경쟁으로 이뤄졌다. 후보들이 회원국을 상대로 치열한 득표 활동을 벌이며 찬성표를 확보해가는 과정을 밟은 것이다. 반 장관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그로 인해 쌓은 신뢰가 힘이 됐다고 밝혔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서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0년에 외교통상부에 입부한 전문 외교관이다. 그는 미 하버드 대학에서 1,984년 행정학 석사를 취득하기도 했다. 반 장관은 11월 초 서울에서 열리는 아프리카 협력 포럼까지 장관직을 수행할 예정이다. 이후 뉴욕행을 앞두고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5개 상임 이사국과 일본을 방문하는 마지막 일정을 소화하게 된다.반 사무총장의 공식 5년 임기는 2,007년 1월 1일 공식 시작된다. 앞으로 유엔 개혁을 비롯해서 북핵 문제 등 여러 가지 난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반 사무총장의 리더쉽에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한편 거제 반씨는 2,000년 현재 10,063명이 있다. 주요파는 시강공파, 총랑공파, 문효공파, 감찰공파(남평관), 문헌공파(광주관), 강화공파(결성관) 등이다. 전남 장성군 서삼면 일원, 충북 음성군 원남면 보천리, 경북 청도군 이서면 구라동, 전북 김제군 진봉면 가실리 등이 집성촌이다.
제자(弟子)되기 어려움
가르침 달라고 사흘 굶으며 간청
나를 버렸나이다
달마대사가 숭산(崇山) 소림사에서 면벽 좌선을 하고 있을 때 일이다. 신광이라는 사나이가 찾아와 도를 묻고 스승이 돼 줄 것을 간청했다. 하지만 달마는 제자로 입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선(禪)이란 다른 가르침과는 달리 스승이 제자에게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닦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인지는 모른다. 한 데 이 사나이는 허락할 때까지 눈보라치는 가운데 서 있기만 했다. 몇 일이 지나도록 받아들일 기미가 없는지라 뉘우침이 선행되지 않고는 안되겠구나고 생각하고 그 뉘우침이란 속세의 욕망같은 것이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신광은 ‘소인은 묵은 나를 버려 버렸나이다’고 고했다. 달마가 문을 열고 보니 한쪽 팔을 잘라 선혈이 떨어지는 것을 들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때야 비로소 달마는 입문을 허락하는 것이었다.
신광의 첫마디가 ‘저의 마음의 불안부터 쫓아주옵소서’하자 달마는 그 마음을 들고 오면 안심시켜 주겠노라 했다. 아무리 그 마음을 찾아도 보이지가 않습니다. 하자 그럼 안심시켜준 것이 되네 했다. 불안한 마음이 아무리 찾아도 없으니 사라진 것이요 사라졌으니 안심을 찾은 것이라 했다. 한 팔을 잘라 없애기까지 하면서 스승을 찾은 이 사나이가 바로 달마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선종(禪宗)의 2대조인 혜가(慧可) 승려인 것이다.
존경하는 스승을 찾아
지금은 명문학교를 찾아다니듯이 옛날에는 이처럼 배우고 싶은 스승을 찾아 다녔던 것이다. 그래서 소문난 스승의 슬하에는 팔도의 산하가 멀고 험하다 않고 몰려들었던 것이다. 조선조 성종 때 일이다. 대과를 급제하고 당상관의 고관 자리에 있는 대사헌(大司憲) 옥계(玉溪) 반우형(潘佑亨)은 당대의 학문과 행실을 귀일시키는 도학(道學)의 태두(泰斗)인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선생을 찾아가 추운 겨울 눈을 맞으며 스승이 돼 줄 것을 간청했다. 하지만 한훤당은 허락치를 않았다.
이유는 반우형이 자신보다 벼슬이 높으니 벗을 삼을 수는 있어도 스승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시국이 험난하여 작당의 모략을 받을 우려가 크기 때문이었다. 한데 ‘아침에 도를 듣고 저녁에 죽어도 좋다하며 사흘을 굶는 것을 보고 글방에 들였다. 그리고 다음 행실을 지킬 수 있을 때 스승이 되겠다’하고 18조로 이루어진 한빙계(寒氷戒)를 손수 적어주었다.
집 안팎을 불문하고 앉을 때는 갓을 바로 쓰고 꿇어앉아라(正冠危坐), 종전의 욕망이나 포부나 생활습관을 대담하게 버려라(痛絶舊習), 욕심을 죽이고 분함을 무턱대고 참아라(窒慾懲忿), 날마다 새로워지는 공부를 하라(日新工夫),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두 갈래로 갈팡질팡 말라(主一不二), 마지막 시작 할 때처럼 조심하라(愼終如始), 말의 뜻보다 왜 그 말이 나왔나를 먼저 알고 일이 생기면 그 조짐부터 감지토록 하라(知言, 知幾), 등등 오늘에 재활시키고 싶은 가르침이다.
팔도에서 몰려와
곧 옛 스승은 인간됨의 행실을 가르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글과 이치는 버금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스승의 사표인 한훤당 김굉필 선생은 무오사화로 산골짝인 평안도 희천에 유배살이 하는데 그 명성과 소문을 듣고 팔도에서 몰려들어 방이 모자라고 청마루가 모자라며 마당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조선의 행동가인 조광조도 바로 한훤당의 유배지인 희천까지 찾아와 김굉필 선생을 스승으로 모신 제자다.
요즈음 교육에서 지식만을 가르치니까 스승을 찾을 필요가 없다. 행실과 철학을 가르치면 찾아가 사사하고 싶은 스승이 생기게 마련이다. 곧 현대의 학교 교육의 큰 결함은 찾아 배우는 스승을 증발시켰다는 것과 굳이 찾아 배우지 않더라도 인생에 전환을 주는 감명을 주는 스승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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