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반면에 동물 가족인 봉순, 점순, 봉이, 귀동이는 먹이를 탐하고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한시도 가만있지 않는다. 뛰어다니거나 짖거나 매달리거나 배설하거나 하는 것이 그들의 타고난 생리다. 생리로 보면 나무의 고고함과 동물의 부산스러움은 대척점에 있다.
나의 하루는 눈 뜨자마자, 이들의 배설물을 치우는 일로 분주해진다. 집 안에 사는 녀석은 10년 전 한 친구의 부탁으로 한 식구가 됐는데, 온 집을 자기 화장실로 여긴다. 하기야 당연한 일 아닌가. 세워 놓은 병풍을 전봇대로 여기는 녀석의 단순함이 때로는 통쾌하게 여겨질 때도 있다. 어쨌든 방심했다 하면 어느새 녀석의 배설물을 밟기 때문에 간밤에 저질러 놓은 것을 무엇보다 먼저 치워야 한다.
현관에서 지내는 봉이는 내가 일어난 기미를 느끼자마자 댓바람에 현관문을 긁어댄다. 녀석을 밖으로 내보내는 김에 뒤따라 뜰로 나간다. 독점욕이 강한 봉이는 봉순이와 점순이가 내 근처로 오지 못하도록 견제하느라고 야단법석이다.
뜰에는 바깥 녀석들이 간밤에 저질러 놓은 배설물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빗자루로 쓸어서 한군데 모아 놓고, 맨손체조를 하고 있노라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야단법석인 녀석들이 딸랑딸랑 종을 치듯 내게 새로운 하루가 시작됐음을 알려준다.
대문 틈에 끼워져 있는 아침 신문보다 그들의 부산한 움직임이 더 ‘아침스럽다’. 여기에는 내가 밥을 주지 않으면 꼼짝없이 굶을 수밖에 없는, 그들의 삶과 죽음이 온전히 내 손에 달려 있다는 책임감, 그래서 도무지 번거롭게 여길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그런 경건한 책임감이 내포돼 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관계 속에는 그것을 회피할 경우, 다른 생명의 죽음을 야기하는 마지막 연결고리에 놓여 있는 입장이 있다. 그런 입장이 되는 것은 은혜이며 축복이다.
목련꽃이 만개한 요즘엔, 매일 하루 한 번씩, 커피 한 잔을 들고 뜰로 나간다. 이때는 집 안에서 사는 귀동이도 데리고 나와 덩치 큰 아우들을 만나게 해준다. 목련 나무 아래 놓인 그네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면서 책을 펼쳐들면 책상 위의 하다 만 일거리도, 세금을 내야 하는 일도, 문병을 가야 하는 일도 더 이상 나를 재촉하지 못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왜 이렇게 조용한가 하고 주변을 둘러본다. 그 야단법석하던 녀석들이 여기저기 배를 땅에 붙이고 편하게 엎드린 채 눈만 끔벅이고 있다. 그 자세는 안타이오스 신이 그렇듯, 대지의 고요와 한 몸이 되려는 것처럼 보인다. 움직일 때마다 중심이 흐트러지는 동물들이 넘어서야 할 숙명적 과제, 죽음에 이를 만큼 깊은 고요를 정복해야만 얻어지는 힘.
비로소 나는 부산스러웠던 일상의 한 공간이, 시원(始原)의 대지로서 모습이 바뀐, 그 깊은 풍경 속에 마냥 여유로운 호흡으로 섞여 있음을 느낀다. 일일이 눈길을 주지 않아도 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통째로 마음에 와닿는다. 영원을 빚는 시간, 그리고 공간.
있는 듯 없는 듯한 바람의 애무에도 아찔한 현기증을 느껴 제풀에 후두둑 떨어지는 목련꽃잎, 건너편 집 담벼락에 맑은 물로 새긴 듯한 소나무 그림자, 어디서든 아랑곳하지 않고 먹이를 찾아 제 집으로 옮겨가는 개미들의 부지런한 행렬, 햇빛의 찬연한 입맞춤에 날개처럼 팔랑이는 대추나무 잎사귀.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그 팔랑거리는 잎새 아래에서는 꽃에서 탈바꿈한 작은 열매가 곤한 잠에 들어 있을지도….
내 의식은 열두 대문 안쪽 깊숙한 곳의 어느 궁궐에 이른 나비처럼 슬며시 낮꿈 속에 든다.
우리 집을 찾는 친구들은 짖어대고 엉겨붙는 이 동물 가족들을 두고 “그야말로 개판이네” 하고 혀를 찬다.
그들에게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지복을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첫댓글 수필의 경지도 대단하군요. 묘사,표현도 신선한 충격입니다. 물, 바람의 흐름이 감지될 정도로 고요한 봄의 한낮 느끼고 갑니다.
한 걸음 걸음이 다 삶의 값진 보석인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하나뿐인 나의 삶도 봄엔 따스하니 이런 햇살들 매일 매일 쬐고 싶다. 그렇게 살지 뭐. 사는 게 별 거 있겠는가. 이제 그만 싸우고 혼내고 가르치고 배우고 욕심부리고 욕하고 이제 그만, 좀, 봄 햇볕에 살이 좀 탄들 어쩌리, 좀 돌아다니자. 걷자. 그렇지 않으면 지금부터 팍팍팍 늙어서 할머니 할배 된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