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歷史속에 묻힌 湖南義兵
(魚登山에 散華한 光山義魂)
文 大 植
光復會 義兵精神宣揚會 國家報勳處
◎ 의병의 역사적 배경과 광산의병
⋅의병이란?
백암 박은식 선생은 “의병은 민군이다. 나라가 위급할 때 즉시 의로써 일어나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하여 싸우는 사람이다”라고 했고 독립운동가 뒤바보(계봉우)는 “의병이란 명사만으로도 큰 가치가 있다”라고 했다. 한말의병은 구국항쟁-독립운동-민족정기선양- 민족통일로 이어지는 민족사의 맥락에서 의병을 되돌아보게 된다.
⋅역사적 배경
우이민족의 역사상 의병의 연원은 삼국시대부터 생각해 볼 수 있다. 백제의 왕조가 망하고 왕이 당군에 붙들려 가니 귀인들이 그 성읍을 적에게 바치고 투항하였다. 그러나 성충의 잔당으로 축출되었던 구신과 초야의 의사들이 조국을 구하고자 각처에서 의병들이 크게 싸웠고 의병장 복신이 진 명성을 회복하고 웅진도록 당장의 정병 천명을 몰살하고 신라의 구원병을 대좌하였다. 이들은 내부분쟁으로 실패하였으나 전후 4년간 걸친 구국운동의 정신은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내외란 시의 의병정신으로 계승되었다.
역사적으로 만주가 우리의 영토이며 다른 나라가 아니라 모두 우리 땅임을 세계에 일깨워준 검모잠이 왕족 안승을 받들어 당나라 군대와 싸웠고 만주에서는 고구려의 남은 백성들이 발해를 세워 대륙민족에 대한 피나는 항쟁을 멈추지 않았던 것은 고구려의 계승이란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새로 일어난 몽고족의 출현으로 고려의 국운이 다해갈 때 40여 년간 항쟁할 수 있었던 근원은 김통정, 배중손, 노영희 등이 인솔하는 삼별초 항쟁에 있었다. 삼별초는 조국을 위해, 특정한 훈련을 받지는 못했을망정 지휘자의 명령에 일사불란한 단결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엄격한 규율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정신적 바탕과 조직 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삼별초는 몽고와의 화친이 명목상으로 이루어지고 임금이 환도를 한 후에도 조치를 굽히지 않고 항쟁을 감행하였다. 즉 왕족 승화후 온을 옹립하고 몽고와 끝까지 항전할 것을 선언하고 강화를 떠나 멀리 나주, 진도, 제주도까지 전전하면서 끝까지 싸운 것이다. 그러나 몽고의 무력에 밀려 마침내는 해산의 비운을 당하고 말았다. 이처럼 무력에 밀린 고려는 민중에 기반을 둔 삼별초에 의해서 외세와 싸울 수 있었다. 조선조 선조에 이르러 계속된 권력투쟁으로 조정이 문란해지고 국세가 점점 허약해지더니 선조25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아무런 준비가 없는 무력 무능한 조선은 적의 침입 앞에 연전연패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부산 첨사 정발 동래부사 송상현이 전사하고 대장 신립이 충주에서 전사하니 왕실은 의주로 파천하게 되어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을 때 각처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그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유생 조헌은 청주에서 승 영규와 함께 의병을 모아 왜병을 격파한 후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였으며 승 휴정 서산대사는 유정 사명당과 함께 승병으로 평양에서 왜군을 무찔렀으며, 곽재우는 밀양에서 의병을 모아 합천에서 왜병을 격파하였고 우리고장 호남에서는 어느 지역보다 의병항쟁이 활발하였다. 이 나라를 침략한 왜구는 한 부대는 경상도를 통하여 서울로 올라가려했고 한 부대는 남해를 거쳐 전라남도를 통하여 서울로 가려 하였다. 경상도를 거쳐 간 왜구는 한 달이 못되어 서울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전라남도를 거쳐 올라가려한 왜구는 한산도 울돌목 같은 곳에서 주로 전라남도 청장년으로 구성된 이순신의 수군에 연전연패하여 육지에 발을 붙이지 못했다. 그때의 “선조수정신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임진왜란 때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으로 세도의 수군을 거느리게 하였다……. 이때 염전을 일구어 소금을 팔아서 저장한 곡식이 여러 만 섬 이었으며 건물과 기구가 완비되어 있었고 백성이 군대로 모집되어 수효가 어김없이 채워져 있었다.” 다음에 또 이렇게 기록하였다.
“임진왜란 뒤에 바다에 닿은 여러 고을에 수군을 뽑아 보내게 하여 바다의 방비를 더 튼튼히 하였는데 봄에는 방비하고 가을에는 돌아가게 하였다.”
이로 보면 총질 칼질도 한번 못해본 순박한 이 지방 사람들이 수군의 중심이 되어 씩씩하게 싸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소금을 구워 양곡을 저장하기까지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지역 육지에서는 경상도와 충청도를 거쳐 내려온 왜구에 맞서 의병이 활발히 일어났다. 1592년 5월 16일 이 도의 나주 사람인 김천일은 한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수천 명의 의병을 이끌고 한양에 와서 권율과 협력하여 양화전에서 왜구를 물리쳤다. 그리고 진주로 내려가 김시민을 도와 싸우다가 진주성이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최경회, 고종후, 양산숙등과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1592년 5월 29일 고경명은 담양에서 의병 6000명을 모아 북쪽으로 올라가 조헌의 의병과 영규의 승군과 함께 금산에서 왜적과 싸우다 그이 아들 고인후와 함께 순절하였다. 광주사람인 김덕령도 담양에서 의병을 모아 순창과 남원에서 승리를 거두고 이어서 진주에서 왜적과 싸웠다. 그를 시기하는 무리가 이몽학의 난에 관련되었다고 모략하여 젊은 나이에 옥사했다.
정묘 병자호란 때도 우리고장 출신으로 오랑캐를 막는데 공헌했거나 의병활동에 나서서 두드러진 활동을 한 사람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상의 김준, 이한세, 박연배, 최여호, 이이남, 안방준이 있는데 안방준은 보성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박광전을 따라 의병을 일으켰으며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전주로 향하는 길에 강화가 성립 되어 돌아왔으며 병자호란때도 거병을 하여 여산까지 갔다가 강화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하여 척화상소를 올렸다. 범진후는 수백명의 의병을 이끌고 수원의 광고산에서 청태종의 부마인 백양고라를 살해 했으며 그밖에 많은 호남의병이 거병하였으나 양란 모두가 강화되었기 때문에 전투다운 전투는 하지 못하고 해산했다.
◎ 유림의 위정척사 운동이란?
위정척사의 흐름은 대원군의 쇄국정치는 강화도 조약체결을 전후하여 보다 분명하게 드러났다. 세단 계를 거치면서 민족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제1단계는 서구 열강의 세력들이 조선에 직접 물리적 힘을 가했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시기였다. 이 시기는 대원군 섭정 하던 시기로 기정진과 이항로를 중심으로 척사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양학 양물 배척 론을 주장하였다. 기정진은 서양의 통상요구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침략으로 쇄국양이정책을 고수하며 양물의 유입을 금하고 국방을 강화하고 내수를 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항로는 주전을 주장하면서 서양과 통상을 주장하는 자들을 이적으로 지칭하였다. 또한 서양물건 거부와 통교의 거부 안이 서양오랑캐를 물리치고 국가를 태평하게 하는 것이라고 상소하였다.
이들의 척사사상 제2단계는 강화도 조약체결로 인한 개항반대 운동이었다. 일제의 강요로 체결된 강화도 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었다. 유림들은 강화도조약 체결에 앞서 정부의 개화정책을 비판하고 일제의 경제적 침탈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특히 최익현은 도끼를 들고 대궐 앞에 나아가 조약을 거부하도록 호소하였으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도끼로 자신의 목을 잘라 달라고 상소하였다. 상소내용은 왜양일체론을 주장하고 일본과 교역을 하게 되면 머지않아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하였다. 최익현은 이 상소로 흑산도로 유배되었고 결국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제3단계는 1880년대의 개화반대운동이었다. 수신사 김홍집이 가지고 들어온 “조선책략”에 의하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기 위해 “친 중국 결일본 연 미국”이라는 개화정책을 제시하였다. 이에 유림들은 “조선책략”의 소각을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조사시찰단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영남지방 유림들은 척사통문을 돌리는 한편 대규모의 집회를 열고 이만손을 대표로 만인소를 작성, 복합 상소를 하였다. 이와 같은 상소에 대해 고종은 주동자를 귀양 보내는 한편 상소에 참가한 유생들을 쫓아냈다.
위정척사운동은 성리학의 의리와 명분으로 척화주전론을 주장하였고, 이를 토대로 개항과 개화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위정척사운동은 서양세력의 침략에 대한 민족적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근대화를 수행하고자 하는데 있어서 한계를 드러내었다.
⋅처변삼사(處変三事)란?
한말 의병장 의암 유인석은 화서 이항로의 제자로 그의 학통을 이어 받았다. 강화도 조약 체결시 반대상소를 시작으로 김홍집 친일 내각이 수립되자 의병장으로 나서 충주 제천등지에서 친일관료를 죽이고 일제와 싸우다가 만주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연해주에서 13도 의군 도총제에 추대되어 일제와 치열하게 싸운 의병장이었다.
유인석은 선비로써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거병하면서 당시 조선의 처지에서 유학자들이 택해야 할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자신은 결연하게 실천에 나섰다. 무릇 우리 유학의 도가 지극히 위대하고 몸은 귀중하나 도가 끝나려 하는데 몸이 도와 함께 같이 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에 스스로 자멸하여 죽는 (자정치명,自靖致命)것이 정당하고, 도가 없어지려는 것을 참지 못해 몸이 도와 함께 보존하기를 도모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에 거병하여 깨끗이 함(거의 소청,擧義掃淸)을 말함도 정당하며 그리고 외국의 망명하여 옛 제도를 지키는(거지수구去之守舊)도 정당하다고 하였다. 유인석이 말한 처변삼사는 유학자 선비들의 몫만 아니었다. 망천하 망국가의 위기를 당하여 이 땅에 생을 받아 사는 모든 생령들에게 주어진 선택이고 의무이기도 하다. 경술국치를 당하여 순국한 매천황현은 절명시에서 “내가 여기 자결할 뿐 의병을 일으키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거병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면암 최익현은 “모두 죽으면 누가 나라를 위해 싸우겠는가?”라고 탄식하며 노구를 이끌고 의병에 나섰다.
◎ 우리지방의 전기의병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이 있는 후로 송사 기우만, 녹천 고광순, 성제 기삼연 등 유학자 중심의 유림들이 나라를 구하자는 의논이 진행되었다. 단발령(1895. 11.15)이 내리자 여러 고을에 통문을 보내 국모의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없으며 단발이란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며 상소를 돌리기도 하였다.
1896년 2월에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충군애국의 정신을 고무 격려하는 제천의병진의창의 대장 유인석의 격문이 이르니 호남지방에서도 의병의 기운이 일어났다.
송사 기우만은 “지존께서 피난을 하였으니 시일을 더디 할 수 없으며, 역당이 망명하였다. 하지만 그 뿌리를 아직 제거하지 못했다. 임금의 두어 발걸음 외출은 억조창생이 분골쇄신 하여도 따를 수 없는 일이다”는 내용의 격문을 각 고을에 돌렸다. 이때는 왕과 정부가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만큼 격문 중에는 복수토왜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북상하여 파천하여 있는 임금을 궁중으로 모셔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음력 2월에는 각 고을에서 호응이 보이자 기우만은 광산부 향교 들어가서 의사들을 모아 규칙을 정하고 전략을 논하니 며칠 안으로 의병의 형세가 성대하게 되어 관리들은 모두 도망하였다. 이 때 장성의 성재 기삼연은 의병 300명을 거느리고 와서 군무를 자원하여 맡았는데, 그는 원래부터 천품이 특출하고 지략이 있었지만, 군사를 거느리게 되면서부터 흰 말을 타고 지휘하며 사기를 고무하고 군율을 엄격하게 하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참으로 의병이다”고 하면서 칭찬이 자자하였다.
한편 나주에서도 민중과 이속들이 모두 호응하여 일어나고, 해남군수 정석진과 담양군수 민종열 등이 모여 창의의 깃발을 세우고 참서관 안종수를 처단하였다. 안종수는 일찍부터 불법횡포가 많았지만 단발령 후에는 더욱 심하여, 강제 삭발에 앞장섰기 때문에 처단을 받은 것이다.
다음은 나주 유림 이병수가 금성정의록에 기록한 병신년(1896년) 2월 9일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2월 9일 새벽에 해남군수 정석진이 부임길을 떠나면서 본 향교에 들려 선생께 참배하고 이주서 및 여러 유생들과 1시간이 넘도록 이야기하며 이 국란을 극복해야 한다고 격려하고 급한 일이 있을 때는 당연히 밤중에라도 달려오겠다.”하며 곧 길을 떠나갔다. 그래서 수성하는 군교들도 모두 전송 차 밖으로 나갔다. 이 날 오전 10시경에 교복이 밖으로부터 바삐 들어와 아뢰기를 “성 안에서 큰 소동이 일어나 고을 아전과 군교 수백 명이 관사로 들어가서 참서관을 잡아 죽였는데, 박총순, 여순검 두 사람도 역시 맞아죽고 박시찰, 복주사 등 6사람은 모두 잡혀 갇히곤 하여 광경이 몹시 해괴하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호남에서 최초로 의병에 의한 희생자가 안종수와 2명의 순검임을 알 수 있다.
이 소식을 들은 광주의 의병대장 기우만은 글을 보내 나주의병과 민중들을 격려하며 안종수의 10가지 죄목을 들어 그 처단이 대의에 의한 것임을 밝혔다. 나주 의진 에서는 이학상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부서와 규율을 정하고 각 고을에 통문을 돌려 같이 일할 것을 약속하였다. 광주대장 기우만은 고광순, 기삼연, 기재, 기동로 등 여러 의사와 함께 나주로 가서 단을 쌓고 맹세를 굳건히 하고, 임란당시 의병장 김천일의 사당 및 금성산에 제사를 드려서 신의 도움을 빌고 민심을 안정시켰다.
한편, 기우만은 또 상소를 올려 경각심과 용단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또한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 2월 30일까지 광주로 모이도록 하였다. 이 때 많은 의병세력이 나주에 있었는데 광주를 집합장소로 한 것은, 그 곳이 호남지역에서 거리가 중앙이 되고, 또 처음 의거를 선언한 곳이었기 때문에 창의소의 중앙본부를 광주에 두기로 하고 미리 광주의 여러 장사들에게 글을 보내 준비하게 했던 것이다.
나주진에서는 호남의 창의 총수인 송사 기우만에게 나주에 유진을 간청하였지만 송사는 여러 장령들에게 “병가의 일은 실신하는 것이 제일 불리하다. 영하의 수십 고을이 벌써 광주에 모이기로 되어 있으니, 여러 장사들에게 효유하여 실신하는 일이 없게 하여달라”고 하여 광주의 광산관을 본영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 때 전주지방의 의병을 해산시키는데 성공한 친위대장 이겸제가 전라도 지방으로 진출하면서 해남군수 정석진을 죽이고 담양군수 민종렬을 잡아 가두는 등 일대를 휩쓸며 살육과 약탈을 행하였다. 광주향교 교임 박원영도 이 때 광주향교에서 효수 당했다. 다음은 “박원영의 참변에 곡했다”는 송사집의 기록이다.
[선생이 의병을 해산하게 되자, 바다에 빠져 죽느냐 칼을 물고 엎드려 죽느냐 결정을 못 짓고 있는데 박공은 손을 잡고 말하기를 “공은 자중하라. 의무를 다할 날이 어찌 없겠는가?”하므로 선생은 드디어 마음을 결정하고서 박공이 목숨을 결흘히할가 두려워 작별하면서 세 번이나 고개를 돌아보며 자중하라고 부탁하니 박공은 말하기를 “공이 살면 나도 살고 공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하셨다. 전주군대가 오자 박공은 잡혀서 굴복하지 않고 죽으니 선생은 글을 지어 제를 지냈다.]고 한다.
형세가 급박하여지자, 공격방어에 이렇다 할 계책을 확정하지 못하고 공론을 일삼던 의병진에서는 차츰 동요하기 시작했다. 한편 남로선유사로 지방을 순회하던 시기선이 음력 2월 27일에 전주에 도착하여 지방 관원을 보내 선유하였다. “주상께서 비밀유시를 내려 의병을 권장하기도 하였지만, 그것이 지금 세력을 잡은 자들의 협박하는 구실이 될 뿐으로서, 그 때문에 더욱 문책을 당하고 있으며 환궁할 날을 기약할 수 없게 되었소. 공의 거의가 어가를 봉환하여 군부의 치욕을 씻으며 왜를 토벌하고, 원수를 갚으려는 일이 아니겠소. 그러나 그 결과는 임금과 신하가 따로 떨어져서 호령이 통하지 못하고 갈수록 더욱 막혀서, 성상의 뜻을 펼 수 없게 되니 오늘의 명령은 정말 부득이한 일이요. 성상의 뜻을 받들어 무기를 놓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이 역시 충성을 다하는 일이 되지 않겠소.”하였다.
이러한 신기선의 은근한 선유를 받게 되니 호남 의병진의 인심은 풀어졌다. 대장 기우만이 말하기를 “지금 세력을 잡은 무리들의 마음이 음험하고 불측하니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적을 토벌하는 것이 우리 임금의 화를 재촉하는 길이 되기에 알맞은 일인즉, 자수하여 우리들의 의리나 밝혀두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통곡하며 해산령을 내리고 말았다. 그 중 성재 기삼연만은 이러한 해산 논의에 크게 논하며 “선비들과는 일을 같이 할 수 없다. 장수가 밖에 있어서는 임금의 명령이라도 받지 않은 일이 있는 것인데, 더구나 위협하여 강제하는 것이요, 우리 임금의 본심에서가 아님에랴. 이 군사를 한 번 헤치면 우리들이 다 생포를 당하게 된다.”고 하며 반대하였지만 대세를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호남일대의 전기의병은 4월 이후 그 자취를 감추게 되고 말았다.
전기의병은 동학농민운동으로 인한 엄청난 살육과 약탈이 자행된 지 1년여 만이었지만 그것이 정의롭고 충성된다고 생각되어 일어났다는데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의병 지도층이 동학을 진압한 세력이었기 때문에 큰 호응을 받지 못한 것 같다.
◎ 호남의 중기 의병
1차 의병투쟁이 끝나자 유생 의병장이나 농토를 가진 농민들은 각기 생업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유랑 농민이나 화적, 그리고 동학 여당들은 돌아가 안주할 생업이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1896년부터 1900년 이전까지 화적이나 영학당, 서학당, 남학당 등의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이들 중에는 화적생활을 하다가 동학에 투신하고 의병으로 활약한 사례가 있었다. 또한 흥덕, 고부, 무장, 고창 등지에서는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이 영학당으로 활동하여 관아를 점령하기도 했다. 1900~1905년까지 남한 일대에서 활빈당으로 반봉건 반제국주의 활동을 계속하면서 상황변화를 주시하는 사람들로 있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이등박문의 진두지휘 하에 하야시 공사와 하세가와 일본 주둔군 사령관의 지원을 받아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상소활동, 순국항쟁, 언론규탄, 밀사를 통한 구국활동, 매국노의 암살활동, 국채보상운동 등의 활동을 통해 을사조약의 파기와 친일파 처단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애국활동 중 가장 격렬하고 적극적인 것이 의병항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중기의병의 중심은 면암 최익현과 돈헌 임병찬의 병오의병이었다.
최익현은 거병의 준비단계로 지사들을 모으고 항일 의지를 결집하기 위해 1906년 초에 노성 권리사에서 인근의 유림을 모아 강회를 열었다. 3월에는 전북 태인의 종석산 밑에서 임병찬을 만나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수립하였다. 임병찬은 다음과 같은 윤통문을 지었다. “나라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시 여러 말을 할 것도 없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장양, 제갈량이 다시 나와도 형편이 어찌할 수 없이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들은 여기서 통철히 느꼈다. 대저 전쟁의 승패는 강약과 이둔에 있는 것이 아니오, 오직 슬기롭고 용감한 장수가 충성되고 의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일심동력으로 하는 데에서만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장양, 제갈량의 인재인들 어찌 일찍 세상에 시험하여 본 다음에 나왔던 것이겠는가? 충의의 분노가 격동되면 여기서 의로운 일을 일으킬 수 있는것이다. 군율과 의복제도, 기계 규정 등 여러 가지 조항을 후면에 적어서 통문을 띄우며, 모일 장소 및 일자는 추후 알리겠으니, 모든 것을 예비하여 추후 통문을 기다리며 혹시라도 태만 소홀하여 군율을 범하고 후회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병오 2월 15일
⋅군율
1. 제 마음대로 옛 습관을 믿고 군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베인다.
1. 비밀히 간사한 무리들과 통하여 군기를 누설하는 자는 베인다.
1. 진중에서 적과 상대하여 무서워하며 겁내며 뒤로 물러서는 자는 베인다.
1. 촌가를 겁탈하여 남의 부녀자를 음란 하는 자는 베인다.
⋅의복제도
1. 입자는 평양자로 하고 혹은 소매 넓은 주의, 혹은 소매 좁은 옷이나 구전복을 각기 있는 대로 사용하되, 상의는 모두 누런빛을 물들인다. 따로 적삼과 바지 한 벌씩을 준비하되 웃적삼의 길이는 다리를 가리우고 소매는 팔이 들어갈 만한 정도로 좁게 하며, 색깔은 그 사람의 난 해, 천간을 따라 물을 들인다.(갑⋅을은 청색, 병⋅정은 홍색, 무⋅기는 황색, 경⋅신은 백색, 해⋅자는 흑색 같은 것이다.) 아랫바지 길이는 가슴에 닿을 수 있고 너비는 다리가 들어갈 정도로 하며, 색깔은 그 사람의 생년 지지를 따라 물을 들인다.<인⋅묘는 청색, 사⋅오는 홍색, 진⋅술⋅축⋅미는 황색, 신⋅유는 백색, 해⋅자는 흑색 같은 것이다.> 전대는 모두 청색으로 물들이고, 수건은 모두 홍색으로 물들인다.
⋅규칙
1. 함께 모이는 날에는 먼저 맹주를 정하고 그의 지휘를 받을 것.
1. 사람을 쓰는 데에 어찌 문벌을 의논하랴. 광대나 백정이라도 지혜나 용맹이 있으면 상좌에 맞이할 것.
1. 통문이 도착하는 즉각으로 옮겨 써서 각면 각리에 고루 알려 한 사람이라도 알지 못하는 폐단이 없게 한다. 혹시라도 오래 두어두고 중간에서 지체한다면 이것은 분명 오랑캐의 무리이니, 거의 하는 날에 먼저 그 고을로 가서 해당 향장이나 수서기에게는 군령 어긴 죄를 시행할 것.
1. 이 통문은 시도장이 향청에 바칠 것.
한편 이와 때를 같이하여 최익현은 정산집을 떠나 최재학과 함께 호남지방으로 향하였으며, 음 2월 30일에 태인의 종석산 아래 김도사 요각에서 돈헌 임병찬과 만나게 되니, 이것은 최익현의 태인 거의의 계기를 마련하는 극적인 장면이기도 한다.
당시 최익현은 유학계의 중진이요, 항일논쟁으로 시종일관하여 온 74세의 명망 있는 노대가이며, 임병찬은 행정, 군무에 모두 실적이 있는 56세의 유능한 인물이었으니 이 두 사람의 회합이야말로 명실이 함께 갖추어진 의병진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익현은 음 4월 8일 담양 용추사에서 송사 기우만과 남도선비 113명이 모여, 동맹록을 작성하고 최재학이 격문을 작성했다. 모두가 힘을 합해 오랑캐를 무찔러 그 종자를 없애고 그 소굴을 불 지르며 역적의 도당을 섬멸하여 나라의 명맥을 튼튼히 하자는 내용으로 전남의 동남지방을 중요대상으로 하였다.
최익현과 임병찬은 윤 4월 13일(양 6.4)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강회를 통해 왜적이 국권을 장악하고 역신이 죄악을 빚어내어 500년 종묘사직과 3천리 강토가 이미 멸망의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라를 위해 사생을 초월한다면 천지신명이 도울 것이라고 역설한 후 사생을 같이 해서 거의할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즉시 일본정부를 성토하는 16가지 죄목을 열거하였다.
1. 황상을 파천하게 하고 재상을 죽이며, 신을 버리고 의를 배반한 죄.
2. 갑오년에 대조규개가 궁궐에 불 지르고 우리의 법률제도와 문화산업을 폐기시킨 죄.
3. 을미년에 삼포오루가 변란을 일으켜 국모를 살해한 죄.
4. 임권조와 장곡천이 철도부설, 어로, 광산, 항해의 권리를 침탈한 죄.
5. 토지를 강점하고 친일배를 추천한 죄.
6. 철도, 토지를 강점하고 군대를 전대로 사용한 죄.
7. 억지로 한일의정서를 만들어 국권을 침탈한 죄.
8. 충신을 잡아가두고 살해하며 공론을 억제한 죄.
9. 일진회를 만들고 보안회, 유향소 같은 애국단체를 탄압한 죄.
10. 한국인을 외국에 팔아서 학대한 죄.
11. 강제로 전신, 우체국을 빼앗아 장악한 죄.
12. 강제로 고문정치를 한 죄.
13. 나라의 제정을 고갈시키고 우리의 정혈을 뽑아 썩은 껍질만 남게 한 죄.
14.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15.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정치를 한 죄.
16. 이민조례를 만들어 인종을 바꾸려는 죄.
이와 같이 창의격문을 보내 창의토적의 대의를 천명하고, 우리의 종실대신 공경문무에서 사⋅농⋅공⋅상, 이속 하인에 이르기까지 각기 창, 칼을 가지고 나와 일심동력하여 원수의 오랑캐를 소탕섬멸하자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임병찬⋅김기술⋅유종규⋅김재귀⋅강종희⋅이동주⋅이용길⋅손종궁⋅정시해⋅임상순⋅임병인⋅송윤성⋅임병대⋅이도순⋅최종달⋅신인구 등 여러 사람들로 각 부서를 정한 다음 거의한 이튿날 정읍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가는 곳마다 민중들의 환영을 받았고 병력이 증강되었다. 내장사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4월 15일에는 순창 구암사로 진을 옮겨 쉬고, 다음날 순창읍으로 들어가서 소총 25자루, 화약 10근, 납철 두어 말 및 지세금을 거두어 군용에 충당했다. 이 때 순창에서 채영찬, 김갑술, 양윤숙 등이 수십명의 포수를 데리고 와 의병수가 500명으로 증가하였다. 곡성군으로 진군하여 무기 지세를 접수하고 격문을 다시 여러 고을에 보냈다. 4월 19일(음) 다시 순창으로 돌아왔다.
최익현 의진의 활동보고가 정부에 도착하자 정부는 전라북도 관찰사 한진창에게 전북지방 진위대를 출동하여 수령을 체포하고, 군사를 해산하라고 훈령하였다. 그런데도 최익현 의진은 순창읍에서 병력을 증강하면서 담양 방면으로 진군할 준비를 하던 차, 음 4월 20일 새벽에 광주 진위대 소대장이 군사를 이끌고 옥과군 경계가지 와서 광주 관찰사 이도재가 보내는 황제의 조칙과 관찰사의 고시문을 보내와서 의병진의 해산을 권고하였다.
그런데 오정이 좀 못되어, 왜병이 읍 동북쪽에서 포위하여 들어온다는 보고가 있자 싸울 태세를 취하였는데, 다시 보고하기를, 그것은 왜병이 아니고 전주, 남원의 진위대 군사라고 하였다. 최익현은 말하기를 “그것이 만약 왜라면 즉각 결사전을 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동포끼리 서로 죽이는 일을 나는 차마 못하겠다. 곧 물러가라.”고 하였다. 이것은 나라를 구원하고 백성을 건지기 위하여 일어난 의병진으로서는 당연한 권고며 주장이었다.
그러나 남원, 전주 진위대가 계속 포화를 퍼붓기 시작하여 의병 대열은 흩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군장 정시해가 대전하다가 적탄에 맞아 쓰러지니, 전세는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정시해는 숨을 거두며 “시해는 왜놈하나 죽이지 못하고 죽으니 눈을 감을 수가 없읎니다. 악귀가 되어 선생을 도와 적을 죽이겠습니다.”고 하니 나머지 의사들이 모두 통곡하였다. 최익현은 좌우 사람들에게 “이곳이 내가 죽을 땅이다. 제군들은 모두 가거라.”고 하며 연청에 그대로 자리 잡고 앉으니 이 때 가지 않고 남아 있는 의병이 20명이었다. 마침 폭풍우가 일어나고 날도 저물어 주위가 처량하였다.
진위대 측에서 포위망을 좁혀 들어왔으나, 감히 손을 대지는 못하였다. 이튿날 전주 진위대 김중휘가 서울로 압송하라는 황제의 칙명이 있다고 하면서 끝까지 남아있던 최익현 이하임병찬, 고석진, 김기술, 문달환, 임현주, 조우식, 조영선, 최재학, 나기덕, 이용길, 유해용, 양재해 등 13인을 전주 진위영으로 호송했다. 이날로 호남의 중기의병은 종결되었다.
최익현이 주도한 중기 호남의병은 전투다운 전투를 해보지 못하고 10일 만에 끝나고 말았지만 최익현의 명성과 대마도에서 순국하여 운구 되면서 전 국민에게 끼친 영향이 컸다.
◎ 후기의병과 광주
일본 침략자들은 헤이그 밀사파견을 계기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인 통감을 실질적인 한국의 통치자로 만들었으며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여 차관정치를 자행하고 군대를 해산했다. 해산 군인들이 의병에 참여함으로써 의병전선에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 이를 후기의병(3차의병)이라고 한다.
후기의병은 의병지역의 전국적인 확산, 전략 전술의 발전, 의병 대열의 변화, 그리고 투쟁대상의 확대 등으로 의병항쟁의 질적, 양적 변화를 초래하여 의병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후기의병은 13도 연합 의병부대를 결성하고 서울 진공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각 지방으로 분산하여 게릴라전을 전개했는데, 그 중에서도 활동이 가장 두드러지고 끝까지 항전을 계속한 것이 호남의병이었다. 후기의병은 노령을 중심으로 전남 서북부지역을 휩쓴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와 지리산 및 그 지맥을 중심으로 동남부의 호남창의소(쌍산의소), 그리고 안규홍 등 독자적인 의병활동을 한 여러 의병부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고광순은 대대로 토왜투쟁의 역사를 지닌 가문에서 성장한 것을 긍지로 삼아오던 중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시행되자 광주 전기의병을 일으켰다가 고종의 해산령에 따라 의진을 해산한 바 있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던 중 최익현의 통문을 받고, 고재량과 함께 순창으로 갔으나 이미 의병은 해산한 후였다. 그는 기우만과 백낙구를 찾아가 거의 할 것을 약속했으나, 일이 여의치 않자 1907년 1월 24일, 창평에서 고재량, 고광훈, 고광채 등 일족과 우국지사를 이끌고 거의했으니 후기의병사에서 호남인으로는 처음이었다. 그는 능주, 동복 등지를 돌면서 더욱 전열을 가다듬고, 9월 17일 지리산 화개동으로 들어가 유진하고 군사를 훈련시켰다. 그러나 10월 16일 일제의 인근의 수비대와 경남 진해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해군 중화기포대의 기습공격에 의해 피아골 연곡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기삼연도 전기의병 당시 기우만과 더불어 거의를 도모하다가 의병해산에 불응하고 또다시 의병을 일으켜 투옥되기도 했던 전기 의병장이었다. 을사늑약에 이어 고종이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1907년 10월 30일 장성군 수연산 석수암에서 의진을 “호남창의회맹소”라 하여 다음과 같은 조직을 갖추었다.
창의대장 : 기삼연
통령 : 김용구
참모 : 김엽중, 김봉수
종사 : 김익중, 서석구, 전수용, 이석용
선봉 : 김태원
중군 : 이철형
후군 : 이남규
운량 : 김태수
총독 : 백효인
감기 : 이영화
좌익 : 김창복
우익 : 허경화
포대 : 김기순
이와 같이 의진을 편성하고 선비들에게 통문을 보내어 호응을 얻고 격문을 보내 주민들로부터 협력을 촉구하여 일제에 부역하는 자에게는 처단하고 재산을 몰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격문 끝에 평민이 일본인 한 사람을 죽이면 상금 백 냥을 주고, 순검, 일진회원 일본인 한명을 죽이면 죄를 면해주고, 2명을 처단하면 백 냥을 준다고 첨가했다. 그가 이끌던 의진은 주로 무장, 법성포, 고창, 장성 등지에서 맹활약을 벌여 일본 군경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일제의 이른바 “전남폭도사” 제 1장 총설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타나있다. “10월 기삼연이 무장과 고창을, 12월에는 법성포를 습격했는데, 항상 석수암 또는 영광 왕녀봉에 둔집하면서 총 병력 4백명으로 그 위세를 떨쳤다.”
겨울로 접어들자 추위로 인하여 의병활동이 어려워졌다. 게다가 부왜인들의 밀고로 기습공격을 받고 격전을 치른 후 의진을 해산하면서 이듬해 정월 보름에 재기하기로 했던 기삼연은 일본 군경의 집요한 추격 끝에 생포되고 말았다. “1월 30일 거괴 기삼연이 이끄는 4백명의 비도가 담양군 용면 성문리를 점령하고 곧 담양을 습격하려고 함에 주재소 순사가 광주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순창 수비대와 협력해서 기선을 제압, 즉각 성문리의 적을 공격하여 궤란시켰다. 적의 사자23명, 부상자 30명, 노획물은 화승총 5정 이었는데, 고니시 1등졸이 부상했다. 광주에서 지원 차 출동한 이마부라 토벌대는 교전 후에 도착했으나 곧 우두머리를 추적하여 순창군 복흥면 조동(동산리 구수동)에서 기삼연을 체포하였다. 이로써 그의 부하는 사분오열되어 그 세력은 크게 쇠퇴하였다.”
<전남폭도사, 1908년 1월 30일>
기삼연은 담양으로 압송되었다가 광주로 끌려갔다. 때마침 선봉장 김태원이 남면 무동촌 전투에서 가와미쯔조장과 하야시 상등병 등을 죽이고 많은 일본 군경에 부상을 입혔기 때문에 일제 관헌들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들은 보복으로 기삼연을 무수히 난자한 다음 광주 서천교 아래 백사장에서 총살하니 1908년 2월 3일이었다.
기삼연의 후임으로 의진을 이끌었던 김용구는 전남북 접경지역에서 토왜전을 벌였는데, 영광의 이대극과 더불어 그 해 4월까지 맹활약을 보이다가 부상당하여 그 후임을 박도경에게 물려주었고, 독립 의진을 이끌었던 김태원, 김율 형제는 끊임없는 토왜전을 전개하다가 4월 25일 어등산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전해산은 고광순, 기삼연이 순국하자 김태원과 협력해서 토왜전을 펼치려고 했지만 이미 전사한 후였다. 그는 오성술과 더불어 의병을 규합하여 재기를 도모하고자 할 때 전 참위 정원집이 고종의 밀조를 전하자 의병장에 올랐다. 이 때 조직한 의진이 “대동창의단”으로 국권회복기 호남의병의 중추 역할을 한 의병조직이다.
대동창의단은 유생, 농민, 해산군인, 산포수 등이 함께 어울러 진 의진이었는데, 덕망이 높았던 전해산이 농민을 보호하고 부왜인들을 처단하는가 하면 전투에서도 번번이 승리하자 장성, 영광, 나주, 함평, 무안 등 전남 중서부 징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고, 나아가 호남 전역을 망라하는 연합 의진을 결성하니, 이것이 “호남동의단”이었다.
대동의병대장 : 전기홍
제1진 의병장 : 심남일
제2진 의병장 : 박도경
제3진 의병장 : 김영엽
제4진 의병장 : 조대천
제5진 의병장 : 신화산
제6진 의병장 : 이순식
제7진 의병장 : 이기손
제8진 의병장 : 오성술
제9진 의병장 : 권택
제10진 의병장 : 안덕봉
호남동의단은 서로 긴밀한 협조체계를 갖추고 토왜전을 벌였는데, 일제의 기록에는 “합동집단”이라는 용어화 몇몇 의병장들의 이름이 보인다.
심남일 의병장은 김율의진에 참여하여 부장으로 활약하다가 김율이 순국하자 의진을 수습하여 전남 중부지방의 대표적인 의병장이 되었다.
의병대장 : 심남일
선봉장 : 강무경, 임만선, 장인보
중군장 : 안찬재, 박사화
후군장 : 노병우, 나성화, 최우평, 김성재
도총장 : 김도숙
모사장 : 권택, 정영태
군량장 : 이세창
심남일이 이끌었던 의진의 장령들을 살펴보면, 함평 인근 출신뿐만 아니라, 전남 전역의 맹장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볼 때 의진이 강성했음을 볼 수 있다. 주요 전투지역은 함평, 장흥, 나주, 영암, 능주 등 전남 중부지역이고 전해산, 안규홍 의병장과도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하였다.
안규홍은 보성의 머슴 출신 의병장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데 그 횟수가 23차례나 된다. 그는 주로 전남 중동부지역과 해안지방이었다. 처음에 순천, 보성 등지에서 활약하던 강용언 의진의 부장이었으나, 강용언이 탐옥하고 양민의 재산을 탈취하므로 그를 총살하고 동소산에서 염재보, 손덕오, 정기찬 등의 추대로 의병장이 되어 맹활약을 하였다.
양진여는 의병사에 보기 드문 의병장이자 아들 양상기, 동생 양동골 등 가족이 의병에 참여했다. 1907년 6월에 거병을 하여 본격적인 활약은 9월이었다. 당시 의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창의대장 : 양진여
도통장 : 안판구
중군장 : 박성일
좌익장 : 김처중
우익장 : 김익지
포대장 : 윤평원
양진여, 양상기 부자 의병장의 활약상은 전남폭도사에 16차나 기록이 있으며, 실제 소규모의 유격전을 벌였던 것과 부왜인을 처단했던 날을 헤아린다면 그 횟수는 수십 차례가 될 것이다.
김동수 : 광주시 중흥동 출신 32세 포목상
1906년 진위대 입대. 1907년 해산 후 의병 참여하여 담양, 장성, 화순에서 활동하다 체포되어 15년 선고받고 복역 중 옥중 순국함.
김원국 : 서구 마륵동 출신 농업
조경환 의병장과 선암시장에서 회견 후 의병 투신함. 그의 동생 김원범이 어등산에서 순국하였으며 나주, 능주, 동복에서 활동하 다 체포되어 1909년 대구에서 교수형 당함.
박봉석 : 도천면 수박등 출신
안규홍 부하로 활동. 체포되어 교수형 당함.
조경환 : 서방면 신안리 최익현 문인
32세. 김준의병장 선봉.
함평, 영광, 장성 등지에서 활동. 부하 100여명 통솔.
1909년 1월 어등산 운수동에서 부하 30여명과 함께 전사.
이기손 : 광산 본양 출신 호는 금재 1907년 의병에 투신.
용진산, 석문산 일대에서 주로 활동. 연해주로 망명. 1915년 귀 국 후 전북 금산에 은거함.
오성술 : 광산군 삼도출신 호는 죽파 27세 농업
김준의병부대 활약 후 독립부대 지휘. 체포 후 대구에서 교수형 당함.
이외에도 박용식, 박처인, 신덕균, 윤영기, 오상열, 박현동, 정사천 등 많은 의병장들이 전사하거나 교수형을 당했다.
전남의 주요 의병장들은 대부분 대구 감옥에서 1910년과 이듬해 총살형 또는 교수형을 당하고 이름없는 의병들은 군중들을 모아놓고 공개 처형되는 비극이 이어졌다.
일제의 기록에 의하면 대토벌작전으로 103명의 의병장이 체포되거나 사살되고, 4138명의 의병을 체포 또는 사살했다. 사살되지 않은 의병은 하동, 해남 간 신작로 개설 작업에 강제 투입되거나 강도, 살인죄로 처벌되었다고 하니 그 날의 참상을 짐작할 수 있다. 대토벌작전 이전에 순국한 의병을 합한다면 국권을 찾기위해 민족의 제단에 몸바친 의병의 숫자가 수천명이 될 것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하늘보다 더 중한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한말 호남 의병이 없이 나라가 망했다면 우리 역사는 얼마나 부끄러운 역사 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