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 의사 독립운동가 이태준 선생)
의사들의 항일투쟁은 멀리 몽골까지 이어졌다.
김필순과 함께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망명길에 올랐던 또 한사람의 의사 이태준.
그는 멀리 안창호에게 편지를 띄어 김필순의 거처를 물을 만큼 김필순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
김필순과 함께 조국독립의 신명을 불태웠던 이태준은 결국 혈혈단신 독립운동의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나섰다.
이태준은 김필순을 이은 세브란스 2회 졸업생으로 '의사'가 되었다.

*1911년 세브란스 의학교 2회 졸업사진

이태준이 김필순의 '김형제상회'에서 일했던 것이 두 사람의 인연이자 이태준이 의사의 길을 걷게된 계기가 되었다.
이태준이 졸업할 당시 김필순은 이미 교수가 되어 스승과 제자 사이가 되었지만 둘은 학생시절 이미 독립운동에 투신한 돈독한 동지 관계였다.

이태준은 '소년'지를 발행하던 청년학우회회원이었다.

'청년학우회'는 안창호가 결성한 신민회의 자매단체이자 흥사단의 모체가 되는 비밀결사단체.
구국계몽운동에 앞장서며 독립운동을 꾀하던 이태준은 망명뒤 중국남경에서 의사생활을 하며 중국의 정치인들과 끈을 맺어간다.
이태준의 몽골생활은 국제정세에 격변기 속에 진행됐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사회주의 물결이 밀어닥친 것이다.
러시아에선 한인들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이 창당되었다.

그들은 일본제국주의를 타파해야 할 계급으로 보았고 이는 항일운동가들에게 적지않은 공감을 샀다.
이태준은 한인사회당의 비밀당원이 되었다.
*레닌과 함께 앉은 박진순
*한인사회당

<반병률 교수 / 한국외대 사학과>
다른의사들 경우엔 민족주의적인 그런것에 머물렀던 것에 반해서 이태준의 경우에는 러시아혁명에 영향을 받아서 사회주의사상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였던 상태고 실제로 러시아의 도움을 받은 러시아와 혁명적인 활동에서 연계를 가졌던 한인 사회당이라든가 고려공산당과의 깊은 혁명활동에 참여를 했던 것입니다.

*울란바타르
몽골또한 정치적인 격변기를 겪고 있었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자 청의 지배를 받던 몽골은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었지만 몽골의 권력공백기에 러시아가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르투르 교수 / 몽골국립대학>
몽골만이 독립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까자흐, 티벳, 위구르등 비교적 작은 국가들이 독립을 위해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운동중에서 몽골의 독립선포는 이태준등 한국독립운동가들에게 커다란 가능성과 희망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당시 울란바타르(후레)는 국제도시였다.
중국과 인도 티벳과 부탄등지에서 몰려든 상인들로 매춘업이 성행했다.

울란바타르의 거리는 성병환자들로 넘쳐났다.
그러나 그들은 치료법을 찾지 못한채 속수무책이었다.
몽골의 성병이 만연한데는 티벳에서 건너온 티벳승려들의 영향이 컸다.
많은 티벳승려들이 성병을 앓고 있던데다 잘못된 위생관을 갖고 있던 탓이다.

이태준은 '동의의국'이라는 병원을 세워 성병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울란바타르에서의 서양의술은 놀라운 치료성과를 보였다.
이태준은 몽골인들사이에서 '붓다의사'로 칭송을 받았다.

<바르투르 교수 / 몽골국립대학>
예를 들어서 손이나 몸을 씻으면 안된다는등 티벳불교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당시 몽골인들이 여러질병을 앓았다고 봅니다.
이때 이태준이 '동의의국'이란 병원을 설립하였는데 몽골인들은 한국병원이라 불렀습니다.
어른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아침일찍부터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고 아주 좋아했다고 합니다.

붓다의사로 널리 이름을 알리던 이태준은 몽골의 왕 '복드한'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다.
몽골의 마지막 왕 '복드한'
복드한은 몽골어도 익숙치 않은 이태준을 어의로 임명한다.
이태준은 병약하던 복드한을 돌보면서 큰 신임을 얻게 된다.
몽골의 어의가 된 이태준은 몽골을 통치하던 중국 가오시린장군의 주치의도 겸했다.
비밀군관학교를 세우기 위해 몽골의 거점을 마련한 이태준은 권력의 철저한 보호를 받게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