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사물은 둘이 아닌 하나 주자와 다르고 불교와는 ‘同軌’
양명학의 완성은 良知 다스리기 성찰극치, 절사 등이 주요 절목 생활 속 자기완성을 중요시 해
朱王에서 理의 성격
우리는 전호에서 양명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명제 ‘심즉리(心卽理)’가 무엇이며 그 연원은 어디에 있는 가를 살펴 보았다. 이 과정에서 자연 주자학의 ‘성즉리(性卽理)’까지도 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명의 ‘심즉리’는 주자의 ‘성즉리’에 대한 안티테제(antithese)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심즉리’ ‘성즉리’는 다 같이 화엄학의 이사법계설(理事法界說)에 근원하고 있음도 파악 할 수 있었다.
주자의 ‘성즉리’는 마음을 심(心) 성(性) 정(情)으로 삼분하여, ‘성’을 ‘이’라고 규정하고 심에 대한 우월성을 갖게 하였다. 그리고 이 성은 도덕적으로 볼 때 인·의·예·지(仁義禮智)로서 순선(純善)이다. 심과 정은 성과는 달리 이기(理氣)의 합이므로 이것은 선도 있고 악도 있다. 이는 태극으로서 순선이지만 기는 유선유악(有善有惡)이기 때문에 이기의 합(合)일 때, 당연히 선악이 혼재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가 화엄 이법계를 딴 것이라면, 이기론에서 만물의 질료라 할 수 있는 기(氣)는 사법계를 모방한 것이다. 기는 이와는 달리 청탁(淸濁)이 있어, 이로하여 선악이 있게 마련이다. 청기는 선할 수 있지만 탁기는 그 정도에 따라 현우(賢愚), 선악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선악, 현우를 갖는 존재이다.
불교에서 일체 중생은 모두가 부처님 성품(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생은 본래 청정한 존재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하고 우매하며, 선악이 심신에 혼재하는 것은 무시이래로 쌓여 온 습(習), 즉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서다. 기독교에서는 원죄(原罪)가 인간을 만들고, 불교에서는 무명이 중생을 만들며, 유교에서는 기가 인간을 만든다.
아담과 이브라는 최초의 인간이 원죄를 짓지 않았다면 인류는 지금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벌거벗고 천사로 살고 있을 것이고, 근본무명이 없었다면 우리는 오욕락을 모르는 채 부처로 살아 갈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비롯한 우주 만물을 만드는 기(氣)에 맑(淸)고 탁(濁)하고 조악(粗惡)한 것이 없었다면 인류는 모두가 70세 이후의 공자처럼 성인(聖人)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무명, 원죄, 기가 있기에 우리는 지금 인간으로 사는 게 아닌가!
주자학의 이기론에서 이는 형상이 없고, 운동도 없으며, 아무런 조작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언제나 기 가운데 있으면서 사물의 본성(物理 또는 事理)을 이루고 사람에 있어서는 하늘에서 품수(稟受)한 천리(태극), 곧 성(性)으로 설명된다.
또한 이는 주자학에서 ‘존재의 이’, ‘도덕의 이’로 개념화 된다. 존재의 이란 이른바 ‘소이연지고(所以然之故)’로서 마땅히 그렇게 되는 바의 까닭, 곧 모든 것의 원인, 특히 현상세계를 존재케 하는 제일 원인자와 유사한 것이다. 태극이 동(動)하면 양(陽)이 생하고 또 태극이 정(靜)하면 음(陰)이 생한다(주렴계 태극도설)고 할 때, 여기서 동과 정을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理)이다. 효제충신도 마찬 가지다. 우리는 왜 효제충신 해야 하는가? 거기엔 그만한 이(理)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덕이란 ‘소당연지칙(所當然之則)’이다. ‘소당연지칙’이란 마땅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법칙, 또는 규칙이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도덕적 의무가 이것이다. 칸트의 용어를 빈다면 ‘정연명법(定言命法)’과 같은 것이다. 유교에서 강상의 윤리가 되었던 삼강(三綱), 오륜(五倫)이 이에 해당하고 종교의 계율도 이러한 범주에 들 것이다.
‘이(理)’의 ‘고(故)’와 ‘칙(則)’은 성리학의 두 수레바퀴와 같다. 그리고 주자학에서 사리 물리와 더불어 고와 칙은 마음 안의 존재이기 보다는 ‘외재물(外在物)이다. 이것이 성즉리의 구조다.
그러나 왕양명의 성즉리(心卽理)는 이상 주자학에서 갖는 이의 의를 그대로 가지면서 마음 안의 존재가 된다. 천리, 사리, 물리, 소이연지고, 소당연지칙과 같은 이의 모든 것이 마음과 일여(一如)하다. 그래서 왕양명은 “마음 밖에 이가 없고 마음 밖에 사가 없다(心外無理 心外無事)”〈전습록〉고 하는 것이다.
마음 - 萬事出
양명학에서는 성리학에서와는 달리 태극(太極)이 없이도 만물의 존재가 가능 하다. 왕양명에서 ‘物(事)’이란 마음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전습록〉에서 이러한 도리를 가장 간요하게 표현하고 있는 대목을 들라면 다음의 말일 것이다.
“텅 비어 영명하고 어둡지 않아 모든 이가 갖추어져 있음으로 만가지 일이 이로부터 나온 다. 마음 밖에 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 밖에 사가 있는 것이 아니다”. (虛靈不昧 衆理具而萬事出 心外無理 心外無事. -전습록 서애록)
왕양명의 이 말은 원래 〈대학〉의 명덕(明德)을 해의한 주자의 “밝은 덕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하늘에서 받은 바다. 텅비어 영명하고 어둡지 않아 모든 이를 갖추었음으로 모든 일에 응하는 것이다(明德者 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以具衆理 而應萬事者也)” 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자는 맹자 ‘진심장구 상’에서도 “마음은 사람의 신명으로 모든 이를 갖추었음으로 모든 일에 응하는 것이다(心者 人之神明 所以具衆理 而應萬事者也)”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을 보면 〈대학〉의 ‘명덕’ 해의에서 ‘허령불매’는 심덕을 지칭 하는 말임이 분명하다. 즉 ‘명덕’은 곧 ‘심덕’ 이다.
왕양명은 주자의 ‘허령불매’는 그대로 쓰고 그것에 대한 작용적 측면을 풀이한 후구 ‘구중리 응만사’에서 ‘구(具)’ 한 자를 도치 시키고, ‘응(應)’ 한 자를 ‘출(出)’로 바꾸어 ‘만사(萬事)’의 뒤에 놓음으로써 주자의 ‘심’과는 상이한 개념을 도출 하고 있다.
즉 ‘구중리(具衆理)’를 ‘중리구(衆理具)’로, ‘응만사(應萬事)’를 ‘만사출(萬事出)’로 만들어 ‘심’에 대한 왕양명 자신의 신설을 내놓고 있다. 주자의 ‘구중리’와 ‘응만사’는 마음에 모든 이를 갖추고 있어 나 밖의 사물들과 감응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마음에 갖춘 이와 나 밖의 사물의 이가 서로 합일하여 감응 한다는 뜻이다. 마음은 주관이고 사물은 객관, 대상물로서 ’심‘과 ’물‘은 하나가 아니고 둘이다.
이에 반하여 왕양명의 ‘중리구’ ‘만사출’은 주자와 달리 이일(理一)이나 분수(分殊)의 입장이 아닌, 오직 이일의 입장으로서 이는 심인 까닭에 인간에게 본구하는 것으로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왕양명의 ‘심즉리’는 ‘심리합일’이기도 하며 ‘심물합일’이기도 하다.
‘만사출’은 일체의 사사물물이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마음과 사물은 상호 대립되는 이원적 존재가 아니라 일원적으로 확립되는 존재다. ‘심’과 ‘물’은 둘이 아니고 하나다. 주자와 다르고 불교와 동궤(同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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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녕파 여요에 있는 왕양명의 고향집. 양명학의 완성은 ‘치양지’, 즉 양지를 다스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왕양명은 성찰극치(省察克治), 절사(絶四), 집의(集義) 등을 절목으로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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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 혜능은 “세상 사람들이 본래 성품이 청정해서 모든 것이 자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미혹과 망령을 없애고 안팍을 밝게 사무치면 자성 가운데 만법이 다 나타나니 견성한 사람도 이와 같다”(육조단경)고 말하고, 황벽선사는 “이 법이 곧 마음이니, 마음 밖에 법이 따로 없다”고 하고, “일체 모든 것은 오직 한 마음 뿐이다”, “일체 모든 것은 다 마음으로 말미암아 만들어 지는 것이다”(전심법요)라고 하였다.
왕양명의 ‘허령불매 만사출’의 심은 혜능의 ‘자성청정심’, 황벽의 ‘일체 유일심’과 그 의미나 개념이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불학의 마음이나 왕양명의 심은 이처럼 인간과 우주의 근원이란 점에서 전호에서 언급한 대로 형이상학적 실재(reality)라 말 할 수 있다.
良知와 致良知
왕양명의 ‘심학’은 ‘치양지(致良知)’로 완성된다. 이로써 ‘양명학’은 불학의 틀에서 벗어나 공맹, 특히 맹자학(孟子學)으로 돌아 간다. 양명학의 완성과정을 대체로 ‘교(敎)의 삼변(三變)’이라 한다. 용장 오도(悟道)의 심즉리(37세), 귀양서원의 지행합일(38세), 치양지의 제창(49세)이 그것이다. 심즉리는 지금까지 설명한 대로다. 그리고 그의 지행합일은 주자학의 선지후행론에 대한 반격이다.
당시 명대 사회는 주자학이 관학화되어 과거학으로 전락하여 이른바, 성학(聖學)이라고 하는 유학을 출세학으로 만들어 버렸다. 공자가 비판한 위인지학(爲人之學)이 되고 만 것이다. 자신을 완성하고 성인(聖人)이 되는 위기지학(爲己之學 )이 공맹의 가르침인데 왕양명에 비친 당시 명나라의 학문은 관직에 나가기 위한 수단에 불과 하였다. 특히 선비, 즉 독서층의 젊은이 들은 “먼저 알아야 행할 수 있다”는 선지후행론 만을 맹신 하여 알기 위해 배운다는 명목으로 평생 죽을 때까지 일할 생각을 가지지 않고 빈둥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이론이 바로 지행합일(知行合一) 이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둘이 아닌 하나다. 효를 말 할 때, 효행에 대한 절목만을 알고 직접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이것은 효를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다. 앎(知)과 실천(行)은 둘이 아니다. 진정으로 실천해야 아는 것이다. 이래서 양명학은 실천주의 철학, 행동주의 철학으로 평을 받는다.
전술한 대로 양명학의 학문종지는 ‘치양지(致良知)’에 있다. 즉 ‘양지’를 이루는데 있다. 그렇다면 양지란 무엇인가? 양지란 말은 ‘양심’이란 용어와 함께 맹자가 최초로 쓴 말이다.
맹자는 “사람이 배우지 않고도 능한 것을 그 양능이라 하고, 생각하지 않고도 아는 것을 그 양지라 한다 (人之所不學而能者 其良能也, 人之所不慮知者 其良知也 - 孟子 盡心 上)”고 말하였다. 맹자의 이 말에서 본 다면 양지는 양능으로 인간이 타고나는 선천지(先天知)이다. ‘생각하지 않고도 안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직관적이고 직각적인 선천적 인식능력을 말한다. 왕양명은 이 “양지‘를 마음의 체로 하여 그 개념을 생성의 원리, 도덕성의 근거, 실천의 주체로 한층 고양시키고 양지의 완성을 곧 인간의 완성으로 보았다.
왕양명은 ‘양지’를 말함에 유교·불교·도교의 핵심 개념들을 다 포섭시키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을 들면 천리, 시비지심, 진성측달(眞誠惻), 실리. 성(誠), 미발지중(이상 유), 昭明靈覺處 , 明師, 明鏡, 本來面目, 恒照者, 照心(이상 불), 太虛無形, 流行氣(이상 도) 등으로 요약 할 수 있다.
그리고 맹자에서 ‘양지’는 단순한 선천적 인식 능력이었는데, 왕양명에 와서 ‘양지’는 유 불 도 ‘三敎 합일’의 정점에 서게 된다. 왕영명은 삼교합일을 강력히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전습록 곳곳에서 자신의 ‘양지 심학’이 이들 삼교를 다 아우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양지는 심체로서 활동하는 능동자다. 곧 만물을 생출(生出)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물(物)이란 의지소재(意之所在)로서의 물이다. 양지에서 발하는 의가 어버이를 섬기는 효에 가 있다면 효가 물이고, 백성의 다스림에 가 있다면 그 다스림이 물이다. 그런데 의는 선도 있고 악도 있다. 그러므로 의가 성스럽지 못하면 물 또한 성스럽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 치양지의 필요성이 있다.
원래 양지는 불교의 진여심과 같은 것이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인욕의 가리움이 있어서 그 본래면목을 제대로 발양하기 어려울 수가 있다. 치이양지는 이 인욕의 가리움을 벗겨 내는 방법이다. 그리고 성찰극치(省察克治), 절사(絶四), 집의(集義)는 왕양명 치양지의 중요한 절목들이다.
자신을 반성하여 극기하는 것은 성찰극치요, 무의(毋意) 무필(毋必) 무고(毋固) 무아(毋我)는 공자가 강조한 절사(絶四)로서 ‘毋’는 ‘無’와 같다.
사의가 없는 것이 무의고, 꼭 무엇을 해야 하겠다는 집착이 없는 것이 무필이며, 집체된 고집이 없는 것이 무고이고, 사기가 없는 것이 무아다. 의, 필, 고, 아의 네 가지 착에서 벗어나 는 것이 곧 공자의 절사다.
그리고 집의는 맹자의 수양론으로 호연지기를 배양하는 것이다. 주자는 이것을 선을 쌓는 적선이라고도 해석했다. 모두가 치양지의 중요한 방법들이다. 왕양명은 이러한 방법 외에도 ‘사상마련(事上磨鍊)’을 제창했다.
일하는 분상에서 심신을 연마하라는 것이다. 수양이 꼭 정좌나 독서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사람이 활동하고 노동하고 일하는 그 가운데서 체험적으로 연마해야 한다는 것이다. 왕양명의 이 사상마련은 아주 획기적인 것으로 농 공 상인들의 많은 호응을 받았다. 그의 제자들 가운데 선비(士)가 아닌 농, 공, 상인들이 많았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사상 마련이야 말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철학의 표본이다. 이것이 지행합일이며, 바로 치양지다. 일 속에서 양지를 이루어라. 이 말은 자기의 주체를 잃어 가는 현대인들에게 왕양명이 던지는 또 하나의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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