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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과 한국 서예
오늘의 한국 서예를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모전을 이해해야 한다. 오늘의 한국 서예가 형성되기까지 수많은 요인들이 작용하였다. 그 중에서도 공모전은 절대적인 요인으로 간주하고 있다.
서예사를 이야기할 때는 공모전은 말하기 싫은 부분이기도 하다. 공모전을 이야기하려면 부정과 비리로 얼룩진 사실을 들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한국의 서예가 이만큼이라도 발전한 것을 공모전의 공적으로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들추어서 악취만 난다고 하더라도 사실을 알고 있어야 개선의 여지가 생긴다. 덮어두어서는 절대로 해결의 실마리가 나타나지 않는다.
서예인이 사회적으로 공인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공모전에 출품하여 입선하는 길이다. 이러다보니 서예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모전에 목을 맨다. 단순히 교양과 취미 생활로 시작한 사람도 공모전에 눈을 돌린다. 수도 없이 많은 공모전(2006년도에 약 300개라고 한다.) 공모전은 운영을 위해서도 아마추어 서예가를 유혹한다. 아마추어 서예가들도 접근하기 쉬운 공모전의 유혹을 쉽게 버릴 수 없다. 여기, 저기의 공모전에 음으로, 양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스승의 권유도 한 몫을 한다.
대부분의 서예인이 가장 선호하는 공모전은 전국적인 규모의 세 서예 단체가 주관하는 전국 규모의 공모전이다. 미협 서예분과와 한국서예가협회(서협), 그리고 한국서가협회의 세 단체가 주최하는 공모전이다.
역사가 가장 긴 공모전은 1949년에 제 1회가 열린 미협의 공모전으로서, 이후로 자주 말썽을 일으켜서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다. 따라서 몇 번의 변신을 거듭한 후에 오늘에 이르렀다. 한국서예가협회는 미협의 서예분과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미협을 빠져나와서 1989년에 결성한 단체로서, 역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서가 협회는 서예인들이 미협과 서혐으로 분리된 것을 다시 통합하겠다는 취지로 서예계의 원로들이 주동이 되어서 발족하였다. 이들은 서단에서 배제당한 원로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으므로 이미 분열을 전제로 모임을 만들었다는 의구심이 드는 단체이었다. 이들도 1993년에 결성하여 지금까지 공모전을 치루고 있다.
공모전은 항상 한국 현대 서예사의 한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만큼 한국 서예사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공모전의 부정적인 효과가 극대화되어서 표출함으로 오히려 서예계의 존폐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개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여론이다. 그런 면에서 서예 공모전을 검토해보는 일은 한국 현대 서예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괴제이다.
현재, 중국의 공모전의 실태와 비교해보면 우리의 부정적인 실상이 더 뚜렸해진다. 앞으로 개선을 한다면 하나의 이정표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중국에는 전국을 아우러는 서예 단체는 중국서도협회가 유일하다. 이 단체가 주도하여 중국 전국 규모의 공모전을 열고 있다. 매년 개최하는 것이 아니라, 3-4년 만에 한 번씩 열고 있다. 약 3만 점이 출품되고(지방의 일차 심사를 거친 작품이라고 한다), 이 중에 약 500점이 수상한다. 물론 우리나라와는 역사적, 문화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이지만 300개가 넘는 공모전을 가진 우리로서는 반성의 빌미가 될 수 있다.
서예 공모전은 한국 미협이 주최하는 미협 공모전과는 떼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미협의 공모전은 여러 비리와 연루됨으로 변화와 개선을 거듭하였다. 서예 공모전도 그 변화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미협과는 같은 길을 걸어왔다. 미협의 공모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서예인들은 대거 참여하였다. 그러나 국전은 처음의 취지대로 우리나라의 미술문화를 튼튼하게 기초를 만드는 일에도 실패하였다. 보신과 입신을 위하여 세력을 형성하였고, 세속적인 명리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였다는 평을 들었다. 세력이 형성되면서 국전은 청치화의 길을 걸었다. 국전이 끝날 때마다 논란이 일어나면서 숱한 잡음만 터뜨렸다. 국전은 아카데미줌적인 풍토를 조성함으로 서단의 구조를 추천작가와 초대작가의 상하 계급적 조직으로 만들어버렸다. 서예계는 조직에 의하여 전반적으로 경직되면서 자유로운 창작으로 전시회를 통하여 작품의 평가를 받는다는 의식은 실종되어 버렸다. 국전에서 입선을 하면 매스컴에서 조명해주지만, 전시회를 통하여 선보이는 작품에 대하여서는 매스컴에서 아무런 관심도 보여주지 않았다.
우선은 작품을 평가할 수 있는 평론이 없었다. 법첩 위주로 형성된 서예의 작품 세계로서는 작품의 질이나, 경향 내지 개성을 따지기에는 무리이었다. 그러므로 서예인들은 작품보다는 국전을 통하여 인지도를 높이는 것이 더 시급하였을 것이다
1993년에 서협의 공모전에서 비리가 폭로되었을 때 미술전문지의 기사는 서예계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 속에 오래 동안 서예계가 이끌려 왔다는 것이다. 서예인들은 다른 장르의 예술가에 비해 궁핍하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 활동할 수 밖에 없었고, 살아남기 위해서 서예학원이라도 운영해야 계속 자기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회화나 조각은 수백, 수천 만원에 거래되고 있는데 비해 서예작품은 시장조차 형성되어 있지 못한 상황이고, 서예계의 생계 유지는 서예학원 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현재 서예계의 중진, 원로 작가들마저도 그와 비슷하게 생계를 유지할 수 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으로 인해 초창기 미술계가 그랬던 것 같이 심사 비리가 누적되어 올 수 밖에 없었다. -(중략)- 미술인들의 생활이 점차 나아지자 이런 비리는 상당히 없어지고 있다. 근본적인 원인은 서예계의 열악한 현실이다.” (서정걸. 월간미술. 8월호. 1993)
잡지의 기사가 지적하고 있듯이 서예인들은 자신들의 생계수단을 작품 시장의 형성에 의하지 않고, 서예학원을 운영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근본 원인이라고 진단하였다. 공모전은 서예인들이 처한 상황을 교묘히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중국의 경우는 공모전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지만 나름대로 시장이 형성되어 있으므로 서예인은 그곳을 통하에 생계를 꾸려나갈 수가 있다. 한국이 서예인들이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이다.
초기의 국전에서 말썽을 일으킨 비리는 돈의 뒷거래가 아니고, 심사의 불공정성이었다. 한 유파가 국전을 장악함으로 파벌 위주로 입선자를 선정한다는 것이 논란의 대상이었다. 입선자의 분포를 보면 이 논란은 상당히 근거가 있다.
국전의 초기인 17회까지는 손재형의 영향이 강하였음을 보여준다.(역대국전서예도록. 고려서적주식회사. 2000.을 참고) 또 하나는 입, 특선작에서 사숙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난다. 서가(書家)로서 사회적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서학도들은 고법을 충실하게 연구하여 기초를 닦은 후에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정상적인 과정을 밟기보다는 성급하게 시류적인 서체를 따르려는 풍조가 풍미하고 있었다.(전상모. 문화권력과 서예공모전. 서예비평1. 고륜. 2007)
국전의 초기에는 특정 유파에 의하여 국전이 운영되므로 한국 서예가 편향되게 흘러갔다. 유파에 따른 알력이 심해지고, 나아가서 국전에 대한 불신과 서단의 분열이라는 결과를 불러왔다. 드디어는 국전 무용론까지 나타났다. 이로서 국전은 1981년, 30회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다.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
국전의 마지막인 29, 30회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으로 이관하여 치른 것을 개혁이라면 개혁이랄 수도 있었다. 1982년부터는 일반 공모전으로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부분으로 되돌아가서 1999년까지 19회를 치루었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분과라고 이름을 바꾼 후에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주관하여 전시회를 치루었다. 1986년부터는 순수한 민간 단체인 한국미술협회(미협)으로 이관하였다. 이후로 미술 협회의 이사장은 공모전에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됨으로 이사장 선거는 파벌끼리 인전투구의 싸움터로 변하였다. 미협은 ‘서울대파, 와 ’홍대파‘가 뿌리깊은 파벌로서 오래 동안 반목하고 있었으므로 주도권 쟁취를 위한 싸움은 더욱 치열하였다. 서예인들은 그들의 곁에 덧붙어서 파벌싸움에 휩쓸려 들어갔다.
이들은 이사장을 차지하기 위한 단순한 싸움으로 끝내지 않고, 심사위원 선정, 심사과정의 여러 문제. 작품 선정의 기준에 이르기까지 사사건건 대립하면서 싸웠다. 미협의 운영진에 참여한 서예인들도 파벌을 형성하여 선거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미협의 집행부가 다투는 싸움에 서예계도 나뉘어져서 지원함으로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급기야는 제 19회 미술대전을 운영해야 할 이사장을 뽑는 선거에서 두 사람의 이사장(박석원과 김선회)이 선출되는 해프닝도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나타나는 일반인의 여론은 아주 부정적이었다. ‘지금까지 개최했던 미술 대전의 심사제도와 운영체제에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이 있다.(월간미술 92.1월호. 국전평에서)라느 평은 국전을 다루는 글에서는 어디에서든지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심사위원의 선정이나, 과정, 기준 등에 대해서는 하나도 변하지 않게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서협이 미술협회의 서예분과에서 뛰쳐나와 새로운 단체를 결성한 배경에는 심사의 공정성에 대한 불만이 깔려 있었다. 서협이 출범한 지 몇 년이 지나서 공모전과 관련된 어마어마한 비리가 폭로되었다. 1993년 7월 27일에 서협의 공모전에서 대필한 작품을 출품하였고, 돈을 주고 입상을 매수한 사실이 적발되어서 관련된 서예인 17명 중에 14명이 구속된 사건이 일어났다. 구속된 인사는 한국서예협회의 이사장. 부이사장, 이사와 대필을 받아서 입상하였던 여러 명(대부분이 서예학원의 원장이었다.)이 구속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에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서예는 수양이라는 사고 방식에 젖어 있던 일반인들에게는 당연히 충격이었다. 국전의 부정과 비리를 비난하면서 뛰쳐나온 사람들이 만든 단체의 수뇌부가 구속된 것도 놀랄만한 일이었다. 공모전의 입상은 돈거래가 있을 것이라는 심정적으로만 느끼고 있던 사항을 실재의 사실로 들어났기 때문이었다.
서예계는 이전에도 미협의 공모전에서 가장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왔다. 하나의 유파가 국전을 장악함으로 심사과정에 비리가 있으리라는 억측은 무성하였지만 실체가 드러난 일은 없었다. 그래도 자기 세력을 확보하기 위한 싸움 정도로만 여겼는데 돈으로 수상을 매수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보고 허탈해 하였다. 이 사건으로 서예계는 파렴치한 몰골을 만천하에 드러내었다.
국전을 개선해야 한다는 논의가 수없이 있어 왔다. 결과로 볼 때는 개선의 의지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해 관계를 미련없이 버리고, 새로운 풍토 조성에 앞장 서 주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꿈일 수 밖에 없었다. 왜냐면 지금도 공모전의 방식이 그때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국전의 비리는 서예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국전의 전반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서예인들은 도덕적 불감증이 만연하여 죄의식을 별로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2000년에는 제 17. 18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동양화 부분에서 비리가 적발되었다. 미협 관계자와 출품 작가 14명이 구속되었다. 17회 때 심사위원이 특선을 조건으로 1500만원을 받았다. 18회 때는 돈의 단위가 더 많아져서 2500만원과 2000만원을 받았다. 2010년에 사진부에서 수 억 대의 돈이 거래된 유사한 사건이 적발되어 구속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서 미술대전 무용론이 제기되었다. 신문기사에서도 폐지를 주장하는 글이 실렸다.
“보다 근본적인 의문은 이런 식의 미술대전이 꼭 필요한가 하는 점이다. 미술대전의 무용론이 제기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더욱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홍찬식 논설위원. 동아일보. 10.10. 2000)
“미술대전의 존폐 여부도 차제에 의논해 보아야 한다.(임청두 기자. 연합뉴스. 9.29.2000)
미술대전의 비리는 심사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정실 심사. 파벌 심사에서 급기야는 ‘매수 심사’라는 일까지 나타났다.
미술대전의 심사를 가까이서 지켜 본 사람은 더욱 신랄한 어조로 반박하고 나셨다. 당시에 대구 미협의 홈페이지에 실렸다가 삭제한 글을 보자.
“나는 미술대전 심사 때 대략 네 번 정도 진행요원으로 일하였다. 그때마다 미술대전에 대한 심사 진행 상황과 그때 이루어지는 이해하기 힘든 행위들을 보아왔다. ···. 무슨 이유에선가 분명 삼사위원들이 낙선을 시킨 작품인데 그림을 찾으면 그림 뒤에 있는 낙선 표시에 지우고 입선 표시를 한 후에 입선 작품과 함께 쌓아 놓는다. mfl고 후에 전시할 때 보면 그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미술세계 11. 2000)
이 글에서 미루어 생각해보면 심사 과정에서 심사위원 이외의 힘이 작용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미술대전의 비리에는 미술대전의 심사 과정을 통하여 출품하는 작가, 심사위원, 그리고 운영위원까지 연류되어서 관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리의 이면에는 인맥(사숙에 의한 사승관계), 학맥, 지방 연고까지 작용하고 있다. 마침내는 금맥까지 얽혀지면서 비리의 폭은 끝날 곳을 모를 만큼 넓어졌다. 이러한 비리가 수 십 년을 이어오는 동안에 관습화되고, 일반화되어서 비리를 저지르고도 비리인 줄 모르는 도덕적 해이에 이르렀다. 이런 사례는 2009년도 서협의 공모전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1999년에는 미협의 서예 분과에서 공모전 운영에 관하여 몇 가지 개선책을 내 놓았다. ‘대한민국 서예대전’이라는 명칭은 서협에서도 같은 명칭을 사용함으로 혼든을 일으켰다. 이로서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분과(19회)로 되돌아 갔다. 이후로는 미술대전과 서예대전으로 명칭이 구분되었다. 미술대전은 과거의 국전을 잇는다는 뜻으로 지었다. 개혁의 방안으로 입선자의 수를 늘이므로 가능한한 수상을 위한 비리를 줄여보려고 하였다. 그 외에도 초대작가도 계보별로 분류하여 한 파벌에 치중되는 현상을 예방하려 하였고, 초대작가와 7점 이상의 작가도 발표하여 특선과 낙선이 되풀이하는 부조리를 막아보려 하였다. 이로서 심사의 공정성을 지키려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1999년 4월에는 서예의 대표적인 세 단체의 초대작가를 공동으로 개최함으로 서단의 화합을 도모하였다. 한편으로는 문인화가 서예에서 분리되어서 하나의 장르로 떨어져 나갔다.
공모전을 개선하는 노력을 나름대로 하였다고는 하나 비리는 여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비리는 제도를 조금 바꾼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더 깊은 사회구조적인 배경을 을 가지고 있었다.
2007년 2월에는 KBS방송에서 저녁 9시 뉴스에 일주일 동안 내내 미술대전의 비리에 관하여 방송하였다. 신문에서도 관련된 기사들이 연일 쏟아져 나왔다. 비리의 내용은 지금까지 늘상 거론되는 내용과 대동소이하였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에게는 낯을 들기가 부끄러운 내용이었다. 낙선작이 특선작으로 둔갑하고, 돈을 받고 입상을 시켜주기도 하고, 모텔에 모여서 수상 대상작을 선정하여 작품을 외우게 하는 예행 연습까지 하였다는 것이다. 미술대전의 비리가 적나라하게 일반 국민들에게 알려졌으므로 이 문제는 급기야 미술계의 문제가 아니고 사회 문제화가 되었다.
뉴스에서 보도된 내용을 미술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새로운 것도 아니었다. 고질적으로 굳어 있는 병폐일 뿐이었다. 그러나 사회의 분노는 엄청났다. 지난 4년 간의 공모전 관련 서류를 압수 수색함으로 미술계 인사 9명을 구속하고, 협회 간부 및 관련 작가 49명을 불구속 입건하였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부르짖어 온 개혁과 개선은 한낱 메아리도 없는 소리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졌던 것이다.
2003년의 문예진흥원의 미술대전 평가 위원회는 “미술협회가 주최해온 대한민국 미술대전 은 공정성, 파급 효과 등 전반적인 면에서 공공 기금을 지원할 필요성이 소멸되었다.”라는 평가를 하였다. “현 공모전 형식의 미협 구조로는 도저히 긍정적인 작가 발굴을 하기가 어렵다”라고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미술대전의 폐기론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반대편의 악의에 찬 음모라는 음모론을 제기하면서 복잡다단한 논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문화공보부는 미술대전의 대통령상과 국무총리상 등의 정부 지원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공모전의 지원금도 일억 이천만 원에서 팔천만 원으로 축소하였다.
서예 공모전은 국가 기관으로부터도, 일반 국민으로부터도 부정당한 꼴이 되었다. 유일하게 공모전에 매달려서 꿈적도 않는 사람은 서예인들이었다. 그들은 서예계의 지도자들이었다. 공모전은 스스로 뼈를 깎는 노력 없이는 존재 가치마저 상실해 버릴 것이다. 가장 최근이랄 수 있는 2010년 4월에 신문에 실린 내용을 옮겨 보겠다. 그들이 왜 공모전에 매달려 있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서예계에서 공모전 출품이 유일한 성장 통로로 간주되고 있는 폐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공모전에 출품하려면 학원의 스승으로부터 체본(體本)을 받아야 하고, 또한 작품에 찍을 낙관도 새겨 받아야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금전 소모가 따른다. 입선이라도 하게 되면 또한 사례비가 필요하며, 끝없이 돈으로 연결된 과정의 되풀이, 설령 그런 일이 서예계 일각의 비리로 치부한다 치더라도 문제의 심각성은 작품성에서 나타난다.
서예 작품의 예술성이 스승이 준 체본의 울타리에 갇혀 언제 나 개성 없는 고답적 되풀이가 계속되는 일이다. 그리하여 어느 공모전이든 천편일률적으로 변화 없는 고식적 서체일 뿐이다. 감히 지적하자면 우리 서예계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모전 증심의 발표 방식에서 벗어나야만 환골탈태할 수 있다.“ (이중희. 계명대미술대학(미술사) 교수). 조선일보 4월. 2010)
위의 글을 읽으면 50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그리고 오늘에도 서예를 바라보는 시선은 하나도 바뀌지 않고 그대로이다. 그러는 사이에 미술에서 차지하는 서예의 위상은 추락을 거듭하여 존폐의 위기를 맞고 있다. 서예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개선하는 방법론까지도 그대로 이다.
그런데도 불가사의한 일 중의 하나는 공모전은 더 번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9년의 서협 공모전에 관하여 이종호가 폭로한 내용을 살펴보면 지난 날에 수도 없이 폭로하였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여기서 우리가 짚어봐야 할 문제점이 하나 있다. 공모전을 주관하고 있는 서예계의 지도자가 인식하고 있는 사실이 너무 흥미롭기 때문이다.
이종호(이정택도 같이 폭로에 가담하였다.)가 폭로한 요지는 입상자를 사전에 결정해두었다는 것이고, 대상 수상자는 철저하게 인맥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다. 심사하는 과정에서 심사위원장의 전횡을 휘둘렀다는 것이다. 새로울 것도 없는 사실이었다.
당시의 심사위원장이 이에 대한 답변이라고 할까, 반박문을 발표하였다. 심사위원장의 답변은 단순히 답변이 아니고, 서예계 지도자들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관습에 젖어 있으며, 도덕적 해이가 얼마나 심한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기에 옮겨 보겠다.
“대상 작품이 수준 이하의 아류라는 주장에 대해서 ‘아류를 스승의 작품을 모방하는 것’이므로 대한민국 공모전에서 우수상 또는 대상으로 선정된 작품이 아류에 속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될까요?”
“수준 낮은 아류라고 표현한 것은 심사위원을 욕한 것이 아니라, ‘대상’ 수상한 작가의 은사님이나, 선생님을 욕하는 것이다.”
“대상 작품은 심사위원장인 저의 독단으로 결정하였고, 그것이 잘못된 결정이라고는 상상도못 하였다.”
“부정한 방법, 예컨대 돈을 주고 입, 특선한 정황이나 근거가 있으면 수사기관에 고발하라.”
“작가의 조형 능력과 실력만으로 특선 이상의 입상이 가능한 공모전이 이 땅에 혹시 있습니까? 양식에 근거한 객관적인 평가로 실력대로 입상작을 선정하는 공모전이 있습니까?”
“심사위원의 담합과 귓속말 없이 상위 입상이 되는 공모전이 있습니까?”
“일부이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실력보다는 두 손바닥을 비벼대고, 세 치 혓바닥으로 비굴한 언어를 쏟아내면서 학연과 지연, 그리고 금연에 기대어 입선과 특선을 하고, 초대작가가 되었지만 만약에 다시 출품한다면 낙선 할 수 밖에 없는 실력과 안목으로도 시도 때도 없이 운영위원과 심사위원을 하는 그런 부류의 심사위원일수록 정의를 앞세우면서도 뒤로는 귓 속말과 담합으로 귀재로 실력을 발휘하여 심사 결과를 오염시켜버리는 악순환의 현상이 공모전이라는 것을, 배고픈 서예판의 구조적인 먹이 사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는 것이 공모전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정말 모르고 있었습니까?”
“각종 공모전에서 수상 경력이 화려하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그 실력을 모든 서예인이 인정하는 풍토와 환경이 우리 서단에 얼마나 조성되어 있습니까?” (월간 서예 문화 7월호. 2009)
문제가 되었던 서협의 공모전에서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분이 심사가 문제되자 자신의 입장을 밝힌 글을 핵심만 요약하였다. 이 글에서는 한국의 서예 공모전 실상을 너무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다. 더욱이 ‘수상 경력이 화려하다고 해서 실력을 인정하는 사람이 없다.는 언급에는 솔직한 고백이다라는 생각이 들기 이전에 왠지 서예의 현실이 서글퍼지는 비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심사위원장까지 맡았던 서예계의 지도자가 한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것은 한국 서예의 현실을 너무 솔직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한국 서예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자료라는 생각이 들어서 옮겼다.
이전에 공모전이 사회의 눈길을 끈 사건은 거의가 금전과 관련된 비리이었다. 이번 일은 서예전문지(월간 서예문화)에 빌표됨으로 비교적 사회적 이목을 끌지는 못 하였다. 그러나 금전적 비리보다 훨씬 더 심각한 구조적 비리를 보여주고 있다. 공모전이 한국 서예의 앞날을 망쳐버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서예 발전을 위한 제안으로 이중희가 말한 ‘공모전 중심의 발표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중국이나 일본처럼 소규모 단체전이나, 개인전 중심으로 서예가 발전해야 한다.’라는 언급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개인전은 작가의 개성적인 작품을 발표할 수 있고, 서예계 원로의 눈치가 아닌 관람자의 눈치를 의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관람자를 신뢰하고, 관람자를 존중하다보면 잃어버린 미술품 시장도 찾을 수 있다. 서예가가 시대에 뒤떨어진 서예관으로 작품을 제작하면서 관람자의 무식이나 나무라서는 존립할 수가 없다. 서예가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서예의 작품 시장을 구축하는 길밖에 없다.
첫댓글 공모전의 폐단을 잘 지적한 글입니다. 옥고에 동의합니다^^
동감입니다.......노고에 감사 드립니다.....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공감 합니다.
모르고있던걸 많이배우고알았읍니다 대단히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글 많이올여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