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뭇 시인의 시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게 된 것은 이번이 네 번째입니다. 첫 번째는 청년 시절에 동국대의 문학심포지엄에 초대받고 가서 그들의 작품을 신랄하게 깐 나머지 뒤풀이 끝에 마종하 군과 주먹다짐까지 했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그때는 미당 문하에서 번호표를 받고 날뛰던 시절이라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천둥벌거숭이였던 셈입니다. 놀랍게도 나의 비판을 받은 문청들은 그 뒤 와신상담을 했는지 일취월장을 했는지 99% 데뷔했고 저보다 더 좋은 작품을 발표해 문명을 떨친 사람들도 있더군요.
두 번째는 74년 봄부터 75년 말까지입니다. 제가 ≪시문학≫ 편집장을 잠시 할 때 고향 벗 김창완군이 7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한 뒤 그가 편집장을 하고 있던 ≪풀과별≫에다 월평을 쓴 것입니다. 長山 섬놈들이 육지로 기어올라와 서울에서 두 개의 시 잡지 편집장을 할 때라 기고만장했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지도 못했는데 적어도 이 감회는 김창완군의 것임을 그의 고백을 떠올리며 밝혀둡니다.
김창완군과 저는 新安郡 長山面 道昌里 2구 斗馬里라는 60여 호 되는 해변 산중 출신이거든요. 아마 당시에는 ≪현대시학≫과 ≪심상≫까지 시전문지가 넷뿐이었을 것입니다. 나머지 문학지는 월간지 이외에 요즘도 우후죽순으로 많이 나오고 있는 계간지는 2개밖에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저의 월평 작업은 매우 힘들었습니다. 매월 300편을 꼬박꼬박 2년 가까이 읽는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그 무렵 월간지에 발표되던 시작품의 총량이었습니다. 지금은 아마 전국적으로는 매월 1천 편에 가깝게 생산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100종이 넘는 문학 계간지와 잡지들이 있으니 말입니다. 당시 저는 원고료를 한푼도 주지 않아서 주머니돈으로 10여 권을 매달 사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읽고 또 읽고 마감날까지 허둥지둥 써서 넘겼던 생각들이 납니다. 그러나 한번도 걸르지는 않았던 걸로 압니다.
저는 문원각에서 ≪한국문학사전≫을 집필한 적이 있습니다. ≪시문학≫에서도 ≪세계문예대사전≫을 뒤늦게 만든다고 하던 무렵입니다. 아마 김창완군이 데뷔하기 전인 72년 늦가을에 윤종석형을 만났습니다. 사전이 뭣인지도 모르면서 외로운 형을 만났다고 과자를 듬뿍 쥐어주듯이 북데기를 늘려서, 박훤형의 얼굴도 모르던 시절에 종석형의 입이 찢어지기 직전까지 써갈겼던 죄가 있습니다. 그바람에 가난한 종석형은 제게 술깨나 사야 했습니다.
성문각으로 옮겨서는 잡지 일에 쫓긴 나머지 ≪세계문예대사전≫의 집필은 간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기여를 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주말이면 신대철군이 나타나 황동규시인 집에 술마시러 가곤 했는데, ≪세계문예대사전≫의 편집 이야기가 나와서 항목 사이에 1행간씩 빈다는 것은 말도 아니다라는 결론이 났고 그것이 중반 넘게 거의 편집이 완료된 상황에서 그것도 요즘 같지 않고 모두 수작업 사진 식자를 하던 시절에 엄청난 수정 작업을 문덕수 시인이 단안을 내렸을 겁니다. 적어도 두 달 이상 출간이 늦어졌고 그만큼 부족한 공간과 빠진 자료들을 채워 넣어 사전다워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저는 당시로선 희귀자료였던 정지용 등의 자료를 일부 제공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뒤 몇 개월이 지나고 74년 6월 8일 삼성출판사에 가서 몇 달 뒤 술자리에서 朴庸企(시인 朴暄의 본명)형을 처음 만났습니다. 선배님도 숫기가 없었고 저는 형이 목포가 고향이란 사실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인사가 늦어졌던 셈입니다.
박훤형은 세계사상전집 파트에 있었고, 저는 세계문학 파트에 있을 때였습니다. 후배놈이 선배님에게 아침저녁으로 만나도 이제나저제나 전혀 인사가 없으니 술자리 첫인사가 "건방진놈!"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세계문학 파트로 옮긴 박훤형이 주임에서 차장이 되고 옆자리의 상사로 모시고 文酒 세월을 보냈고, 차원장님을 그 시절에 뵙게 됐습니다. 선생님께서 입센의 대표작 ≪페르귄트≫ 등을 번역하셨을 때입니다. 외대에서 독일어판을 빌려서 교정을 마친 다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세 번째는 91년 스포츠 신문에 1년간 세계문학에 등장하는 섹스에 대한 글을 쓰던 때입니다.
제 이야기가 너무 장황했습니다. 시에 대한 저의 소신은 변함이 없습니다. 청년기의 저는 시란 "빛의 노래"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랬더니 김아무개씨가 이것도 흉내를 내더군요. ≪오적≫ 사건이 난 뒤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문협이 있을 때 이문구 형과 셋이 앉아 처음 그를 만났는데 이름을 본의 아니게 빼앗아 써서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그는 목중의 4년 선배인가 그런데 하필이면 본명도 한문은 달라도 발음은 같습니다.
아무튼 저에게서 시는 빛의 노래에서 마음의 빛으로 구체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흔히 우리는 마음이란 말을 사유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내 가슴이니, 내 마음이니 해서 오직 내 육신에만 있는 나만의 마음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크게는 하늘ㆍ땅ㆍ사람(天地人三才)의 마음을 하나로 봐야 할 것입니다. 사전적 의미로는 삼극(三極)ㆍ삼령(三靈)ㆍ삼원(三元)ㆍ삼의(三儀) 말입니다. 적어도 이렇게 봤을 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성립된다고 생각합니다. 소아(小我)가 없을 때 대아(大我)가 있으며, 대아가 없을 때 어찌 소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까지는 소아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온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르트르가 즉자 대 대자를 강조한 것도 찬찬히 살펴보면 별것 아닙니다. 인류멸망 직전까지 몰고 간 핵무기의 개발 뒷면에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의 발견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 이전에 일찍이 불타께서 만물의 상대성원리를 이미 설파한 것이 三千大千世界인 것입니다. 이것은 2천 수백 년 전의 깨달음인 불교세계입니다.
須彌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한 세계의 천 배를 小千世界, 그 천 배를 中千世界, 또 그 천 배를 大千世界라고 한 것입니다. 나 곧 小我에만 집착하면 小千世界에 머물러 있어 中千世界에까지 말이 들리지 않고, 中千世界 곧 패거리에만 머물러 있으면 大千世界에까지 말이 전해지지 못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한 나라에만 머물면 소천세계요, 여러 나라를 섭렵하면 중천세계요, 마음이 우주에까지 열리면 대천세계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설명입니다. 저는 불교의 원리를 말씀드리자는 것은 아닙니다만, 불교에서 말하는 33天의 우주관을 본다면 저의 설명은 올바른 비유라고 단언할 순 없습니다.
어쨌든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원리를 발견치 못했다면 다른슈타인이 상대성원리를 발견했겠지만,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원리를 발견한 것은 아인슈타인의 운명인 동시에 이미 예비된 과학사의 궤적인지도 모릅니다.
빛이 重力(gravity) 때문에 휜다는 사실은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이나 ≪푸른 기차≫ 등 다뤼스 미요의 12음계 등에서도 예술가의 자각이 동시대 과학자의 발견과 하나가 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우리는 뚜렷이 느낍니다. 그 축축 늘어진 시계나 데포르마숑된 사물들과 툭,툭, 부러질 듯이 마찰계수가 높은 불협화음들은 이제 그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낡은 광고기법이나 20세기의 예술기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1979년에는 허블 우주망원경이 80억 광년 저쪽에 있는 하나의 퀘이사로부터의 빛이 4억 광년 저쪽 은하의 중력에 의해 구부러져 네 개로 보이는 重力렌즈현상 곧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예언한 아인슈타인의 십자가를 포착함으로써 이 중력과 우주의 빛의 굴절 및 천체의 운동, 그리고 시간의 개념 등을 관찰하는 데 새로운 장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전에 바라본 우주의 개념은 적어도 불타의 깨달음을 뺀다면 우리가 애써 찾아나설 것들이 못되지 않겠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그러한 예술가들과 과학자들의 자각과 발견들이 이제 量子力學과 小粒子의 세계를 지나 그것들이 다시 DNA의 미세구조인 게놈지도에 이르러 볼 수 있듯이, 과학자들의 발견과 확신이 달라지듯이 예술가들의 자각과 생각도 달라져야 합니다.
생물 유전인자의 나선끈처럼 물질세계의 내면의 깊이에는 불타가 설파한 인연의 끈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정신세계의 인연의 끈 또한 중요한 문제이며 물질과 정신, 곧 물질과 마음의 세계가 둘이 아닌 하나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수년전 과학자들이 예상했던 대로 과학자들은 인간이나 생물의 복제문제가 3차원적으로 해결된다고 해도 다시 그 생명체들의 循環(circulation)의 迷路와맞닥뜨림으로써 이제 진정한 과학자로서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연구하는 새 생명체나 복제물의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는 새로운 과제를 떠안게 된 셈입니다. 곧 복제는 복제일 뿐 생명 창조는 아니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맞춤옷이 아닌 한낱 기성복일 따름입니다.
시인 셸리의 아내 M.W. 셸리가 1818년에 쓴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에게 패하는 물리학자 프랑켄슈타인 같은 신세라고나 할까. 21세기의 과학자들은 이제 생물체의 前生과 來世를 동시에 연구해야 하는 거추장스러운 과업에 매달려야만 합니다.
예술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禪師나 高僧이 돼야 하는 불행한 2중성의 정진은 곱절의 노력으로 최소한의 효과밖에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배우자를 잘 선택해 공동 연구를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시인 등 예술가도 마찬가집니다. 과거에는 남의 흉내나 표절로도 부지했으나 앞으로는 오직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하든지 아니면 자기와 세계에 대한 무당이나 승려와도 같은 뚜렷한 종교적 태도를 지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우리로 하여금 이 자리(지난해 1999년 11월 14일, 서울목동의 파리부페에서 모였던 목포출향시인회 창립1주년 기념행사)에 모이게 한 것은 고향 유달산의 홀립한 1등바위의 그 文筆峰의 기상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오늘 제가 이렇게 떠드는 것은 목중고 동창으로 지금 경희대 사대 영어과 교수인 畏友 朴敬一군이 너무 바쁘다고 한사코 발뺌을 하는 바람에 小我의 존심을 접어두고 하는 수 없이 꿩닭이 된 겁니다.
그 점 여러분께 저의 불찰을 용서빌고, 한편으로는 도정일교수가 아끼는 후배 엘리엇 연구가인 박경일군에게 저에게 기회를 준 여러분과 함께 고맙다는 말을 합니다.
2 .전 작품을 열독한 느낌
차범석 선생님은 창간호부터 3호까지 세 편의 세계적인 시편을 주셨습니다. <갯벌>의 똥섬과 벌거벗은 모든 것, <낙엽을 밟으며>에서 ‘마법의 단지에서/한 줄기 연기가 되는 /아, 낙엽은 그렇게 환생하는구나’의 절창은 우리 고장의 명수필가 김진섭 대선배님의 <대설부>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더욱 간결하고 절묘하게 드높은 시정신을 느끼게 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 <輓歌>의 비통한 슬픔에 와서 저희들끼리만 모여서 죄송스럽게 얘기 나누며 조상했을 뿐입니다.
차선생님께서는 기왕에 세계적인 시작품을 보여주셨으니 여러 권의 시집으로 묶을 수 있을 만큼 계속 쉬엄쉬엄 명시를 보여 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1934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극작가 피란델로나 문호 빅토르 위고처럼.
최승렬 선생님은 창간호에서부터 옥고를 주신 일을 감사드립니다. <도시의 지붕에 비 내릴 때>에서 '구름 위 별들의 눈물이’우리 한국의 현실을 처절하게 직시하며(째려보거나 노려보며) 내리는 아픔을 함께 느낍니다. 재담을 용서하십시요.
어떤 이가 청와대에 있을 때 네 번씩이나 하늘이 벼락을 내렸고, 지난해엔 서울의 송파구에서도 벼락을 때려 인명이 다치는 큰 사고가 났는데도 우리나라 야당들은 세 치도 못되는 혀를 마구 내두르는 사논배(사촌이 논사면 배아픈 사람) 짓을 서슴없이 해대니 가소롭군요.
최선생님의 시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나 뽈 베를렌 또는 김소월 등에서는 느낄 수 없는 청렬한 아픔이 옵니다. 우국적 대아의 세계입니다. <황금풍덩이>는 에드거 앨런 포를 떠올린다기보다는 종교적 경건함까지 느껴지는 인연의 끈이 보입니다. 우리의 삶은 찬란한 생명의 후광 효과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늘>로의 비상을 꿈꾸는 내 새에서 시정신의 오롯한 차원을 맛봅니다. <바람부는 날><너와 나><바람><추억> 속에서 우리는 짙푸른 우주로 열린 아름다운 넋을 만납니다, 그리운 얼굴을 봅니다. 모두 시정신의 깊이는 우주적 서큘레이션(순환)의 궤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범대순 선생님의 시 <다시 오거리>에서 목포문화의 질풍노도시대(쉬트룸 운트 드랑)를 정말 절감합니다. 1950년대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념의 푸른 깃발을 들고 전국의 피끓는 천재들이 오거리에 모여 예술을 꽃피우던 선생님의 ≪詩精神≫ 발간과 權逸松 선생님의 무언의 항변시대, 고도를 기다리며 삼학을 홍어집 지붕 위로 날려보내며 새벽 기차의 도마질소리에 잠깨던 분위기가 있었다지요.
<또다시 목포 오거리>에 와서 부처님 손바닥 위를 날으는 손오공을 만난 것도 같고, 온갖 기가 관통하는 백두대간의 큰 흐름을 접합니다. 시절이야 언제건 예술 작품 속에 찍힌 오거리의 빛은 오색 무지갯빛으로 우리들의 요람을 장엄합니다. 태극의 오행 사상으로 본다면 오거리는 항도 문화의 황금 공간이며 그 황금분할까지 보여주는 아름다운 시편입니다. <목포 오거리 나의 터미널>은 목포 나그네들이 대륙으로 나가는 출발점이며 회기점이기도 합니다.
<목포의 흑백사진><나룰 만들고 허문 곳이었다><木浦醉歌>에 와서 어지럽고 보랏빛나는 원형의 추억으로 되살아나는 목포의 이미지가 덩더쿵덩더쿵 덩실덩실 춤춥니다. 그리고 <포스트 모더니즘 여행 1-7>에서 선배님의 새로운 이미지 여행을 만납니다.
고중영님의 <情恨>을 읽으며 시인은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그리움 하나로 배도 안 아프고 버티는 귀족이라는 사실을 느낍니다. <낙화 옆에서>도 그리움은 살빛 나비가 되어 있음을 아실라는지 몰라요. <극비문건>에 오면 그날의 만남이 생각나고 시인은 지천명이 넘도록 스물다섯 살의 펄펄 끓는 청춘임을 봅니다. <律呂의 章>을 지나면서 주정연님의 집에서 열렸던 詩會가 떠올랐습니다. 강릉 태생의 화가 정숙진씨인지 최숙진씨는 황제가 그리움의 돌계단 위에서 쓰러져버릴 듯이 잡았던 후궁의 손은 아니었는지요? 쥑여주는 시편이어라우.
<雪粉><끈><호박단><소로원 가는 길>에서 이 시인의 실존적 유미주의를 확인합니다. 늘 대상이 있는 실존적 그리움의 말들입니다. 金峯子 시인님은 사바티에님은 아니신지요?
김옥재님의 <가을에>에서 설운 홍시 하나는 예이츠의 하늘비단보다 더 지상적인 선물이겠습니다. <뻘밭땅 추억>은 깨복쟁이 아그들의 추억이며 <부정의 계절>은 우리 모두 아파하는 노숙자들의 풍경이지요. <목포><낙화><지금 남녘 山城은>에서는 짙은 향수와 사물에의 연민이 깔려 있습니다. <이름을 불사르고><산이 하는 말>에 오면 종교적이라거나 체념적이라기보다 너무 조로한 듯한 유서를 봅니다.
주정연님의 <귀향 3제><사철가>는 버드나무집 봄막걸리의 안부로 취해서 역전 핏국집 선짓국으로 풀고 내친걸음으로 선창을 한바퀴 돌아봅니다. <그리운 4행시>는 노사정 심야토론이라든가 애꿎은 북녘땅엔가 당대의 으뜸가는에서 TV 앞에 모인 가족의 단란함도 보입니다. <김대중론·4>은 더 좀 써보세요. 아직도 취임식전 그때입니까. <빙어에게 2>는 거나하니 모두 좋은 세상입지요. <난지도 쑥꾸기>는 별난 술노래요, <용머리 자란꽃><정도리 갯돌밭>에서 노래꾼 주정연님의 가락이 멋집니다.
‘금부처 고이 묻힌 한 자락 내 마음이사/눈만 뜨면 절로 부처인 것을/귀만 기울이면 두루 열반인 것을’의 오도송(悟道頌)을 만납니다. 마음 한 자락에 금부처 고이 묻힌의 의미는 21세기의 생명과학자와 예술가들이 뚫고 가거나 찾아보아야 할 윤회와 인연의 끈 또는 고리 찾기 4차원의 시간여행을 위한 한 겁과 일념(一念:한순간)에 대한 깨달음으로써 소중한 의미를 전달하는 상징성을 지닙니다. 특히 바닷속 물고기들을 설법하던 낭랑한 독경소리라든가, 갯돌들이 다시 환생하는 사람들이라 보는 시각은 어느 날 함께 만났던 무당 소냐박의 말대로 형의 전생이 인도의 수행자였음을 느끼게 합니다.
이러한 전생과 환생의 게놈을 몇 마디 노래나 푸닥거리로 풀어낼 수 있는 것은 예술적 영매나 물·불·흙·바람[4大]을 통한 시인의 성찰과 게송 등을 짓던 깨달음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며 따라서 형의 현세의 가창력은 소위 佛性-곧 本來自性에 눌려 시들어가게 마련입니다. 부디 정진하세요.
<1999년 8월><9월>에서도 상가수의 노래솜씨보다는 표주박달마·팔만대장경·팔만구암자·백팔번뇌 등에서 곡차를 즐기던 수행자의 그림자가 엿보입니다. 죽비든 주장자든 둘러메고 곡차를 게워내 물고기를 살려주세요.
고정선님의 <고향 친구 하주>는 장승처럼 고향 지키는 곱사등이 친구에 대한 우정의 노래이며 <섬 그 아픔의 의미><섬 그 전설의 의미>에서 시인의 마음 속에 푸르게 타오르는 섬은 안개에 가려 있습니다.
김동하님의 <그 바다는 지금>에서 삶의 해조음을 듣습니다. <마종기와 주정연을 읽다가>는 행간의 풀잎들이 취해 있고 <동행>에서 노고단 하늘 높이 비상합니다. <겨울 섬진강에서> 우리는 같이 강물이 되어 흐르는 것입니다. <목포 산조><굴뚝새와 동백나무>의 그리움을 거쳐 <내가 너를 부를 때><바위>에서 연민도 한 줄기 바람에 집착의 고뇌인 것을 압니다.
고정애님의 <조직에서>와 <산에 오르며>는 청결 섬세함이 뻗어내리고 또 올라가고 있습니다. 차분하고 싱싱한 屈光性이 느껴집니다. 잘 가꾸다 보면 진품만 남겠죠.
최재환님의 <길>을 오다가다 <다시 목포에서> 물가로 날아드는 젖은 새떼들의 날갯소리 들리고 맑은 영혼의 울림 잔잔히 흐르는데 <1999, 아침에>도 홀로 길을 가는 나그네의 넋이여. <겨울, 수문포·4> 역시 고 정규남 시인의 <허공에 머리칼 하나>의 그 영아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외로운 나그네의 귀향길입니다. <돌 이야기><사는 이유>에 오면 질기고 외로운 삶의 향기가 모과나 파래내음처럼 퍼집니다.
<觀梅島通信>에서 외로운 시인의 눈은 신의 창조 작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박문재님의 <목포생각>은 봇물로 터지고 현실의 어디쯤에서 실제보다 다섯살은 더 이뻐 보이는 <모자를 쓴 여자>를 보기도 합니다. <일분 스케치>는 시인 특유의 여행시편들에서 느끼는 감칠맛을 보여주는 예고편이고 <새하얀 파도와 눈부신 겨울 장미 그리고 눈이 예쁜 이국 소녀 하나와>-Sydny Bondi Beach에서의 부제가 붙은 기념할 만큼 긴 시제목의 이 작품에서 본격적인 여행의 맛을 만끽합니다.
가보지 않으면 그 맛 모른답디다. 그리고 우리의 열망은 <木浦에게><팔월의 바다>에 와서 힘찬 비상의 날개를 펼칩니다. <좋은 시><젊음에게>에서 고로코롬 좋은 시는 비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충이님의 <당신의 자리>는 흰 무명옷으로 빛나시는 선친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이런 엘렉트라 콤플렉스를 떨쳐버리면 좋은 시가 쏟아지겠죠. 오해가 아닌 효성으로 알고 있습니다.
윤종석님의 <첫눈이 내린다><그날 나를 경악케 한 바다여><풀밭><풀><부상하는 갈매기><꽃씨>를 보며 <검척기>라는 작품으로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던 순하디순한 飛禽島섬사람인 성님의 표정이나 이송이라는 여성 예명으로 怡山 金光燮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술꾼심사원들의 눈을 헷갈리게 하며(어디까지나 재담임) 당시 신문 문예작품모집의 가작을 싹쓸이하던 문청의 열정을 생각해봅니다.
박광호님의 <늦가을><계곡에서>는 깨끗한 자연과의 만남이며 <그대>는 삶의 감미로운 만남입니다. <오늘도>도 그대와의 기쁜 나날입니다.
<꽃 그리고 나><자매> 역시 살맛나는 환희가 넘칩니다. <아차산에서>는 팔각정과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경건함과 행복의 안분자족을 즐깁니다. <들국화>도 연장선에 있습니다.
허형만님의 <헛기침><목포를 떠나며><홍도에서·1∼4>를 읽고 아무리 담배를 피워도 시원치 않는 것이 시쓰는 일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홍도에서> 시편들은 깊은 자연과의 속삭임 그것이군요.
강성상님의 <하얀 기다림><새벽달>은 목마르도록 하얀 기다림과 그리움입니다. <바람이 하늘에게><함수><무엇인가를 사랑해야 하므로><외로움><나비연><비오는 날의 일기><호프집에서>에 와서 기다림과 그리움은 마침내 외로움으로 타들어갑니다.
박훤님의 <나무숲새의 눈물><겨울寓話>는 눈물·한숨·허망의 숲속이군요. <당신의 폐항><일몰 앞에 서서 왜 우는지>에서 전송과 붙들래도 영 못 붙드는 참혹함을 느끼고, 평생의 쓸쓸함을 ‘아, 저리 해가 떨어지는데/내 아름답게 살다가야지. 내 아름답게 살다가야지’로 달래고 내 영원의 언어가 메마른 대지 자욱자욱마다 눈물로 숨쉬는 <詩人의 마음>은 뇌일혈 투병을 통해 죽교동 큰샘거리 <그 고샅에는>에서 백리향 같은 어머니를 그립니다.
<병든 지구는 이 밤을 어디서 쉬랴><천당도 판단듸 으짠듸야>에서 훤이형님, 보험회사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축사망’이라고 한답디다, 그 말이 생각납니다. 혼자 아프지만 말고 제주도행 비행기에서 형님이 좋아하는 뷰카메라로 병든 지구를 굽어보소서.
김재희님의 <째보선창><목포驛><기다리는 시간><반딧불><비오는 날>에서 그리움과 기다림은 혼불 같은 파란 빛살이 되기도 하고 싸늘한 빗물이 되기도 합니다.
김선기님의 <바람난 포구>는 어머니의 가슴입니다.
최건님의 <나비되어>는 재미있는 발상입니다. <죽음에 대한 평균율·Ⅲ>-슈베르트의 경우 박훤님의 경우와는 또 다른 맛을 풍깁니다. <비몽사몽>-19번 국도변 원호덕마을·10에서는 莊周의 21세기 齊物論을 읽는 듯합니다.
<20년 후>-전주에서 둥지 트는 영인은 <레드와인 마주놓고><선웜터 고개><하찮은 소망에 대한 작은 스케치>-무덥고 긴 여름날 저녁 한때, 여행하는 사람에게도 나의 여행에서도 또 일상에서 레드와인을 한잔 마시면 시간은 더욱 풍부 다양해져서 스케치할 맛이 나겠습니다.
조유금님의 <세월 속엔 무엇이 숨어 있는가>는 마카로니 웨스턴의 한 필름에서 뚫린 벽 사이로 비친 파란 하늘을 보는 듯 <잿빛 비망록>은 후박나무 잎새 하나 때문에 고독에 목을 매고 <거울>은 내 고독의 환영을 깨부수는 축제의 틀일 수도 있고 <슬픈 연못>과 <書>는 연잎의 이슬방울로 원광을 두르고 타오르고 있습니다.
<가을빛 회상><바다의 서약>에서 노을 속에 흔들리는 갈대의 서걱임 따라 출렁이는 영혼과 그 물결을 봅니다. <유월의 悲歌><그 벤취, 등꽃 아래서>는 샹송을 듣는 것보다 차라리 흑인영가 쪽입니다.
양회성님의 <산모롱이 오솔길은><새날의 아침>은 웃음과 행복감이 서려 있군요.
최병두님의 <나그네끼리><시나위조로>는 끈끈한 고향 노래요, <메아리>는 조국통일의 그날을 손꼽고 있습니다. <노래의 초대>는 달동네에서 만난 나그네들의 찬가이며, <달래에게><태종우><수릿날 그대와 만나><열목어><만해의 귀띔>은 시와 사랑과 흥이 도도히 넘쳐 흐르는 진경입니다.
강정삼님의 <다산초당><비가비><꽃뱀><노적봉과 목포><개펄 찬가><그네><흐르는 물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네>에서 전아한 담채의 수묵화를 보는 듯합니다.
안정환님의 <생명의 천사들>-고하도 공생재활원에서 <눈 내리는 목포><동백꽃 4><1999년 현충일><땅 10>-땅의 웃음 <외달도 소나무><우이도 나폴레옹>에서 포근함과 이쁜 느낌에다 멋진 흥이 일어납니다.
정중수님의 <하느님도 삐삐를 친다><새벽 두시에 일어나><옥상에 올라가><동백꽃><눈온 날 아침><그대가 한 말들은>을 보고 있으면 찬란한 별자리와 별똥별이 다가오거나 슝슝-쿵쾅거리며 다가오는 시뮬레이션을 보는 맛이 있습니다. 연애시도 그렇습니다. 시인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지녔습니다. 특히 <그대가 한 말들은>에서 시인 나름의 기호들이 빛을 띠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