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약전 17 - 제3차 한산해전 승첩
성웅 이순신(이은상 지음)에서 발췌 요약한 글
공의 제2차 당포해전 승첩이 있던 6월, 선조대왕이 의주에 닿은 것은22일이었다.
선조는 그 이튿날 신하들을 대동하고 통군정(統軍亭)으로 올랐다. 거기서 시 한 수를 읊었다.
국경이라 달 아래 목 아 울고
압록강 강바람에 상하는 마음
조정의 신하들아 이 꼴이 되고
그래도 동인 서인 싸우려느냐.
그 얼마나 아픈 심정이었더냐. 이 뼈저린 한 귀절의 시로써, 그날의 정계사정을 여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안에 애통조(哀痛詔)를 받들어, 전국 각처에서 의병들이 일어나니, 경상도 의령(宜寧) 학자 곽재우(郭再祐)는 왜적이 부산에 상륙한지 10일 만에 의병을 일으켰던 이로서, 세상이 그를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 일컫는 이요, 합천(陜川)에서는 정인홍(鄭仁弘), 고령(高靈)에서는 박성(朴惺), 박이장(朴而章), 삼가(三嘉)에서는 윤염(尹念), 노흠(盧欽), 그리고 광주(光州)에서는 고경명(高敬命), 옥과(玉果)에서는 유팽로(柳彭老), 남원(南原)에서는 안영(安瑛), 양대박(梁大樸), 나주(羅州)에서는 김천일(金千鎰) 들이었다.
이 때에 공은 또 한 번의 해상 대승첩을 거두었으니, 그것이 바로 제3차 한산해전이었던 것이다.
공의 두 번 승첩으로 일본으로서는 커다란 타격을 받았을 뿐아니라, 일본 총본영에 앉아 있는 풍신수길은 지극히 분개한 나머지, 협판 치(와끼사까 야스하루)를 수반으로 하고, 여러 수군장들을 보내어, 이순신 함대에 보복을 가하게 했던 것이다.
공은 7월 6일에 경상우수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노량 바다에서 같이 모여 굳은 약속을 하였다.
7일에는 강한 바람이 불었건마는 모든 곤난을 무릅써가며, 해질 무렵에 당포에 도착하여 다시금 배를 정비하고 있을 적에, 공의 함대를 보고 달려온 자가 있었다. 그곳 머슴꾼 김천손(金千孫)이었다.
"왜의 배 대, 중, 소 70여 척이 저기 저 견내량(見乃梁)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하고 정보를 알려 주는 것이었다.
공은 8일 아침, 전 함대를 거느리고 견내량으로 들어갔다. 큰 배 36척, 중간 배 24척, 작은 배 13척, 모두 73척의 왜적선들이 몰려 있었다.
원균은 바로 마구 돌격해 들어가자 했으나, 공은 그것을 저지시켰다. 견내량의 지형이 좁고 또 암초가 많기 때문에 판옥선과 같은 배는 활동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는 싸움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적은 만일 형세가 불리하면 육지로 올라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한산도 앞, 큰 바다로 꾀어가지고 나가서, 전멸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 한산도 바다는 사방에 달아날 곳이 없고 혹 섬에 오르더라도 굶어 죽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의 전략이었다.
그래서 우리 함대는 들어가다 말고, 짐짓 패한 듯이 돌아섰다.
공의 전략은 적중되었다. 왜선들은 모두 돛을 달고 따라나오는 것이었다.
마침내 우리 함대와 왜적선들 전부가 한바다에 완전히 다 나와졌을때, 공은 일시에 대회전의 명령을 내려 이른바 '학날개 진'을 쳤던 것이다.
우리 함대는 왜적선들을 완전히 에워쌌다. 그리고는 지자(地字) 현자(玄字) 승자(勝字) 총통 등 각종 포화를 연발하여, 적의 선봉장들의 배에 집중 사격을 가했던 것이다.
그들은 뜻밖의 공격을 당하는 것이요, 또 신묘한 전술에 어리둥절한 채 적의 선봉선이 깨어지자, 적진은 흩어지기 시작하며 혼란에 빠지고 말았는데, 접전지역에서 약간 떨어져 있던 왜선들이 10여 척 있었으나, 그들도 감히 구원하러 들어노지는 못했었다.
마침내 공은 이 해전에서 73척 중 14척은 도망가고 12척은 사로잡고 47척은 완전히 불태우고 깨뜨려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가장 으뜸 대장이던 와끼사까 야수하루는 겨우 목숨을살려 단신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싸움이 끝난 뒤, 견내량 안바다에서 왜선의 동정을 살피면서 밤을 지내고, 이튿날 9일에는 가덕(加德) 방면으로 향했다.
그런데 따로이 왜적의 수군으로 구끼 요시다까와 가도오 요시아끼 등이 부산에서 새 함대 40여 척을 이끌고 출발하여, 이날 안골포(安骨浦)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것을 우리 척후선이 발견하고 공에게 보고했다. 그래서 공은 이억기, 원균들과 함께 토멸한 방책을 협의하면서, 온천량(溫川梁)에서 밤을 지냈다.
이튿날 10일 새벽, 공의 함대는 안골포로 향했다. 왜적선들은 확실히 안골포에 머물고 있었으며, 큰 배 21척, 중간 배 15척, 작은 배 6척, 합하여 42척이 분명했다.
그 중에서도 3층 누각의 큰 배 1척과 2층 누각으로 된 큰 배 2척은 포구 바깥을 향하고 있었으며, 다른 배들은 모두 포구 안에 늘어서 있었다.
여기서도 지형이 불리하므로, 적들을 꾀어내어 싸우는 방법을 쓰고자 했으나, 이미 전날 저희들이 대패한 경험을 가진 놈들인만큼, 얼른 따라나오지 아니하므로, 공은 부득이 전술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우리 배들이 번갈아가며, 왜적선들이 있는 곳까지 드나들면서, 각양 총통과 장편전 등을 바람같이 쏘아대어, 결국은 적선 거의 전부를 쳐부수었던 것이다. 그래서 구끼, 가도오 두 왜정들은 밤을 타서 도망하고 말았다.
이 견내량에서 한산도 앞바다로 끌고 나와 이긴 해전과 안골포에서 이긴 해전을 아울러, '한산해전'이라 혹은 '견내량해전'이라 일컫는 것이요, 이 승첩으로써 공은 정2품으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진되었다.
그런데 이 승첩 때문에 왜적은 서해로하여 올라가려던 계획을 완전히 내버리고 말았으며, 그래서 고니시 유끼나가가 평양에 앉아 후원군이 올라오는 것을 기다려서, 의주에 있는 선조대왕의 뒤를 쫓으려했던 것마저 꺾여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마침내 고니시 유끼나가는 뒤에서는 명나라 군사가 나오고, 또 아래에서는 차츰 의병들이 일어나는 것 때문에, 복배수적(腹背受敵)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봇짐을 싸짊어지고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던 것이니, 그야말로 한산해전은 임진란으로 하여금, 하나의 분수령을 넘어서 우리 쪽에 유리하게 전개될 수 있도록 하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동서의 역사가들이 무두 다 이 한산대첩을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이며, 특히 '헐버트'같은 이는 "이 해전이야말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다."
라고 말하기까지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