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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장 동북부 지역의 지도자 5인
동북부 5인의 위대한 지도자
제2차 영적 대각성 시대는 위대한 인물들을 탄생시켰다. 그것은 특별히 동북부에서 더욱 강력했는데, 에드워드 도르 그리핀, 아사헬 네틀턴, 리먼 비처, 에드워드 페이슨, 가드너 스프링이다. 이 다섯 명 가운데 에드워드 페이슨만 하버드 대학 출신이었고, 다른 네 명 모두는 뉴헤이븐의 예일 대학 출신이었다. 헤먼 험프리가 작성한 1800년의 영적 지도자들의 이름은 ‘그들의 설교가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영과 능력 있는 비범한 것’이었음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목회하던 회중은 「코네티컷 복음 잡지」에 기록된 영적 대각성들을 실제로 목격한 사람들이었다.
리먼 비처(1775-1863년)는 뉴헤이븐 출신의 한 제철공의 아들이었다. 에드워드 그리핀(1770-1837)과 아사헬 네틀턴(1783- )은 모두 코네티컷 출신 농부들의 아들이었으며, 특히 네틀턴은 다섯 명 가운데 유일한 총각이었다. 에드워드 페이슨(1783-1827)에 대해서 한 전기 작가는 페이슨의 인생여정을 ‘해에 서 있는 한 천사’(계19:17)로 비유했다. 가드너 스프링(1785-1873)은 페이슨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전 인생을 한 교회의 목회를 위해 바친 인물이다. 법조계에서 목회 사역으로 선회한 그는 63년간을 뉴욕의 브릭 교회의 목사로 사역했다.
5인의 지도자는 부흥과 부흥주의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 줌
이제 우리는 이 시기에 나타난 일반적인 현상들과 원리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다섯 명의 지도자들의 삶은 부흥을 아는 것과 부흥사가 되는 것 사이의 극명한 차이점을 확실히 보여 주고 있다. ‘부흥사’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알려지고 사용된 것은 바로 이 시기였으며, 부흥을 반대하는 유니테리안 교파(삼위일체를 부인하고 유일신격을 주장하며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은 개신교의 교회사적 이단) 사람들과 다른 적대자들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말하자면, 부흥의 정수라고 여겨지는 감정과 흥분을 부추길 수 있는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영이 놀랍게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이 부흥의 적대자들은 부흥주의와 참된 부흥을 올바로 구분하지 못하고 말았다.
부흥주의는 종교적 흥분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동북미의 지도자 다섯 명의 사역에서는 부흥주의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부흥은 오히려 교회와 성도들을 변화시켰던 무언가 특별한 사건이었다. 이들은 부흥에 대해 성경적인 의미를 견지했다. 부흥은 그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계획하거나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1802년 이후 코네티컷의 가장 주목할 만한 시간은 1807-1808년과 1812년, 1815-1816년, 1820-1821년 그리고 1825-1826년이었는데, 왜 이 기간이 위대한 영적 추수의 기간이 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신비스러운 부흥 시기들은 동북미의 설교자 5인의 사역에 공통적으로 발생했던 현상이었다.
그리핀의 경우 알렉산더 맥후터와 함께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는 것을 목격했던 인물이다. 그리핀은 1807년 9월 첫째 주 월요일 밤에 회집된 모임에 대해 애슈벨 그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비범하게 임재하신 놀라운 모습과 신앙 부흥의 실제적인 시작은 당시 회집한 모든 회중의 각성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의심할 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주와 이어지는 다음 주에 이르기까지 성령의 강하신 역사가 계속되었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그 동안 이 마을에 한 번도 내리지 않았던 비가 한꺼번에 내린 것과도 같았으며, 그 비는 노아의 홍수처럼 온 마을에 범람했습니다. 수주 동안 사람들은 매일 밤 예배에 참석하기를 원했으며, 새로운 권고의 말씀들을 경청했습니다. 그들이 지칠 때까지 너무 오래 기도할 때 말고는 우리가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을 설득해서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비처는 1807년 12월에 첫 영적 추수를 목격했고, 페이슨은 1809년에 그의 회중이 ‘눈에 띄게 신앙에 열중’하는 것을 보았다. 1813년 12월, 페이슨이 또다른 도시에서 설교할 때, 그는 ‘똑같은 시간과 장소에 이렇게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렇게 교회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눈에 띄는 증거가 반복적으로 나타났으며, ‘성령 하나님이 가장 눈에 띄게 부어지시는 역사’는 1816년에 일어났다. 가드너 스프링의 사역에서도 1864년에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 사역 기간에 적어도 다섯 차례의 성령의 특별한 부어 주심이 있었다. 그것들은 1812-1834년 사이에 임했는데 새롭게 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비범하게 나타났다.’
이 다섯 명의 지도자의 경험은 모두 한결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것은 부흥이라는 것이 어떤 특수하고도 특별한 노력과 결합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자세히 연구하여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일상적인 예배 과정에서 발견되고 증거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전에 계획되고 선전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오직 하나님만이 그 시기를 결정하신다는 확신이 있었다.
5인의 지도자는 영혼의 의사인 목회자가 갖추어야 할 지혜가 회심에 대한 바른 지식이라는 것을 보여 줌
이 역사적 시기에서 두 번째 일반적 교훈을 도출할 수 있는 것은 영혼을 치료하는 의사가 될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지혜와 관계가 있다. 소위 회심이 가능한 사람들에 대한 부주의하고 성급한 취급은 모든 시대에 재앙이 될 수 있는데, 특히 부흥 시기에는 더욱 그러하다. 만일 성경 진리가 적재적소에서 올바르게 설교되지 않는다면, 만일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일이 동시에 강조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만일 인위적이고 감정적인 방법에 감염된 사람들이 미숙한 믿음을 고백한다면, 매우 심각한 결과들이 초래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에벤에젤 포터는 1832년에 쓴 글에서 켄터키에서 발생한 부흥과 북동부에서 발행한 부흥의 차이점은 주로 북동부 지역의 지도자들이 더욱 성숙한 목사들이었다고 믿었다. 이런 관찰은 매우 설득력 있다. 켄터키가 1800년 이후에 그랬던 것처럼 뉴잉글랜드도 1740년대에 부흥에 대한 과도한 열심을 가진 어떤 부흥 설교자들 때문에 고통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북동부에서 이런 교훈은 잊혀지지 않았으며, 제2차 영적 대각성 운동 기간에 활동했던 지도자들 역시 이런 문제에 대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들은 영적 지혜와 통찰력을 발휘해 부흥사들의 영향력을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코네티컷 복음 잡지」에는 영혼들이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며, 믿음에 이를 수 있는지 그 참된 방법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저자들은 죄인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판에 박힌 정형화된 절차를 따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똑같은 회심의 방법이나 절차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가 교훈을 받고 따라야 할 확고한 지침이 성경에 명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었다.
우선 그들은 참된 회심은 본성의 변화, 즉 ‘극도의 이기주의에서 보편적인 사랑으로의 변화,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대감에서 하나님을 향한 지고한 사랑으로의 변화’를 수반한다는 진리를 견지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진정한 상태 즉 죄인 된 비참한 상실의 상태를 깨닫기 전까지는 이런 변화의 필요성을 의식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지혜로운 목사들은 각성된 상태가 모두 다 구원받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은 또한 거대한 회중이 나타내는 감정의 표현을 확인하고 검증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이런 자연적 감정에 영향을 받게 되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예배 중에 귀에 거슬릴 만큼의 고뇌와 슬픔을 표현하는 사람들을 모임에서 분리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가 되었던 것이다.
이 다섯 명의 설교자들은 부흥의 초기 때부터 자연적 현상으로서의 놀람의 요소들이 극에 달할 수 있는 이런 감정적 위험을 대단히 해로운 것으로 간주했다. 페이슨이 한 다음과 같은 말은 매우 많은 것을 시사해 주는 적절한 말이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두려운 공포에 빠진 듯이 보였다. 그러나 내가 자주 목격했던 이런 현상 가운데 죄를 깨닫고 주님께 나아온 자는 한 사람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다만 자연적 공포와 두려움의 현상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사람들의 특징은 소란과 흥분이 아니라 경외와 겸손, 그리고 고요함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세처럼 하나님을 의식할 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머리를 조아리며 급히 엎드리어 경배하게 되는 것이다(출34:8).
동북미에서 사역한 이 목사들은 이 세상에서 확신을 위한 설교와 이런 확신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지혜롭게 다루는 일보다 더 시급하고 고통스러운 일은 전혀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단호하게 모든 이에게 시급하고도 즉각적으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할 의무를 가르쳤다.
동북미의 이 목사들은 죄를 깨닫고 고민하는 자들에게 외적인 행동을 표현하라고 설득하는 것이 회심 그 자체가 아니라면, 이런 행위를 회심을 돕는 길이라고 여기는 것은 사람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영적 변화의 위대함과 중요성을 심각하게 무시하는 처사라고 믿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사람들은 반드시 회개하고 믿으며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 사람으로 하여금 가시적인 육체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지침들을 유포하거나, 설교자가 이런 행위를 하도록 사람들을 유도하는 것은 그럴싸하게 위조된 신앙을 경험하도록 잘못 인도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영적 필요를 지혜롭게 다루는 이런 일들의 성패는 우리가 얼마나 성경 진리를 확신하고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다. 회심과 관련된 이 지도자들의 사역은 회심의 성격과 본질이 목회 사역에 얼마나 실제적인 결과들을 양산하는지에 대한 교리적 확신들을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제 9 장 공적 부흥 논쟁
찰스 피니의 등장과 공개적 부흥 논쟁 발생
19세기 초반의 미국은 이전 세대들이 결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 시대는 불과 수년 전에 만들어 놓은 지도를 못 쓰게 될 만큼 변화가 극심했던 시대였다. 하룻밤 사이에 새로운 도시가 여기저기 건설되곤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812년, 거의 불모의 황야였던 뉴욕의 로체스터가 1830년에 이르러서는 10,000여 명이 거주하는 상업과 제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렇게 새로 난 길들과 강들 그리고 운하들은 사람들의 이합집산을 신속하게 만들었다.
뉴욕에서 발생한 사건들은 미국 복음주의 역사의 중대한 분수령이 되었고 하나님의 영의 역사를 친히 경험한 지도자 사이에서 진행된 부흥의 의미에 대한 논쟁을 최초로 야기했다. 이 시기에 감리교는 이 뉴욕에서 잘 정착하고 있었고, 자유의지설을 주장하는 침례교와 모든 종파와 교파의 종식을 주창했던 크리스천 집단을 포함하는 알미니안 그룹들도 뉴욕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새롭게 일어난 영향력 있는 유니테리안교파(그리스도의 신성 부인. 19세기 초반까지 자신들을 공공연히 정통 회중교회의 목사들이라고 주장했던)와 가장 최근의 만인구원론자들이 연합하여 정통신앙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향후 기독교 역사에 한 사람의 이름이 기억되기 시작했다. 바로 찰스 피니였다. 찰스 피니는 1821년에 당시 게일 목사가 목회하던 이 에덤스 교회의 많은 교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뉴잉글랜드 출신으로 지역 변호사 사무실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게일 목사는 피니가 ‘많은 사람을 회심시키는 방법’에 있어서 대단히 설득력이 있으며 독보적인 인물임을 주목했다. 그는 비공식적으로 게일 목사의 지도 아래 기독교 목회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고, 이 때부터 전도자로서 게일 목사를 돕는 사역을 시작했다. 1823년 12월, 장로회는 그에게 설교할 수 있는 강도권을 부여했고, 오래지 않아 뉴욕 주 서부 지역 여선교회의 후원을 받는 제퍼슨 카운티 북부의 선교사로 파송되었다(거의 2년 동안 사역함). 이윽고 장로회는 1824년 6월에 그를 목사로 임직했다.
1825년 가을은 피니의 인생에 대전환기였다. 오나이다 카운티에 있는 유티카를 방문하면서 그는 악화된 질병 때문에 이 지역으로 옮겨 온 게일 목사를 만났다. 게일 목사는 당시 인구가 많았던 뉴욕 중심과 서부의 도시에서 목회하고 있었는데, 그는 피니를 이 지역에 머물 것을 설득했다. 피니는 게일 목사를 도우면서 그 교회에서 140여 명의 회심자가 생기는 강력한 영적 각성을 목격했다. 이 ‘서부의 부흥’은 오나이다 카운티까지 미치는 광범위한 부흥의 전조가 되었고 1827년까지 계속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피니의 복음 전도 사역의 명성은 이렇게 해서 더욱 멀리 퍼졌다.
그러나 1827년에 접어들면서 서로 부흥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단체들 사이에 벌어진 첫 번째 논쟁이 발생했다. 1826년의 연말이 다가올 때 트로이의 맞은편에 위치한 알바니에서 설교했던 아사헬 네틀턴이 피니를 두 차례 만난 적이 있다. 이 만남을 통해 이 젊은 목사가 부주의하게 취급하고 있는 신학적 위험을 알려 주고 경고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 이후 네틀턴은 유티카의 제1장로교회 목사인 새뮤얼 아이킨에게 편지를 썼다. ‘이제까지 수많은 부흥을 경험하고 그것에 익숙했던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이제는 그런 부흥을 보면서 모두 놀라고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는 부흥에 대해 새롭게 선호되던 방식과 실행들을 예방하고 피하려는 목적으로 기록되었다. 이 새로운 부흥의 방식은 지난 30년 동안 임했던 ‘참된 부흥의 본질과 성격’을 해체하는 방식이었다.
한편 이 네틀턴의 편지를 접하게 된 찰스 피니는 ‘두 사람이 서로 의견을 통일하지 않고 같은 길을 걸어갈 수 있는가?’라는 설교를 통해 이 편지에 간접적으로 대답했다. 이 설교의 주요 목적은 최근에 발생한 새로운 방식의 부흥을 반대하고 경고한 것은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1827년에 공개적인 논쟁이 시작되기 앞서 이미 부흥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달랐다. 이미 상당히 초기였던 1825년 5월 13일, 찰스 시어스(피니의 절친한 친구)가 피니에게 보낸 편지는 후일 문제가 되었던 중심 논쟁점들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나는 자네가 메나르 형제를 다그칠 때, 반드시 어느 정도의 흥분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던 것은 적절한 것이었다고 믿네. 또한 자네가 하나님이 이런 것들을 가장 최선의 방법으로 다루실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부흥 시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옳은 것임을 의미한 것이 아니며, 동시에 모든 고함치는 것과 열광이 다 그릇된 것도 아니라고 믿네. 하지만 나는 신앙 부흥의 가장 위대한 도구 가운데 하나가 기도라고 믿네. 또한 권면의 말씀과 온화하며 합당한 호소가 우리의 이해와 양심에 적용됨으로써 진리가 가장 깊은 감명을 줄 수 있는 형태로 드러나야 한다고 믿네. 만일 하나님이 이런 일을 축복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은혜를 나타내실 의도가 없으심이라고 믿어야 할 것이네. 그러나 나의 관찰과 비평에서 잘 드러나듯이 그 흥분들과 소동들은 무언가 다른 방식 때문에 생긴 것이며, 잘못된 신앙 고백과 신앙 행위를 폭로하는 것만큼이나 이런 위조된 감정들을 폭로하고 드러내는 것은 우리의 의무일세. 자네가 메나르 형제가 주장한 이런 원리들을 인정한다면, 나는 자네의 모든 정당성을 지지할 것이지만, 만일 자네가 그것들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한다면, 나는 자네와는 다르다는 불행한 사실을 밝히지 않을 수 없네. 또한 동물적인 감정과 흥분 그리고 그런 흥분이 아무리 잘 계발되고 소중하게 여겨진다 할지라도 나는 그 부흥의 진위 여부에 대해 매우 심각한 의심과 의문을 자유롭게 표현할 걸세.
이런 시어스의 편지에 대해 피니가 답변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1826년에 접어들면서 오나이다 장로회의 지도자 세 명인 존 프로스트, 모제스 질레트 그리고 노아 쿠는 88페이지로 구성된 소책자 「오나이다 카운티의 신앙 부흥 이야기」를 출판했다. 이 책자는 다가오는 논쟁에 더욱 직접적인 불씨를 제공했다. 이 책의 내용은 초기에 발생한 옛 부흥들과 비교해 보면, 이들이 주장하는 것들이 장로교회와 회중교회 그리고 침례교회들에게는 매우 새롭고 생소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오래지 않아 오나이다의 정통 목사들이 또다른 책자를 출간했다. 1827년 5월, 오나이다의 회중교회 목사들은 22페이지 분량의 「그들의 보호를 받는 교회들에게 보내는 오나이다 목회자 협의회 교서」를 출판했다. 이것은 서부에 발생한 부흥을 전혀 비난하거나 평가절하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찰스 피니를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문서를 지지했던 목사들은 「오나이다 카운티의 신앙 부흥 이야기」에 묘사된 태도, 즉 자신들의 서술에는 오류가 있지도 않고 전혀 비성경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태도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목회자 협의회 교서」를 발행한 목사들의 주요한 목적은 이런 무분별함이 초래할 위험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들은 비판과 비평의 원인이 되는 어떤 문제들이 발생했으며, 이런 문제들에 비평을 제기하는 것은 부흥을 방해하기 위함이 아니라 참된 부흥의 진정한 중요성을 인식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한 부분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만일 부흥이 결함과 결점 투성이라고 해서, 거기에 어떤 선함이나 유익도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어떤 부흥이 참된 신앙의 부흥이라고 간주된다고 해서 그 곳에 아무런 결점이나 결함이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 곳에 악이나 결함이 있다고 해서 선함을 보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폐해나 해악을 보지 않기 위해 우리 눈을 감아 버리는 것 역시 의심할 여지 없이 그릇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곳에도 어떤 유익과 선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실상 우리가 보고 발견하는 모든 결점과 결함들을 온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며 선전할 의무가 없습니다. 만일 이런 결함이 법에 어긋난 것도 아니고 이런 결함 때문에 손해가 발생하는 것도 아니라면, 우리는 당연히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결함과 결점들이 부흥에 동반되어 모든 대중에게 알려지고 영혼에 대단한 해악을 끼치게 된다면, 침묵은 곧 심각한 죄악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목회자 협의회 교서」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일반적인 요점들은 다음과 같은 제목들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회중을 동시에 정죄하거나 칭찬하는 일, 보기에 좋은 상황과 환경을 너무 과도하게 만드는 일, 위조된 회심들을 경계하지 않는 일, 겉치레와 소란, 사람들을 너무 성급하게 회심자로 인정하는 일,(한 교회의 힘은 사람들의 숫자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그 은혜들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심지어 매우 선하고 좋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들의 숫자를 세고 파악하는 일에 너무 열중하고 탐닉하려는 열망을 조심하고 경계하며 두려워해야 한다) 심판과 선고 때문에 감정을 학대하고 고행하는 일, 반대 세력에 대해 너무 과도한 비평의 말을 하는 것, 교회에 잘 출석하고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자들을 냉랭하고 어리석으며 무능력한 자들이라고 매도하며 마치 그들을 회심하지 않은 자처럼 취급하며 비난하는 일, 이름을 거명하며 사나운 독설 가득한 말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 현재 발생한 모든 일에 찬성하지 않는다며 그들을 부흥의 적들로 비난하고 고소하는 일,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어떤 수단과 방법들을 옳은 것이며 하나님께 인정받은 방법들이라고 받아들이고 주장하는 일.
1827년 초여름, 이 「목회자 협의회 교서」의 경고의 말들이 발행될 무렵, 모호크 산맥을 중심으로 유티카에서부터 트로이에 있는 모든 교회는 큰 논쟁에 휩싸이고 말았다(피니를 포함하는 한 부류, 피니가 사용한 방법을 반대하는 목회자들로 구성된 한 부류). 1827년 7월, 이런 양자 간의 긴장과 대립을 완화하고 절충하기 위한 일주일 동안의 목회자들을 위한 집회가 뉴레바논에서 개최된 적이 있다. 하지만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효과 없는 모임으로 끝나고 말았다. 1827년이 대 논쟁의 시대였다면, 그 이듬해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급작스러운 결말을 보았던 해처럼 보인다. 그리고 1828년에 해결되지 않았던 이 새로운 방법에 대한 논쟁은 윌리엄 윅스의 ‘이 주제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을 수집하여 출판하려고 준비’의 책의 출판과 함께 미국 교회 역사의 방향을 새롭게 바꾸기 시작했다.
공적 부흥 논쟁의 원인
우리는 이제 논쟁과 관련된 분쟁과 분열의 원인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접근 방법은 네틀턴과 피니 사이의 사적인 충돌과 불화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교회 역사는 이 논쟁을 야기한 대표자로서 찰스 피니를 지목한다. 그러나 실상 새로운 방법들은 피니 개인에게서가 아니라 전체 상황에서 비롯되었고, 피니는 이 논쟁의 전체 상황과 관련되어 있을 뿐이다. 물론 치명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피니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피니에게 영향을 준 인물들은 피니가 회심하던 해에 게일 목사를 도와 함께 사역했던 제데다이아 버차드(1790-1864)였다. 버차드는 당시 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인으로서 초보 단계였던 피니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나단 비먼(1785-1871)은 피니의 목회 후원자로서 피니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이미 이 새로운 방법들을 장려했던 인물이었다. 그 결과 이 교회는 분열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리고 대니얼 나쉬(1771-1831)가 있다.
찰스 피니가 적어도 윌리엄 윅스와 그의 동역자들이 준 「목회자 협의회 교서」의 경고와 교훈들을 잘 이해했더라면 그리고 뉴레바논에서 열린 목회자를 위한 집회에서 그에게 쏟아진 경고들을 겸손히 받아들이려 했더라면 이어지는 교회 역사는 분명 매우 다르게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피니는 사역을 통해 나타난 결과들이 피니로 하여금 그 자신이 사용한 새로운 방법을 더욱 신뢰하도록 격려했다. 이 때부터 피니는 부흥을 발생시키기 위한 새로운 방법들을 옹호했으며, 이에 기초해서 이 전체 논쟁은 피니를 중심으로 한 개인적인 논쟁으로 치닫기 시작한 것이다. 피니는 이 방법들을 반대하는 사람이나 이 방법들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을 반대하고 적대시하는 것은 결국 부흥을 반대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된다고 믿었다.
마침내 성경 지식이 부족하고 지성이 균형잡히지 않은 사람들이 피니를 찬미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피니는 우상과도 같았다. 그들에게 피니는 부흥을 일으킨 인물이었다. 그들은 피니가 많은 영혼을 회심시켰기 때문에 이런 역사가 진보하고 확장됨에 따라 부흥은 절대로 중단되지 않을 것으로 믿게 되었던 것이다. 성공이 가져온 만족감과 행복감 때문에 피니는 자기에게 쏟아진 비평들을 전혀 진지하고 사려 깊게 고찰하지 못하였다.
※새로운 방법-설교에 대한 육체적 반응(바닥에 쓰러지는 것과 같은 것)의 장려, 예배시간에 여자가 말하는 것, 수 시간 동안 집회하거나 며칠 동안 연속적으로 집회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어서가나 무릎을 끓거나 ‘애통해하고 신앙을 갈망하는 구도 좌석’은 앞으로 나아오는 행위들과 같이 사람들을 ‘하나님께 복종’케 하며 또한 ‘겸손’한 행위로 그 복종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사상. 이것은 어떤 감리교도들이 대중에게 보급한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새로운 방법들은 어떤 결과들을 의도적으로 양산하기 위해 계산된 것들이었다. 그들은 공포와 불안을 조장하는 위협적이고도 비난적인 언어들,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진행되는 개인을 향한 노골적인 비평들, 기도할 때 회심하지 않은 자들의 이름을 부르는 일, 각 개인에게 기도하게 하거나 ‘복종’시키는 일 또는 이와 비슷한 다른 방법들을 시행했다. 이들이 한탄스러워했던 것은 회심자의 숫자를 부풀리려고 감정을 계획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이렇게 도입된 새로운 방법들은 그것 때문에 기만당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경험적 신앙 그 자체인 참된 부흥을 불신하게 만드는 것이다.
공적 부흥 논쟁의 핵심은 회심관의 차이
이 문제의 근원은 죄인의 회심에 대해 양자가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데 있다. 피니는 파크 스트리트 회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에스겔 18장 31절).
나는 여러분에게 이 본문이 명령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보여 주려 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 인생을 지배하는 목적을 반드시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해석하고 주도하는 자가 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는 그 목적을 향해 모든 계획과 노력들을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를 지배하는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이 목적을 향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게 되며 결국 자기 마음을 변화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이 변화는 단순히 내부를 자극함으로써 죄인의 마음을 변하게 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결단으로 말미암는 이 변화는 성경이 요구하는 충분한 변화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죄인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전부인 것입니다.
피니는 그의 회중 대부분으로 하여금 회심에 대한 이런 단순한 설명을 수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들이 이제까지 인간의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전통적인 교리를 배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중생하지 못한 자가 타락한 본성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상 역시 그릇된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대담하게도 사람이 타락한 본성이나 거룩한 본성 따위에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피니는 아담의 첫 본성이 거룩한 것도 아니고 죄악에 찬 것도 아니었다고 말한다. ‘본성은 거룩해질 수 없다. 창조시에 아담의 본성은 거룩하지 않았다. 창조시의 아담의 본성은 죄 된 본성도 거룩한 본성도 아니었다. 아담이 행위를 시작했을 때, 그는 하나님을 섬기기로 주도적인 결심을 했던 것뿐이다.’ 피니는 아담이 그의 행위를 지배하고 통제했던 것은 상상으로 만들어진 본성이 아니라 아담 자신의 의지였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는 또한 아담에게 있었던 일은 여전히 오늘날 모든 사람에게도 똑같이 발생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모든 사람이 회심하는 데 필요했던 것은 본성의 변화가 아니라 의지의 결정이었다는 것이다.
1834년부터 1835년 사이에 뉴욕에서 피니가 한 강의가 곧 책으로 출판된 「신앙 부흥에 대한 강좌」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강의에서 피니는 반복적으로 사람은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의지하고 맡길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피니는 계속해서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에게 믿으라고 명령하시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하시는 명령은 우리가 그것을 할 능력이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만일 우리에게 순종할 능력이 없다면, 하나님도 명령할 권한이 없으신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의무를 다하게 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영향을 끼친다면 성령을 주시는 이유는 다만 일상적인 문제에 한정된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실행 불가능한 일을 명령하신다면, 하나님은 폭군일 것이다.’ ‘타락한 본성에 기인한 죄인들의 무능력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다.’ 피니는 회심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재창조 사역이라거나 그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상을 비판했고,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의 창조자에게 순종’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영향이 필수적이라고 믿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며 그렇게 기도하지 않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중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시작일 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스도를 의지적으로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유일한 길이다. 한 개인이 하나님을 향한 실제적인 순종을 선택할 바로 그 때,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찰스 피니는 자기 설교와 동시대의 전통적 신학을 급진적으로 대조하는 일에 대단한 관심을 기울였다. 1835년에 이르러서 그는 자기 회중에게 그가 실질적으로 회심에 대한 새로운 신학을 제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사실상 우리는 지난 수백 년 동안 잘못된 신학에 오염되고 왜곡되지 않은 순수한 복음을 접한 적이 없습니다.’ 이어서 피니는 이 잘못된 신학의 전달자로서 제일 먼저 아사헬 네틀턴을 지목했으며, 새로운 방법들은 전통적인 신학이 아닌 새로운 신학에 기초해서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더 나아가 ‘회심해야 할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흥분시키는 것은 이 회심시키는 데 필수적인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피니가 사람들을 끌어 모아 공개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그들을 순종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근심하고 슬퍼하는 구도자를 위한 좌석’ 또는 이와 상응하는 ‘구도 좌석’ 등과 같은 것들은 복음 전도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피니는 그들이 사용했던 절차들이 당연히 그런 것처럼, 회심을 매우 신속하게 일으키는 데 공헌했다고 믿었다. 피니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회심하지 않은 자들이 즉각적인 복종과 순종을 순수하게 행하게 된 것은 분명한 일이다. 만일 그들이 순종하지 않는다면, 성령께서는 그들을 버리실 것이고 그들은 전혀 소망이 없는 비참한 상태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부흥과 관련해서 피니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당신이 부흥을 보지 못하는 것은 단지 당신이 부흥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부흥이 임하기를 원하는 믿음과 기도에 있어서 서로 의견이 통일된다면 그들은 즉시 부흥을 볼 것이라고 강력히 역설했다. 결국 피니는 매우 논리적으로 새로운 방법을 반대하는 자들을 ‘부흥의 적들’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피니는 인간의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진실을 부정한 펠라기우스주의자로 스스로를 전락시키고 만 것이다.
이 논쟁을 평가하면서 가드너 스프링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전적으로 필요한 일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하는 것이라고 교육받았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인 되기 위한 목적과 결심이야말로 그 자체로 복음적 신앙이라고 배웠다. 그것은 피조물 스스로 마음을 혁신하는 피조물의 사역이지 성령의 사역은 아니다. 그들이 교훈하는 바는 성령의 능력이란 단지 죄인 자신이 그것을 행할 수 있도록 권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새로운 방법들과 펠라기우스적인 오류들을 주도한 인물은 다름 아닌 찰스 피니 목사였다.
피니가 복음을 전할 때 필수적인 것은 대중적인 활동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그는 회심에 필요한 것은 기립하고 무릎 꿇고 앞으로 나아오는 것을 결심하는 것이 전부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죄인들이 행동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죄인들이 행동하기까지 성령께서는 절대로 역사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적인 결심은 ‘갑작스러운 회심으로 말미암아 기적적으로 내적인 변화가 생기는 것과 동일시’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방금 인용했던 말은 휘트니 크로스의 말인데 그는 다음과 같이 계속해서 진술한다. ‘피니가 행한 이런 과정들은 침착하고 절제되어 있으며 매우 인상적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회심했으며, 회심한 자인 것처럼 내적 변화를 상상하게 강요하는 가치 없는 기계적 기교와 수법일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이 서부의 부흥에 소개되었던 이 혁명적인 방법을 반대했던 주된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