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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차 문화유산답사(5-3); 국립중앙박물관 둘러보기(3-1)
국립중앙박물관 전시품 발췌관람
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은 時代順으로 관람하지 않고 1층 기획전시실에서 반대로 이동하면서,
더욱이 문화재 전부를 보지 않고 選別的으로 관람했기 때문에 전시문화재 전부가
아닐 뿐만 아니라 時代順과는 無關함을 밝혀 둔다.
(01) 아미타불[鐵造 阿彌陀佛 坐像]
-강원 原州지역 출토 –고려시대 -1925년 入手
原州지역에서 발견된 鐵造 阿彌陀佛 坐像으로 소라껍질처럼 들어올린
螺髮의 머리에 사실적이고 土俗的인 얼굴과 手印은 阿彌陀 九品印 가운데
上品上生印을 맺고 있다.
日帝强占期에는 臺座 일부가 깨지고 그 후 鐵佛과 臺座를 콘크리트로 부착했었으나
變形부분을 제거하는 등 保存處理 後 1층 高麗室에 상설 전시하고 있다.
(02) 철불(鐵佛)
-충남 瑞山 傳 普願寺址 -1918년 입수 –통일신라시대 8~9세기 –재료 鐵
(03) 정병(淨甁)
-충남 扶餘 -1945년 입수 - 통일신라시대 9~10세기 –재료 靑銅
(04) 짐승얼굴무늬 기와[怪獸面瓦]
-경북 慶州 月池(雁鴨池) -1975년 발굴 -통일신라시대 8~9세기 –綠釉
*統一新羅는 唐과의 교류를 통해 많은 文物을 받아들여 王京[서라벌] 遺蹟에는 唐에서
수입한 陶磁器나 金工藝品이 많이 발견되며, 唐三彩는 新羅와 唐의 교류를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당삼채가 유통되던 신라에서도 三彩와 비슷한 기술로 만든 綠釉土器가 유행했다.
녹유토기는 표면에 낮은 온도에서 發色되는 鉛釉系統의 녹유를 발라 구워낸 토기로
7세기 전후에 출현하였으며 신라에서는 주로 뼈 단지로 사용하였다.
*唐三彩: 중국 唐나라 前期(7세기 말~8세기 초)에 만든 백색 바탕에 綠色·褐色·藍色 등의
釉藥으로 여러 무늬를 묘사한 陶器.
(05) 돌 함과 뼈 단지[石函∙骨壺] -국보 125호-
-경북 慶州 -1966년 입수 -통일신라시대 8~9세기 –돌, 綠釉
*녹유골호(부 석제 외함)[綠釉骨壺(附 石製 外函)] (*문화재청 문화재정보)
골호는 불교에서 屍身을 화장한 후 유골을 매장하는데 사용된 뼈 항아리[骨壺]로,
삼국시대 후기부터 고려시대까지 성행하였다.
뚜껑에 둥근 꼭지가 달리고 꽃잎모양으로 角진 화강암 外函 속에서 발견된 골호는 몸체와
뚜껑에 녹색유약을 입힌 높이 16㎝, 입지름 15.3㎝의 통일신라시대 뼈 항아리이다.
몸체에는 점선과, 꽃무늬로 가득 장식했는데 골호 중에는 이처럼 무늬를 찍어 장식한 뒤
유약을 바른 施釉骨壺가 몇 점 전해지는 중에서도 이 골호가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06) 삼채 낙타(三彩 酪駝)
-出土址 未詳 -1977년 구입 –중국(唐) –三彩
(07) 삼채 서역사람[三彩 胡人俑] (*俑” 목우 용)
-出土址 모름 -2004년 구입 –중국(唐) –三彩
(08) ‘청녕 4년’이 새겨진 종[靑銅 ‘淸寧 四年’銘 鐘] -보물 1166호-
-경기 驪州郡 金沙面 上品里 발견 –고려 文宗 12년(1058) -1969년 입수
‘淸寧 四年’을 새긴 종으로 淸寧은 契丹 道宗의 年號이며, 淸寧 4年은
고려 文宗 12년(1058)으로 종의 鑄造年度이다.
통일신라의 전통을 계승한 고려 銅鐘은 11세기부터 고려양식으로 변화하고
있는데 龍이 정면을 바라보거나 位牌形 銘文들이 등장하고 종을 치는 부위인
撞座가 사방에 1개씩 4개로 늘어난다.
150근의 이 동종은 당시 임금인 文宗의 長壽를 기원하는 發願文
‘特爲 聖壽天長之願鑄成 金鐘一口 重一百五十斤 淸寧四年戊戌五月 日記
(특위 성수천장지원주성 금종일구 중일백오십근 청녕사년무술오월 일기)’을
陰刻하였다.
(09) 나전 경함(螺鈿 經函)
-고려 후기 -2014년 (사)국립중앙박물관회 기증
나전 경함은 螺鈿으로 만든 大藏經을 담는 함으로 고려시대 나전은 매우 정교하고 文樣이
優雅하고 화려하여 螺鈿漆器는 靑瓷, 佛畵와 함께 고려미술의 眞髓를 보여주는 工藝品이다.
고려 후기에 만든 유사한 형태의 나전 경함은 元宗 13년(1272) 元의 요청으로
鈿函造成都監이 설치되면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 나전 경함에는 모란꽃송이와 넝쿨무늬가 자연스러운 線을 이루며, 자개를 가늘게 잘라
2만 5천여개의 자개조각을 사용하여 무늬를 만들었으며, 넝쿨줄기 등에는 金屬線이
사용되어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여러 번 옻칠하여 나무의 뒤틀림과 龜裂을 방지하였다.
*(사)국립중앙박물관회는 2010년 11월 日本의 한 신문이 보도한 ‘세계 9번째
고려나전 경함 발견’ 기사를 보고 所藏者를 설득해 구입하여 박물관에 기증한 작품이다.
(10) 보살[金銅 菩薩坐像] -고려 14~15세기 -2009년 구입
온화한 미소를 띄고 있는 菩薩像으로 통통하고 둥근 얼굴, 깊은 冥想에
잠긴듯한 표정, 道袍형태로 걸친 天衣, 높게 올려 묶은 寶髻 등 高麗後期
佛像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髻: 상투 계)
瓔珞장식이 번잡하게 늘어지고 가슴을 도드라지게 표현하는 것은
14세기 말부터 나타나는 특징이다. (*瓔: 옥돌 영)
西山大師가 “菩薩은 오로지 衆生에 대한 생각뿐이다”라고 했듯이 보살은
자신이 깨달음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체의 중생을
먼저 구제하겠다는 誓願을 세웠다.
(11) 관세음보살[木製 觀世音菩薩坐像] -고려 13세기 -1908년 구입
왼쪽다리는 아래로 내리고 오른쪽 다리는 올린 遊戱坐의 觀音菩薩이다.
높은 보관과 화려한 瓔珞裝飾, 美麗한 얼굴표정은 화려하고 섬세한 고려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머리 위에 15개의 나무 부재를 못으로 이어 붙여 복장물을 납입할 수 있게
했으며, 머리 안에는 고려시대 <大隨求陀羅尼經>과 오색실이,
몸에는 씨앗을 담은 五寶餠이 들어 있었다.
(12) 반자[靑銅 金鼓] -함경남도 출토 –고려시대 -1929년 입수
(13) 반자[靑銅 金鼓] -고려시대 -2000년 구입
사찰에서 供養時間을 알리거나 齋를 올릴 때 사용하는 法音具로 이 반자는 드물게도
共鳴口가 아래로 뚫려있어 앞뒤 구분 없이 사용 가능하다.
반자는 金鼓, 금구라고도 하며 뒷면이 트인 것과 측면에 구멍이 뚫린 것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지름 40cm내외의 쇠북이 많았으며 북을 치는 鼓面에는 구름,
연꽃무늬 등을 장식하였다.
(14) 범종[靑銅 梵鐘]
=범종[靑銅 梵鐘](앞줄 왼쪽). –고려시대 -1912년 구입
=범종[靑銅 梵鐘](앞줄 오른쪽). –고려시대 -1916년 구입
=범종[靑銅 梵鐘](뒤)
-경기 漣川郡 百鶴面 원당리 발견 –고려 13세기 -1968년 입수
고려시대의 기본적인 양식을 잘 갖춘 梵鐘으로 완전한 筒形으로 제작되었으며, 다른 종과
달리 撞座나 飛天像은 뚜렷한 線刻으로 3~4mm 튀어나오게 彫刻하였다.
고려시대 동종은 신라시대 동종의 전통을 계승한 바탕 위에 11세기부터 고려양식의
변화가 일어나 龍이 정면을 바라보거나 位牌形 銘文들이 등장한다.
13세기경에는 上帶(범종의 어깨 부분에 둘린 무늬 띠) 위에 꽃 문양이 띠를 이루는
立狀花文帶를 장식하고 音筒에는 3~8개의 寶珠가 나타나기 시작하며 한쪽 발로는
如意珠를 잡는 등 고려후기 종들의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종의 크기도 50cm이하의
작은 종을 제작하였다.
(15) 다리가 세 개인 향로[靑銅 三脚香爐](앞줄 왼쪽)- 향완[靑銅 香垸](뒤)-
은 입사 향완[靑銅 銀 入絲 香垸]
=다리가 세 개인 향로[靑銅 三脚香爐](앞줄 왼쪽) -고려시대 -1970년 구입
=향완[靑銅 香垸](뒤) -고려 13~14세기 후반 -2003년 구입
=은 입사 향완[靑銅 銀 入絲 香垸](오른쪽) –고려 11세기 후반- 2001년 구입
(16) 비로자나불(앞)과 조사상[靑銅 毘盧遮那佛 坐像∙靑銅 祖師坐像]
-경기 城南市 板橋 –고려 후기 -청동 -2008년 발굴
城南 板橋에서 출토된 靑銅像 3점으로 毘盧遮那佛은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싼 智拳印을 한 채
깊은 禪定에 빠져 미소 짓는 듯하다.
한 쌍의 祖師像은 頭巾을 쓰고 있어 僧伽大師, 地藏菩薩로 보는 견해도 있다.
僧伽大師는 西域출신 승려로 중국 唐나라로 건너갔으며 修行이 뛰어나 참된 승려로
존경 받고 入寂 후에는 신앙의 대상으로 각광받은 인물이다.
靑銅像의 크기나 彫刻技法의 차이로 볼 때 두 점의 祖師像이 毘盧遮那佛의 夾侍였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매끄럽게 鑄造된 靑銅像은 千年의 세월이 지났어도 완벽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17) 청자 정병[靑磁 陰刻 蒲柳水禽文 淨甁](앞)-청동 정병[靑銅 淨甁](뒤 왼쪽)-
토기 정병[土器 淨甁]
=청자 정병[靑磁 陰刻 蒲柳水禽文 淨甁](앞) -開城 출토 –고려시대 -1910년 구입
=청동 정병[靑銅 淨甁](뒤 왼쪽) -고려 12세기 -1981년 이홍근 기증
=토기 정병[土器 淨甁] -開城 출토 –고려시대 -1911년 구입
*같은 모양, 다른 材質의 그릇
정병∙향완∙주전자 등의 器種은 陶器∙瓷器∙靑銅器 등으로 만들었다.
고려시대 도기∙청자∙청동기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만들었는데 특히 靑瓷는 청동기와
도기의 다양한 형태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고려에서는 일반적으로 값비싼 청자와 金屬器보다 그 모양만을 본떠 만든 陶器를 대부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社會∙經濟的 상황에 따라 日常用具의 材質을 달리 사용한 것으로 身分制 社會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18) 청자 매병[靑磁 陰刻蓮花文 梅甁](왼쪽)-토기 매병[土器 梅甁]
=청자 매병[靑磁 陰刻蓮花文 梅甁] -開城 출토 –고려시대 -1913년 구입
=토기 매병[土器 梅甁] -開城 출토 –고려시대 -1908년 구입
(19) 청자 과형 주전자[靑磁 瓜形 注子] -開城 출토 –고려시대 -1905년 구입
(20) 토기 과형 주전자[土器 瓜形 注子] –고려시대 -1981년 구입
(21) 청자 도교인물모양 주전자[靑磁 道釋人物形 注子] -국보 167호-
-고려시대 12~13세기 -1977년 입수
사람모양을 정교하게 본떠 만든 주전자로 머리에 寶冠을 쓰고 道袍를 입은
사람이 복숭아 바구니를 받쳐들고 앉아있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은 道敎의 道士나 傳說 속의 西王母를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西王母는 崑崙山 정상에 있는 宮에 寄居하며 不老不死와 神仙世界를 주관한다고 한다.
고려시대 道敎의 성행과 함께 道敎的 색채를 띠는 象形靑瓷가 많이 제작되었다.
이 주전자는 1971년 大邱市 郊外의 한 과수원에서 발견되어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출토지가 분명한 13세기 전반의 상형청자 가운데 하나이다.
(22) 대나무무늬 주자와 승반[靑磁陽刻 竹節文注子∙承盤]
-고려시대 12세기 -1908년, 1998년 구입
대상의 특징을 충실하게 빚어 象形靑瓷의 멋을 잘 보여주는 竹節形 주전자와 承盤이다.
대나무 가지를 일정한 모양으로 다듬은 모양의 몸체에 대나무모양의 注口와 손잡이가
달려있으며, 대나무 마디마디의 곁면 자국을 표현하여 사실적인 느낌을 강조하였다.
뚜껑은 몸체와 그대로 이어지도록 線이나 文樣구성에서 세심하게 배려한 흔적이 보이며,
뚜껑꼭지와 손잡이 윗부분에 서로 끈을 꿰어 맬 수 있도록 고리가 달려 있다.
(23) 거북∙용모양주전자[靑磁 龜龍形 注子]
-開城 출토 –고려시대 12세기 -1915년 구입
龍 머리의 거북이 연꽃 위에 앉아있는 모양의 주전자이다.
고려시대에는 人物이나 動∙植物의 형상을 본떠 세련된 象形靑瓷를 만들었으며 그 중의
하나가 龜龍形 주전자이다.
연꽃받침은 얕게 돋을새김하고 그 위의 龜龍은 얕게 오목새김 하였으며, 거북이 등의 6각
안에는 하나하나 ‘王’字를 새기고 목을 치켜 올려 먼 곳을 바라보는 눈에는 鐵畵點을 찍었다.
손잡이는 연의 줄기를 틀어 올려 연봉과 연잎을 만들어 붙인 형태이다.
등 중앙에는 연잎을 얹어 가운데에 구멍을 내고 뚜껑은 꽃잎이 붙여진 연꽃 봉오리 형태로
만들었는데 이처럼 뚜껑이 남아있는 예는 매우 드물다.
녹색 色調를 띤 밝은 灰靑色 釉藥을 얇게 施釉하였다.
(24) 귀걸이[金製 耳飾]
-삼국시대(신라) 6세기 –慶州 普門洞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 출토
(25) 관 꾸미개[金製 冠飾] -보물 630호-
-신라시대 5세기 –경북 慶州 皇南大塚 출토 –무게 228g
皇南大塚 南墳 金製冠飾은 冠帽에 끼워 장식하는 것으로 새의 날개모양을 본떠 만들었으며
높이 45㎝, 날개 끝 너비 59㎝로 3매의 금판으로 구성되어 전체가 ‘山’字 모양을 하고 있다.
양쪽 날개에는 수많은 달개가 달려있어 화려하게 날아갈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26) 금 관모[金製 冠帽]
-삼국시대(신라) 5세기 –慶州 金冠塚 출토 –무게 139g
맞새김무늬가 있는 여러 장의 金板을 연결하여 만든 화려한 모자이다.
男性의 머리 위에 쓰는 것으로 주로 관 꾸미개와 세트로 출토된다.
(27) 황남대총 북분 금관[皇南大塚 北墳 金冠] -국보 191호-
-경주 황남재총 –삼국시대(신라) 5세기 -1973년 발굴
경주시 皇南洞 味鄒王陵 地區의 신라무덤 皇南大塚에서 발견된 금관으로 높이 27.5㎝,
드리개(修飾) 길이 13~30.3㎝, 무게 1,062g이다. (*鄒: 추 나라 추)
머리띠 앞쪽에는 ‘山’字形을 단으로 쌓아 올린 장식을 3곳에 두고, 뒤쪽 양끝에는 사슴뿔
모양의 장식을 2곳에 세웠으며 푸른 빛 굽은 옥을 ‘山’자형에는 16개, 사슴뿔 모양에는 9개,
머리띠 부분에 11개를 달았다.
아래로 내려뜨린 드리개는 좌·우 각각 3개씩 대칭으로 굵은 고리에 매달아 길게 늘어뜨렸다.
바깥의 것이 가장 길고, 안쪽으로 가면서 짧아진다.
이 금관은 신라 금관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굽은 옥을 많이 달아 더 화려하게
보인다.
(28) 황남대총 북분 금제허리띠[皇南大塚 北墳 金製銙帶) -국보 192호-
-경주 황남재총 –삼국시대(신라) 5세기 -1973년 발굴
慶州市 皇南洞 皇南大塚의 북쪽 무덤에서 발견된 금 허리띠(銙帶)와
띠드리개[腰佩]이다. [*銙: 대구(帶鉤) 과 *佩: 찰 패]
과대는 직물로 된 띠의 표면에 사각형의 금속판을 붙인 허리띠로 길이 120㎝,
띠드리개 길이 22.5∼77.5㎝, 무게 919g이다. 28장의 板으로 만든 허리띠는
주위에 있는 작은 구멍들로 미루어 가죽 같은 것에 꿰매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허리띠와 띠드리개는 완벽한 상태로 출토되어 당시의 착용법과 띠드리개의
배치순서를 아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29) 말 탄 사람 토기[騎馬人物形 土器] -국보 91호-
-삼국시대(신라) 6세기 –경주 金鈴塚 출토 -높이 21.3㎝, 길이 26.8㎝
머리에 띠를 두르고 어깨에 짐을 메고 있다. 오른손에는 방울을 들고 있는데 방울을 흔드는
장면은 마치 주인의 영혼을 인도하는 下人의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陶器 騎馬人物形 明器(국보 91호)는 金鈴塚에서 출토된 한 쌍의 토기로 말을 타고 있는
主人像과 下人像의 모습이다.
금령총에서 1924년에 배모양 토기와 함께 출토되었으며, 이 인물상 형태의 토기는
신라인의 靈魂觀과 당시의 服飾, 武器, 말 갖춤 상태, 工藝意匠 등의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30) 토우 붙은 항아리[土偶附 長頸壺] -국보 195호-
-삼국시대(신라) 5세기 –慶州 路東洞 墓 출토
항아리의 목 부분에 개구리의 뒷다리를 물고 있는 뱀, 性器를 드러낸 남자 등의
토우가 붙어 있다. 뱀과 성기를 드러낸 남자는 강인한 生命力을 상징한다.
*土偶는 흙으로 만든 인형으로 어떤 형태나 동물을 본떠서 만든 土器로 생산,
豊饒, 귀신을 물리치는 의미를 담고 있고, 소박함 속에 뛰어난 藝術性을
인정받고 있으며, 時代的인 신앙과 풍부한 감정 표현을 보여준다.
(31)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 新羅眞興王巡狩碑] -국보 3호-
-삼국시대(신라) 眞興王 16년(555) –서울 北漢山 碑峯
眞興王이 漢江流域을 차지한 후 이 지역을 둘러 본 것을 기념하여 세운 碑石으이다.
*서울 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는 진흥왕이 세운 巡狩拓境碑 가운데 하나로,
원래는 북한산 비봉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碑를 보존하기 위하여 景福宮으로
옮겼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비몸의 크기는 높이 1.54m, 너비 69㎝이며, 비에 쓰여 있는 글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겼다.
*眞興王巡狩碑는 이외에도 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국보 제33호),
咸南 咸興에 있는 摩雲嶺眞興王巡狩碑(북한 국보 문화유물 111호)와
黃草嶺新羅眞興王巡狩碑(북한 국보 문화유물 110호)가 있다.
(32)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 新羅眞興王巡狩碑] 碑文
碑文에는 진흥왕의 영토확장에 대한 노력과 강력한 王權, 당시의 官職制度외
인물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純祖 16년(1816) 書藝는 물론 金石學에도 造詣가 깊었던 秋史 金正喜가
발견하고 判讀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碑에 새긴 당시의 역사적 사실 등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33) 월광사 원랑선사 탑비[月光寺 圓朗禪師 塔碑] -보물 360호-
-충북 堤川 月光寺 터 –통일신라 眞聖女王 4년(890) 건립
新羅 末의 高僧 圓朗禪師(816~883)의 一生을 기록한 塔碑이다.
월랑선사가 入寂하자 憲康王은 ‘大寶禪光’이라는 塔名을 내리고, 碑文은
金潁에게 짓게 했으며, 글씨는 唐나라 歐陽詢의 楷書體이다. (潁: 강 이름 영)*
거북받침[龜趺] 위에 碑身을 올리고 그 위에 蛟龍을 새긴 머릿돌[螭首]을
얹은 구성으로 이런 塔碑의 모습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하였다.
*충북 堤川郡 寒水面 東倉里 月光寺터에 전해오던 탑비로, 1922년 景福宮으로
옮겼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 1층에 있다.
(34) 경천사 십층석탑[敬天寺 十層石塔] -국보 86호-
-경기 開豊郡 光德面 扶蘇山 敬天寺터 –고려 1348년 -1919년 입수
고려 忠穆王 4년(1348)에 건립한 大理石 10층 석탑으로 고려석탑의 전통적인
양식과 異國的 형태가 調和를 이루며 高麗人이 생각한 佛敎世界가 입체적으로
표현된 석탑이다.
위에서 보면 ‘亞’자 모양의 基壇部에 獅子, 西遊記 장면, 羅漢 등을 조각하고,
木造建物을 옮겨놓은 듯한 塔身部 1~4층에는 부처와 보살의 法會 장면을 16면에
조각하고, 5층~10층에는 다섯 분 혹은 세 분의 부처를 조각하였으며, 지붕에는 각
각의 장면을 알려주는 懸板이 달려있다.
이 탑은 1907년 日本의 宮內大臣 다나카(田中光顯)가 일본으로 密搬出하였으나
英國 언론인 E. 베델과 美國 언론인 H. 헐버트 등의 노력으로 1918년에 반환되었다.
1960년 景福宮에 復元하였으나 酸性비와 風化作用으로 保存上의 문제점이 드러나
1995년 解體하여 保存處理 후 2005년 상설전시실 1층에 復元하였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 특이하며
전체적인 균형과 세부적인 조각수법이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태로 눈길을 끌며,
지붕돌의 처마가 목조건축의 구조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 당시의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이러 양식은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서울 圓覺寺址 十層石塔(국보 2호,
탑골공원 소재)에 영향을 주었다.
(35) 경천사 십층석탑[敬天寺 十層石塔], 박물관 2층에서 본 모습
(36) 고성 옥천사 괘불[固城 玉泉寺 掛佛] -경남유형문화재 299호-
-조선시대 1808년 –비단에 색
경북 固城 蓮華山 玉泉寺에 있는 10m가 넘는 화려한 彩色의 이 掛佛은
靈山會上을 具現한 佛畵이며, 靈山會上이란 印度 靈鷲山에서 있었던
釋迦牟尼佛의 說法을 뜻한다.
장엄한 佛∙菩薩은 河東 雙磎寺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畵僧 華岳評三과 16명의
畵僧들이 조성하였다.
(37) 固城 玉泉寺 掛佛
釋迦三尊을 화면에 크게 浮刻하고 上段의 인물을 작게 그려 보는 사람이 空間感과
상승감을 느끼게 하며 釋迦三尊과 二大弟子, 他方佛의 간략한 구성으로 釋迦의 靈山會上을
재현하고 있다.
(38) 무학대화상 진영[無學大和尙 眞影]
-조선 19세기 –모시에 색[苧本 彩色] -1911년 구입
太祖 李成桂의 王師 無學 自超(1327~1405)의 眞影으로 無學은 元에
留學할 때 懶翁 惠勤과 印度僧 指空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조선 전기부터 유행한 三和尙(無學∙懶翁∙指空) 신앙 속에서 指空∙懶翁과 함께
한 폭 또는 세 폭으로 그렸다.
화면 위 왼쪽 빈 칸은 주인공을 기리는 讚을 적는 공간으로 造成 당시에 쓰거나
이후에 知人 또는 參拜客이 써 넣기도 하였다.
(39) 지공화상 진영[指空和尙 眞影]
-조선 18~19세기 –모시에 색 -1914년 구입
高麗 末에 활동한 印度출신 승려 指空和尙의 眞影으로 각이 진 冠을 쓰고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모습은 異國人의 이미지를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위 왼쪽에 題簽에 ‘西天 百八代祖師 指公大和尙主’는 指空이 迦葉尊者로부터
시작되는 印度[天竺] 禪宗 系譜에서 108代 祖師라는 뜻이다. (*簽: 제비 첨)
(40)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불[靈山會上圖]
-조선 1742년 –비단에 색 -1974년 기증
印度 靈鷲山에서 올린 釋迦牟尼의 說法會를 묘사한 장면으로, 깨달음을
說하는 석가모니의 주위에 綠色 頭光의 여러 보살이 서있다.
석가모니의 무릎 옆에 선 首弟子인 迦葉과 阿難 이외에도 여러 승려가
뒤쪽에 서있는데 이들은 釋迦의 제자이며 깨달음을 구하는 修行者들로
菩薩, 天, 聽聞衆과 함께 靈山會에 참석했다.
眞影은 祖師堂이나 眞影閣에 모시고 해마다 入寂한 날에 禪師를 기리는
祭를 올린다.
(41) 서왕모가 베푸는 잔치[瑤池宴圖]
-작가 미상 –조선 19세기 –비단에 색 -2012년 구입
西王母가 周 나라 穆王을 초대하여 崑崙山 瑤池에서 宴會를 베푸는 장면으로 宮中裝飾畵로
즐겨 그렸다.
화면 왼쪽에는 초대받은 여러 神仙들이 바다를 건너는 모습이 보인다.
이 그림은 본래 中國 문헌 <竹書紀年>과 <穆天子傳>에 실린 西王母와 周 穆王의 宴會에
초대된 神仙들의 이야기가 결합된 故事에 淵源을 두고 있다.
여러 신선들은 바다와 산, 바위, 鶴과 鳳凰, 거북, 사슴, 靈芝, 복숭아나무 등과 함께 등장한다.
(42) 왕세자의 천연두 회복을 축하하는 잔치[王世子 痘候平復 陳賀契屛]
-작가 미상 -조선 1879년 –비단에 색 -1924년 구입
高宗 16년(1879) 12월 28일 王世子(後에 純宗)가 天然痘에서 회복된 것을 경축하기 위해
거행된 陳賀禮 장면을 그린 것이다.
陳賀禮는 昌德宮 仁政殿과 重熙堂에서 거행되었으며 그림에 묘사된 각각의 圖像들은
王世子 冊封禮 儀式을 그린 冊禮契屛類에 가까워 흥미롭다.
(43) 강세황 화첩[豹菴帖]
-姜世晃 –조선 18세기 –비단에 엷은 색 -1911년 구입
총 2권에 26폭의 다양한 장르의 그림이 收錄된 畵帖으로 豹菴 姜世晃(1713~1791)이
다양한 畵目에 능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豹菴은 山水뿐만 아니라 花鳥翎毛畵도 많이 남겼는데 특히 <十竹齋畵譜>나 <芥子園畵傳>과
같은 중국의 화보를 본뜨며 꾸준히 그림을 연마하였다.
姜世晃은 당시 畵壇에 한국적인 南宗文人畵風을 정착시키고, 眞景山水畵를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풍속화·인물화를 유행시켰으며, 새로운 西洋畵法을 수용하는 데도 기여했다.
(44) 대나무[墨竹圖]
-李霆 –조선 16~17세기 –비단에 먹 -2002년 구입 (*霆: 천둥소리 정)
오른쪽 면에는 잎이 거의 다 떨어진 앙상한 枯竹을, 왼쪽 면에는 새봄에 뿌리아래서부터
잎이 새롭게 돋아나는 新竹을 그렸다.
고죽은 마르고 야윈 가지가 강조된 반면, 신죽은 무성한 잎을 중심으로 표현하였다.
총 4면으로 이루어진 화첩에는 新竹, 枯竹, 雨竹의 다양한 대나무를 그려 대나무라는
단일소재로 生態와 기후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양상을 다양하게 그려낸 것은 李霆의
작품세계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李霆(1554~1626)은 世宗의 玄孫으로 호는 灘隱, 石陽正을 수여 받았으며, 후에
石陽君으로 승진하였다
文人畵家로 대표적인 墨竹畵家 柳德章·申緯와 함께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꼽힐 뿐만
아니라 墨蘭·墨梅에도 조예가 깊었고, 詩와 글씨에도 뛰어났다.
壬辰倭亂 때 적의 칼에 오른팔을 크게 다쳤으나 이를 극복하고, 회복 후에는 더욱 힘찬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45) 북새선은도[北塞宣恩圖] –複寫本-
-韓時覺(1621-1691?) –조선 1664년 -비단에 채색 -56.7×338.0cm(전체)
顯宗 5년(1664) 咸鏡道 吉州에서 시행한 文武科 시험 장면을 그린 것이다.
함흥 官衙에서 합격자를 발표하는 장면에 대한 그림과 文谷 金壽恒을 비롯한 시험감독관과
합격자 명단 등이 적혀 있다.
그림의 끝에 ′韓時覺′이라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으며 이 작품은 1664년 韓時覺이 그린
작품을 베껴 그린 것이다.
-제65차 문화유산답사(5-4); 국립중앙박물관 둘러보기(3-2)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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