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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 토마스 왓슨
1 신앙 교리 면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2 그리스도인들이 흔들리지 않기 위한 최선의 길은 터(기초)를 잘 닦는 것이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면”(골1:23)
베드로의 기도,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 너희를 친히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벧전5:10). 허공의 별똥별이 아니라 항성(恒性)이 되게 하신다는 말이다.
“유리하는 별들”(유13)은 벨러스트(바닥짐)를 싣지 않는 배와 같아서 교리의 바람이 불 때마다 번번히 뒤집힌다. ‘그의 종교는 마치 달이 차고 기울 듯이 자꾸 변한다’(베자). 아리우스파는 해마다 새로운 신앙을 만들어내곤 했다. 이들은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아니라 온 사방으로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부류이다. 사도 베드로는 그들을 “멸망케 할 이단”이라고 부르고 있다(벧후2:1). 인간은 간음죄뿐 아니라 이단에 빠져도 지옥에 가게 된다.
신앙적으로 흔들린다는 것은 판단력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경박하다는 증좌이다. 깃털이 온 사방으로 불려 날아가듯이 심성이 가벼운 그리스도인들도 그와 같다. “바람은 알곡을 날려보내지 않는다. 그러나 빈 쭉정이는 던져진다”-키프리안.
신앙적 안정을 가져다 주는 것이 말씀 설교의 위대한 목적이다.
엡4:11,12,14. “그가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말씀은 망치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렘23:29. 망치의 타격 하나하나는 건축물의 못을 단단히 박기 위함이다. 마찬가지로 설교자의 말씀은 당신을 그리스도께 좀더 확고히 고정시키려는 것이다. 교화를 위해서 뿐 아니라 영혼의 안정을 위함이요, 옳은 길로 인도할 뿐 아니라 그 안에 머물게 하려는 것이다.
신앙적으로 안정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탁월성인 동시에 명예이다.
우유가 안정되면 크림으로 변화한다. 그것은 그의 탁월함이다. 이제 그는 진리에 열심을 내고 하나님과 밀접하게 교제하며 행할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의 명예이다. 잠16:31. “백발은 영광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주님의 늙은 제자를 보는 것, 즉 고귀한 미덕으로 장식한 성도의 은발을 보는 것이야말로 가장 멋진 광경 중의 하나인 것이다.
신앙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사람들은 절대로 신앙을 위해 고난 받을 수 없다.
종교적 회의론자들은 좀처럼 순교자가 되지 못한다. 흔들리는 그리스도인들은 최선의 것이 아닌 가장 안전한 것을 추구한다. 터툴리안, “배교자는 하나님과 사탄을 저울에 올려놓고 양자의 사역을 저울에 달아 본 후에 마귀의 사역을 선택하고 그를 가장 나은 주인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모욕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믿음 안에서 안정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킨다.
시 78:57,59. “저희가 반항하여 그 증거를 지키지 아니하며 ---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배교자는 마치 바람에 불려 떨어진 과일처럼 마귀의 입으로 떨어져 들어간다.
신앙적으로 안정되지 못하면 절대로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 것을 명령받고 있다.
“끊임없이 옮겨 심는 식물은 절대로 무성해지지 않는다.”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우리는 안정되어야 한다.
유혹자는 악마의 대리자이다. 당신에게서 진리를 도적질하려는 대악당인 것이다. 유혹자들은 나쁜 상품을 떠맡길 수 있는 능변의 소유자들로서, 속이는데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다. 유혹자들은 사기꾼이요 주사위 노름꾼들이다. 롬16:18. “이같은 자들은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또 다른 술책은 특출한 경건을 가장하는 것으로서, 사람들의 칭찬을 사고 자기의 교설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열정적이고 거룩하며 신적 영감을 받은 사람처럼 보이며, 새로운 계시를 감히 사칭한다. 유혹자들은 건전한 정통적 교사들을 비방하고 그 가르침을 무효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은 마치 하늘의 빛을 어둡게 만드는 검은 안개처럼 진리를 가르치는 자들을 무색하게 만들려고 한다. 거짓 교사들은 자기들이 받아들여지기 위해 바울을 깎아내렸다(갈4:17).
유혹자들은 자유의 교리를 설교한다. 마치 인간은 도덕률로부터 해방되고 저주나 율법 모두로부터 자유하며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모든 일을 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런 일도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한다. 그들은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교리를 모든 방종에로의 문을 여는 열쇠로 만들어 버린다.
유혹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로 뒤흔든다. 그리스도께서 유업으로 물려주신 유업은 십자가이다. 세상에 마귀와 악인들이 존재하는 한 고난으로부터의 면제증서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박해의 시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변절하는가! 붉은 용은 그 능력과 교활함으로 교회라는 궁창에 별과 같이 빛나는 뛰어난 신앙고백자들을 타락시켰다(계12:4).
인간이 흔들리는 것은 타락한 천사를 흉내내는 것이다. 마귀는 최초의 배교자였다. 시온의 자녀들은 결코 요동할 수 없는 시온산과 같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안정되는 길은 터 위에 굳게 서는 것이다. 터 위에 굳게 선다는 말의 헬라어 원어는 좋은 기초를 갖춘 건축물을 가리키는 비유어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근본적인 조항들에 있어서 굳건히 서야 하며 기초를 잘 놓아야 한다.
근본적인 지식에 있어 굳게 서야 한다. 그것 없이는 하나님을 올바로 섬길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드리지 않는다면 열납되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 신앙의 규칙과 원리를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신앙의 기초에 관한 지식은 마음을 풍요하게 해준다.
그것은 우리 발의 등불인 것이다. 그것은 눈이 몸의 갈 길을 지시하는 것처럼 우리를 기독교의 완전한 길로 인도해 준다. 신앙의 기본 원리에 관한 지식은 종교의 최고 신비에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열쇠이다. 그것은 신학의 전 체계를 그 모든 특징과 생생한 색체까지 포함하여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말씀을 읽을 때 생겨나는 수많은 난제들을 이해하고 성경의 많은 매듭을 풀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신앙의 기초 지식은 진리의 대적들과 맞서 싸울 무기를 제공해 준다. 그것은 은혜를 조성하는 거룩한 씨앗이다. 신앙의 종자이다. 그것은 사랑의 뿌리이다. 본질에 관한 지식을 통해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터닦기야말로 흔들리지 않기 위한 최선의 길이다. 나무가 흔들리지 않으려면 뿌리를 잘 박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신앙 가운데 굳게 서려면 그 근본 원리에 뿌리를 박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격변하는 시대에 굳게 서려면 내면에 지식의 원리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배가 전복되지 않으려면 닻을 단단히 내려야 한다. 근본 원리에 관한 지식과 영혼의 관계는 닻과 배의 관계와 같다. 즉 넘실대는 오류의 파도와 사나운 박해의 강풍 가운데에서 흔들리지 않게 해주는 것이다.
신학상의 주요 조항들에 관해 무지한 자들은 안정성이 없다. 근육이 위축된 신체가 힘을 쓸 수 없듯이 지식적 기초가 결여된 신자는 신앙적으로 강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지식은 그를 강하고 굳건하게 만드는 근육과 같다.
요리문답은 사람들을 터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게 만드는 최선의 방편이다. 설교만 하고 요리문답을 등한히 하는 것은 기초없는 건물을 짓는 행위인 것이다. 초대교회도 그 나름의 요리문답 형식을 가지고 있었다. 딤후1:13의 “바른 말”, 히5:12의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
저자의 계획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다음 안식일부터 이 요리문답 교육을 시작하려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격주로 안식일 오후에 요리문답의 형식으로 신앙의 기초와 근본적 진리들을 설명하는 것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고자 한다. 내가 죽으면 하나님께서 포도원의 다른 일꾼을 일으키사 지금 시작하는 과업을 완성시켜 주시기를 희망한다. - 토마스 왓슨, 『신학의 체계』, pp 9-17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 / 토마스 왓슨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모든 행위를 총괄하는 주제이다. 모든 사람들의 삶과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진리의 대강령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삼위일체의 세 위격, 곧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성부 하나님과,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신 성자 하나님, 그리고 우리 속에 새 생명을 조성하시는 성령 하나님 전부와 관련되어 있다. 인간은 온전하신 삼위일체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영광은 하나님께서 그 안에 본유적으로 소유하고 계신 것이다. 빛이 태양의 본질이듯이 영광은 신성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으로 일컬어진다. 영광은 신성의 광체이다. 영광 없이 하나님은 하나님 되실 수 없는 것이다. 피조물이 누리는 영광은 그의 존재의 본질이 아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그의 영광에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무한하다.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48:11). 그의 본질적 영광은 결코 포기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은 세상에서 그의 이름을 높이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를 존대하게 만드는데 있다. “너희 몸과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지어다.”(고전6:20).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하게 하려 하나니”(빌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행위는 4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감사, 예배, 사랑, 순종.
1) 감사(찬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 생각의 가장 높은 위치에 모시고 그분을 경외하는 것을 의미한다. 시92:8. “여호와여 주는 영원토록 지존하시니이다.” 그는 제일원인이시며 존재의 기원과 원천으로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영광을 부어주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신성의 빛나는 광채인 그의 속성과,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보증하는 그의 약속들과, 값진 진주들이 감추인 신령한 보고(寶庫) 및 세계를 지으실 때 나타난 그의 권능과 지혜의 고귀한 능력을 찬미할 때,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를 가장 탁월한 존재로서 경외하며 오직 이 반석 위에서만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예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행위는 예배에 있다. 시29:2.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예배는 그의 눈의 눈동자요 면류관의 진주이며, 그는 마치 생명나무처럼 그룹과 화염검으로 아무도 접근하여 침범치 못하도록 지키신다. 신성한 예배는 하나님 자신이 지정하신 대로 되어져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엔 다른 불을 제단에 드린 것과 같게 된다.
3) 사랑. 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나님은 인간의 사랑을 받으시면 영광을 받으신 것으로 간주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사랑의 최고의 것을 드린다. 그것은 강렬하고 열화 같은 것이다. 참된 성도들은 스랍 천사들처럼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를 영화롭게 한다. 우리 행복의 주인 되시는 그분은 우리 사랑의 주인이기도 한 것이다.
4) 순종. 이것은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고 그분을 위한 봉사를 위해 준비 태세를 갖추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사역에 전념할 때, 곧 우리 머리로 그에 관해 연구하고, 혀는 그분께 간구하며, 손이 그의 지체들을 구제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된다. 우리는 무릎꿇고 하나님께 경배드릴 뿐 아니라 그에게 금과 같이 고귀한 순종의 예물을 드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은 그 감정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뜨겁게 될 뿐 아니라, 그의 자취를 따르게 된다. 그는 순종의 영역 내에서 활발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1) 그분은 우리를 존재케 하셨기 때문이다. 시100:3.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요”. 우리가 받은 모든 것들이 그분의 은혜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그에게 영광돌리는 것이야말로 합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롬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결론적으로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바다로부터 유래된 하천이 그 은빛 물줄기를 다시 바다로 쏟아내는 것과 매한가지인 것이다.
2) 하나님은 만물을 오직 그의 영광을 위해 지으셨기 때문이다. 사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은 특별히 경건한 자들을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지으셨다. 그들은 주를 찬양하기 위한 살아있는 악기이다.
3) 하나님의 영광에는 고유한 가치와 탁월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생각과 천사의 방언을 초월한다. 그의 영광이 곧 그의 보화인 것이다. 일체의 부요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늘보다 귀하고 모든 사람들의 영혼의 구원보다 더 값진 것이다
4) 우리보다 하급 또는 고급의 피조물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이다. 생명 없는 피조물들과 하늘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시19:1). 하늘의 오묘한 솜씨는 그 조물주의 영광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우리는 태양 한가운데서 작렬하고 성좌 가운데 반짝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찬미가를 짹짹이며 우짖는 새들을 보라. 모든 천사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시중들면서 영광의 수입을 천국 창고에 들이고 있는 중이다. 확실히 인간은 천사들보다 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열심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천사보다 더 존중하셨으니, 곧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천사의 성품이 아니라 인성을 입으셨기 때문이다.
5)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망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9:7). 은혜와 영광의 고귀한 원천이 바로 그분 안에 있다. - 토마스 왓슨, 『신학의 체계』, pp 2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