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대 중국 경제의 장기적 변천은 17~18세기의 성장 및 안정과 19세기의 위기로 형상화되고 있으며, 에도시대 일본경제의 장기적 변천은 17~18세기의 성장 및 정체와 19세기의 성장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18세기에는 조선과 중국에서는 성장에서 위기로 전환되는 고위 균형의 시기이고, 일본에서는 17세기와 19세기 성장의 사이에 끼어 있는 상대적 정체기이다. 그러나 그것을 안정기로 파악하는가, 정체기로 파악하는가는 19세기의 동향에 의해 역규정되는 것일 뿐, 19세기를 제외하고 보면 17세기의 급성장과 18세기의 상대적 안정으로 묘사될수도 있다. 동북아시아 3국의 18세기는 19세기 이후 삼국의 역사적 경로가 분기된 시기로 평가될 수도 있기 때문에, 18세기 동북아시아 삼국의 경제체제를 비교하는 것은 그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18세기 중국, 선, 일본에는 소농경제가 확립되어 있었다. 소농이란 단혼소가족 혹은 핵가족이 주로 가족경제란 소농이 집약적 농업의 발전주체로 확립되어있는 농업경제이다. 조선과 일본에서도 중국의 강남지역과 같이 국내 시장경제가 소농경제의 발전을 추동하였는가. 조선과 일본은 중국의 강남지역과는 달리 중국을 모방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면화를 예로 하여 살펴보자. 면화는 원래 열대의 다년생 식물로써 온대 이상의 지역에서는 겨울을 날 수 없기 때문에 제배가 불가능한 작물이었다. 면화재배의 북방한계선은 겨울을 날 필요 없이 한 해에 바로 수확할 수 있는 품종으로 개량됨으로써 확대되었다. 송대에는 강남지역에서 면화가 재배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북방한계선이 확대되어 명대에는 중국의 북부인 화북지역에서도 재배될 수 있게 되었다. 조선과 일본은 품종개량된 면화씨를 도입할 수 잇었다. 모방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중국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사대부들이 선진농업의 보급자로서 활약할수 있었다.18세기 전남 영암의 한 양반가(남평 문씨)의 장부에는 일인당 1끼 곡물소비량을 쌀 0.7되로 산정항 결산하였다. 하루 세끼를 먹었다고 가정하면 2.1되이다. 그러나 이것은 의례적인 행사나 접대 때의 소비량이기 때문에 일상적인 곡물소비량보다는 더 많았을 것이다. 18세기 조선왕조의 한 관료는 서울 사람의 일인당 하루 곡물소비량을 쌀2되로 하여, 서울 인구 20만명의 한 해 쌀 소비량을 100만가마니로 추산하였다.이 추정치는 서울 시민들이 풍족하게 먹는데 필요한 량이ㅓㅆ다고 생각된다. 물론 이보다 더 많이 먹는 경우도 있었다. 농촌에서 품삯을 주고 고용한 일꾼에게 제공되는 곡물량은 하루 2되를 넘는 경우가 있다. 왕실의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동원된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하루 곡물량은 쌀 3되가 기준이다.(박이태 2004) 일을 할 때는 많이 먹어야 힘을 쓸 수 있으므로, 일꾼에게는 충분한 곡물을 제공하여야 한다는 머습밥의 전통은 18세기에도 있었다. 그러나 하루 2되를 넘는 넘는 곡물 섭취량은 강도 높은 일을 할 때에 허용되는 것이었다. 일상적으로는 조금 넉넉하게 먹는 2되에 미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식량부족상태에 빠져 있는 다수의 농민들이 있었으므로 일이낭 곡물소비량은 2되보다는 적었다. 당시 생존을 위한 최저 하루 곡물소비량은 쌀 1되 정도였다(문용식 2001:77). 하루 곡물소비량은 최저소비량인 1되와 풍족한 수준인 2되 사이의 적당한 값이었다고 판단된다. 곡물소비량은 당해년의 풍흉에 의해 크게 변동되는데, 평귝정도의 작황이라면, 조세나 지대수입으로 먹고 살 수 있었을 30%의 인구는 하루 2되의 곡물을 섭취하였고, 그밖의 70% 인구는 하루 1되의 곡물을 섭취하였을 것이라 가정하여, 1.3되를 하루 곡물 소비량으로 삼았다. 이 수준은 중국 강남지역과 일본의 1인당 곡물소비량의 평균에 해당한다. 18세기 후반 1800만 명 내외의 인구가 하루 1.3되를 먹기 위해 필요한 쌀 환산 곡물량은 4271만 가마니이다. 이 수치는 1911년 쌀 환산 곡물량보다 11% 많은 수치이며, 18세기 중반에 비해 1911년의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14% 정도 줄었다고 가정항 산출한 값과 같다. 이하에서는 18세기 후반의 생산량을 4271만 가마니를 사용하고자 한다.18세기 중반 조선을 일본보다 1인당 경지면적은 2.1배 더 크고, 경지 면적당 생산량은 54% 수준이며, 일인당 곡물소비량은 19%더 많다. 왜 조섡에서는 토지 생산성이 더 낮았으며, 경지면적당 인구는 더 적었는가. 우선 토지의 구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의 경지 중 21.3%는 '경작을 할수 없는 땅'(진황지)으로 경지면적 통계에 포함되어 있으며, 조선은 논보다 밭이 더 많다. 경지파악방식과 논밭구성의 차이, 농업생산량에 영향을 주는 강우량과 같은 기후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서 바로 집약적 농업의 발전수준을 비교허ㅏ는 것은 의미가 없다.18세기 조선의 벼농사의 생산성을 측정하는 지표로 사용할 수 있는 종자 대비 생산량은 1:40이어서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었다. 보다 분명한것은 18세기 조선의 1인당 곡물소비량은 일본보다 더 컸다는 점이다. 일본의 1인당 곡물소비량이 조선을 능가하게 된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4. 근로 혁명과 시장 규율
이제 소능의 노동의욕을 고취하였던 기제에 대해 살펴보자. 조선 전기에는 양반지주가 노비라 불리는 예속 노동을 이용하여 토지를 경영하는 대경영(작게제)이 주된 형태였다. 양반지주는 선진적인 농법의 전수자였다., 그들은 노비에게 직접적인 노동강제를 행하여 선진적인 농법을 구현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노비제가 해체되고, 신분적으로 자유로운 소농들이 자기 계리하에 농업을 경영하였다(김건태 2004). 이 속에서 발전한 것이 병작제였다. 병작제는 토지소유자인 지주와 직접적 생산자인 소농간의 토지임차계약 제도로서 수확을 반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토지의 가격은 지주가 수취한 소작료 5년분 정도였다. 지주는 토지를 매입함으로써 연평균 20%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소작인도 자신이 취득한 모든 것을 5모으면 그 땅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소작인보다 지주가 되고 싶은 열망이 소농의 노동의욕을 고취시켰다. 뿐만 아니라 지주들은 자신의 소작료 수입을 늘리기 위해ㅔ 보다 근면한 소작농을 구하려고 노력하였다. ㅈ경작지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열망이 소농의 노동의욕을 고취시켰다. 직접적 생산자의 노동의욕을 고취시키는 기제는 조선 전기의 직접적인 노동강제에서 조선 후기의 토지매매시장과 토지임차시장을 통한 규율로 변하였다. 조선 후기 토지매매시장과 병작제는 소농들의 노동의역을 고취시키는 기제이자 소농경제 발전의 표상이었다.
3. 유통과 저장으로 본 미곡경제
1. 18세기 조선의 미곡 유통
18세기 후반 쌀로 환산하여 연평균 4271만 가마니에 이르렀던 곡물은 어떻게 유통되었는가. 곡물은 농촌에서 생산되어 농촌과 도시의 소비자에게 이동하므로 곡물의 유통은 농촌 내부에서의 유통, 농촌에서 도시로의유통, 도시 내부에서의 유통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동을 고찰하자. 도시에서는 곡물이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도시민이 소비하는 데 필요한 모든 곡물은 농촌으로부터 공급된다. 따라서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곡물량은 도시인구 규모로부터 추산할 수 있다. 1789년 도시 인구수를 살펴보면 서울이 18만 9153명으로 가장 많고, 개성(2만 7769명), 평양(2만 1869명), 상주(1만 8296명), 전주(1만 6694명), 대구(1만 3734명), 충주(1만 1905명), 의주(1만 1905명) 등이 인구 1만 명 이상의 도시이고, 이 밖에 5천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49개의 도시가 있었다. 호구 통계에서 파악할 수 있는 도시 총인구는 57만ㅇ명으로 , 호구 통계에 파악된 전체 인구 740만 명의 7.8%이다(손정목 1998:22). 당시 호구통계에 누락된 인구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추계된 인구는 1830만 명으로(권태화,신용하 1977), 호구통계의 인구파악력이 도시와 농촌에서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면 도시인구는 140만명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도시에서의 인구파악력은 농촌보다 더 높아다고 판단되므로 도시화율은 이보다 낮은 수준이었다. 7.8%의 도시화율은 비교사적으로 볼 때 어느정도 수준이었는가. 중국 강남지역의 도시화율은 1620년대에는 15%, 1776년에는 16.3%(또는 19.2%)이고, 17세기 중반경 일본의 도시화율은 15%이다. 그리고 1776년 중국 전체의 도시화율은 7.4%이다(용등고 2003:57~58; 신보전,장곡천팽 1988:228). 조선의 도시화율은 중국의 선진지역이나 일본의 절반에 못 미쳤다. 호구 통계에 57만명으로 파악된 도시인구가 먹고 살기 위해서느 어느 만큼의 곡물이 필요하였는가. 18세기 조선왕조의 한 관료가 하였던 방식대로 1인당 하루 쌀 2되를 먹는 것으로 추계하면 연간 소비되는 쌀 환산 곡물량은 277만 4천 가마니로 전체 생산량의 6.5%이다. 이 곡물은 어떻게 공급되는가. 도시에서 소비하는 곡물의 일차적인 원천은 정부수취곡이다. 18세기 후반 조세징수액은 쌀 266만 가마니이다(이영훈 1996:83). 이외에 정부가 곡물을 대여하고 받은 이자가 쌀 환산으로 47만 가마니로, 양자를 합하면 313만 가마니이다. 조세ㅡㄴ 모두 곡물로 징수된 것은 아니었다. 그중 일부는 면포나 마포로 수취항 도시민의 의류품을 조달하였다. 부족한 곡물은 도시에 거주하는 지주들의 곡물수입으로 보충되었다. 도시에서 소비하는 곡물의 대부분은 정부수취곡과 도시에 거주하는 지주들의 곡물수입으로 거의 충족되었다고 판단된다. 정부수취곡과 지주의 곡물수입은 풍흉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남거나 부족하게 되는 곡물을 처리하여애 하는데, 이것도 서울에 소재하는 행정기관이 관리하는 곡물창고와 지방 관청의 곡물창고[환곡]에 의해 어느정도 해소되어서 곡물상인의 활동공간은 크지 않았다. 농촌지역간 또는 농촌지역내 곡물의 유통은 상당히 활발하였다. 미곡은 은포, 소금, 어물, 담배와 교환하는 것이 주된 것이었는데, 원격지간의 유통은 주로 수운을 이용하였으므로, 선박이 정박하기 편한 포구에서 상업이 발전하였고, 이 물품들이 수집되고, 교환되고, 판매되는 장소로서 5일마다 한 번 열리는 정기시가 발전하였다(고동환 1998;이헌창 1999b).재지지주나 농민들의 거래가 발전함에 따라 보다 상위의 거래 중심지가 발전하였지만 거래중심지의 인구규모는 매우 작았다. 곡물의 유통에 잇어 발견되는 특질로는 농촌과 도시간의 재정적 물류와 농촌 지역간에 이루어지는 농민적 물류가 기본적으로 분단되어 있었으며, 재정적 물류에서 상인의 주도력을 발견하기는 힘들고, 농민적 물류 또는 상업적 물류에 기반한 상업도시의 발전은 매우 취약하였다.
2. 미곡유통구조의 비교사
위에서 고찰한 조선의 미곡유통구조는 비교사적으로 볼 때 어떠한 특질을 가지고 있었는가. 우선 중국과 비교하여 보자. 중국에서 미곡이 항상적으로 부족한 지역은 수도가 있는 북경과 천진지역, 소농경제와 수공업이 가장 선진적으로 발전한 강남지역, 무역중심지이면서 배후에 수공업 생산지를 가지고 있는 광동지역이다. 이중 북경과 강남지역에 대해 살펴보자. 북경의 인구는 100만 명에 달하였는데, 이들이 소비하는 연간 쌀환산 곡물량은 300만 가마니이다. 중국에서는 명대부터 일부 조세를 은으로 거두기 시작하였는데, 청대에는 거의 모든 조세를 은으로 거두었다. 그러나 북경에서소비되는 300만 가마니는 지방에서 곡물로 거두어들인 조세이다. 재해 때문애ㅔ 징수 실태가 나쁘거나 재해 지역을 구제하기 위해 전용한 경우, 산동반도나 강남 지역으로부터 곡물을 매집하여 공급하기도 하였지만, 북경에서 소비되는 곡물은 기본적으로는 재정적 물류로 해결되었다. 1776년 강남지역에는 인구 50 또는 1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소주와 85만 명으로 추정되는 항주를 비롯한 크고 작은 295개의 도시에 288만 또는 338만 명이 살고 있어, 도시에서 필요한 쌀환산 곡물량은 1000만 가마니 정도엿다. 일부는 강남지역의 농촌부에서 공급받을 수 있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강남지역 농촌의 농업생산성은 매우 높았지만 면화나 기타 상업 작물 재배를 많이 하였기 때문에 곡물생산량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부족한 곡물은 장강 중상류 지역으로부터 공급받았다. 장강 중상류지역은 강남지역 뿐만 아니라 화북지방에도 곡물을 공급하였으며, 식량으로 사용되는 미곡뿐만 아니라 주조업에 사용되는 미곡도 공급하였기 때문에,청대 중기에 장강 중상류에서 이출된 벼의 량은 2400~3200만 가마니다(용등고 2003:84). 대량의 미곡이 항상적으로 방출되었기 때문에, 명대에 조그만 어촌이었던 한구가 청대에는 미곡 중계지로 기능하면서 인구 20만 명의 대도시가 되었다. 청대 상업 도시는 소주나 한구와 같이 행정적인 기능이 중요하지 않거나 거의 없는 곳에서 발전하였다. 이것은 강남지역의 도시화가 재정적 물류와는 독립된 상업적 물류애ㅔ 기반하였음을 보여준다. 상업적 물류의 기반은 수출용 수공업품 또는 국내의 관료나 지주나 상인들이 소비할 고급 수공업품의 생산 및 유통이었다. 대표적으로는 견직물과 고급 면직물, 도자지, 차 등을 들 수 있다. 수공업품을 수출하여 획득한 은화와 국내 다른 지역으로 수공업품을 판매하여 획득한 은화는 장강 중상류지역에서 미곡을 구입하는데 사용하였다. 도시 경제가 발전하였음에도 정기시를 중심으로 한 농민적 물류는 존속하고 있었다. 정기시를 중심으로 한농민적 물류는 상업도시망을 중심으로 한 상업적 무류와 통합도어 있다기보다는 단절되어 있었다.지주 관료 상인의 물질생활 문명과 농민들의 문질생활 문명의 간극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취급하는 물화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중국과 비교할 때, 조선에서 중국의 강남징ㄱ에서 보이는 상업적 물류에 기반하여 발전하고 있었던 상업도시들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제 일본과 비교하여 보자. 일본은 인구규모가 중국의 1/10밖에 되지 않으면서 중국 강남지역에 버금가는 도시화를 이루고 있었다. 중국 강남지역의 도시화는 곡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배후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일본은 그러한 배후지가 없었는데도 높은 수준의 도시화를 달성하였다. 왜 도시화 수준이 그렇게 높았는가. 일본의 도시화는 일본에 독특한 영주제적 사회편성에 기반하고 있었다. 일본의 최고통치자인 쇼군[장군]은 지방 지배자들인 다이묘[대명]들이 반역하지 못하도록 ㅎ기 위해 2년중에 1녕은 다이묘 본인이 나머지 1년은 다이묘의 친권자가 쇼군의 거주지인 에도[지금의 동경]에 거주하도록 강제하여[참근교체제], 에도는 인구 100만의 도시로 성장하였다. 100만 명의 인구가 소비하는 물자가 교환되는 중앙시장인 오사까[대판]는 인구 40만의 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지방 지배자들이 다이묘들은 농촌에는 농민만 거주하도록 하고, 사무라이와 상인과 수공업자는 도시에 거주하도록 하였다[병농분리]. 이들이 먹고 살 곡물은 어떻게 조달되었는가.다이묘들은 농민으로부터 곡물생산량의 40~50%를 수취하였다.(생략)
3.미곡저장제도의 비교사
(생략)환곡의 총량은 18세기 초에는 500만 가마니이었는데, 18세기 후반에는 1000만 가마니로 증가혔다. 환곡량은 쌀과 벼와 기타 곡물을 단순 합계한 것이기 때문에 싸로 환산하여야 한다. 자료가 비교적 자세하게 남아 있는 1797년도를 살펴보자. 환곡 총량은 967만 가마니이지마, 쌀로 환산하면 672만 가마니이다. 이중 70%는 대부되었고, 30%는 이월되었다. 환곡 총액은 곡물생산령의 16%이고, 환곡 대여량은 곡물생산량의 11%이고, 곡물대부로부터 발생한 이자는 곡물생산량의 1.1%이다. 이월된 량은 생산량의 4.8%였는데, 이 정도의 이월량으로 풍흉을 조절하기에 충분하였는가. 1744~1800년 동안 조세가 부과된 경지면적의 변동으로부터 미곡 생산량의 불안정을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곡물 이월향의 수준을 살펴보자. 이 기간동안 연별 변동율의 평균은 4.7%였고, 평균보다 5%이상 감소된 해가 9개념이며, 전년에 비해 10%이상 하락한 해가 4개년이다. 조세가 부과된 경지면적의 변동은 생산량의 변동을 과소하게 반영하고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이를 고려하면 생산량의 4.8%의 이월량으로는 풍흉의 변동을 완전히 제압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곡물생산량의 16%의 저장량, 4.8%의 이월량은 비교사적으로 어느정도 수준이었는가. 중국의 저장창고는 상평창, 의창, 사창 세가지가 있다. 이 세가지 창고에 저장된 곡물량은 1790년대 중반에 피크에 달하였는데, 쌀환산으로 2250만 가마니이다. 조선의 인구 1인당 저장량은 중국의 5배이다. 중국은 저장곡 중 30~50%만을 판매 또는 대부하고, 50~70%를 다음 해로 이월하고 있어(Shiue 1999 : 136), 저장량에서 이월량이 차지하는 비율은 조선보다 더 높다. 그렇다라도, 조선의 1인당 곡물 이월량은 중국의 2.2배이다. 조선은 비교사적으로 보아 높은 수준의 저장량과 이월량을 유지하였는데, 그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토의 면적이 작고 기후적 다양성이 적어서 지역간 교역보다는 저장에 의한 풍흉조절이 중요하였기 때문이다(박이택 , 이영훈 2002 : 699~702). 조선의 환곡제도는 몇 가지 운영상의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첫째 곡물생산량의 11%를 대부하고 있는데, 대부 받는 사람을 찾는 짝맞추기 기제가 없었다. 따라서 환곡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대부되는 강제대부의 폐단이 있었다. 둘째, 우너곡과 이자를 회수하지 못하는 부실대부는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청산할 합리적인 처리절차를 가지지 못하였다. 셋째, 환곡은 지방관청이 운영하는데,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 감독할 수 있는 행정적 인프라가 없었다. 때문에 환곡을 운영하는 서리들의 다양한 작폐가 문제되었다. 운영방법에서 볼 때 중국의 상평곡은 조선의 환곡보다 우수한 측면이 있다. 상평곡은 값이 비쌀 때 판매하고, 값이 쌀 때 구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서 운영비용이나 운용수입은 이자가 아니라 시세차익으로 얻었다. 시세차익을 얻는 곡물 매매방식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곡물시장의 짝맞추기 기제가 작동하였으며 부실화 문제도 적었다. 물론 상평곡의 운영방식에도 폐단이 있었다. 상평곡은 지방관리가 운영하는데, 어디에서 구입해서 어디에서 판매하는가가 문제였다. 곡물가격이 보다 싼 인접 지역에서 구입하여 보다 비싼 인접지역에 판매하고자 하는 유인이 있다. 그러나 보다 싼 지역에서는 그 지방관리만이 구입하여 구입단가를 낮추고, 보다 비싼 지역에서는 그 지방관리만이 판매하여 판매단가를 높이고자 하는 유인이 작동함으로써 지역간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은 각 지역의 곡물시장을 분단시켜 시장통합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여다.
4. 은화와 동전의 유통으로 본 화폐경제
1. 17세기 은화와 동전의 유통
(생략) 17세기에 조선에서는 중국 및 일본과 마찬가지로 은을 화폐로 사용하는 은경제가 발전하였다. 서울에서는 일상적인 상거래에 은이 사용되었고, 각 지방에서는 토지를 거래하는 데 은을 사용하였고, 정부는 수입과 지출은 은냥으로 환산하여 결산을 보기도 하였으며, 중국 일본과의 거래에 은이 결제수단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은화를 주조하지 않으니 은경제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은화는 주조된 개수화폐가 아니라 무게를 달아 사용하는 칭량화폐였다. 왜 17세기에 조선에서는 은경제가 발전하고 있었는가. 임진왜란 동안 명나라 군대가 군자금으로 가져온 은화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간의 중계무역으로 벌어들인 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의 은경제는 매우 취약하였다. 당시 군주와 관료들은 은화는 남(일본)으로부터 흘러 들어와서 북(중국)으로 흘러나가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것은 동북아시아 수준에서의 결제수단으로는 유용한 것이지만 조선내부 화폐로 사용하는 데는 주저하였다. 조선 정부가 은화의 흐름을 통제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은화의 과잉 유동화로 발생할 교란을 두려우한 것이다. 비록 은경제가 발전하였지만 조선 내부화폐로는 쌀과 면포가 주로 사용돠ㅣ었다. 조선정부가 고민하였던 것은 쌀과 면포 대신 유통될수 있는 지역내부 화폐를 만들어 유통시키는 거시었는데 동전이 그것이었다.17세기에 조선정부는 동전의 유통을 네 번에 걸쳐 시도하였다. 1626년, 1634년 및 1651년의 동전 유통시도는 모두 폐전으로 종결되었다. 왜 폐전하게 되었는가. 동전의 유통은 정부가 무엇 대신에 지급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세차례의 동전 유통은 쌀 대신에 지급하였다. 동전의 가치는 쌀의 부피로 정해진 것이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살로 정해진 동전가격을 안정화시킬수 없었다. 발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전의 가격은 1/10 수준으로 하락하여 폐전되었다. 왜 발행가격을 유지하지 못하였는가. 화폐는 기본적으로 조정게임의 균형이다. 모든 사람들이 동전으로 거래하기를 운함ㄴ 동전은 소재가치 이상의 유동성 프렘엄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동전은 도일한 무게의 동그릇보다 더 가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어떻게 하면 쌀인 면포 대신 동전으로 거래하도록 할 수 있는가. 국가가 쌀이나 면포 대신 동전을 수취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동전은 국가가 수령할 때에만 그 가치대로 유통되고,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들 끼리는 할인되어 유통된다. 동전의 시중시세와 국가의 수령가치가 다를 때 동전은 국가기관 주변에서만 머무르면서, 지방에서 현물을 받고 대신 동전으로 대납하는 방납과 같은 다양한 폐단이 발생한다. 방납의 폐단을 막기 위해 정부가 수령을 거부하면 동전 가격은 급락한다. 그러나 1678년의 상평통보 유통시도는 성공하였다. 왜 성공하였는가. 그것은 이미 민가에 동전유통망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정부는 폐전한 동전을 회수하지 않았다. 민간에 남겨진 동전은 개성을 중심으로 은화의 보조화폐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개성과 인근 군, 그리고 울산-개성-평안도 간의 우너격지 거래에 사용되었다. 울산에 있는 구강서원의 회계장부는 1659년부터 쌀과 소금을 비롯한 여러 물자를 동전으로 거래하고 있다. 동전의 유통범위가 확대돠ㅣ고 있으나 정부는 동전을 주조하지 않으므로 동전 유통량이 부족하여 개성인들이 동전을 주조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정부는 부족한 동전을 주조하여 유통하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정부가 직면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동전유통망을 전국적으로 빠르게 확산시킬 수 있는 가였다. 이때 동전이 유통된 방식은 비교사적으로 보아 매우 흥미롭다. 당시 중국과 일본에서 동전은 1개가 1문이고, 1000개가 1관은 관문제로 사용되었으며, 개수화폐인 동전은 무게단위인 냥과는 무연의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무게단위인 양전제로 사용되었다. 양전제하에서 동전은 어떻게 유통되었는가. 1678년 상평통보를 유통시킨 방식은 동전 400문을 은 1량과 동일한 가치로 사용하는 것이다(은전상준제). 이후 몇 차례 동전 유통과 관련된 변화가 발생하여, 동전 1문이 1푼, 10문이 1전, 100문이 1량으로 사용되게 되었다(송찬식 1975).
2. 18세기 은경제의 소멸과 불완전한 동전경제
동전이 원활하게 유통된 18세기 후반 주목항 보아야 할 것은 두가지이다. 첫째, 은화는 중국과의 무역결제 수단으로 사용되기는 하였지만 국내 거래에서는 사용되지 않앗다. 왜 은화는 국내에서 사용되지 않게 되었는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금은화는 원격지간 거래수단으로 사용된 반면, 동전은 지역내 유통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조선에서 은화가 사용되지 않게 된것은 원격지 유통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ㅡㄴ 미곡이나 면포가 재정적 물류로 대부분 해결되어 은화를 화폐로 사용할 만큼 원격지간 시장거래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시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 농민적 물류에서는 중국에서도 은화가 아닌 동전이 사용되었다, 동전의 활발한 유통은 농민적 물류의 활발화에 따른 것이다(박이택 2003). 조선은 일본과는 달리 농촌에 남ㄱ진 잉여가 상당한 수준에 이른다. 정부에서 수취한 조세와 환곡으로 수취한 이자를 모두 합하여도 곡물생산량의 10% 즉 쌀환산 427만 가마니를 넘지 않는다. 재지지주와 농민에게 남겨진 잉여는 정기시와 포구에서 유통되었으며, 이러한 유통을 매개한 것이 동전이었다. 그러나 농민적 물류는 국지적 거래를 중심으로하여 이루어져서, 은화가 유통될 만한 상업도시망을 형성하는 데는 이르지 않았다. 둘째, 상평통보가 원활하게 사용되었음에도 정부는 조세를 미곡과 면포로 징수하고, 동전은 일부분을 대납하는 것에 하정하고 있다. 왜 정부는 조세 수취를 동전으로 일원화하지 않았는가. 그 이유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동전은 원격지 거래에 사용하기에는 운반비가 많이 들었다. 말 한필에 실을 수 있는 동전은 200량으로, 말 한 필에 실을 수 있는 면포 100필의 가치와 같다. 동전의 운반비를 고려할 때, 동전을 거두어 그것으로 다시 미곡이나 면포를 구입하는 것보다는 정부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쌀과 면포를 바로 징수하는 재정적 물류가 합리적이었다. 둘째, 농민들도 동전 납부로 고정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비록 농민적 물류가 발전하여 동전이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다고는 하지만 동전의 회류체계가 안정적이었던 것은 아니다.(생략)
5. 18세기 재분배경제와 비시장경제적 특질
1. 평균과 안정을 지향한 국가개조
18세기 조선왕조는 어떠한 경제체제를 지향하고 있었는가. 조선 후기에 시행된 재정개혁은 소농들이 안정적으로 생업에 종사하 수 있는 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조세징수액을 줄이고, 조세부담을 보다 공평하게 하고, 소농이 직면하는 다양한 위험을 국가가 분담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고쳐 나갔다. 조선 전기의 조세는 전세, 공물, 신역의 세 가지였다. 이 조세들이 조선 후기에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조선 초기의 전세는 풍흉에 따라 1결에 300되에서 40되가지 차등을 두어 징수하였는데, 조선 후기에는 1결당 징수상한을 40되 혹은 60되로 낮추고, 재해를 입은 토지에 대해 추가적인 조세감면을 행하였다[영정법]. 조선초기의 공물은 각 지방의 특산물을 호로부터 징수하였는데, 조선 후기에는 토지에 대한 과세로 바꾸어 납부능력에 상응하는 부과가 되게 하였고, 조세부과 표준은 쌀로 통일하여 지역간 불균등을 조정하였고, 지역에 따라 포목이나 동전으로 대납할 수도 있게 하여 조세남부의 편의를 제공하였으며, 재해를 입은 토지에 대해서는 조세감면을 행하였다[대동법]. 조선초기의 신역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직역에 인민을 할당하였는데,조선후기에는 면포 1필 또는 쌀 60되를 납부하는 것으로 하여 부담을 공평하게 하고, 부담의 수준도 낮추었으며, 필요한 경우 동전으로의 대납도 허용하였다[균역법].이 외에 환곡제도와 진휼정책을 통하여 재해를 입은 소농을 구제하였다. 18세기에 완성된 재분배경제는 비교사적으로 보아 매우 수주 높은 '도덕경제'로서, 군주가 모든 인민의 보호자로써 인민 한사람 한사람의 상태를 고려하여 그들의 삶이 안정될수 있도록 하는 개별 처방을 내릴 수 있는 체계를 지향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비교사적으로 보아 정미한 재분배경제가 확립될 수 있었던 이유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조선은 전제국ㄴ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군주가 사회후생을 극대화하는 제도적 체계를 구현할 유인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제도체계를 집행하고 강제할 수 있었다. 일본과 같은 영주제 하에서는 행하기 어려운 것이다. 둘째, 조선은 상대적으로 소국이었다. 중국도 전제군주의 국가였지만 황제가 소농의 일상적인 위험을 세세하게 파악하여 조정하려는 재분배정책을 실행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컸다. 중국은 넓은 영토와 지리적 거리를 극복하기는 어려웠던 교통수단으ㅗ 인하여 황제와 소농이 통교하는 중앙집권적 관리체계는 가능하지 않았으며, 지방정부를 규제하는 데에도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중국은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라기보다는 준연방주의적 관료국가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2. 재분배경제의 비시장경제적 특질
(생략)대동법이 실시된 이후, 각 지역으로부터 거둔 쌀과 면포와 동전으로 정부가 필요로 하는 물자를 조달하였다. 조달업자는 공인이라 불렸는데, 공인으로부터 물자를 조달받는 방식도 시장거래라 보기는 어렵다. 정부가 공이에게 지급한 대가는 시장가격이 아니었다. 정부가 항상적으로 수용하여야 하는 공물은 원공이라 하여 달리 취급되었는데, 원공가격은 시장가격의 10배수준이 되도록 책정하였다. 왜 10배 수준으로 책정된 대가를 지급하였는가. 시장가격은 수시로 변동하는 것인데, 공급차질이 발생하여 가격이 급등할 경우 공인은 손실을 보게 되어 때로는 파산하여 유산될 수 있는데, 이를 막기 위해서는 10배정도의 대가를 지불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인이 반드시 높은 이익을 얻었던것은 아니었다. 공인이 부당하게 얻은 이득을 환수하기 위해 다양한 무상공역이 부과되었다. 10배의 공가제도와 무상공역의 교묘한 결합이 시장가격에 의한 조달체계를 대체하고 있었다. 공인제도와 관련하여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공인들이 납품하는 물품의 전문화가 별로 이루어 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특정 상인이나 집단은 특정 물종만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물종으로 구성된 패키지를 공급하도록 되어 있다. 그것은 필요한 물량이 적었기 때문이 아니다. 동일한 패키지를 공급하는 공인들은 상당수에 달했다. 그리고 이들에게 지급하는 대가는 대동세로 거두어 들인 쌀과 면포와 동전의 패키지였다. 왜 이렇게 패키지를 만들어서 거래하였던 것인가. 특정한 한 상품만을 공급하게 하거나 쌀이나 면포나 동전 어느 하나로만 지급하는 것보다는 패키지로 거래하는 것이 가격 변동의 위험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격변동의 위험을 초소화하기 위해 희생되었던 것은 전문화의 이득이었다. 환곡제도도 시장기구에 의존하지 않았음은 앞서 서술하였다. 정부의 재분배경제가 시장기구에 별로 의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부의 상인관도 시장경제적 상인관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하면 가격이 오르고, 수요가 공급보다 부족하면 가격은 내린다. 이와 같은 경제학적 지식을 당대정부 관료들이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공급이 부족하고 가격이 오르면 그 책임을 져야 할 존재로서 매점매석하여 가격을 조정하는 도고가 등장한다. 조선의 대상인의 자산규모는 중국이나 일본의 대상인과 비교할 때 대상인 범주로 파악하기 어려웠으며, 이들은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은경제를 발전시키는 주체가 되지도 못하였다. 그렇다면 이 도고들은 매점매석을 하지 않고도 희생양으로 언급된 것인가. 이들은 매점매석을 할 수 있었다. 상인의 규모보다 시장의 규모가 훨씬 적었기 때문이다. 시장 배제적인 재정적 물류가 원격지 거래와 도시내 거래를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시를 중심으로 한 상업적 물류의 규모는 적을 수밖에 없었으며, 시장이 적었기 때문에 자산이 많지 않은 상인이 매점매석으로 시장가격을 조정할 수 있었다. 시장가격이 도고에 의해 조정되ㅏ는 것으로 인식되면 시장 가격의 공정성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고, 재정적 물류는 비시장경제적 방법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다. 이렇듯 조선의 비시장 경제적인 재정적 물류는 자기 유지의 기반을 스스로 창출하고 있었다.
2.면포질형 시장경제와 전문화 밍 혁신의 시장경제
(생략)18세기 조선은 중국 강남지역의 소농경제 발전을 추동하였던 시장경제체제를 조선 내에 구축하는 데 서공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성공적으로 구축된 것은 비시장경제적이고 도덕경제적인 재분배체계였다. 18세기 일본은 어떠하였는가. 19세기 일본에서는 중국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소농들도 비단 옷을 입을 수 있느 사회로 변한 것이다. 비단 옷은 도시에 거주하는 다이묘나 상인 수공업자의 전유물이었지만 그 문화가 농민에게까지 파급된 것이다. 다이묘는 곡물생산량의 40~50%를 수취하였지만, 수취 대상이 되는 곡물 생산량이 고정됨에 따라 생산성 향상분은 농민의 수중에 남게 되었다. 재정적 물류와 상업적 물류와 농민적 물류가 통합되어 형성된 일본형 유통ㄱ조 속으로 농민의 잉여가 흘러감에 따라 농민의 잉여를 획득하기 위한 수공업이 발전하게 되었다. 농민이 비단 옷을 입을 수 있는 사회로 변화시킨 힘은 생산성 향상에 따른 농민의 잉여의 증대와 일본형 유통구조였다(임영자 1995). 이것은 소농들의 근로혁명과 생활수준의 향상이 결합되어 진행된 면화혁명과 비견되는 비단혁명이었다. 이 비단혁명이 새로운 차원의 소농경제와 사회적 분업을 추동하고 있었다. 상대적 정체기였던 일본의 18세기는 19세기 소농경제 발전을 예비하고 있었던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