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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차 문화유산답사(5-5); 국립중앙박물관 둘러보기(3-3)
(94) ‘연가칠년’이 새겨진 부처[‘延嘉七年’銘 金銅佛 立像] -국보 119호-
-경남 의령 발견 –삼국시대(고구려) 539년 -높이는 16.2㎝ -1964년 입수
光背 뒷면에 제작 年代와 場所 등이 기록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539년
고구려 樂浪(平壤)의 東寺 승려 40인이 참여하여 제작∙유포하려던 千 點의 불상 가운데
스물 아홉 번째 불상이다.
이 불상은 경남 宜寧에서 발견되어 불상이 出土地와 제작장소가 다른 대표적인 사례이다.
광배의 일부분이 손상되었으나 鍍金까지 완전히 남아 있는 희귀한 불상으로, 光背 뒷면에
있는 銘文과 강렬한 느낌을 주는 표현방법 등으로 보아 6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고구려 불상으로 보고 있다.
(95) ‘延嘉七年’銘 金銅佛 立像 -국보 119호- (뒷면의 銘文)
‘延嘉七年歲在己未 高麗國樂浪東寺主敬 弟子僧演師徒卌人共造 賢劫千佛流布
第卄九因現義佛 比立法潁所供養’
[연가7년입 기미년(539) 高句麗의 수도 樂浪(平壤) 東寺의 주지스님 敬과 그의 제자 僧演을
비롯한 40인이 함께 현겁천불을 조성하여 유포하기로 했는데 제29불인 因現義佛로 比丘
法潁이 공양한다.] (*卌: 마흔 십 *卄: 스물 입)
(96)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국보 78호-
-삼국시대 6세기후반 –金銅 –높이 83.2cm, 무게 37.6g -1916년 입수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은 한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뺨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의 보살상이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으며 움직임과 자세가 자연스럽고 팔과 다리 위에
늘어진 옷자락의 흐름이 律動的이며, 머리에 쓴 높은 寶冠, 목걸이, 팔찌 등은
화려하면서도 번잡하지 않고 세련된 조각솜씨를 보여준다.
보관은 해와 달 장식이 있어 ‘日月飾寶冠’이라고 하며, 머리 뒷부분에 흔적만
있을 뿐 光背는 없어진 상태이다.
큰 金銅佛임에도 불구하고 몸체부분의 두께가 3~8mm에 지나지 않아 삼국시대의
뛰어난 鑄造 技術을 보여준다.
1963년 방사선 透過法으로 촬영한 결과 내부의 결함이나 고친 흔적이 없으며,
材質이나 만든 기법이 매우 특이함이 밝혀졌다.
(97)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국보 83호-
(*2016.06.02 사진)
-삼국시대 7세기 전반 –높이 93.5cm, 무게 112.2g -1912년 입수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뺨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의 보살상으로, 이런 자세는 인간의 生老病死를 고민하며 冥想에 잠긴
싯다르타 太子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이 보살상은 머리에 三山冠 또는 蓮花冠이라는 낮은 관을 쓰고 있어
‘三山半跏思惟像’이라고도 하며 입가에 잔잔한 미소에서 느껴지는 半跏像의
자비로움은 우수한 宗敎彫刻으로 崇高한 아름다움을 더해주며 上半身에는
옷을 전혀 걸치지 않고 목걸이만 착용하였으며, 下半身에는 율동적인 치맛자락이
다리를 감싸며 臺座를 덮고 있다.
新羅系 僧侶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 고류 사[廣輪寺]의 赤松으로 만든
半跏思惟像과 類似하다.
*국보 78호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과 비슷한 半跏思惟像으로 국보 78호와
교대로 전시했을 때(2016.06.02) 찍은 사진이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78호)과 함께 국내에서는 가장 큰 금동반가사유상으로
높이 93.5㎝이다. 1920년대에 경주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한다.
(98) 관음보살[木造 觀音菩薩 坐像] -朝鮮 1763년 -1966년 입수
發願文에 따르면 1763년 安養庵에서 만든 두 점의 관음보살 중 한 점이다.
관음보살상의 제작을 위해 比丘 亮濟, 李福慶 등이 施主하였으며 제작을
담당한 首彫刻僧은 聚謙이며, 彫刻僧들은 주로 金剛山 등 북부지역에서
활동한 승려들로 추정된다.
관음보살상은 1965년 韓日協定에 따라 腹藏遺物과 함께 반환되었다.
(99) 관음보살[石造 觀音菩薩 坐像] -朝鮮 前期 -1911년 구입
(100) 보살[石造 菩薩 坐像] -朝鮮 前期 -1917년 구입
동그란 얼굴에 작은 耳目口鼻, 얼굴크기에 비해 짧은 신체가 특징인
조선시대 菩薩像이다.
신체는 돌로 조각하고 금을 입혔으며, 섬세하고 화려한 장식이 달린 寶冠은
금으로 만들고, 두 손을 앞으로 모은 禪定姿勢이다.
*禪定: 불교의 근본 수행방법 가운데 하나로, 般若의 지혜를 얻고 成佛하기
위해 마음을 닦는 修行.
(101) 관음보살[金銅觀音菩薩 坐像] -고려 14세기 -1914년 구입
阿彌陀佛을 새긴 높은 寶冠을 쓴 觀音菩薩像이다.
두 손은 엄지와 가운데손가락을 맞댄 채 들고 있으며, 보관 뒤의 장식과
머리카락이 어깨를 덮고 있고 가슴과 무릎에는 裝身具를 걸치고 있다.
佛像의 손갖춤[手印]
佛像의 손갖춤[手印]은 부처나 보살이 깨달은 진리나 衆生救濟의 誓願을 밖으로
표시하기 위하여 짓는 손 모양을 의미한다.
(102) 지권인[智拳印] - 시무외인[施無畏印]∙여원인[與願印]
=지권인[智拳印]
오른손은 佛界, 왼손은 衆生界를 나타내는 것으로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고 迷惑과
깨달음이 하나임을 뜻한다.
=시무외인[施無畏印]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펴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어깨 높이까지 올린 手印으로 衆生의
어떤 소원도 다 들어주며 慈悲를 베풀어 두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뜻을 지닌다
=여원인[與願印]
다섯 손가락을 편 상태에서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손 전체를 내린 수인으로 부처가
衆生에게 大慈大悲를 베풀어 중생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게 함을 뜻한다.
(103)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 선정인[禪定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결가부좌한 상태에서 오른손을 오른쪽 무릎에 얹어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킨다.
正覺(올바른 깨달음)을 이룬 석가모니가 악마의 장난을 물리쳤음을 地神에게 증명하라고
命하는 순간을 나타내는 모습을 뜻한다.
=선정인[禪定印]
釋迦世尊이 菩提樹 아래에 있는 金剛寶座 위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禪定)
취한 수인으로, 왼손의 손바닥을 위로 해 배꼽 앞에 놓고, 오른손도 손바닥을 위로 하고
왼손 위에 겹쳐놓되 양 엄지를 서로 대는 형식이다.
(104)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 – 전법륜인[轉法輪印]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
아미타불의 淨土인 西方極樂世界에 往生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行業이 얕고 깊음에 따라
上·中·下 三品으로 구별되며, 三品에 각각 상·중·하 三生이 있어 모두 九品이 있어,
이 9품에 따라 아미타불의 印도 각각 다르게 표현되기 때문에 阿彌陀九品印이라고 한다.
=전법륜인[轉法輪印]
오른손 엄지와 집게손가락을 맞대고 나머지 손가락은 펴며, 양손을 가까이 접근시켜
수레 바퀴를 돌리는 모습으로 석가모니의 說法을 상징한다.
(105) 비로자나불[鐵造 毘盧遮那佛 坐像] -통일신라 말~고려 초
비로자나불은 온 누리에 가득 찬 진리의 빛을 형상화한 부처로 우리나라에
毘盧遮那佛像은 8세기에 등장하여 9세기에 크게 유행했는데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如來의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단정한 얼굴, 안정감 있는 자세. 표면에 이음매가 보이지 않는 뛰어난
鑄造技術 등에서 통일신라 佛像의 전통이 엿보이나, 형식화된 옷 주름 등
세부표현에서는 사실성이 떨어지는 高麗 鐵佛의 특징도 함께 나타나고 있어
통일신라 말~고려 초에 제작된 불상으로 보인다.
(106) 부처[鐵造 佛頭] -고려 10세기
(107) 부처[鐵造 佛頭] -고려 10세기
(108) 부처[石造 佛頭] -통일신라 8~9세기
(109) 부처[鐵造 佛 坐像] -고려 10세기 –경기 抱川 出土
두 손이 모두 없어졌으나 오른쪽 손목의 위치로 보아 降魔觸地印의
손갖춤[手印]을 취한 것으로 추정된다.
偏袒右肩의 着衣法, 무릎 앞의 부채꼴 주름 등에서 慶州 石窟庵 本尊佛의
모습을 따르고 있으나 허리가 길어진 부자연스러운 造形美 등으로 미루어
석굴암 본존불을 계승한 고려 초기 불상임을 알 수 있다. (*袒: 웃통 벗을 단)
둥글고 온화한 얼굴, 항마촉지인의 손 갖춤, 大衣의 깃이 왼편 어깨에서
뒤집힌 점, 대의의 물결식 옷 주름 등은 開城을 중심으로 京畿 北部地域 佛像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110) 부처[木造 佛 坐像] -조선 17~18세기
조선 후기에 널리 제작된 三方佛 중의 한 점으로, 삼방불은 일반적으로 가운데 釋迦佛,
석가불의 왼쪽에 藥師佛, 오른쪽에 阿彌陀佛로 구성된다.
각각 中方, 東方, 西方을 관할하는 삼방불은 朝鮮後期 寺刹에서 가장 중요한 殿閣인 大雄殿에
奉安하였으며 이 불상은 석가불의 왼쪽에 봉안된 東方 瑠璃光淨土의 藥師佛로 추정된다.
佛像의 머리는 신체에 비해 크고 어깨는 움츠렸으며 고개를 앞으로 숙인 모습이며,
이런 불상의 형태와 자세는 높은 佛壇에 봉안된 佛像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禮佛者의
視線을 고려하여 제작한 결과로 추정되며, 조선 후기불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111) 부처[鐵造 佛 坐像]
-고려 11세기 –충남 瑞山 普願寺址 출토 -1918년 이부
쇠로 만든 이 부처는 충남 瑞山市 雲山面 普願寺 터에서 옮겨온 것이다.
두 손이 모두 없어졌으나 오른 손목의 위치로 보아 手印은 釋迦牟尼가
보드가야(Bodhgayā)의 菩提樹 아래에서 道를 깨닫는 순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降魔觸地印으로 추정된다.
몸에 비해 큰 머리와 不自然스러운 옷 주름 등은 高麗 鐵佛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강원도 原州에서 출토된 鐵佛 3구와 얼굴모습, 왼쪽어깨에서 한 번
접혀있는 偏袒右肩, 왼팔이 접히는 곳에 표현된 리본 형태의 옷주름,
항마촉지인 등에서 거의 동일한 수법을 보이고 있어 같은 彫刻家 집단이
주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袒: 웃통 벗을 단)
이 불상은 사실적인 통일신라 불상양식의 전통을 잘 계승한 철불로,
이후 고려시대에 많이 제작된 철불의 模本이 되는 작품이다.
(112) 비로자나불[石造 毘盧遮那佛 坐像]
-통일신라 9세기 -1911년 입수
毘盧遮那佛은 온 누리에 가득 찬 眞理의 빛을 形象化한 부처이다.
우리나라에 毘盧遮那佛像은 8세기에 등장하여 9세기에 크게 유행했는데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寶冠을 쓰지 않은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손갖춤은 한쪽 손으로 반대쪽 손가락을 감싸 쥔 智拳印을 하고 있다.
이 불상은 얼굴이 동그랗고 표정이 현실적이며, 신체는 鈍重하고 옷주름은
계단모양으로 규칙적이다.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光背와 臺座는 統一新羅 後半期 石佛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113) 감산사 미륵보살∙아미타불[甘山寺 石造 彌勒菩薩 立像∙石造 阿彌陀佛 立像]
-국보 81호와 국보 82호-
-통일신라 719년 무렵 –경북 慶州 甘山寺터 출토 -1916년 입수
두 佛像은 慶州의 甘山寺터에서 옮겨 온 것으로 光背 뒷면에는 불상을 만든 사람,
만든 목적 등을 자세하게 새겼다.
銘文에 따르면 執事部侍郞 金志誠이 부모의 은혜와 임금의 恩德에 보답하고자
聖德王 18년(719)에 만들기 시작한 阿彌陀佛과 彌勒菩薩이다.
불상을 만들던 도중 성덕왕 19년(720) 金志誠이 죽어 김지성의 冥福을 비는 내용도
아미타불 광배 뒷면에 함께 새겼다.
미륵보살은 온화한 표정과 허리를 약간 비튼 자세를 보이며, 아미타불은 엄숙한 표정으로
곧게 선 자세를 취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8세기 前半 石造彫刻 수준을 잘 보여주는 빼어난 작품이다.
(114)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慶州 甘山寺 石造彌勒菩薩立像]
-국보 81호-
신라 聖德王 18년(719) 金志誠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 국왕과 왕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慶州 甘山寺를 창건하고, 그 해에 어머니를 위해
慶州 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을, 아버지를 위해 아미타불을 만들었다고 한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은 화려하게 장식된 冠을 쓰고, 얼굴은 볼이 통통하여 원만한
인상이며 목에는 2줄의 화려한 목걸이를 새기고, 목에서 시작된 구슬 장식 하나가
다리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光背는 불꽃무늬를 새긴 배(舟) 모양이며, 하나의 돌로 만든 臺座는 맨 아래
8각 위에는 엎어 놓은 연꽃무늬와 활짝 핀 연꽃무늬를 간략하고 큼직하게 새겼다.
광배 뒷면의 銘文으로 聖德王 18년(719)에 불상을 조각한 시기와 유래를 알 수 있다.
돌로 만들었음에도 풍만한 신체를 사실적으로 능숙하게 표현하고 있어
통일신라시대부터 새롭게 유행하는 국제적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115)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慶州 甘山寺 石造阿彌陀如來立像]
-국보 82호-
신라 성덕왕 18년(719)에 金志誠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 국왕과 왕족의 안녕을
위해 慶州에 甘山寺를 창건하고, 어머니를 위해 미륵보살을, 아버지를 위해
慶州 甘山寺石造阿彌陀如來立像을 만들었다고 한다.
석조아미타여래입상은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인체 비례에
가까운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부처님의 모습을 인간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의도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光背는 배(舟) 모양이며 가장자리에는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으로 몸광배 안에는
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통일신라시대의 이상적 사실주의 양식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일 뿐만
아니라, 광배 뒤의 銘文으로 만든 시기와 사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불상으로
우리나라 불교 彫刻史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116) 약사불[石造 藥師佛 坐像]
-통일신라 9세기 –경북 慶州 南山 三陵谷 출토 -1916년 입수
원래 慶州 南山 三陵谷 정상 가까이에 있는 磨崖大佛 건너편에 있던 것을
옮겨 온 것이다.
藥師佛은 疾病을 고쳐주고 災難에서 구해주며 음식과 옷을 주는 부처로
왼손에는 藥단지를 들고 있다.
통통한 얼굴, 건장한 신체, 얌전하게 흘러내린 계단식 옷주름 등에서
통일신라 절정기인 8세기 佛像의 餘韻이 보인다.
그러나 엄숙한 얼굴표현, 고개를 앞으로 숙인 자세, 화려하고 장식적인 光背와
臺座 등은 9세기 불상의 특징으로 8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117) 철조 불 좌상[鐵造 佛 坐像] -보물 332호-
-고려 10세기 –경기 河南市 下司倉洞 절터 출토 -1911년 입수
쇠로 만든 이 부처는 河南市 下司倉洞의 한 절터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으로
하사창동의 절터에는 지금도 돌로 만든 대좌의 일부가 남아있다.
河南 下司倉洞 鐵造釋迦如來坐像(문화재청 명칭)은 높이 2.88m, 무게 6.2톤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鐵佛이다.
경주 石窟庵 本尊佛과 같은 형식의 옷차림과 手印을 하고 있으나 허리가
급격하게 가늘어진 造形感과 抽象化된 세부표현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불상을
계승한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부처의 양 무릎에는 딱딱하게 굳은 옻칠의 흔적이 남아있어 원래 불상 전체에
두껍게 옻칠한 다음 鍍金했던 것을 알 수 있다.
(118) 북묘 비[北廟 碑] -조선시대 1887년
중국 삼국시대 蜀漢의 장수 關羽를 기리기 위해 조선 高宗 20년(1883)에
세운 北廟에 있던 것으로. 북묘는 서울 明倫洞 흥덕골에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비석은 4년후인 高宗 24년(1887)에 세웠으며, 碑文은 우리나라에서 關羽를
기리게 된 경위, 북묘를 세우게 된 내력 등으로 구성되었다.
글은 高宗이 짓고, 글씨는 桂庭 閔泳煥이 썼다.
*북묘비는 상설전시실 1층 東門(後門) 앞에 있다.
石造物 庭園 野外展示
박물관 野外 石造物 庭園에는 石塔, 石燈, 石碑 등의 다양한 석조 미술품들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팔각 집 모양의 승탑인 廉居和尙塔(국보 104호)을 비롯하여,
고려 태조 왕건이 가장 공을 들여 세운 興法寺 眞空大師塔∙石棺(보물 365호), 開城에서
옮겨온 것으로 고려 석탑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南溪院 七層石塔(국보 100호)과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종으로 알려진 普信閣鐘(보물 2호) 등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 문화재의
白眉로 손꼽히고 있다.
(119) 普信閣
(120) 보신각 종[普信閣 鐘] -보물 2호-
-조선 1468년 -1986년 입수
조선 世祖 14년(1468) 圓覺寺(현재 종로구 탑골공원)에 걸기 위해 만든
높이 3.18m, 입 지름 2.28m, 무게 19.66톤의 큰 종이다.
절이 없어진 후 光海君 11년(1619) 普信閣으로 옮겨 罷漏(오전 4시)에 33번,
人定(오후 10시)에 28번 울려 漢陽 都城의 문을 여닫는 時刻을 알리는데 쓰였다.
하나의 몸체에 양쪽으로 龍鈕가 달려있으며, 몸통 한가운데는 세 겹의
굵은 띠를 둘렀는데 이런 모양의 종은 고려 말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들어서 널리 만들었다.
이 종은 2번의 화재를 겪으면서 원형에 손상을 입고, 음향도 다소 변하였으나
銘文이 남아있어 鑄造 年代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귀중한 조선시대
王室發願 鐘의 자료이다.
(121) 온녕군 석곽[溫寧君 石槨] -조선시대 1453년
경기도 楊州 禁標地域 안의 조선 太宗의 일곱째 王子 溫寧君墓에서 나온 석곽이다.
무덤에서는 고려왕실의 무덤과는 달리 구리수저 한 벌, 粉靑沙器 항아리 2점, 접시 두 개만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朝鮮王室의 검소함을 엿볼 수 있다.
*石槨: 널(棺)을 넣기 위해 따로 짜맞춘 매장시설
(122) 남계원 칠층석탑[南溪院 七層石塔] -국보 100호-
-경기 開城 南溪院 터 –고려시대 11세기
경기 開城 부근의 南溪院 터에 남아 있던 탑으로, 1915년에 基壇部를 제외한
塔身部만 景福宮으로 이전하였으며, 이후 2층으로 구성된 기단이 출토되어
추가 이전해 복원하였다.
탑은 2단의 基壇에 7층의 塔身으로, 세부모습은 신라 석탑의 典型을 따르고
있는 듯하나 塔身이 7층이고, 지붕이 얇고 넓으며 위로 올라갈수록 탑신의
두께가 둔중한 느낌을 주는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 중기 이전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탑은 전체에 흐르는 雄健한 氣風과
精製된 수법은 新羅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고려시대 석탑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1915년 탑을 옮겨 세울 때, 탑신부에서 두루마리 7축의 <紺紙銀泥妙法蓮華經>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고려 忠烈王 9년(1283) 탑 속에 넣은 불교경전으로, 이 때
탑을 보수했음을 알 수 있다.
(123) 갈항사 동서 삼층석탑[葛項寺 東西 三層石塔] -국보 99호-
-경북 金泉 葛項寺 터 –통일신라시대 758년
경북 金泉市 南面 梧鳳洞 葛項寺 터에 東·西로 세워 있던 두 탑으로,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반출될 위기에 처하자 1916년 景福宮으로 옮겼다가 현재 위치로 이건 하였다.
葛項寺는 통일신라 초기의 慶州 感恩寺처럼 하나의 金堂에 두 塔이 있는 雙塔一金堂式
사찰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두 탑 모두 꼭대기의 相輪部만 없어졌을 뿐 전체적으로 온전하게 남아있으며, 탑의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으나 각 부분의 비례가 조화를 이루고, 위∙아래층 基壇에 가운데기둥을
두 개씩 새겨 놓고 있어 당시의 석탑양식이 잘 담겨 있는 탑이다.
東塔의 基壇에 통일신라 景德王 17년(758)에 靈廟寺 言寂法師 3남매가 건립했다는 내용의
銘文이 있어 건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으며, 吏讀文을 사용하고 있어 더욱 특기할 만하다.
(124) 홍제동 오층석탑[弘濟洞 五層石塔] -보물 166호-
-서울 弘濟洞 –고려시대 11세기
서울 弘濟洞 沙峴寺에 있던 탑으로 市街地를 확장하면서 1970년 景福宮으로
옮겼다가 중앙박물관 이전과 함께 현 위치로 이건 하였다.
전체적으로 重厚하면서 경쾌함과 안정성을 겸하고 있으며, 온화하고 부드러운
새김법과 새롭게 유행한 탑신받침의 덛붙임, 벽 테두리장식 등에서
고려전기 석탑의 造形美가 드러난다.
安城 七長寺 慧炤國師碑(보물 488호)의 碑文에 따라 沙峴寺는
고려 定宗 12년(1045)에 창건된 것임을 알 수 있어, 이 탑도 沙峴寺를 창건할 때
건립한 것으로 보고 있다.
(125) 고달사 쌍사자 석등[高達寺 雙獅子 石燈] -보물 282호-
-경기 驪州 高達寺터 –고려시대 10세기
驪州 高達寺址 雙獅子 石燈은 두 마리의 사자가 火舍石(불밝기집)을
받치고 있는 매우 특이한 형태의 石燈으로 높이 2.43m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런 형태의 석등이 등장하지만 이 고달사 쌍사자 석등은
사자가 서있는 자세가 대부분인 쌍사자 석등들과 달리 웅크린 사자가
화사석을 받치고 있어 이채롭다.
이 쌍사자 석등은 彫刻手法 등으로 보아 高達寺가 우리나라 三大禪院의 하나인
高達院으로 명성을 떨치던 고려시대 10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달사 터에 火舍石까지만 남아 쓰러져 있던 것을 1959년 景福宮으로 옮겼으며,
2000년에 경기도 畿甸文化財硏究院이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지붕돌이 출토되어
복원하였다.
(126) 천수사 오층석탑[泉水寺 五層石塔] -강원 原州 泉水寺 터 –고려시대
下層基壇 甲石(덮개 돌) 아래 部材는 없어지고, 각각의 塔身部 몸돌은
한 개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2층 몸돌부터 급격하게 낮아진다.
지붕처마에는 각층마다 3단의 받침이 있으며 네 모서리에는 風磬의 일종인
風鐸을 단 작은 구멍이 남아있다. (*磬: 경쇠 경 *鐸: 방울 탁)
탑 꼭대기 장식부인 相輪部는 없어졌다.
(127) 천수사 삼층석탑[泉水寺 三層石塔] -강원 原州 泉水寺 터 –고려시대
塔身을 받치고 있는 基壇部는 통일신라 석탑에서 보이는 2층 기단형식이다.
탑신부의 몸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1층과 2층 탑신 아래에는
굄돌이 놓여있다.
지붕처마 層段 받침은 4단으로 되어있고, 지붕의 윗면은 경사가 완만하며,
탑의 相輪部에는 지붕모양 장식(露盤)만 남아있다.
(128) 영전사 보제존자 사리탑[令傳寺 普濟尊者 舍利塔] -보물 358호-
-강원 原州 令傳寺 터 –고려시대 1388년
原州 令傳寺址 普濟尊者塔은 普濟尊者 懶翁(1320~1376)의 舍利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
사리탑이다.
보통 僧塔이 八角堂이나 鐘모양인데 비해 이 승탑은 특이하게 佛塔과 같이 四角 형태의
두 탑으로 이루어져 매우 이채롭고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훌륭하고 균형을 이루고 있다.
나옹의 사리를 모신 승탑은 이 탑 이외에도 나옹이 入寂한 驪州 神勒寺와 그가 住持로 있던
楊州 檜巖寺 터에도 남아있다.
고려 禑王 4년(1388)에 세운 탑으로 지금의 자리로 옮길 때 각각의 탑에서 사리를 두는
장치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 한 탑에서는 죽은 사람에 관해 새긴 誌石이 발견되어 이 탑을
세우게 된 과정을 알 수 있게 되었다.
(129) 안흥사 오층석탑[安興寺 五層石塔]
-경기 利川 安興寺 터 –통일신라 말~고려 초 10세기
2층 基壇 위에 5층의 塔身과 相輪部가 있는 일반적인 형태의 탑이다.
탑신의 높이는 2층부터 급격하게 줄어들고, 처마밑 층단받침은 네 단인
5층을 제외하고 모두 다섯 단을 이루고 있으며, 相輪部에는 네모난
지붕모양의 장식인 露盤만 남아있다.
탑의 세부수법이 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을 띠며 균형 잡힌 비례로 보아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건립된 석탑으로 보고 있다.
(130) 활짝 핀 왕원추리꽃
(131) 국립중앙박물관 앞 거울못과 靑瓷亭
=거울못
박물관 건물의 모습이 커다란 못에 비춰지게 되어 거울못이라고 하며, 산과 물의 조화를
강조하여 꾸미는 우리나라 전통의 정원 원리를 반영하여 만들었다.
=靑瓷亭
박물관 전면 거울못 半島地에 있는 靑瓷亭은 2009년에 건립되었으며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상징물로 청자정으로 가는 산책로에 작은 목조다리를 놓아 韻致를 더하였다
(132) 비스듬히 멋지게 자라는 소나무
(133) 뒤풀이장소, 南營洞 <미성회관>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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