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이도[ 全爾 ]
요약
고려 후기의 관인이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복주로 몽진할 때 호종하였다. 1362년 총병관 정세운 등과 함께 홍건적에게 빼앗긴 개경을 공격하여 수복하였다.
출생-사망 ? ~ ?
본관 정선(旌善)
국적 한국
활동분야 정치
본관은 정선(旌善)이다. 1349년 원나라에 가는 강릉대군(江陵大君:뒤의 공민왕)을 따라가 시종하였다가 1351년(공민왕 즉위년) 원나라에서 공민왕과 함께 돌아와 낭장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연저수종 1등공신(燕邸隨從一等功臣) 에 책록되고 노비와 토지를 받았다.
이후 의성창사(주1) 등을 거쳐 1359년(공민왕 8) 예부시랑(주2)으로 경상도진제사(慶尙道賑濟使)(주3)로 부임하였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 감무(監務)와 현령에 지방서리를 등용하여 백성들의 피해가 크므로 과거급제자만을 임용하도록 왕에게 건의하였다.
1361년(공민왕 10)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주4)로 있을 때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복주(福州:지금의 안동)로 몽진하자 호종하던 도중 왕명으로 홍주도(洪州道)(주5)에서 군사를 점검하였다.
이듬해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을 위시한 이방실(李芳實)·안우(安佑)·김득배(金得培)등 원수(元帥) 들과 함께 홍건적에게 빼앗긴 개경을 공격하여 수복하였다. 이 공으로 1363년 첨병보좌 1등공신(僉兵輔佐一等功臣)과 수복경성 2등공신(收復京城二等功臣)(주6)에 녹훈되었다.
참조항목
김득배, 이방실, 정세운, 안우
카테고리
인물 > 정치 > 한국정치 > 고려시대
지역 > 아시아 > 한국 > 한국일반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전이도 [全爾] (두산백과)
(주1)의성창[ 義成倉 ]
고려 충렬왕 때에 설치한 왕실 창고, 또는 재정 기관인 내방고(內房庫)가 개칭된 명칭.
[네이버 지식백과] 의성창 [義成倉]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義成倉使: 의성창의 종5품 관리
(주2)예부시랑[ 禮部侍郎 ]
예부는 육부[六部]의 하나로 나라의 전장제도나 전례·제사·학교·과거·빈객접대 등을 담당한 기관. 장관은 예부상서[禮部尙書]. 예부시랑은 예부상서의 부관으로 예부의 차관.
[네이버 지식백과] 예부시랑 [禮部侍郎]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 용어사전), 2012., 한국콘텐츠진흥원)
(주3)진제[ 賑濟 ]
[같은 말] 진휼2(賑恤)(흉년을 당하여 가난한 백성을 도와줌).
(주4)전농시[ 典農寺 ]
제수용으로 쓰는 곡물[粢盛2)]을 공급하는 일을 맡았다. 목종 때 사농경(司農卿)을 두었다가 뒤에 폐지했다.
충선왕이 전농사(典農司)를 설치하고 그 관청의 관리들로서 지방에 사자(使者)로 가는 사람들을 모두 무농염철사(務農鹽鐵使)라고 불렀으며 얼마 후 저적창(儲積倉)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공민왕 5년에 다시 사농시(司農寺)를 설치하면서 판사의 품계는 정3품, 경은 종3품, 소경은 종4품, 승은 종5품, 주부는 종6품, 직장(直長)은 종7품으로 정했다. 11년에 전농시로 이름을 바꾸면서 경은 정(正)으로, 소경은 부정(副正)으로 고치고, 직장은 없앴다. 18년에 다시 사농시로 부르면서 정·부정을 경·소경으로 바꾸고 직장을 다시 두었다. 19년에는 적전관을 두면서 영1명을 사농시에 소속시켰다. 21년에 다시 전농시라 부르게 하면서 다시 정·부정으로 되돌렸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농시1) [典農寺] (국역 고려사: 지, 2011. 10. 20., 경인문화사)
2) 자성 : 제사에 쓰는 곡물로 보통 서직(黍稷) 즉 기장과 쌀을 의미한다. 고려시대는 왕이 친히 적전(籍田)을 갈아 거기에서 나온 자성을 제물로 사용하였다. 성종 2년에 왕이 몸소 적전(籍田)을 갈아 신농(神農)에게 제사하고 후직(后稷)을 배향하는 적전의 예가 처음 시작되었다고 한다(『고려사』 권3, 세가, 성종 2년 1월 을해). 조선시대의 경우 종묘나 사직과 같은 국가의 큰 제사에 사용되는 자성은 임금이 적전에서 직접 밭을 갈아 심은 곡식을 이용하였다. 『한서(漢書)』 권4, 문제기(文帝紀)에는 “給宗廟粢盛”이라 하여 자성이란 말이 있다.
※ 判典農寺事
고려시대 “전농시” 관청의 판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주5)홍주도(洪州道)
충청남도 홍성의 옛 이름이다. 과거 홍주는 평택에서 서천까지 22개 군·현을 관할했던 곳이며,고려 시대에는 충청 서부지역의 중심지였다.
지금의 충청남도에 해당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주6)경성수복공신[ 京城收復功臣 ]
이칭별칭 수복경성공신(收復京城功臣)
유형 개념용어
시대 고려/고려후기
정의1363년(공민왕 12) 홍건적(紅巾賊) 제2차 침입을 물리친 공으로 책봉된 공신.
내용
1361년(공민왕 10) 10월 홍건적이 다시 고려를 침략해 경성(京城)인 개경을 함락했다. 그 직전에 탈출한 공민왕은 복주(福州: 경상북도 안동시)로 파천하여 임시 도읍으로 삼았다.
전열을 정비한 공민왕은 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總兵官)에 임명해 반격에 나서게 했다. 1362년 정월에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황상(黃裳), 한방신(韓方信), 이여경(이여경),김득배(金得培), 안우경(安遇慶), 이귀수(李龜壽), 최영(崔瑩) 등이 병력 20만을 이끌고 개경을 포위 공격하여 홍건적 10여 만명의 목을 베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개경이 수복되었으며 살아남은 소수의 홍건적은 압록강을 넘어 도망쳤다.
이러한 공로를 포상하기 위해 1363년(공민왕 12) 윤3월에 책봉된 공신이 경성수복공신(京城收復功臣)이다. 경성수복공신은 수복경성공신(收復京城功臣)으로도 불리며 1등공신과 2등공신으로 구별되었다. 안우·이방실·김득배는 경성 수복에 큰 공로를 세웠지만 정세운을 살해한 사건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이 공신에 포함되지 못했다.
1등공신은 찬성사상의(贊成事商議) 황상, 정당문학(政堂文學) 한방신, 지도첨의(知都僉議)안우경,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이순(李珣), 밀직사(密直使) 최영,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귀수, 밀직부사(密直副使) 우제(禹磾)·유연(柳淵)·한휘(韓暉), 전(前) 밀직부사 허유(許猷), 개성윤(開城尹) 양백익(梁伯益), 첨의평리(僉議評理) 이인임(李仁任), 전리판서(典理判書) 오인택(吳仁澤)·김귀(金貴), 판도판서(版圖判書) 김한진(金漢眞), 전 판도판서 김원명(金元命), 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 변안열(邊安烈),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이성계(李成桂), 좌대언(左代言) 유계조(柳繼祖),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 박춘(朴椿), 전 응양군상호군 홍사우(洪師禹), 판종부시사 지용수(池龍壽), 대호군(大護軍) 임견미(林堅味),전객령(典客令) 전보(全甫) 환자(宦者)인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김현(金玄)과 온양부원군(溫陽府院君) 방절(方節) 등이었다.
2등공신은 연안군(延安君) 송경(宋卿), 전 밀직부사 김광조(金光祚), 군부판서(軍簿判書) 윤척(尹陟),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 우길생(禹吉生),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장백안(張伯顔), 위위윤(衛尉尹) 염흥방(廉興邦), 전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전이도(全爾), 소부윤(少府尹) 이광대(李廣大), 내부령(內府令) 이원계(李元桂), 호군(護軍) 조인벽(趙仁璧) 등이었다.
의의와 평가
경성수복공신은 경성인 개경을 수복해 책봉된 공신들이었으므로 이후 고려의 군권은 이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특히 안우경, 최영, 우제, 한휘, 양백익, 오인택, 김한진, 유계조, 전보 등은 흥왕공신(興王功臣)이기도 했다.
이들 공신들의 권력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커져 가자 공민왕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신돈(辛旽)을 등용해 다수의 공신들을 숙청하였다.
한편 경성수복공신에 이성계, 이원계(이성계의 이복형), 조인벽(趙暉의 손자 趙暾의 아들:이성계의 매형) 등 동북면(東北面) 세력이 이름을 올리면서 이들이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시대사』(김상기, 동국문화사, 1961)
「고려말 홍건적의 침입과 안동임시수도의 대응」(이경희,『부산사학』24, 1993)
「신돈의 집권과 그 정치적 성격」(민현구,『역사학보』38·40, 1968)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