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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사
호국참회기도도량 도선사의 주산(主山)인 삼각산은 고대 백제 온조왕(溫祚王)의 수도로 건립되었고, 조선왕조 5백년의 역사가 전개되었던 유서 깊은 곳이다.
도선사는 862년(경문왕 2)에 신라말 유명한 도승이었던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대방중창기(大方重創記)에 의하면 불법과 천문, 지리의 심오한 이치를 통달한 도선국사가 명산 승지를 두루 답사하다가 삼각산에 이르러 산세가 절묘하고 풍경이 청수한 이곳에서 천년 후 말세 불법이 재흥하리라 예견하고 사찰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또 사찰의 전설처럼 신통력으로 사찰 옆에 우뚝 서있는 큰 바위를 반으로 잘라 그 한쪽면에다 20여척에 달하는 관세음보살상을 주장자로 새겼다고 하는데, 현재 입증할 자료는 없다.
이후 조선전기까지의 중건ㆍ중수 내용은 전하는 기록과 문헌이 없어 전해지지 않는다.
조선후기에는 북한산이 산성수호사찰이 되면서 산성을 쌓을 때 승병들이 방번(防番)을 섰고, 1864년(철종 14)에 김좌근(金佐根)의 시주로 가람을 정비하고,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이후 1880년(고종 17)에 칠성각의 칠성탱과 신중탱을 새로 조성하여 절에 봉안하였다.
1887년(고종 24)에는 동호 임준(東湖 任準)스님이 사찰에 주석하며, 마애관음보살상 앞에 석가모니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오층석탑을 세웠다.
1903년에는 혜명 관수(慧明 寬守)스님이 고종의 명을 받아 산신각을 신축하고, 법당의 상단탱, 팔상탱, 신중탱, 극락구품탱, 현왕탱, 감로탱, 지장탱, 산신탱 등을 봉안하였으며, 고대로 전해지는 불상을 개금하였다.
이후 조선 광무(光武) 7년인 1904년에 황제로부터 정식으로 국가 기원도량으로 지정받아 현재의 가람의 기틀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1912년 6월에 홍수피해를 입어 서별당 및 승료가 떠내려가고 도선사 주지를 비롯한 7인이 목숨을 잃는 일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사찰에서는 또 다시 중창 불사가 일어 났는데, 1926년에 큰방의 후불탱화를 조성하고, 국가기원도량으로서 그 맥을 이어가게 되었다.
이후 도선사가 더욱 빛을 발하게 된 것은 한국 불교정화유신운동의 총수인 청담대종사로 인해서이다.
한국불교로 대표되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정, 총무원장, 중앙종회의장 등을 두루 역임하신 청담대종사는 한국불교의 역사적 사명인 민족적인 문화 과업과 불교 중흥, 그리고 조국통일 성취를 위하여 참회를 통한 호국을 제창하시는 대원력을 세우셨다.
그리하여 큰스님의 대원력으로 故 박정희대통령, 그리고 영부인 故 육영수 대덕화보살 등을 비롯한 뜻있는 여러 신남신녀들의 지극한 정성인 호국불교의 의지가 한데 모아져 대가람인 「호국참회원」을 1968년 11월 20일에 건립하여 호국참회 불교사상을 널리 펼치게 되었다.
더구나 故 박정희 대통령과 영부인 故 육영수 대덕화 보살님은 1960년초 故 박대통령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계실 때부터 청담대종사의 호국염원에 크게 감화를 받은 뒤, 청담대종사로부터 대덕화(大德華)란 불명까지 받아 도선사에서 3ㆍ7일 기도를 하는 등 국가 혼란기에 국가의 비호를 박게 되었다.
이후 그런 지극한 불심 속에 '故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의 지원으로 우이동 버스 종점에서 도선사 안양암 '마음의 광장'에 이르는 4km의 아름답고 장엄한 산악 관광도로인 청담로와 약 500m 가량의 경내 도로를 말끔히 단장하는 대작불사가 1975년 봄에 성취하게 되었다.
도선사 마음의 광장 석가미소 석불좌상
도선사 천왕문
사천왕상을 안치한 천왕문은 사찰을 지키고 악귀를 내쫓아 불도를 닦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찰이 신성한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해 세워졌다. 사천왕문에는 인간의 선악을 관찰하고 수행자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며 불법을 수호하는 지국천왕, 광목천왕, 증장천왕, 다문천왕 등의 사천왕상이 있는데 각각 불국정토의 동ㆍ서ㆍ남ㆍ북을 지키는 신들이다.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은 손에는 보검을 쥐고 있다.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은 붉은 관을 쓰고 있으며 삼지창과 보탑을 들고 있다.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은 오른손에는 용을 움켜잡고 왼손에는 용의 입에서 빼낸 여의주를 쥐고 있다.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은 왼손으로 비파를 잡고 오른손으로 줄을 튕기는 모습이다.
도선사 사천왕상
도선사 부도전
부도
부도(浮圖), 부두(浮頭), 불도(佛圖), 포도(蒲圖)라고도 한다. 원래 불타(佛陀) 또는 솔도파(率堵婆 Stupa)라는 음이 잘못 전해진 것으로 처음에는 불상·불교사원·불탑을 의미했지만 뒤에는 고승들의 사리를 담는 석조 소탑을 지칭하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불교가 전래된 후한시대부터 이러한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 당나라로부터 선종이 들어온 9세기 이후 각 구산선문(九山禪門)에서 사자상승(師資相承)으로 법맥이 이어지면서 불상 숭배보다는 조사(祖師)들의 사리와 유골을 담은 묘탑이 중요한 예배대상이 되어 많은 부도가 세워졌다.
도선사 지장보살상
지옥에서 구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하는 보살이다.
석가의 위촉을 받아, 그가 죽은 뒤 미래불인 미륵불(彌勒佛)이 출현하기까지 일체의 중생을 구제하도록 의뢰 받은 보살이다. 관세음 보살과 함께 가장 많이 신앙되는 보살이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지옥에 몸소 들어가 죄지은 중생들을 교화, 구제하는 지옥세계의 부처님으로 신앙된다. 그는 부처가 없는 시대 즉, 석가모니불은 이미 입멸하고 미래불인 미륵불은 아직 출현하지 않은 시대에 천상·인간·아수라·아귀·축생·지옥의 중생들을 교화하는 보살이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불에게 “지옥이 텅 비지 않으면 성불(成佛)을 서두르지 않겠나이다. 그리하여 일체의 중생이 모두 제도되면 깨달음을 이루리라”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모신 전각을 지장전·명부전 혹은 시왕전이라 한다.
지장보살의 형상은 본래는 보살형으로 보관과 영락으로 장엄한 모습이었지만, 지장십륜경의 기록에 의해 차츰 삭발을 한 사문(沙門)의 모습으로 모셔지게 되었다. 사문형의 지장보살은 천의 대신 가사를 입고 있으며, 지옥문을 깨뜨린다는 석장인 육환장과 어둠을 밝히는 보석구슬인 장상명주를 들고 있다. 육환장의 6고리는 육바라밀을 상징하며, 윗부분에는 화불을 모시기도 한다.
선묵 혜자 스님
선묵 혜자 스님은 14세에 출가했다. 모두가 힘들게 살았던 보릿고개 시절 선묵 혜자 스님 역시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에 갈 형편이 되지 못했던 스님은 한문공부를 하기 위해 도선사로 들어갔다. “친척 중 한 분이 도선사 총무 스님으로 계셨어요. 그분이 집에 들르실 때마다 어린 절 보고 ‘이 놈은 앞으로 중이 될 사람’이라며 어머니에게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절로 보내라고 얘기하곤 하셨어요.”
도선사에 출가해 청담 스님을 스승으로 모셨고, 출가한 지 35년 만에 도선사 주지가 된 선묵 혜자 스님. 이래저래 도선사와는 인연이 깊다.
어려서 출가한 탓인지 선묵 혜자 스님은 절에 있는 동안 속세에 대한 미련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혈기왕성한 20대에는 사회에 대한 호기심도 없지 않았지만 부처님의 가피로 무난히 넘어갈 수 있었다고 했다. 출가한 지 40년이 된 선묵 혜자 스님은 뒤돌아보면 청담 스님이 열반했을 때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고 전했다. 큰 스승이자 정신적인 의지처였던 청담 스님은 속세로 말하면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 분이 돌아가시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공허함이 느껴지더라고.
청담 스님 열반 후 49제까지 정성스럽게 염불했지만 좀처럼 마음이 잡히지 않았을 정도로 선묵 혜자 스님의 허전함은 깊어갔다. 이후 도선사를 떠나 여기저기서 선방 공부를 하다가 2001년 도선사 주지가 되면서 다시 도선사로 돌아왔다.
도선사 주지로 부임하자마자 선묵 혜자 스님은 크게 세 가지 원력을 세웠다. 그간 비공개였던 예산을 공개 예산으로 바꾸고, 청담 스님의 많은 제자들을 한데 모으는 문중 화합 사업을 실천했다. 또 유명한 기도 도량인 도선사를 포교와 문화 도량으로까지 활동의 폭을 넓혀나갔다.
청담 스님의 뜻을 기리기 위해 청담 기념관과 청담사상 연구소를 개원했고 그외 반야굴 조성, 참회원 정비, 마당 복개, 윤장대 봉안 등 다양한 불사를 매듭지었다. 지난해에는 캄보디아 남방 불교 체험에 나서 앙코르와트 유적 복원에 참여했다. 한국과 캄보디아 간의 불교문화 교류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 받은 선묵 혜자 스님은 2004년 성직자로서는 최초로 유네스코가 수여하는 은관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선묵 혜자 스님은 올해 9월 도선사 주지로 재임됐다.
주지로서의 바쁜 일정과 다양한 불사에도 불구하고 선묵 혜자 스님은 매일 아침 하루도 빠지지 않고 108배를 올린다. 지방에 내려가더라도 도선사 석불을 향해 108배를 올리는 스님의 모습은 많은 신도들에게 귀감이 된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오직 부처님 법만 알고 묵묵히 정진한 선묵 혜자 스님은 중앙승가대 교수 미산 스님, 봉화 청량사 주지 지연 스님과 함께 불교 신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선묵 혜자 스님에게는 요란한 수식이 필요 없다. ‘천생 스님’으로 불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다.
도선사 범종각
사찰에서 범종이 있는 곳을 말하며 전각이 2층의 누각일 경우에 범종루(梵鍾樓)라고 한다. 범종각은 일반적으로 불이문과 동일선상에 위치하는데 그 까닭을 불이문과 관계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범종각에서는 범천(梵天)의 종소리가 흘러나온다. 힌두교의 창조신인 범천은 하늘에서 불이문으로 들어오는 구도자를 환영하고 그가 불이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하늘의 음악을 연주한다. 이 범천의 소리는 더 나아가 아직 불이문에 이르지 못한 구도자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고 일주문 바깥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의 번뇌를 씻어주는 부처의 소리인 것이다. 이 범종각에는 때로 범종만이 홀로 있기도 하지만, 규모 있는 절에서는 범종 외에도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등의 불전사물(佛殿四物)이 함께 배치하기도 한다.
불교 사찰에서 소리와 관련 있는 것으로 사물(四物)이 있는데 범종(梵鐘),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을 말한다. 이 4가지를 사중사물(寺中四物) 혹은 불전사물(佛殿四物)이라 하며, 사찰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도구로 자리잡고 있다. 범종은 전상과 지옥중생을, 목어는 수중에 사는 중생을,운판은 공중을 날아다니는 중생을, 법고는 짐승을 제도하기 위해 울린다고 한다.
도선사 목어
목어는 나무를 깎아 잉어 모양을 만들고 속이 비게 파내어 불사에 쓰는 기구. 본래 중국의 선원에서 아침 죽 때와 점심 밥때에 쓰던것...모양도 길고 곧게..고기같이 생긴것..인데...뒤에와서 현재 쓰는것과 같이 둥근것으로 되다.. 우리나라에서는 목탁이라하여 불전에서 염불,독경,예배할때에도 쓰고..공양할때에나 대중을 모을때에도 쓴다.. 고기모양으로 만든데에는 예전부터 일정한 말은 없다.. 그러나......이야기는 있는데..... 옛날 어떤 스님이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다가 죽은뒤엔 고기가 되어 등에는 나무가 났었다고 한다... 어느날 스승이 배를타고 바다를 건너갈때에..한마리의 고기가 바다에서 몸을 나타내어 이전의 죄를 참회하고..등에난 나무를 없애주기를 애걸하므로 스승이 수륙제를 베풀어 고기몸을 벗게하고 그 나무로써 고기모양을 만들어 달아놓고 스님네들을 경책 하였다고 한다.. 또...일설에는 고기는 밤낮으로 눈을 감지 않으므로 수행자로 하여금 잠을 자지않고 도를 닦으라는 뜻으로 고기모양을 만들었다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선..둥근것은 목탁...긴것은 목어..라한다... 목어(木魚) 나무를 잉어모양으로 만들어 속이 비게 파낸 것으로 아침 저녁으로 예불할 때와 경전을 읽을 때 두드리며 "방"이라고도 한다. 물 속에서 살고 있는 모든 고기들을 위하여 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한다. 목어는 나무를 깎아 잉어 모양을 만들고 속이 비게 파내어 안쪽의 양벽을 나무 막대기로 두드려 소리를 내는 법구다. 물 속의 중생을 제도하고 게으른 수행자를 경책하는 뜻이 담긴 목어는 조석예불.염불.독경 때 쓰는 사물의 하나로서, 때를 알리기 위해서도 사용된다. 본래 중국의 선원(禪院)에서 아침 죽 때와 낮의 밥 때에 쓰던 것이다. 어고(魚鼓). 목어고(목어고). 어판(어판 ) 또 나 라고도 부른다. 사찰에서 물고기 모양의 목어를 두드리는 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권하 목어조(木魚條)에 보면 물고기는 밤에도 눈을 뜨고 있으므로 수행자로 하여금 잠을 자지 않는 물고기처럼 항상 깨어 있어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뜻에서라고 밝히고 있다. 또 다른 의미는 물 속에 사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다
청담 대종사
속성은 이씨(李氏). 속명은 순호(淳浩). 서당에 다니다가 18세에 진주제일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22세에 진주고등농림학교에 입학했다. 3·1운동 때는 만세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여름방학 때 호국사(護國寺)에 놀러갔다가 승려 박포명을 만나 마침내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해인사·백양사 등에서 출가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졸업 후 25세에 일본에 유학, 효고 현[兵庫縣] 송운사(松雲寺)에 들어가 아키모도 준가[秋元淳推] 밑에서 행자수업을 하며 불교를 공부했다. 다음해 귀국해 고성 옥천사(玉泉寺)에서 남규영을 은사로 수계하고 청담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서울에서 개운사(開運寺) 대원불교전문강원(大圓佛敎專門講院)에 들어가 박한영에게 사사하며 대교과(大敎科)를 마쳤다. 강원을 마친 뒤 29세에 승단정화(僧團淨化)를 위해 50여 명의 승려를 규합, 전국학인대회(全國學人大會)를 열려고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그뒤 33세에 충청도 정혜사(定慧寺) 선원에서 안거 이후 20여 년 간 전국 각지의 선원을 돌며 수행에 열중했으며, 만공의 인가(印可)를 받았다. 8·15해방 후 1954년 이승만의 유시(諭示)를 계기로 서울 선학원(禪學院)에서 전국비구승대회를 열고 '불법에 대처승(帶處僧) 없다'라는 기치 아래 불교 정화에 주력했다. 1955년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에 취임했고 이후 해인사 주지, 도선사 주지 등을 역임했으며, 1966년 조계종 통합종단 2대 종정에 취임했다. 1968년 도선사에 호국참회원(護國懺悔院)을 건립했다. 1969년 종권 다툼에 휩싸인 종단을 염려하여 종단탈퇴를 선언하기도 했으나 1970년 주변의 간곡한 권유로 다시 총무원장을 맡기도 했다. 1971년 한국종교협의회 회장을 맡아 종교간 대화와 화해를 위해 애쓰다가 1971년 11월 입적했다.
도선사 청담스님 사리탑
사리탑
부처님이 사셨던 나라, 인도에서는 옛부터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는 관습과 더불어 타고 남은 유골을 수습하여 숭배하는 유골숭배의 풍습이 있었습니다만, 석가모니부처님께서 45년간의 중생구제와 진리전파를 위한 일생을 마치고 쿠시나라에서 입멸(入滅)에 드시자 부처님의 장례도 재가신자들에 의해 인도의 전통예식대로 화장으로 치뤄졌습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부처님의 제자인 출가수행자들은 부처님의 장례같은 일에는 관여하지 말고 오로지 진리탐구에만 힘쓰라고 유언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쿠시나라에 살던 말라족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부처님의 장례를 치르고나자 이번에는 부처님의 유골을 처리하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뒤늦게 부처님의 입멸소식을 전해들은 여러 나라의 왕들이 각기 생전의 부처님과의 인연을 빌미로 부처님의 유골을 요구하며 심지어는 군대를 동원하는 사태까지 벌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때마침 도냐라는 한 바라문이 부처님의 생전의 덕을 일깨우며 중재에 나서서 유골을 여덟 등분하여 여덟 나라에서 각기 사리탑을 세워 공양하도록 하였습니다. 또, 유골 분배가 끝난 후 현장에 도착한 모리야족은 할 수 없이 화장을 하고 남은 재를 가져갔고 도냐에게는 유골을 분배할 때 썼던 병이 주어졌는데, 그들도 각기 그것들을 탑을 세워 봉안했습니다. 그것을 근본팔탑(根本八塔) 혹은 근본십탑 (根本十塔)이라고 합니다만, 그후 아쇼카왕 때에는 불교를 널리 포교하기 위해 여덟개 탑 속의 유골을 꺼내 인도 전역에 팔만사천개의 사리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불자들은 대대로 사리탑을 석가모니부처님 대신으로 여기며 정성껏 공양해왔는데, 사리탑의 사리란 인도의 옛말 사리라에서 온 말로, 유골을 의미하던 말입니다.
도선사 12지신상
12지신상 앞은 도선사를 참배하는 불자들이 잠시 쉬어가는 휴게소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항상 북적거린다. 하지만 불자들이 이곳을 단순히 휴식을 취하는 것으로만 여기지는 않는다. 바로 이곳에는 12지신상이 모셔져 있는 신성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특히 각 12지신상 부조 옆에는 띠를 설명하는 안내문까지 적혀 있어 불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예를 들어 쥐띠의 경우 ‘나는 자칭 욕심꾸러기, 나는 인연을 이어주는 완전한 중매쟁이라네. 고지의 정복을 목표로 삼으면서 마음먹은 일은 백발백중으로 완성시킨다. 삶이란 나에게 하나의 즐거운 여행이다. 각각의 목표는 또다시 새로운 탐색으로 이어지리. 나는 진보ㆍ탐험ㆍ통찰이다. 나는 활동의 대명사, 나는 꾀돌이다. 나는 광명의 몸을 채워주는 만월보살의 화현이라네’ 등 12띠별로 각각 글귀가 새겨져 있다.
옛 사람들은 삼라만상에는 어떤 기운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늘에는 하늘의 기운, 땅에는 땅의 기운이 있는데, 하늘에는 10가지 기운(십간 十干)이 있고, 땅에는 12가지 기운(십이지 十二支)이 있다고 믿었다. 이곳에 모셔진 열두 띠는 바로 땅의 기운과 관련되어 있는데 이 십이지는 달의 움직임과 계절의 변화를 보고 인식한 기수법이라 한다.
띠는 모두 12개로, 쥐띠(子), 소띠(丑), 호랑이띠(寅), 토끼띠(卯), 용띠(辰), 뱀띠(巳), 말띠(午), 양띠(未), 원숭이띠(申), 닭띠(酉), 개띠(戌), 돼지띠(亥)가 있다.
이러한 십이지신상은 수호신으로 호석뿐만 아니라 현실 내부에 벽화로 그린 경우가 있으며, 불교에 흡수되기도 했는데 원원사지(遠願寺址)의 3층석탑이나 황복사지(皇福寺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난 2002년 청담대종사 탄신 100주년을 맞아 12지신상을 봉안한 선묵 혜자 주지 스님은 “띠에 의한 인식은 한국뿐만 아니라 인도와 중국 일본 그리고 몽고와 티벳 등지에 걸쳐서 두루 민중 속에 뿌리 내리고 있다. 우리 불자들은 12지에 대한 의미를 열두 동물도 동업중생으로 보고 친근감을 가져야 하며 깨달음을 이루어 가는 방편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며 “이 십이지신상을 참배하고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가다듬고 인생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해야겠다는 적극적인 서원을 세우시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도선사 참회원
참회(懺悔)를 주제로 한 수행과 기도가 최근 들어 불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과거에 지은 죄를 뉘우치고 불보살님 앞에 사과하고 새로운 업을 서원하는 수행의 의미가 강조되는 참회. 참회기도하면 삼각산 도선사를 빼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한국 근세불교사의 주역인 청담(靑潭,1902―1971) 대종사가 참회수행을 중점적으로 한 종합포교를 지향하는 한편 호국참회원(護國懺悔院)까지 건립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조 고종 8년 고종황제로부터 국가기원도량으로 지정받은 도선사는 1968년 11월 지하 1층, 지상 3층 총면적 3,300㎡규모의 호국참회원을 건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국불교의 중흥과 조국평화통일의 염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참회의 기도를 제창하신 청담대종사의 원력으로 故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을 비롯한 많은 신도님들의 지극한 원력으로 세워진 것이다. 이렇게 청담 대종사께서 호국참회원 건물까지 직접 지은 것은, 악업을 참회하여 불행의 씨앗이 되지 못하게 하고, 선업을 닦아 복 받고 행복을 누리며 정법을 깨닫고 성불하자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사상적 배경으로 하여 말법시대 중생의 십악업을 참회하여 혁범성성(革凡成聖)하는 그 중추적 역할을 하는 참회결사의 발원지가 되기를 발원하는 마음으로 추진한 것이 바로 호국참회원 건립취지다.
호국참회원에서는 신도포교를 위한 도선법보, 여성불교가 발행되고 실달학원 도선어린이회 학생회 청년회 신도회 도선불교자원봉사회 등 여러 신행단체가 개설되었다. 그리고 각종 법회를 통하여 청정한 신심을 고양시키고 있으며 대강당내에는 심우도가 조성되어 있고 정면에는 만불이, 우측에 영구영가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특히 참회원에는 이곳을 찾는 불자들의 청담대종사의 참회사상을 대종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주지 스님은 “청담 대종사께서 특히 사시불공 이외는 불공을 못하게 하고, 신도들의 발원은 스스로 하도록 하는 신도교육을 시작했다. 참회기도를 할 때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불보살의 명호를 염송하면서 하는 염불참회를 하도록 하였는데, 불보살 명호를 외우며 참회하면 불보살의 서원력에 의해 업장(業障)이 모두 소멸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며 청담 대종사의 참회사상을 회고했다.
도선사는 호국참회원을 건립하고 불교의 평화염원과 실천불교, 생활불교 운동을 전개하며 현재와 같은 대찰로 발전한 것이다.
도선사 영지
도선사 쌍사자 석등
불교에서 등불을 밝히는 것은 공양 중에서도 으뜸이므로 일찍부터 등불을 안치하는 공양구의 하나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형태는 하대석·중대석(간주석이라고도 함)·상대석·화사석(火舍石)·옥개석 등 5부분으로 구성되며, 옥개 위에는 보주(寶珠)를 얹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등불을 안치하는 화사석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약간씩 형태가 다르지만 사각형·육각형·팔각형이 대부분이다. 경전에는 동제·철제·와제·목제 등 다양한 종류의 석등이 있었다고 하나 석재를 사용해 만든 것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익산 미륵사지에서 백제시대의 석등 파편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석등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도선사 청담스님 기념관
도선사 포대화상
이름 계차(契此). 호 정응대사(定應大師). 포대화상(布袋和尙)이라고도 하며, 당시의 사람들은 장정자(長汀子) 또는 포대사(布袋師)라 불렀다. 명주 봉화현(明州奉化縣:浙江省寧波) 출생. 체구가 비대하고 배가 불룩하게 나왔으며, 항상 커다란 자루를 둘러메고 지팡이를 짚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시주를 구하거나 시대나 인간사의 길흉 또는 일기를 점쳤다 한다.
복덕원만(福德圓滿)한 상을 갖추고 있어 회화·조각 또는 시문의 좋은 제재가 되었다. 게(偈)를 잘하였으며, 봉화현 악림사(岳林寺)에서 죽었다 한다. 그는 미륵보살의 화신이라는 존경을 받았다.
도선사 삼층 석탑
우리 나라에 석탑이 처음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대략 삼국시대 후기인 A.D 6세기 중엽으로 추정되고 있다. 탑은 예전에는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서 세워졌다고 하며, 우리 나라에 불교가 들어와서는 부처님의 진신사리 대신 불경이나 불상 등의 법신사리를 봉안하는 탑도 건립되었다.
도선사 요사채
도선사 대웅전
말세 불법의 중흥과 호국의 서원으로 신라 말 경문왕 2년(862) 도선 국사가 개창했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사세를 굳혀오던 중,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실되었다가 철종 14년(1863) 중창되었다. 그리고 광무 7년(1903) 황제의 어명으로 혜명 화상이 1년 여의 불사 끝에 대웅전을 중건한 뒤, 국가원찰로 지정받고 당대 12세의 신동 강창희로 하여금 대웅전 현판을 쓰게 하였다.
그 후 동호 대화상과 청담 대종사의 중수를 거쳐 이어오다, 1990년 현성 대화상의 발원으로 외5포 내9포의 청기와로 장려한 오늘의 대웅전을 신축하였다.
법당 내부는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등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고, 후불은 목각탱화로 장엄하였다.
도선사 대웅전내 아미타불
도선사 삼성각
산신,칠성,독성과 함께 봉안하고 있는 사찰 당우 중 하나. 삼성은 각각 재물과 수명과 복을 관장하는 존재로서, 전통신앙인 三神信仰과의 습합현상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이 삼성각 안에 고려말의 三大聖僧인 指空. 逃翁.無學의 三聖과 칠성. 독성등을 봉안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칠성은 북두 칠성을 말하는데 별나라의 主君으로 인간의 복과 수명을 담당하고 있다. 那畔尊者라고도 불리는 독성은 十二因緣의 이치를 홀로 깨달아서 성인의 위치에 올라 말세 중생에게 복을 내린다고 한다. 또 사찰에 따라서는 독성과 산신과 용왕을 봉안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모두 불교 밖에서 유입된 신들로 下根機 중생을 위한 방편으로 채택되었기 때문에 그 건물의 이름을 殿이라 하지 않고 閣으로 일컬은 것이다. 불전의 뒤쪽에 위치하면서 우리 민족 고유 의 토속신들을 불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나반존자는 三明과 二利의 능력을 갖추고 있으나 중생들의 복을 키우는 福田이 되어 미륵불이 출현하는 龍華世界가 올 때까지 이 세상에 머물러 계신다. 우리 나라의 나한신앙은 고려시대에 구복과 외침극복을 기원하는 羅漢齊를 많이 함에 따라 이것이 점차 나한신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국토의 7할 이상이 산인 우리 나라 산신을 護法神衆의 하나로 삼아 불교를 보호하고 역할을 부여하였다. 조선중기 이후 무병장수를 위해 산신각을 자주 찾았고, 산신각 내에는 호랑이와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한 산신상을 봉안하거나 혹은 탱화로 도상화한 그림만을 모시기도 한다. 칠성 각은 壽命長壽神으로 일컬어지는 七星을 봉안한 전각으로 北斗閣이라고도 한다. 칠성각은 우리 나라 사찰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특유의 전각으로 초기 불교에는 찾아볼 수 없고, 조선시대 중기에 차츰 나타나기 시작했다. 칠성각 내에는 삼존불. 칠여래 도교의 칠성신 등이 함께 봉안된다.
도선사 석불전 석불
근래 도선사가 서울에서 제일가는 명찰로 명성이 높아진 까닭은 청담 대종사라는 훌륭한 명승이 중흥조로서 크게 불사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석조마애불이 영험하여 기도처로 널리 알려진 까닭도 크게 작용했다.
도선사를 참배하는 불자들이 빠뜨리지 않고 가장 먼저 석불전을 찾는 것에서도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대웅전 왼쪽 뒷편에 위치하고 있는 이 마애석불은 관세음상을 새겨놓은 것으로, 높이 20m의 암벽에 몸의 높이 8.43m, 머리높이 2.15m, 어깨 폭 2.88m로 몸통은 원통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상 형태로 보아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마애불 계통을 이어받은 조선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방치되었던 이 석불은 1863년(철종 14)에 나라의 기도 도량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1977년에는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고, 현재는 석불보호를 위해 보호각을 씌워져 있다
석불 앞에는 석탑과 석등이 있고, 석불 앞의 공간은 불공드리기 편하도록 대리석을 깔아 불자들의 야외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1903년에 혜명 스님이 고종의 명을 받아 대웅전을 보수하였는데, 그 이전의 보수나 개축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주지 스님이 석불전에서 33관세음기도를 시작하여 이곳을 찾아 기도하는 불자들이 더욱 늘어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석불상이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도선사의 석불(석조마애불입상)처럼 거대한 자연암벽에 조성된 부처님은 특정한 개인이 아닌 뭇 중생들의 소원과 희망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수많은 참배객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예불 드리는 광경을 보면, 현재 우리 나라의 부처님 가운데 참배객이 가장 많은 부처님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도선사 석불전내 칠층석탑
도선사 반야굴
반야굴의 중앙에는 십일면 관세음보살상과 오른쪽으로는 잔 을든 문수보살이 왼쪽에는 경책을든 보현보살이 각각 모셔져있다.
도선사 윤장대
책장의 일종으로 불교에서는 경전을 넣은 책장을 돌리면 경전을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한다. 윤장 또는 전륜장(轉輪藏)·전륜경장(轉輪經藏)이라고도 한다. 중심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에 의지하여 원형 또는 다각형의 나무장을 올린 뒤 여기에 경전을 넣고 손잡이로 돌릴 수 있도록 만든다. 경전은 경장뿐 아니라 율(律)과 논(論), 여러 고승들의 장소(章疏)도 함께 넣어 둔다.
무지개 스님 선묵 혜자 주지스님
놀라운 건 포대화상 제막식이 있던 날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진 것. 2003년 음력 9월 1일 새벽, 대웅전 삼존불상에서 상서로운 푸른 빛이 목격됐다. 그 빛은 자리를 옮며 40분간 지속됐는데 새벽 기도를 올리던 신도 1백여 명이 함께 지켜봤다. 그때의 광경이 비디오로 촬영됐고, 공중파 방송을 타기도 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면 어쩌다 일어난 우연한 사건으로만 남았을 터. 그날의 서광은 도선사 내 상서로운 기운의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최근 도선사 상공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무지개가 목도된 것이다. 그건 비온 뒤 으래 뜨는 무지개가 아니었다. 맑은 하늘에 갑자기 나타났고, 특정한 날 특정한 시간에 맞춰 출현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그동안 맑은 날 무지개는 모두 네 차례 목격되었는데 특별한 형상을 하고 있어 더욱 상서롭게 받아들여진다고 한다.
기복적으로 흐르면 혹세무민하는 게 아니냐는 세간의 반응도 있다. 그러나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불가사의한 사건이라고 여겨져서 많은 신도들은 상서롭게 여긴다. 선묵 혜자 스님 역시 도선사 신도들의 신심 깊은 기도로 7관세음보살이 일곱 색깔 무지개로 화현, 광명불심으로 살아가라는 뜻을 보여주시는 게 아닌가 새긴다고. 하지만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자숙하며 차분하게 이 기이한 현상을 받아들이려 한다고도 했다. 혜자 스님이 도선사 주지로 부임한 후부터 무지개가 목격돼 사람들은 선묵 혜자 스님을 ‘무지개 스님’으로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