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담양은 예전부터 기름진 평야, 아름다운 자연, 수많은 문화유산을 가진 고장이다.
선비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원대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불합리하고 모순된 현실정치에 좌절하여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담양 일원에 누(樓)와 정자(亭子)를 짓고 빼어난 자연경관을 벗삼아 시문을
지어 노래하였다. 조선 중기 한문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에 한글로 시를 만들었고 그 중에서
가사문학이 크게 발전하여 꽃을 피웠다.
담양군 남면 일대는 무등산에서 흘러내린 맑은 시냇물이 담양 들녘으로 가는 동안에 식영정, 서하정, 환벽당, 취가정 등 많은 정자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원림이라 일컬어지는 소쇄원이 있다.
![sh21[1].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chosun.com%2Fweb_file%2Fblog%2F346%2F7346%2F1%2Fsh21%255B1%255D.jpg) 소쇄원 가는 길에 만난 가사문학관 풍경
1995년 건립을 추진하여 2000년 10월에 완공된 가사문학관은 가사문학 자료를 비록, 송순의 면앙집과 정철의 송강집 및 친필 유묵 등 유물이 있다.
소쇄원을 조영한 분은 양산보(1503~1557)다. 그는 연산군 9년에 이곳에서 양사원이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호가 창암이라 하여 그 동네를 창암촌이라 부른다. 은사인 정암 조광조(1482∼1519)가 기묘사화로 능주 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출세에의 뜻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숨어 살기 위하여 꾸민 별서정원 이다. 주거와의 관계에서 볼 때에는 하나의 후원이며, 공간구성과 기능면에서 볼 때에는 입구에 전개된 전원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 그리고 내당인 제월당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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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의 입구는 울창한 대밭으로 시작한다. 하늘을 찌를 듯이 뻗어 오른 수죽(脩竹) 수죽의 안쪽은 어두워서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한여름 아무리 불타는 땡볕도 이 대밭 안 그늘에서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바람불어 댓잎끼리 스치는 소리는 어떨까? 한겨울 흰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덮더라도 푸르게 빛날 대밭은 상상만으로도 환상적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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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다면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소쇄원에 대한 묘사다 "소쇄원 원림은 결국 자연의 풍치를 그대로 살리면서 곳곳에 인공을 가하여 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공간을 창출한 점에 그 미덕이 있는 것이다. 소쇄원에 설치된 집과 담장 그리고 화단과 물살의 방향 바꿈 그 모두가 인공의 정성과 공교로움을 다하고 있지만, 그 사람들의 손길들은 자연을 정복하거나 자연을 경영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자연 속에 행복하게 파묻히고자 하는 온정을 심어놓은 모습이기에 우리는 조선시대 원림의 미학이라는 하나의 미적 규범을 거기서 배우고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자연 속에 행복하게 파묻히고자 하는 온정을 심어놓은 모습이라는 표현 어떤 곳일까. 꼭 한번은 가보고 싶었으나 인연이 쉽게 닿지 않았다. 이번에는 아예 작심을 하고 발걸음을 재촉하여 소쇄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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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박해 보이는 흙돌담. 무엇을 지키기 위함이라 기기보다는 단지 이곳과 저곳을 구분하는 경계의 역할을 할 뿐이다. 담이 가지고 있는 소쇄원의 미학은 담 밑으로 냇물을 자연 그대로 흐르게 해놓은 것이다. 담을 쌓기 위해 물길을 돌리는 현대와 달리, 물길을 위해 담을 뚫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겠다는 겸손과 안과 밖을 연결하는 열린 마음. 어떻게 이런 발상이 가능했을까. 탁월한 구상과 섬세한 디자인, 슬기로움에 놀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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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이 '소쇄처사 양공지려'라고 써놓은 담벼락 밑의 매대(梅臺)를 지나고 나니 그곳에 제월당(霽月堂)이 있었다. '비 갠 하늘의 상쾌한 달처럼 맘을 씻는다.'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있는 제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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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월당을 나와 광풍각으로 들어선다. 양산보가 계곡 가까이 세운 정자를 광풍각이라 하고 사랑채와 서재가 붙은 집을 제월당이라고 한 것은 송나라 때 명필인 황정견이 춘릉(春陵)의 주무숙(1017~1073)의 인물됨을 얘기할 때 ‘가슴에 품은 뜻을 맑고 맑음이 마치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도 같고 비 갠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도 같다고 한 데서 따온 이름이다.
이곳에서 풍류를 논하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건조한 일이 있을까. 표주박에 동동주 한잔 띄워 내려주며 "운을 띄우시오. 이쪽 건너에서 시 한 수 올리리다." 한다면 그 얼마나 낭만적인가.
![sh44[2].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chosun.com%2Fweb_file%2Fblog%2F346%2F7346%2F1%2Fsh44%255B2%255D.jpg) 광풍각
시원한 바람과 신비한 대 소리, 잔잔히 물 흐르는 작은 계곡, 그렇다. 소쇄원은 멋지다 그러나 풍광만 가지고 말할 수 없다. 그런 정도의 정경은 찾아보면 그리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왜 소쇄원인가? 그것은 아주 평범한 자연 속에 터를 잡고 부모에게는 효성을 다하고 군자로서 살아가는 길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반성하며 확고한 도덕관과 역사관을 가지고 세상을 경륜하고 학문에 정진하며 지인들과는 시와 노래 그리고 술을 즐기고 정원을 디자인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것이다.‘양산보’가 그렇고 송순, 김인후, 정철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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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세를 떠나 평범하지만 포근한 고향에서 아담한 터전에 소박한 초가삼간을 지어지인들이 오면 반겨 술을 對酌하며 시를 읊고 정을 나누던 곳.
이곳이 무릉도원이요. 신선 같은 삶을 살지 않았을까...
내게 무슨 일로 한가한 곳에 사느냐고 묻는다면
천하의 이름난 땅 이만한 곳 없기 때문이라네
모래 희고 바닷물 푸르며 소나무 파란 길
만 송이 연꽃 핀 곳 모두 내 집이라네
<양사언의 「鑑湖堂」>
"새처럼 바람처럼/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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