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에서 현재까지
역대 고교야구 최강팀은? (9) 1983년 광주일고
이종길 기자 / 2007-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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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제37회 황금사자기대회 우승을 차지한 광주일고 선수들이 시상식에서 우승컵과 깃발을 들어올리고 있다.
사진 제공=광주일고역사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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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고는 1949년 청룡기 우승팀 광주서중의 후신이다. 그러나 그 뒤 오랫동안 침체기를 겪었다.
김윤환이 결승전에서 경북고 성낙수에게 고교야구 사상 최초의 3연타석 홈런을 터뜨린 1975년 대통령배대회 우승은 무려 26년 만의 전국대회 우승이었다. 천하의 선동열이 버틴 1980년에도 대통령배대회 한 차례 우승에 그쳤다.
메이저리그에서도 명문으로 통하는 광주일고의 신화는 1983년에 시작됐다. 이해 광주일고는 대통령배대회, 봉황기대회, 황금사자기대회에서 우승하며 전국대회 3관왕에 올랐다.
그해 첫 전국대회인 4월 대통령배대회 때만 해도 광주일고에 대한 평가는 높지 않았다. 32살인 김대권 감독의 경험이 떨어진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김감독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학년 구분 없이 실력 우선으로 주전 선수를 뽑았다.
1983년 주전 1루수는 1학년 이호성이었다. 이때 에이스는 3학년 문희수였다. 문희수를 받쳐 줄 투수가 모자라자 1학년 때까지 포수를 보던 박준태를 과감하게 투수로 돌렸다. 1학년에는 잠수함 이강철이 있었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공에 힘이 없었다.
문희수와 박준태가 이끈 마운드는 대통령배대회 1회전에서 원주고에 9-0 7회 콜드게임승을 시작으로 승승장구했다.
2회전에서 만난 동대문상고를 10-7로 이긴 데 이어 8강전에서 포철공고를 4-2로 눌렀다. 4강전에서 성남고마저 9-1로 물리치자 선수들은 자신감을 갖게 됐고 우승을 확신했다.
주장 김성규는 팀 분위기를 이끌었다. 김성규는 체구가 작았지만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사기를 끌어올리는 능력이 있었다.
배명고 감독인 박준태는 "도루나 호수비가 나온 뒤엔 어김없이 김성규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폴레옹 같았다"고 회상했다.
결승전 상대는 초고교급 투수로 명성을 날리던 송진우가 이끈 세광고였다. 투수전이 예상됐지만 두 팀은 9회까지 안타 10개씩을 기록하며 6-6으로 팽팽히 맞섰다.
광주일고는 문희수와 박준태가 번갈아 던졌지만 세광고 마운드는 송진우가 혼자 지켰다. 10회말. 광주일고는 선두 타자 문희수가 안타를 치고 나간 뒤 야수 선택과 희생 번트, 볼넷으로 1사 만루 기회를 잡았다.
유격수 김선진은 송진우에게서 끝내기 안타를 뽑아내며 광주일고의 대통령배대회 세 번째 우승을 확정지었다.
김선진은 11년 뒤인 1994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연장 11회말 끝내기 홈런의 주인공이 된다. 이 대회 광주일고의 팀 타율은 3할3푼3리였다.
광주일고의 강타선은 54개 학교가 참가한 8월 봉황기대회에서 더욱 빛났다. 덕수상고와의 1회전에서는 5회까지 안타를 무려 19개 때렸다.
주장 김성규의 방망이는 트레이드마크인 고함보다 컸다. 좌익수로 출전한 김성규는 이 대회 최우수선수로 뽑혔다.
9월에 열린 황금사자기대회에서 방망이는 잠잠했다. 박준태는 "황금사자기 때는 투수전이 이어졌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박준태는 아니었다.
광주일고는 준결승에서 청주고 김진규에게 6안타만 뽑아내며 고전했다. 6안타 가운데 4개는 박준태가 때렸다. 2-0으로 끝난 경기에서 박준태는 홀로 2타점을 올렸다.
박준태는 대구고와의 결승에서는 무안타에 그쳤지만 문희수와 번갈아 마운드를 지키며 3-2 승리를 이끌었다. 시속 145km 강속구의 문희수와 기교파 박준태의 계투는 상대 타자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황금사자기대회에서 이룬 3관왕 위업 뒤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대구고는 준결승에서 광주상고를 누르고 결승에 올랐다. 경기 전 광주일고 선수들은 "동향 팀이 졌다. 반드시 대구고를 이기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4강전까지 선수들은 대회 결승전을 '광주의 축제'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해는 1980년 광주의 비극이 남긴 상처가 생생할 때였다.
동강대 감독을 맡고 있는 문희수는 "선수들끼리 '고향 어른들께 웃음을 드리자'고 다짐하곤 했다"고 말했다.
지역 단체들도 고교야구팀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83년은 프로야구에서 해태가 첫 우승을 차지한 해다. 해태가 그랬듯 그해 광주일고는 호남인들에게 상처를 잠시나마 잊게 했다.
축제의 광주
황금사자기대회 결승전이 열린 오후 3시 이전부터 광주시내는 한산했다. 광주일고가 우승을 확정지으며 3관왕에 오르자 동대문야구장을 비롯해 전남도 전체와 당시 인천 전국체육대회에 참가했던 전남선수단 본부 등은 일제히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원정응원에 나선 재학생과 동문, 호남향우회원들은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일제히 교가와 응원가를 부르며 감격했다.
당시 응원을 가지 못한 광주일고 학생들은 TV를 교실에 설치해 수업을 중단한 채 경기를 지켜봤고 승리가 확정된 순간 학생탑에 몰려가 우승을 자축했다. 회사원들은 퇴근 후 소주파티를 열었고 술집은 빈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문희수는 "잡지에 집 주소가 실렸는데 나중에 편지를 정리하는데 편지를 담은 라면박스가 천장에 닿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박준태도 "경기 뒤 광주에 돌아와 정신 없이 인터뷰 요청이 들어와 내 기사가 어디에 실렸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SPORTS2.0 제 56호(발행일 06월 18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