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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주름,그리고 생명
열대우림,새만금,그리고 가이아
1.두 모델
다음 그림들을 보자.
a는 원자를 모형화한 것이다.이것은 표면이 매끈하다.반면 b는 표면이 울퉁불퉁한 구멍 투성이이다.b는 모형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모형이 아니다.이것은 오늘날 녹조를 일으키는 주범이 되고 있는 원생생물인 규조류(diatom)이다.
a는 차갑고 딱딱한 느낌을 주는데 대해 b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전자는 내부로 닫혀 있고 후자는 외부로 열려 있다.그 차이는 구멍과 틈에 있다.살아있는 것은 모두 이러한 구멍과 틈,그리고 주름들로 되어 있다.외부로 열려있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철학과 근대과학의 이상은 b가 아니고 a이다.이것은 근대철학에서 "실체"(substance)의 모형에 가깝다.이른바 "존재하기 위해서 바깥으로 부터의 어떠한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그 스스로 존립하는 자립적 존재가 그것이다.
이것은 기계의 존립방식이기도 하다.기계에서 관계맺음은 치명적이다.그래서 표면적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표면을 매끄럽게 하고,녹이 쓸지 않도록 도색하고 도금한다.그러면 기계들 간의 관계는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그것들이 만나서 집합적 조직을 만들어내어야 할 필연성은 아무곳에도 없다.있다면 그것은 다만 외부에서 강요된 것이다.관계맺음은 그들의 본성에 낯선 것이다.생명이 다만 그러한 기계라면 이러한 복잡한 생명의 질서가 저절로 만들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차라리 비행기의 부속들이 이리저리 날라 다니다가 스스로 조립되어 보잉747기가 되었다고 믿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은 그 본성상 "관계자"이다.그것은 스스로 관계맺어 자기조직화할려고 하는 경향을 가진다.거기에는 바깥으로 부터의 설계자가 없다.요소와 전체의 연관은 내적인 필연성으로 이루어진다.그것은 바깥으로 자기를 열어놓고 있고 그래서 표면은 면적을 최대화하기 위해 울퉁불퉁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기계에서 "관계"는 죽음의 방식이지만 생명에서 "관계"는 삶의 방식이다.
생명체들의 외양상의 매끄러운 모습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구멍과 주름이 몸의 곳곳에 은폐되어 있다.그것이 허파이고 핏줄이고 장이다.그것은 피부의 확장이다.(사실 이것들은 피부와 동일한 상피세포로 되어 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크기와 표면적의 문제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박테리아는 이렇다 할만한 내부 기관이 없다.그것은 호흡계도,순환계도,소화계도 없다.그것은 피부로 호흡하고 피부로 소화한다.말하자면 피부로 "듣고",피부로 "냄새 맡고",피부로 "본다"1) 박테리아에게는 왜 이것이 가능한가? 그 이유는 단순한데 사이즈가 작다는데서 온다.
사이즈가 작으면 부피에 대한 표면적의 비가 커진다.2)박테리아에게는 내부 장기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필요없는 것이다.사이즈가 커지면 표면적이 줄어들어 불가피하게 복잡한 기관들을 들여 놓아야 한다.지렁이는 순환계는 있지만 호흡계는 없다.그것은 피부로 호흡한다.더 커지면 순환계와 호흡계라는 내부 장기가 필요하다.
이것은 순환계도,호흡계도,소화계도 모두 피부의 확장이라는 것을 의미한다.큰 동물에게서 이제 바깥의 피부는 각질의 보호막으로 남고 보고,듣고,먹고,배설하던 그 민감한 진짜 피부는 안으로 욱여 들어가서 감각기관이 되고 소화기관이 되고 배설기관이 되었다.그 두터운 각질속에 주름과 구멍으로 된 생명의 원형은 의연히 보존되어 있다.타다 토미오의 다음말은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다.
인간은 여러개의 관으로 이루어져 있다.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관은 소화관이다.인간은 그 속에 소화관이라는 긴관을 가지고 있는 거대한 관이라고 볼 수 있다.소화관은 구강에서 항문까지 총길이가 8m이다.소화관은 해부학적으로도 몇 개씩 되는 기관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성의 관으로 인간존재의 가장 신체적인 기능을 맡고 있다.
그런데 위(胃) 안이라든가 장(腸) 안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 몸안일까 아니면 몸바깥일까?해부학적으로 보아 위안이나 장안은 어디까지나 몸 바깥이다.사람은 피부와 감각기관을 통해 외계와 접할 뿐 아니라 소화관 내강의 점막을 통해서도 외계와 접하고 있다.사람이 거대한 관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소화관의 내면은 미세한 주름을 갖고 있기 때문에 표면적이 아주 넓다.외계와 접하고 있는 면적이 약 400 제곱미터로 계산된다.이 정도라면 테니스코트의 두 개의 면적에 해당한다.반면 피부의 총면적은 2제곱미터이고 외계와 접촉해 가스를 교환하는 폐는 80제곱미터정도이다.3)
2.구멍,주름,프랙탈
구멍과 주름은 표면적을 최대화하는 방법,말하자면 관계를 극대화하는 방법이다.이것을 이해하기 위한 도식으로 멩거 스폰지라는 프랙탈 도형을 살펴보자.
이것의 조작은 간단한데 입방체를 3등분하면 27개의 작은 입방체가 만들어질 것이다.그 가운데 중간부분의 작은 입방체를 버린다.다음 다시 남아있는 20개의 작은 입방체를 각각 3등분해서 그 가운데 부분들을 버린다.이 과정을 무한히 반복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 멩거 스폰지이다.
복잡한 계산 필요없이 첫 번째 보다 두 번째가 표면적이 더 넓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그 다음 세 번째 단계에서는 더 넓어진다.이 과정을 무한히 한다면 이 멩거스폰지는 유한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그 면적은 무한대가 될 것이다.반면 단계가 진행됨에 따라 부피는 지속적으로 줄어들어 종국에는 0이 되어 버린다.크기가 없으면서 무한대의 표면적을 갖는 대상! 물론 실제 생명체도 무한한 표면적을 갖지 않으며 또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크기가 없는 것은 없다.그러나 이것은 생명체의 구멍과 주름에 대한 근사한 모형으로 보인다.
우리몸의 폐를 보자.4)이것은 텅빈 공기주머니가 아니다.큰가지가 점점 작은 가지로 갈라지면서 폐포에서 종결되는 수지상 구조로 되어 있다.산소는 폐의 세포벽과 접촉해야만 적혈구에 의해서 흡수될 수 있기 때문에 허용되는 최대부피내에 가능한한 넓은 표면을 가지는 것이 유리하다.프랙탈구조는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다.똑같은 원리가 우리몸의 순환계에도,소화관에도,신경계에도 적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똑같은 요구 때문에 우리의 대뇌피질도 주름져있고,우리의 손바닥도 주름진 손금으로 되어있다.
순환계는 산소와 영양을 세포에게 신속히 공급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그러기 위해서는 세포 바로 인근에 혈관이 분포해 있지 않으면 안된다.만일 이것을 보통의 방식으로 설계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충족시키기위해 우리 몸을 혈관으로 완전히 채우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최소의 부피를 차지하면서 몸의 모든 부분과 속속들이 접촉을 유지하는 방법은 프랙탈적 구조외에는 없다.
3.가이아의 주름
원자는 사물에 대한 극단적 이상화이다.엄밀한 의미에서 원자적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생명아닌 모든 사물도 프랙탈적 구조를 갖는다.이 세계에 관계지워져 있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바다의 파도는 그것이 부딪히는 땅과 관계하여 독특한 해변의 프랙탈구조를 만들고(방파제에 인간이 만든 정사면체구조물은 이것을 모방한 것이다) 사막에서 모래는 바람과 관계맺어 모래사막의 아름다운 무늬를 형성한다.강의 물줄기는 땅과 대화해서 해빛과 식물의 대화에서 생겨나는 것과 유사한 수지상의 강모양을 만든다.(그러나 엽맥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이중교차가 없다.이것은 생명의 관계맺음의 정도가 훨씬 더 긴밀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달에서 본 가이아
위기의 가이아
우리가 살아있는 만큼 뭍생명을 품고 있는 이 지구도 살아있다.제임스 러브록(J.Lovelock)은 이런 의미에서 지구를 "가이아"(Gaia)-희랍신화의 대지의 여신-라고 부를 것을 제안했다.
러브록은 NASA로부터 화성에서의 생명체의 가능성에 대한 조사를 의뢰받았다.그가 이 과정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은 지구상의 대기속의 산소의 비율이었다.화성이나 금성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산소분자가 지구의 대기에는 21%의 비율로 존재하고 있다.산소가 무엇인가? 그것은 반응성이 워낙 커서 그대로 두면 다른 원소들과 반응하여 산화물을 만들어 낸다.외부에서 지속적인 산소의 공급이 없다면 산소분자는 곧 고갈되고 말 것이다.화성이나 금성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산소없이는 곧 생명의 죽음인 화학적 평형상태로 이행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지구에 이 산소를 지속적으로 공급함으로써 이 지구를 생명의 행성으로 살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생명이다! 생명이 살기에 적합한 "여건으로서의 지구"가 아니고 생명이 만들어낸 것이 바로 지구다.우리는 단순히 그 환경속에 살고 있지 않다.우리가 바로 그것이다.이것이 러브록이 내린 결론이었다.
가이아의 주름은 무엇보다도 수림이다.특히 열대우림이다.이것은 폭 3천마일로 가이아를 둘러싸고 있는 전체 육지면적의 14%에 해당하는 푸른 띠이다.나무 자체가 태양의 주름이다.정글을 뒤덮고 있는 이 나무들의 주름을 바르게 펴면 지구 전체를 몇 번 둘러싸고 남을 방대한 표면적이다.이것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내뿜는 가이아의 허파이며 그럼으로써 뜨거워지는 가이아를 식혀주는 가이아의 피부이다.동시에 광합성작용을 통해 태양에너지를 고정시키는 가이아의 소화관이며 전체 생명종의 절반이상이 서식하고 있는 가이아의 자궁이다.5)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열대우림의 파괴는 심각한 수준에 있다.인간의 무분별한 산림남벌로 1분 마다 축구장 10-20개에 해당하는 열대우림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1년으로 치면 5000만 에이커,한반도 전체를 포함한 것 보다 더 큰 면적의 우림이 사라지고 있다.지금 14%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6%가 남아있을 뿐이다.이런식으로 간다면 2030년이면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걱정스러운 예측도 나오고 있다. 러브록은 오늘날 가이아가 앓고 있는 이 심각한 중병에 "영장성 백혈병"이라는 신란한 진단을 붙이고 있다.6)
열대우림에 가장 가까운 환경은 무엇일까? 놀랍게도 그것은 사막이다.말하자면 열대우림은 "젖은 사막"이다.온대림에서는 낙엽이 떨어져 비옥한 부식토를 만들 그 영양분들이 열대림에서는 토지속에 저장될 여유가 없다.연중 높은 기온으로 생명들의 활동이 왕성하며 그래서 그것은 곧바로 분해되어 다른 생명체의 성장의 재료로 쓰인다.그래서 열대우림의 에너지의 대부분은 토양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열대우림내의 생명체속에 있다.기업에 비유하면 온대림은 유동자산 보다 고정자산이 많은 데 대해 열대림은 그 대부분이 유동자산으로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열대림이 파괴되면 그곳에 서식하던 생명체들이 소멸하고 그 결과 벌거벗은 사막으로 변하고 만다.
아프리카의 만성적인 기아는 녹색혁명이라는 이름하에서 숲을 파괴시킨 결과이다.열대림의 그 엄청난 생산성이 부의 환상을 주었다.그것은 퍼도 퍼도 줄지않은 화수분으로 보였을지 모른다.인간은 그 부를 독점하려고 열대림을 파괴하고 생명체들을 몰아내었을 때 정작 손에 들어온 것은 벌겋게 굳어 버린 사막성 적토였다.그 화수분의 근원은 토지가 아니고 정작 쫓아낸 그 생명체들이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이것은 이솝우화의 황금알을 낳는 닭의 이야기를 연상시킨다.알을 몽땅 차지하기위해 닭을 죽인 결과 황금의 알도 함께 사라져 버리지 않았는가? 열대우림에서의 농업이 지속적 농업형태를 취하지 못하고 화전식 농업을 취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삼림이 불태워지면 재와 분해된 식물이 토양속으로 충분한 영양분을 쏟아내어 2-3년간은 농사를 지을 수 있다.그러나 그후 토지의 영양분은 고갈되고 다른 지역으로 옮겨 화전경작을 되풀이하는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화전경작은 열대림의 파괴의 한 원인에 지나지 않는다.쇠고기를 얻어내기 위한 자본에 의한 조직적 파괴가 훨씬 더 심각하다. 1헥타아르의 열대우림은 약 80만 킬로그램의 식물과 동물에 서식처를 제공한다.가축을 키우기위해 불태워지고 목초지로 강등되고 나면 1헥타아르는 한해에 불과 200킬로그램의 쇠고기를 산출할 뿐이다.이것은 약 1600개의 햄버거에 상응하는 양이다.따라서 하나의 햄버거를 만드는데 약 500킬로그램의 열대우림이,넓이로 환산하면 9제곱미터의 열대우림이 파괴되는 것이다.7)그리고 그 햄버거로 비대해진 살을 뺀다고 목하 다이어트산업이 성업중이다.
가이아의 자궁을 들어내고 가이아의 피부를 벗겨내는 이 패륜을 이 문명-이 야만적 기술앞에 문명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은 언제까지나 계속할 것인가?그러고도 온전하리라고 생각하는 이 자본의 "미친"논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신자유주의라는 이름하에서 행해지고 있는 이 광란적 자살게임을 어떻게 할 것인가?요즈음 자살사이트가 문제되고 있다고 한다.이 자살사이트의 자살방법을 신자유주의의 강령으로 대체시켜 보라.신자유주의 강령이 바로 자살방법에 대한 강령이라는 것을 알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그러면서 그것을 살아남는 방법으로 호도하고 있으니 자살사이트 보다 솔직하지도 못하다.
열대우림은 우리에게 멀리 있다.이 패륜에 햄버거를 씹음으로써 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와는 무관한 것이다.그것은 먼 남의 나라의 이야기이다.우리는 이렇게 스스로를 자위할 수 있을까?안된 이야기이지만 우리도 직접적으로 이 패륜에 관여하고 있다.그것은 다름아닌 갯벌의 문제이다.가이아의 자궁을 도려낸 시화호는 우리의 아픈 원죄로서 남아 있다.
4.가이아의 구멍
나무가 가이아의 주름이라면 갯벌은 가이아의 구멍이다.갯벌은 미세한 구멍이 송송 뚫려있는 다공질의 점토들로 되어 있다.그 넓은 표면적으로 해서 산소와 영양의 공급이 원활하고 이것이 많은 생명체들의 삶의 터전이 되고 있다.갯벌과 같은 습지 1m2에서 벌어지는 광합성작용의 생산량은 연간 1만-2만5천 칼로리로 사막의 50배,산림의 20배,먼바다의 10배에 해당한다.그리고 바다 생물들의 90%가 개펄에서 산란하고 그곳에서 생을 시작한다.그야말로 가이아의 자궁이라고 할 만 하다.
열대우림이 생명체들의 서식환경이라기 보다 그 자체 초유기체라고 보아야 하듯이 이 갯벌도 그 자체 살아있는 초유기체이다.생명체가 없으면 열대우림이 그 특성을 상실하듯이 갯벌도 생명체가 없으면 갯벌로서의 특성을 상실한다.문자 그대로 그것은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데 갯벌은 열대림에 비해서 상황이 더 좋지 않다.열대림을 파괴하면서도 그것이 가치있는 것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자책감은 있었다.그러나 갯벌은 쓸모없이 버려진 땅으로 간주되어 왔다.그것을 매립하는 것은 파괴가 아니고 건설로서 인식되어 왔다.필자의 세대가 초등학교 때부터 배워온 것이 바로 "국토개발=간척"의 등식이었다.
1998년 해양수산부에서 실시한 갯벌 조사결과에 따르면 서남해안에는 약 2400km2의 갯벌이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국토면적의 약 2.4%에 해당한다.이는 10년전이 1987년 때의 통계보다 15%나 줄어든 것이다.불과 10년새 간척과 매립을 통해서 무려 422km2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이러한 추세로 간다면 세계 5대 갯벌의 하나인 우리 서해안의 갯벌이 아예 자취를 감출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시화호의 악몽이 얼마되지 않았는데 또 다시 새만금호의 간척공사로 그 악몽을 되풀이할려고 하고 있다.지금 물길을 막기위한 방조제공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그 길이가 무려 33km로 세계 최장이다.이 공사가 끝나면 여의도 면적의 140배에 해당하는 1억 2천만평의 갯벌이 뭍으로 바뀌게 된다.국민 1인당 3평의 땅이 돌아간다나?
갯벌은 뭍생명체를 키우는 자궁이자 동시에 가이아의 콩팥에 해당한다.하천물이 육지에서 운반해온 각종 오염물질을 바다에 이르기 전에 흡수,머금고 있다가 여과시켜 바다로 내보내는 일을 한다.갯벌에 서식하는 온갖 미생물들도 부유물질의 분해에 동원된다.한 연구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갯벌 10km2의 수질정화능력은 인구 10만명이 사는 도시에서 배출하는 오염물질을 정화시키는 하수처리장의 시설과 맞먹는다고 한다.이 갯벌이 매립될 때 육지에서 유입되는 오염물질들은 정화되지 못하고 매립을 통해 만들은 거대한 담수호에 쌓이게 될 것이다.새만금이 시화호의 재판이 되리라는 것은 눈에 보듯이 뻔하다. 정화시설 운운으로 강변하지 말라. 그것은 인간의 기술로 가능하지 않으며 설사 가능하다 해도 엄청난 돈이 또다시 투입되어야 한다.그것은 자본의 논리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그것은 불모의 땅과 오염물질로 범벅이된 담수호, 아니 시궁창으로 변할 것이다.그 때쯤이면 자본은 단물을 빨아 먹은 다음 철수하고 없을 것이다.
지난 92년 여름 “둑의 나라”인 네덜란드 중부 블라우에 카머지방에서 놀랄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네덜란드 정부가 블라우에 카머지방 1백 20만㎡(약36만평)를 둘러싼 높이 2m의 제방을 무너뜨린 것이다. 지역주민들의 반발은 심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후 광활한 대지를 덮어버린 그곳에 수십종의 잡초들이 자라났고 물새들이 먹이를 찾아 몰려들었으며 야생동물들도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생물의 종수도 무려 67%나 증가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저지른 짓에 대해 우리의 후손이 해야할 미래의 일을 보는 것 같다.그러나 이것은 허물면 다시 복원되는 가역적 과정이 아니다.우리 서해안의 그 풍부한 생태계는 영원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케언스 스미스는 최초의 생명체는 점토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놀라운 가설을 제시했다.점토는 그 자체가 구멍이다.그 미세한 구멍은 생명의 핵심이다.그것은 숨을 쉰다.갯벌은 구멍 그 자체이다.그런면에서 가이아의 자궁에 해당한다.그것을 도려내는 짓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측하기 어렵다.브라질에 아마존의 우림을 보존하라고 요구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 세계 5대 갯벌의 하나인 우리의 갯벌들을 보전하겠다는 단안을 내려야 한다.그것은 어떤 경제논리에도 선행하는 생명의 논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이 세상은 우리 인간들만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우리도 단지 가이아의 일부일 뿐이다.
5.작은 가이아
필자는 생명체를 "작은 가이아"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이 용어에는 생명에 대한 우주론적인 울림이 있다.생명체들은 그 어느것도 그 자체로서 하나의 우주이라는 함축이 그 언어속에 들어 있다.이것은 새로운 생각이라기 보다 우리 선조들이 가졌던 생명에 대한 관점이었다.그러나 기계론의 위세 앞에서 우리는 여기에 대한 느낌을 잃어버렸다.
필자가 지금까지의 연재를 통해서 복원해볼려고 했던 것은 이 "느낌"이었다.지난 39호에 실은 "스위프트는 갈릴레오의 책을 읽었을까?"라는 글은 이 느낌의 복원을 위한 예비적 논의로서 도입된 것이다.여기서 보이고자한 것은 다층적 존재론이다.생명체들의 몸이 바로 우주이며 몸마다 다른 우주가 있다는 것을 크기에 따라 달라지는 세계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벌레라도 그 벌레의 몸으로 구현되는 우주가 있다.그리고 그것은 가이아를 자신속에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은 가이아"들이다.우리는 한 생명체를 파괴시킴으로서 한 우주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느낌을 설득력있게 전달하기 위해서 생명의 미학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데 이것에 대한 예비적 논의로 가져온 것이 37호에 실은 "太極,생명의 디자인"이라는 글이었다.거기서 생명의 기본디자인으로서 황금분할의 의미와 기능을 다루었다.여기서는 일반론을 다루었을 뿐이며 느낌에 좀더 다가가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자연현상에 그 적용의 사례들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이 글에서 잠깐 언급되기는 했지만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사례는 소라와 같은 연체동물(mollusc)의 패각과 식물의 잎차례(phyllotaxis)이다.이것을 여기서 다루고 싶었지만 수식과 그래프,그리고 응용소프트웨어의 사용법 등으로 가득차 있는 글이 아무래도 이 문예지의 성격과 맞지 않는 것 같아서 다루지 못했다.관심있는 사람은 필자의 홈페이지를 참조해 주기 바란다.8)
에드워드 윌슨은 열대우림이 보호되어야 할 이유의 하나로 그것이 엄청난 종류의 약제의 보고라는 점을 지적한다.9)나무의 예를 들면 나무는 박테리아,곰팡이에서 곤충류,인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기생생물체들로부터 시달림을 받아왔다.거기에 대한 방어기제로서 독성있는 화학물질들을 생체내에 합성해 왔다.인간은 예로부터 그것을 추출해서 약제로 사용해왔다.밀림이 사라지면서 아직 인간이 찾지 못한, 보존했다면 발견할 수도 있었을 미래의 치료약이 사라진다는 논리이다. 갯벌의 보존에 관해서도 이러한 논리들이 전개된다.갯벌이 가지는 생산성,갯벌이 가지는 수질 정화능력,많은 수서생물들의 산란장이라는 점에서 종의 보존능력 등이 거론된다.말하자면 효용성의 논리이다.
현재 개펄은 전국토의 3%인 3800㎢로 이중 14%인 549㎢가 매립농지로 조성되고 있으며 오는 2001년까지는 34%인 1289㎢가 매립예정으로 돼 있어 아직도 자연과 생명의 보고인 개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크게 부족해 선진국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합성세제의 사용이 크게 늘면서 인산염이 과다 배출돼 악성적조의 원인 생물인 편모 조류의 과잉적 번식을 초래하여, 바다 오염이 불을 보듯 뻔한 현실에서 이같은 현상은 청정해역으로 일컬어지는 고흥의 바다도 결코 예외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어패류 등 영양이 풍부한 개펄의 매립은 근시안적 단견이다. 갯펄은 해수와 담수가 뒤섞여 다양한 생물종이 번식하는 생태계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갯벌을 비롯한 습지 1㎡에서 벌어지는 광합성 작용의 생산량은 연간 1만 - 25,000kcal로 사막의 20 - 50배, 초지나 산림지역의 2 - 20배, 바다의 10배에 달한다.
개펄은 또한 육지에서 유입되는 각종 유기물과 토사 등이 쌓이는 곳이며 이런 생태적 폐기물들은 개펄에 자생하는 미생물에 의해 분해된 후 자연으로 환원된다. 초본류도 매년 절반 이상이 개펄 바다에 서식하는 조개류와 곤충류의 먹이가 되고 새와 어패류는 영양분이 풍부한 개펄에서 산란하고 유충기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낸다.
바다 물고기들의 90%가 개펄에서 생산된다는 조사도 있다. 해양생태계의 기초가 개펄에서 다져지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개펄을 매립하면 회유성 어류들이 알을 낳거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먹이를 구하는 보육장이 없어지며 새로 만들어진 방조제가 해류의 흐름을 약하게 하기 때문에 오염물질이 확산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 갈수록 악화되는 수질문제가 심각한 현실 앞에서 간척으로 농토 확장을 하기보다는 개펄을 보호, 육성하는 것이 어족자원 보존의 최선책이며 수산자원을 자손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첩경인 것이다. 이런 중요한 개펄을 식량증산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매립을 할 때에 어느 쪽이 더 이득이 있을 것인지는 자명한 일이 아니겠는가?10)
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이다.그러나 그 경우 반대의 논리와 비교해야 하고 결과는 자본의 논리가 앞서게 될 것은 뻔하다.새만금 간척사업도 똑같은 효용성의 논리로 무장하고 있다."간척사업이 완료되면, 14,800㏊의 농수산용지와 13,500㏊의 도시공업용지가 창출되고, 만경강, 동진강 유역 12,000㏊의 수해상습지가 홍수 및 침수피해에서 벗어난다. 연 1,400만명의 고용창출효과가 있고, 항만이 건설되면 대륙권 무역기지화에도 유리하다. 또한 백제고도권, 변산 국립공원, 고군산군도를 연결하는 국제적인 휴양관광단지로 개발된다.”꿈같은 이야기지만 그 지역 주민들은 솔깃할 것이고 자발적으로 자본의 홍위병이 되어 줄 것이다.
필자는 환경보전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자연에 대한 우리의 감성의 회복이라고 생각한다. 기계론의 해독을 씻어내고 자연의 神性을 되찾게 해주어야 한다.뭍생명들속에 들어있는 가이아를 볼 수 있는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우리가 먹고 있는 것은 단순한 단백질의 덩어리가 아니고 우리를 길러준 가이아이고,우주이고,하느님이고,부처의 몸이다.우리의 삶은 이 가이아 또는 부처의 몸보시에 신세지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가 미래에 되돌려주어야 할 업보이다.길가에 피어있는 이름없는 들꽃속에도 한 우주가 깃들어 있으며 그것을 함부로 꺽지마라.우리의 무심한 행동이 한 우주를 붕괴시키고 있다.나는 영국의 시인 윌리암 블레이크(W.Blake)의 높은 감수성을 좋아한다.그는 "순수의 전조"(Auguries of Innocence) 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한 알갱이의 모래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송이 들꽃속에서 우주를 본다.
그대 손바닥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속에 영원을 담아라.
모래나 들꽃속에 우주가 들어있다.그러나 윌리암 블레이크 정도의 높은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것을 말이 아니고 느낌으로 가져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라의 貝殼에서라면 그 느낌을 가져올 수 있다.소라는 그리이스인들이 신의 비(devine proportion)라고 부른 그 황금비가 3차원상에 아름답게 각인되어 있는 우주이다.소라뿐이겠는가? 피뿔고동,비단고동(각시고동),바지락,백합에 각인된 아름다운 등각나선의 곡선을 찬찬히 따라가 보라.무엇인가 아련히 들려오는 생명의 노래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우리가 둘이 아님을...
비단고등
마지막으로 학생이 쓴 글 한편을 소개할까한다.
"입장바꿔 생각해봐"라는 말이 있다.사자성어로 易地思之..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며 이 입장바꿔 생각해보라는 말을 내 행동의 지침으로 삼아왔다.대학와서 동양의 자연관을 배우며 나만의 입장을 바꿔 생각함으로써 사상은 더욱 넓어졌다.또한 남의 입장도 생각하는 착한 놈이야..하는 자만심도 그에 맞춰 더욱 켜져갔다.그러나 이에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 있었으니 "몸의 철학"을 수강하면서였다.
역지사지 참좋은 말이다.길을 걸어가며 흙의 입장을 생각해보고,나무를 볼 때 나무의 입장을 생각해보며,날아가는 새의 입장을 생각해보는 것 얼마나 좋은 행동인가?허나 내가 간과한 것은 나무의 입장을 생각할 때 나무의 입장이 되어 나무의 가치관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크기와 형태에 따라 세계관이 다르고 사는 방법도 다르며 시간도 다르다.내가 나무의 입장을 생각하면 뭘하나?결국 나의 눈으로 나무를 보는 것 밖에 안된다.나는 사물들의 입장만 생각했지 진정으로 그 사물이 되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눈을 돌려 주위를 본다.가까운 김해대학 설립문제도 그렇고,새만금,천연기념물,..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환경운동가들은 그것의 생명성에 관하여 논하지 않고 그것의 종의 가치와 손실에 대해서만 논한다.그들은 환경을 생각만하고 있지 직접 환경이 되어보지 못한 것이 아닐까?
중요한 문제가 하나 더 있다.지금부터 내가 그것이 된다는 것은 늦게나마 그것이 된다는 것이고 이미 내가 그것이 아닌 것이다.풀어말하자면 내가 나무가 된다는 것은 나와 나무가 다른 것이며 아직 경계가 있다는 말이다.내가 나무가 되기전에 나와 나무는 하나여야 한다.나무를 나의 허파로 보고 연못을 나의 방광으로 보는 자세..나는 아직 멀었다.허나 늦진 않았다.나무에 대한 시를 쓰려면 나무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내가 내주위의 것들이 되고 그들이 내가 되고 나와 그것들의 구분이 없어지고 나아가 내가 나로 느껴지지 않을 때 나는 비로소 자연이 된다.
이런 자세로 갯벌로 신을 만나러 가자.어쩌면 조개의 패각을 열고 방금 거품을 일으키며 탄생하고 있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만날지도 모르고 소라의 패각을 움켜지고 사색에 잠긴 창조와 파괴의 신 시바를 만날지도 모른다.나는 거기서 무엇보다도 대양의 흐름에 무심한채 조개에 몰입해 있는 어린 소년뉴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고 싶다.
<주>
1) 나의 피부는 더 이상 듣고,냄새맡고,보는 기능을 갖고 있지 않다.나는 바이올린 선율의 냄새를 맡고 싶고 고흐의 "해바라기"가 내는 소리를 듣고 싶지만 나의 감각기관은 귀,코,눈으로 분화되어 버림으로써 그 원초적 지각능력을 이미 잃어 버렸다.
2) 상세한 것은 필자의 "스위프트는 갈릴레오의 책을 읽었을까?",《오늘의 문예비평》,39호,118쪽 이하 참조.
3) 타다 토미오,『면역의 의미론』,황상익 옮김,한울,159-160쪽
4) David Peak & Michael Frame,Chaos Under Control, Freeman&Co.,1994,pp.104-105
5) 열대우림의 종다양성은 정말 놀라운 것이다.보르네오의 10헥타아르의 면적에서 1000종이 넘는 종들이 발견되었다.이것은 미국과 캐나다의 중요한 서식처에서 발견되는 총 종수인 700종 보다 많은 것이다.(에드워드 윌슨,『생명의 다양성』,황현숙 옮김(까치,1995),218쪽)
6) 제임스 러브록,『가이아』,김기협 옮김(김영사,1995),156쪽
7) 호세 쿠첸베르거,『지구적 사고,생태학적 식생활』,홍명희 옮김(생각의 나무,2000),214쪽
8) http://chaos.inje.ac.kr/Alife/note_meun.htm 필자는 인문학이 수학을 멀리하는 것이 인문학적 감성을 살리는데 큰 손실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언어가 사태를 표현하는 하나의 기호이듯이 수학도 그러한 기호일 뿐이다.다만 서로 잘할 수 있는 영역이 다를 뿐이다.예를 들자면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다만 눈이 잘할 수 있는 영역이 있고 귀가 잘할 수 있는 영역이 있을 뿐이다.그래서 두가지 경로에서 들어오는 정보가 충돌을 일으킬 때 어떤 경우에는 눈을 신뢰하고 어떤 경우에는 귀를 신뢰한다.
수학은 우리의 일상어가 부족한 사물이 갖고 있는 무늬,결,패턴을 보여주는 강력한 도구이다.이러한 것은 일상언어로는 흐릿한 상 밖에 갖질 못하며 수학의 언어로 파악되었을 때 비로소 손에 잡힐 듯이 들어오게 된다.그러나 수학은 이질적인 것 사이의 섬세한 고찰에서는 일상언어를 따르지 못한다.그러므로 파악된 그 "결"과 "무늬"는 일상언어의 섬세성에 의해서 재구성되어야 한다.그 과정에서 또렷한 상이 다시 흐릿해진다.그러나 이것은 명료성의 단계를 경과한 自己補正이기 때문에 그 이전의 단계와는 다르다.말하자면 보편성과 구체성 사이의 변증법적 운동이 낳는 이 총체적 구체성은 이 두 언어의 상호순환을 통해서 가장 잘 구현될 수 있다.
필자는 또렷한 상을 가지기를 원하기 때문에 강의시간에 수학을 많이 동원한다.(그렇다고 필자가 수학을 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우리 인문학도들의 태생적 한계에서 나라고해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영어에 비유하면 독해는 되지만 영작은 안되는 그런 수준이다.)그러나 나의 욕심일 뿐 수강생들(이공학부 학생들 마저)은 엄청나게 싫어한다.그러면서도 나는 그 명료성의 매력 때문에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최근에 한 학생이 피력한 수업에 대한 소감은 나에게 이 짓을 계속해야겠다는 용기를 주었다.
"솔방울 하나를 주었다.처음에는 나선 모양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이제는 솔방울의 나선모양이 마치 파도가 출렁이듯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다.가만히 책상앞에 솔방울과 마주치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정말 좁쌀속에 우주가 있는 것 같다.
20년 넘게 공부한 한 철학자가 인간이 잃어버린 자연에 대한 감각을 찾아주기 위해 철학을 가르친다고 했다.그말이 참 좋아서 그 철학자의 책을 다시 한번 더 보았다.내가 싫어하는 수학이 가득했다.그러나 나는 느꼈다.그 수학이 참으로 따스하게 느껴짐을.. 내 생애 처음으로 수학이 내게 다가왔다.중고등학교 때 그 철학자를 만났더라면 아마도 수학을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왜냐하면 그 수학을 통해 내가 무엇을 배워야하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9) 윌슨,앞의 책,13장
10) http://user.chollian.net/~shy6008/mp_kms003.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