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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프로젝트 ; Military Project
 
 
 
카페 게시글
전쟁역사 고대사 광개토/장수태왕의 업적과 동등 혹은 그 이상의 업적을 만든 고구려의 제6대 태왕 태조왕.
밀러리터 나그네 추천 0 조회 368 06.09.30 20:20 댓글 16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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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6.09.30 21:17

    첫댓글 후한과 고구려와의 전쟁의 특징은 고구려가 영토를 점령하기 위해 군사를 보냈다는 것보다는 재물과 사람을 약탈한 것입니다. 그리고 고구려는 후한의 중앙 정부와 전쟁을 벌인 것이 아니라 후한 유주의 군대와 전쟁을 벌였습니다..광양과 어양, 우북평, 탁군 등에서 병력은 3천명을 동원했다고 합니다~ (고구려사 연구로 잘 알려진 김용만 선생님의 '고구려의 발견'에서 발췌입니다..)

  • 작성자 06.09.30 21:18

    네~ 자료감사합니다^^

  • 06.09.30 21:31

    그러므로 후한이 고구려와의 전쟁이 조낸 힘들었다는 것은 살짝 오버성이 있다고 봅니다만 .. 그리고 후한과 고구려와의 전쟁시기는 태조대왕 53년(김용만 선생님의 '고구려의 발견' 내용을 그대로 옮겼습니다..)인 105년과 6년 후인 111년, 태조대왕 66년(118년), 121년입니다.. 이 당시는 명제, 장제, 화제, 상제, 안제, 소제, 순제 시절(후한서에는 태조대왕이 121년에 죽었다고 하니.. 이 기록을 바탕으로 하면 안제까지..)은 후한이 제법 잘 나가던 시기였습니다만 -_ -.. (물론 화제 이후 왕조 말기적 증상이 후한에도 슬슬 등장합니다만..)

  • 06.09.30 21:32

    그리고 고구려에서 왕의 칭호는 건국왕인 추모성왕처럼 '성왕', 유리명왕이나 문자명왕처럼 '명왕', 태조대왕처럼 '대왕', 광개토태왕처럼 '태왕'이라고 붙인 것처럼 일정한 법이 없었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 06.09.30 21:25

    그리고 글쓴이는 병주가 무너지면 낙양까지 가는 것이 한큐에 이뤄지는 것처럼 적었는데 -_ -... 태조대왕 당시 고구려가 후한과의 전쟁에서 우세를 점했다고 하더라도 고구려땅에서 낙양까지 가는 것은 당시 고구려의 국력으로는 무리수였습니다라고 봅니다만.. 태조대왕 당시 고구려가 동방 사회의 큰 국가임은 맞지만 ... 고구려는 동방 사회를 이끌어나갈 힘은 부족했습니다..(부여의 위구태가 2만 군사로 고구려의 뒤통수를 친 것을 보면 그 당시 고구려는 동방사회의 큰 국가였지 그 무렵까지는 동방사회를 이끌고 나갈만한 힘은 아직 부족한 듯 보입니다..)

  • 작성자 06.09.30 21:26

    태조왕때 최초로 태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답니다. 우리민족의 경우 황제라는 표기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앞에 고구려의 경우 -성-, -명-,-태-를 붙여서 독자적인 표기를 사용한것이지요^^

  • 06.09.30 21:35

    밀러리터 나그네님이 말씀하신 것은 저도 잘 알고 위에도 적었습니다만-_ -;; 그리고 저는 김용만 선생님의 고구려의 발견이라는 책을 바탕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 작성자 06.09.30 21:27

    태조왕때는 제가 옛날에도 말씀드렸지만 산둥반도 그리고 중국의 황해안 일대 지역을 석권한바 있었습니다. 다만 차대왕때 다뺏겼지만요.

  • 06.09.30 21:34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에서 글 뒤져봤습니다만.. 대체적으로 그곳분들은 박영규씨의 의견에 부정적인 것 같았다는.. -_ -... 뭐 ... 확실히 이거다라고 결론이 난 것은 아닙니다만 -_ -.. 만약에 고구려가 장악을 했었다면 그와 관계된 유물 혹은 유적이 나오거나 후한 당시 사람들이 한줄이라도 그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을까요? 산동 같은 경우에는 당시 중원의 경제 중심지인데 말입니다..

  • 06.09.30 21:57

    이 내용과 관련은 없지만 이정기의 '치청'이 장악한 지역이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었는데요. 당시 치청은 당의 15개주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 지역은 산동성, 안휘성, 강소성 일부를 포괄하는 지역이었고 호구수는 84만호였습니다. 당시 당나라의 호구수가 840만호였습니다. 경제력은 곡물 생산의 중심지였으며 소금의 주요 생산지였습니다. 참고적으로 당시 당나라 재정 수입의 절반이 소금이었습니다. 그리고 치청의 철과 구리 생산량은 1백만관이 넘었는데 당시 당의 철, 구리 총 수액고는 1200만관이었습니다.

  • 06.09.30 21:58

    그리고 이 치청이 장악한 지역은 비단 생산지로 유명했습니다(당시 비단의 주요 생산지는 치청, 화북과 화남, 검남, 삼남이었습니다.) 당현종때 국가의 비단 수입액은 7백 40만필이었습니다. 이중 약 3분의 2를 하북도와 하남도가 부담했다고 합니다..

  • 06.10.03 10:21

    박영규씨에 대한 의견을 몇개 봤습니다만.. 단순히 서지학적 측면에서 고구려가 이 땅 먹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하네요.. 유물이나 유적 같은 고고학적 증거 바탕이 없이 말이죠 -_ -.. 그러므로 박영규씨의 의견은 아무래도 오류가 많은 것 같습니다만 ... -_ -..

  • 작성자 06.09.30 21:28

    전쟁에서 후미를 위협받는것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이 수가 적던 많던 간에요 현리전투때는 군단병력이 단 1개대대에 의해 무너진사실이 있습니다.

  • 06.09.30 21:36

    -_ -... 군사 이야기로 가니 할 말이 없군요 쩝 -_ -

  • 작성자 06.09.30 21:32

    더욱이 당시 고구려군은 현도성에서 한군과 대치상태였습니다. 만약 그대로 일전을 치루었다면 고구려군은 부여+한연합군에 의해 포위섬멸당했을것입니다. 과거 1차포에니전쟁에서처럼 카르타고의 수도를 포위한 -마르크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가 이끌던 로마군이 카르타고군과 용병들에게 당했던것처럼요.

  • 작성자 06.09.30 21:43

    헤헤~ 저도 공부가 많이 필요하군요..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에서 한버 새로운 지식을 찾아봐야겠습니다. 쟈드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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