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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성에 대한 탐색과 확신
-문병란 시선집 《장난감이 없는 아이들》중심으로
<시인. 평론가 박철영>
지금껏 노출된 문병란 시인의 객관적 세계가 망라된 문학적 연대기랄 수 있는 시집들을 살펴보았다. 내면에서 발효된 문학은 살아 있는 삶이기에 시의 형식을 통해 들추어 볼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 있다. 특히 시인의 시와 삶이 광주라는 지역으로 견고하게 갇혀있다 보니 일반적 시선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광주에 국한한 문제로 바라보는 편협함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단정적으로 볼 때 발생하는 오류는 실제 모습과 오차가 클 수밖에 없다. 시를 관통하는 의식속에 내재한 인간 문병란 시인에 대한 접근을 차단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편견을 배제하고 문병란 시인의 끊임없이 분출하도록 하는 시 창작 에너지의 충만한 근원은 과연 어디인가와 무엇인가를 탐색하고자 한다.
그것은 생전의 손수 뽑아 올린 시선집 《장난감이 없는 아이들》(인간과 문학사 2015.4)에서 일부나마 엿볼 수 있다. 시선집을 통해 남들이 보지 못한 자신의 내면 세계를 손수 짚어 주고자 한 것은 아닐까 유추해본다. 지금도 끊임없이 뭇사람들에게 애송되는 시편을 보면 저항시인 답지 않게 웅숭깊은 서정성이 저류하고 있음을 알 수 없다. 마치 보여지는 시들을 보면 민중 저항의 표상처럼 각인된 시인의 참모습은 분명 아닐뿐더러 일방향적인 저항 시 일색은 더더욱 아님을 추론해가면서 서정시에 닿아 있는 근원에 다가가고자 한다.
문병란 시인은 시선집의 머리말에서 자신의 시 안에 상당한 서정성이 온재溫在되어 있음을 밝히고, 의도한 대로 더 많은 사람과 공감하길 바라는 마음은 시처럼 진솔하다.
“시들은 향토에 밀착된 우렁차고도 뜨거운 가슴의 폭을 지녔으되, 바다를 향해 조용히 흘러가는 산골 개울물의 서늘함 같은 맑은 서정도 지니고 있었다.” 1981년 간행되어 군사 독재정권 시절에 판금 당해 있었던 창비시선 26권 <땅의 연가>에 대한 단평 소개 글이다. ---중략--- “이미 친숙한 <직녀에게>, <꽃씨>, <호수> 그런 시들과 더불어 묵혀 있던 나의 졸시들이 독자의 마음속에 스며들기 바란다.”며 《장난감이 없는 아이들》 시선집의 발간 목적을 그 동안 시집 속에 묻혀 있어 빛을 보지 못한 시들을 선정해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기를 바란다”
-시선집 《장난감이 없는 아이들》의 ‘시인의 머리말’에서
행간을 유추해보면 문학적 평가가 민중이나 사회 체제에 대한 비판 일변도였음을 인식하고 있다. 그렇기에 민중 저항시로 편향 각인되었음을 우려하거나 그런 현실을 시인의 입장에서도 인지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사회는 시대적으로 매우 숨 가쁘게 변화되고 있었다. 그 시대에서 양심 있는 문학인들에게는 암묵적이지만, 변화를 위한 의식으로 시대적 소명을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도 저항적인 시와 함께 원형적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서정시 혹은 비가悲歌라는 문학의 영토를 외면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응당 일탈한 것이 아님은 물론이거니와 시의 보편적 정서와 가치에 누구보다 충실했다는 것이다. 시의 본적지인 인간의 가치를 중시하는 서정의 언저리를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음을 방증傍證한다. 그것은 자신의 몸에 은연중 흐르고 있는 자애의 정신과 목도하는 시대정신이 어우러져 거대한 시 창작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인간에 대한 도저道底한 사랑이었음을 알 수 있다.
1 . 문병란의 시의 서정적 발화원의 탐색
문병란 시인은 전남 화순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다. 광주 주변부 농촌에서 성장하며 문학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다 스승인 김현승 시인의 추천으로 <가로수>가 《현대문학》(1959.10)에 발표된다. 새삼 초기 시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문병란 시인의 시적 근원의 중요한 단서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초기에 보여주는 시어는 언어의 조탁을 통한 사유와 감정의 절제로 시적 형상화를 이뤄낸다. 이러한 시의 특징은 탄탄한 언어의식으로 아름다운 심미적 서정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한 초기 시 <가로수>에서 당 시대에 고향을 등진 사람들의 멍에 같은 향수를 제재로 삼아 우리를 가슴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향수鄕愁는 끝나고
그리하여 우리들은 오후의 강변江邊에서
돌아와 섰다
생활의 폐허廢墟에 부대끼던 겨울을 벗으면
빙점氷點에 서서 기다리는 우리들의 3월
동상凍傷의 가지마다
부풀은 지혈止血에 창문窓門이 열린다
허기진 발자욱들이 돌아오는 오후午後의 입구入口
아무데서나 너의 인사는 반갑고
너와 같이 걷는 이 길은
시진한 고독孤獨을 나누며 가는 계절의 좁은 길,
빈손 마주 모으고 돌아오는 밤이면
가난을 열지어 흐르는 어둠 속
서러운 까닭은
우리 모두 사랑을 따로이 간직하기 때문이다.
어둠을 호흡呼吸하는 고요론 자리
누리지는 별빛을 머금어
다가오는 3월三月 같은 머언 얼굴들이
쏟고 간 눈물
-<가로수> 부분
외로운 것들이 제 자리를 잡아
은혜를 기다리는 시간
창가에 보랏빛 기다림이 이슬져 내리는
명후일明後日의 가슴이 있고
울먹이는 나무들의 어깨너머
찬란히 무늬지는 피빛 낙일落日
-<밤의 호흡> 부분
빛과 빛이 모여 꽃을 이루고
꽃과 꽃이 모여 다시 빛을 이루는
오전의 능동지대能動地帶, 거기엔
그리움의 몸부림이 밝음을 향하여 모이는 자리.
서로의 미소가 열리는 곳에 가감加減의 손길이 대낮의 문을 열어
꽃을 밴 5월의 가슴이 정오로 누워 있고
무너져 가는 시간의 피안에
기다림이 마디마디 여물어 터지는 꽃밭
-<꽃밭> 부분
위 세 편의 시에서 <가로수>는 누구나 갖고 있을 향수를 서정적 모티프로 취하고 있다. 여기에서 ‘향수’는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화순의 한 시절을 전부 의미하진 않는다. 봄의 어느 시기에 찾아간 봄 강변에서 문득 시인은 자라고 성장한 곳에서 안주하지 못하고 떠 밀려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렇지만 “생활의 폐허廢墟에 부대끼던 겨울을 벗으면/ 빙점氷點에 서서 기다리는 우리들의 3월/ 동상凍傷의 가지마다/ 부풀은 지혈止血에 창문窓門이 열린다”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런 희망과 긍정적인 자기 인식은 ‘시진한 고독’과 ‘머언 얼굴들이 쏟고 간 눈물’에 침몰되지 않고 애써 절제하는 미학으로 극복한다. 그렇다고 3월 같은 머언 얼굴들이 쏟고 간 눈물이나 닦아내는 소심한 자기 방어가 아니다. ‘미쁘운 여인’과 같이 ‘거닐고 자운’ 가로수 길을 통해 내재되어있는 마음속 고향에 당도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본다. 이 시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쉽게 감상에 빠져들지 않고, 현실을 부정하고 포기하거나 불편한 의식으로 전이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너는 5월의 휘앙새, 기대어 서면 너도,/ 나와 같이 고향이 멀다.”며 가로수와 자신이 똑같은 처지로 동류임을 인식하고 서로를 위로한다. 되짚어보면 가로수는 시인의 오롯한 자화상이다.
서정시의 주조는 과거와 마주한 세계에 대한 감정과 사상을 압축하여 상징으로 표출한 주관적 세계로 볼 수 있다. 유형으로도 초기 현대문학에서 추천 완료된 두 편의 시 <밤의 호흡>과 <꽃 밭>에서도 서정의 순수한 양상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밤의 호흡>에서는 삶의 공허함과 절대 고독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초월하려는 강한 의지가 ‘은혜를 기다리는 시간’, ‘명후일의 가슴’, ‘찬란히 무늬지는 핏빛 낙일’로 나타나고 있다. 이어 밤의 이미지를 통해 긴장은 더 강화되지만 어둠의 두려움은 ‘나무들의 어깨’와 곁고 감으로써 당연하게 도래할 여명의 공간에 존재하는 시간을 예비하고 있다. 또한, 시적 대상이나 사물을 인식하는 과정에서도 시각적 이미지를 시간적으로 배열하고 있다. 이어 슬픔이나 자기 고독의 정서를 절제된 미학으로 수용한다.
<꽃 밭>에서처럼 논리적이고 명징한 의미만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주어진 시를 이해하기에 앞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꽃 밭>의 시를 통한 의미와 미적 감동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시는 그런 조건을 관념이나 의미에서 충분히 전달하는 형식을 취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의 시공간적 배경은 오월과 정오의 햇살로 충일한 꽃밭이다. 위 두 편에서 보여준 감상적 절제는 더 이상 불필요하다. 격한 감정의 표출로 시적 의미 전달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절제된 언어를 통한 서정적 정서가 전반에 깔려 있는 <꽃 씨>에서 다시 재현되고 있다.
빛나는 여름의 오후午後
핏빛 꽃들의 몸부림이며
뜨거운 노을의 입김이 여물어
하나의 무게로 만져지는 것일까.
비애悲哀의 껍질을 모아 불태워 버리면
갑자기 뜰이 넓어가는 가을날
내 마음 어느 깊이에서도
고이 여물어 가는 빛나는 외로움!
오늘은 한 알의 꽃씨를 골라
기인 기다림의 창변窓邊에
화려한 어젯날의 대화對話를 묻는다.
-<꽃씨> 부분
인내의 온전한 씨앗이 완성되기까지는, 꽃이 피고 일정한 시간을 자연조건에 순응해야만 가능한 관조의 결과물이다. 그러한 자연 친화적 시상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태생에 근거한다. 시인은 화순의 농촌에서 성장하며 터득한 자연의 질서가 생명을 위한 법칙임을 안 것이다. 따라서 서정성이 강하게 표출된 서정시의 범주에서 자연을 내면화한 순수성은 자연스럽다. “꽃씨 한 알 속”에 응집된 “찬란한 빛깔이 사라진 다음”의 허무는 무상함에 그치지 않고 실존의 의미에 다다른다. “고이 여물어가는 빛나는 외로움!”마저 더해져 꽃이 만개했을 때의 아름다움을 시視, 감각적으로 형상화한 서정에 도달한다. 그러면서 “오늘은 한 알의 꽃씨를 골라/ 기인 기다림의 창변窓邊에/ 화려한 어젯날의 대화對話를 묻는다.”며 자연법칙인 현실에 담담히 긍정해가는 언어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자연 친화적인 소재에 집착한 꽃씨 한 알은 시적 바탕에 근접할 수 있는 주요 단서가 된다. 조그만 씨알 하나에도 생명적 가치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인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다만 꽃씨를 감싸고 있는 껍질을 비애로 인식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 껍질이 불편한 장애가 되어 “뜰이 넓어가는 가을날”에 당도하지 못했다고 보았기에 그렇다. 그곳에 당도하기 위해 그마저 씨알의 본성을 소중히 감싼 껍질마저 불태워야 할 대상으로 시인은 인식했다. 오히려 그 꽃씨를 감싸고 있는 껍질이 존재함으로써 크고 넓은 세계에 도달할 수 있음을 간과한 것은 모순일 수 있다. 물론 표현의 모순이 시의 완성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면 긍정으로 작용한다는 것도 여지로 남는다. 그렇지만 내면화한 절대적 사랑이 궁극에 도달하려는 파토스를 부인할 수는 없다. 향후 창작을 통해 발표된 시중에서 보여주는 반시反詩 성향이나 전통적傳統的 유행가류流行歌類에서 이미 그 징후를 알 수 있다. 그런 바탕에서 자연스럽게 현실 비판적인 리얼리즘도 순수 서정과 어우러져 형상화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렇지만 <꽃씨>의 시류는 아직 순수 서정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2 . 추천작 이후 최근작까지 이어지는 서정시편 들
지금껏 살펴본 바와 같이 현대문학에서 추천 완료한 이후 시를 살펴보았을 때 문병란 시인의 시적 바탕은 순수 서정시와 낭만 시의 근경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 추론이 가능한 것은 주관적 정서나 내면세계를 구체화하여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기에 그렇다. 더군다나 시적 자아와 대상 사이 대립이 부재하므로 시인의 내면적 자아로 형상화된 시와 동일한 정서로 받아들이기에 더 그렇다. 이해하기 쉽도록 《장난감이 없는 아이들》에 수록된 시들은 발표되었던 순서에 준해 접근하고 있다. 많은 민중 저항의 시의詩意와 여기에 실린 시를 조야해 보았지만, 일 편향적 몰입이 아닌 시의 본래적 의미에 깊이 천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의詩意에 있어 구체적 보편성과 시적 근원에 가까이 밀착해있음을 알았다. 일부 형상화된 시를 보면 언어의 유희와 낭만적 감정마저 전투적이거나 구호성인 시로 변주되었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먼저 <30세歲>의 시를 존재론적 근거로 접근하였을 때 무의식을 의식으로 전환하는 낭만적 서정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느 월간잡지月刊雜誌 속
빛나는 유명有名을 빌어
나도 잠깐 넌지시 던져본 미소
거기,
쓸쓸한 눈길 속에 숨어버린 30세歲
어느날
일류이발소一流理髮所의 거울 속에
점잔을 피어 문 소슬한 이마,
입술이 조금씩 옆으로 삐둘어져 간다.
목 언저리에 기어가는 면도面刀날 아래서
먼 주말여행週末旅行을 떠나는 쓸쓸한
30세歲-잊었던 연애를
다시 복습할까-차츰 주량酒量이 는다.
아직은 후회하지 않는 패기覇氣를 피워 물고
어느 날 흐린 술잔 속에서
비웃음을 이죽이며
고급 국산 담배를 피우는
30세歲-나도 이제 능청을 배우고 싶은가.
확률確率을 겨냥하는
나이 손길이
그녀의 유방 아래 잠든
오렌지 빛깔의 무의식無意識을 건드린다.
-<30세歲> 부분
이 시는 문병란 시인의 생물적 연대를 명쾌하게 밝혀준다. 당시의 시대와 사회적 환경을 어떤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 까지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거기에다 청년기 문병란 시인의 의식 세계를 가늠해볼 수 있는 행운까지 얻는다. 생존 문제보다 더 절실한 청년기의 이성적 호기심과 존재의식 공간에서 실존적 의미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이행하고 있다. 특히 눈여겨봐야 할 ‘건널목’, ‘화장실’, ‘일류이발소’는 우리의 일상에서 꼭 거쳐 가야 할 불가분의 관계로 자리매김한 장소를 가리킨다. 최소한 문화적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당연한 필수 공간이다. 그렇지만 “미니스커트 아래/ 고이 숨은 종아리”, “빛나는 유명有名을 빌어/ 나도 잠깐 넌지시 던져본 미소”, “어느 날 흐린 술잔 속에서/ 비웃음을 이죽이며/ 고급 국산 담배를 피우는/ 나도 잠깐 넌지시 던져본 미소”는 불필요한 의미로 선택되거나 해체되어 무의식의 범주에서 기다린다. 그것은 마지막 연에 “ 확률確率을 겨냥하는 나의 회화會話가/ 그녀의 유방乳房아래 잠든/ 오렌지 빛깔의 무의식無意識을 건드린다.”며 30歲 생존에서 긴요한 긴장의 의미를 단숨에 와해시켜버린다. 어찌 보면 그런 창작 의도를 장치한 시인의 의식적인 것을 무의식으로 인식해버린다면 아쉬움으로 끝날 수 있다. 청년기 존재적 생존 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단정해버린다면 시인의 의도를 간과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았기에 자아와 시의 세계는 일치하는 것으로 공감할 수 있다.
내가 지치고 피로했을 때
여름이여, 너는 머언 항구에서 돌아와
갑자기 퍼붓는 소나기와 같은 그리움으로
피로에 지친 내 육신을 두들겨
천둥 번개로 내 영혼을 일깨우며
그대 불멸의 뜨거운 입술로
내 빈 갈망의 묵마른 잔에
그대 소나기의 연정 가득 채워다오.
그리고 여름이여, 창백한 도시의 빛깔을
푸른 바다의 물감으로 새로이 칠하고
지치고 창백한 일상의 언어들에
장밋빛 생기를 부어주는 사육제의 시간……
넘치는 바다의 그라스에
냉 맥주 보다 시원한
우유빛 새벽의 나체를 포옹하게 해다오.
지금은 오전 일곱시
제도와 의무를 반란하는 새벽
시민 조세지역을 탈출하는 한 사내의
우범 가능성 위험한 금요일을 위하여
바다로 향한 국도의 끝에 서서
이글거리는 7월의 태양에 입맞추게 해다오.
-<여름에게> 부분
시인의 눈에 비친 대상은 전부가 시의 형상이 된다. 생기발랄한 여름도 그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미치도록 푸른 바다의 여름은 7월의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더 가치가 돋보이는 법이다. 그래서 7월은 내면에 층층이 쌓인 억눌림을 더 이상 억누르지 못한 채 표출하고 만다. 감각적인 시어에서 “내가 지치고 피로했을 때/ 여름이여, 너는 머언 항구에서 돌아와/ 갑자기 퍼붓는 소나기와 같은 그리움으로/ 피로에 지친 내 육신을 두들겨/ 천둥 번개로 내 영혼을 일깨우며/ 그대 불멸의 뜨거운 입술로/ 내 빈 갈망의 목마른 잔에/ 그대 소나기의 연정 가득 채워다오.”처럼 뭇 시선으로 이 시를 바라본다면, 감정 선을 훌쩍 넘어 표출된 밀어蜜語같은 애정시거나 가벼운 감상 시에 그칠 수 있다. 그렇지만 한 꺼풀 겹을 벗겨본다면 시대의 암울한 체제에 대한 강한 저항 의식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어차피 시는 그 시를 읽는 독자의 몫이다. 몫이란 받아들이는 의미마저도 시인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는 다른 의미로 인식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하여 더 많은 의도가 함의되어 있다 해도 시의 행간에서 미소처럼 번져 나오는 서정의 의미를 외면해선 안 된다. 문병란 시에서 그런 진폭은 더 많은 정서적 공감과 울림으로 여운을 불러일으켜 독자에게 가독성을 부여한다. 그것은 시적 대상에 대한 형상화로 이뤄낸 보편적 원 체험 공간이 변용되어 생산력으로 변주되기 때문이다.
썩고 썩어도 썩지 않는 것
썩고 썩어도 맛이 생기는 것
그것은 전라도 젓갈의 맛이다.
전라도 갯땅의 깊은 맛이다.
괴고 괴어서 삭고 곰삭아서
맛 중의 맛이 된 맛
온갖 비린내 땀내 눈물내
갖가지 맛소금으로 절이고 절이어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맛
소금기 짭조름한 눈물의 맛
-<전라도 젓갈> 부분
잘 절여진 젓갈에다 전라도가 붙여지면 그 순간 시선이 불편해지거나 기피의 대상이 된다. 그것은 전라도에 사는 사람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전라도 이외의 사람이 규정한 사회, 역사적인 멍에다. 시인은 불편한 외적 요소를 <전라도 젓갈>에서는 고통스럽게 감내하던 것에 대하여 과감히 거부한다. 그 기저는 시인이 목메도록 외치며 부딪치던 민중 저항 의식과 궤를 같이한다. 이어 역사나 시대정신에 따라 부당하게 평가받던 외적 요소를 되레 전라도라는 젓갈 속에서 “괴고 괴어서 삭고 곰삭아서/ 맛 중의 맛이 된 맛/ 온갖 비린내 땀내 눈물내/ 갖가지 맛소금으로 절이고 절이어/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맛/ 소금기 짭조름한 눈물의 맛”으로 자연환경에 의한 융합을 이뤄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젓갈처럼 곰삭히고 나면 전라도만의 기질이 잘 가미된 토종 전라도 것이 된다. 애초부터 ‘전라도’란 것은 단순히 지역을 가르는 경계가 아닌 사람의 기질을 가리켰다. 그런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전봉준이 되었고, 그 땅에 살아온 민중과 민족인 동시에 80년 광주의 내면화된 실체다. 그렇기에 문병란 시인에게 서정시의 정의는 굳이 필요치 않다. 전라도 젓갈처럼 곰삭은 것이 곧 서정의 가치이기에 그렇다. 치열한 삶의 언어가 서정시와 현실 참여의 저항 시여서 동전의 양면처럼 같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는 헤엄을 치고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는 꽃망울을 튼다.
절망 속에서도
삶의 끈기는 희망을 찾고
사막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의 오아시스의 그늘을 찾는다.
--중략--
꿈꾸는 자여, 어둠속에서
멀리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긴 고행 길 멈추지 말라
인생항로
파도는 높고
폭풍우 몰아쳐 배는 흔들려도
한 고비 지나면
구름 뒤 태양은 다시 뜨고
고요한 뱃길 순항의 내일이 꼭 찾아온다.
-<희망가> 부분
긴 터널에 들어서면 실낱같은 빛을 소망한다. 소망하는 것은 희망을 간절히 구하는 것이다. 6, 70년대의 우리 선배들이 살아온 세상이 그랬다. 시대의 암울은 의식과 행동의 자유와 양심마저 시인에게 박탈해갔다. 애초부터 시인의 본성은 예민한 감수성으로 무장되어 있다. 그 감수성은 양날의 칼과 같다. 시인의 눈빛은 서정적 인식에다 현실적인 이미지를 수없이 오버랩시킨다. 시적 감수성으로 표출되어야 할 ‘꽃망울’과 ‘오아시스’가 ‘눈보라’와 ‘사막’에서 절망한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 없다고 다독이며 “고요한 뱃길 순항의 내일 온다”는 강한 희망을 제시한다. 시 속의 얼음장 밑에서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의 미세한 움직임으로는 봄을 알 수 없지만, 이내 꽃망울과 조응한다. 밀림 속 나비 한 마리가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나비효과는 시인의 성찰로 자연법칙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한다. 시를 통해 암울한 현실을 표징하고 있지만, 자아라는 내면을 공고히 할 때 희망이라는 궁극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희망을 집안이라는 공간 <아내의 상숑>에다 “인생은 30촉 백열등”을 환하게 밝힌다.
인생은 30촉 백열등
그 불빛처럼 쓸쓸해도
도마질 소리는
궁, 상, 각, 치, 우로 흐른다.
사랑하는 사람아, 해넘이
고운 노을 등에 지고
그대 어디쯤 흔들리고 있는가.
가난한 아내의 식칼 끝에 묻어나는
소슬한 음악, 한 접시 노을이
식탁 위에 곱게 타고 있다.
-<아내의 샹송> 부분
남녀의 사랑을 노래한 중세 프랑스의 상숑이 흐르는 밤이다. 이름조차도 걸맞게 <아내의 샹송>은 시인의 삶을 시로 빌어 전경화 한 리얼리티이며 화폭으로 완성되기 전 목탄으로 그려내는 스케치다. 우선 변두리와 단독주택은 묘한 부조화를 이루는 듯해도 어색하지만은 않다. 부엌에서 들려오는 도마질 소리와 아내의 말소리 말고는 필요치 않다. 리얼리티 한 삶은 항상 배고프다. 그러면서도 평안함이 충만한 삶의 전형을 꿈꾸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래도 시인은 저녁이 있는 풍경을 수채화로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도마질하기에 딱 좋은 30촉 전구를 천장에 매달아 아늑한 실내 조도를 연출하고 있다. 자그마한 집과 어스름이 먼저 당도하는 변두리다. 고요와 어둠이 만나면 적요하다. 적요의 틈으로 아내의 도마질 소리가 또각 또각이 아닌 딸각딸각 4분의 3박자로 번져나간다. 나이 든 아내의 감정에 따라 엇박자도 놓아주며 슬픈 일과 기쁜 일을 짊어진 하루를 고스란히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들이민다. 노을 같은 전형적 사랑이 충만한 서정이 그 안에 있다.
아직도 젊고 팽팽한 몸뚱어리에
푸른 가지를 죽죽 뻗치고
남해의 푸른 하늘을 끌어안고 서 있는
곰내 팽나무
임진년 난리 때
이순신 장군의 노모 변씨와
그의 부인 방씨가
5년간 기거했다는 내력을 지니고
하나의 역사가 수천 개의 이파리를 달고서
눈부신 6월 햇살 아래
그 미끈한 아랫도리를 당당하게 서 있다.
팽나무는 그대로
아름다운 조선 역사
그날의 내력 안으로 간직하고
거대한 상형문자처럼 두 팔 발려
이 세상 사내란 사내 천하의 무든 수컷들을
죄다 삼키고도 모자랄 듯
천하의 햇살을 모조리 빨아들이고 서 있다.
천하장정들 다 오라
그 넉넉한 무당각시의 품을 열고
아랫도리 성한 왜놈들 부대쯤 모조리 삼키고
이 세상 남편과 자식 줄줄이 거느리고
그 수천 수만 개의 남근이 주렁주렁 매달리듯
저 용트림하는 장려한 나무의 풍만한 끼를 보라
-<곰내 팽나무> 부분
문병란 시인은 자연의 대상을 시적 구조물로 차용한다. 그것은 단순한 차용에 그치지 않고 의도를 장치한다. 여수의 곰내熊川 마을은 수백 년 묵은 팽나무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노모와 부인이 기거했던 유래를 갖고 있다. 그런 <곰내 팽나무>는 시인의 역사의식을 자극하고 통한痛恨의 임진년까지 관통한다. 임진년 통한의 과거사를 해한解恨의 정서로 인식하며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한풀이는 구호에 그치지 않고 고유 민족 정서인 서정에 닿는다. 그러기에 곰내 팽나무는 민족의 혼이 깃든 대상이다. 팽나무는 고래古來부터 마을 앞이나 관가에 심어진 수호신으로 받들어진 신목으로 민중의식과 상통한다. 시인은 범상치 않은 팽나무의 웅혼한 기상을 감지한다. “하나의 역사가 수천 개의 이파리를 달고서/ 눈부신 6월 햇살 아래/ 그 미끈한 아랫도리를 당당하게 서 있다.”라고 하며 팽나무 한 그루가 늙은 사람들이 쉬어가는 그늘이나 제공하는 정자나무가 아닌 여수 앞 바닷가 당시 조선을 지키는 든든한 수호신으로 인식한다. 거기서 “내 나이 67세/ 아직은 젊고만 싶은 수컷으로/ 열 오른 이마 가까이 다가가 접신”까지 하는 열정을 가졌다. 과거와 현재 이 땅의 암울한 시대를 살아온 시인정신은 남다르다. 하여 내면화된 역사의식이나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정서는 사물 속에 투영된 서정적 시흥이 뼛속까지 관류하는 시인임을 방증한다.
사랑은
저만치 피어 있는 한 송이 풀꽃
이 애틋한 몸짓
서로의 빛깔과 냄새를 나누어 가지며
사랑은 가진 것 하나씩 잃어 가는 일이다.
각기 다른 인연의 한 끝에 서서
눈물에 젖은 정한 눈빛 하늘거리며
바람결에도 곱게 무늬 지는 가슴
사랑은 서로의 눈물 속에 젖어 가는 일이다.
오가는 인생길에 애틋이 피어났던
너와 나의 애달픈 연분도
가시덤불 찔레꽃으로 어우러지고
다하지 못한 그리움
사랑은 하나가 되려나
마침내 부서진 가슴 핏빛 노을로 타오르려나
이 밤도 파도는 밀려와
잠 못 드는 바닷가에 모래알로 부서지고
사랑은 서로의 가슴에 가서 고이 죽어 가는 일이다.
-<인연서설> 부분
이 시는 <아내의 상숑>에 버금가는 서정의 전형으로 “꽃이 꽃을 향하여 피어나듯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다.”라며 “사랑은 서로의 가슴에 가서 고이 죽어 가는 일이다.”라고 확언하며 시적 형상화와 미학적 국면에 도달한다. 당당한 서정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꽃은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 형태로써 의미를 부여받고 시적 의미 공간을 형성한다. 그러한 시적 공간이 사랑의 열정을 강화시켜준다. 이 시는 사랑의 연가戀歌로 불려도 좋을 사랑을 노래한 애정시다. 그렇다고 어느 한쪽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파멸적 사랑이 아닌 서로에게 다가가 뼈저린 상처까지도 아우르는 사랑이다. 거기에 언어 행에서 이루어내는 촘촘한 나열 구조는 독자들을 위한 배려다. 다만, 시를 탐색하는 상상력을 저감 시킬 수도 있겠지만 시인은 그것마저도 감수한다. 진정으로 인식한 사랑이란 가치에 무감한 우리에게 절실한 울림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서로의 영원을 담보로 출발한다. 그렇기에 죽음을 전제한 사랑은 너무 일러 예감하기 어렵다. “사랑은 서로의 가슴에 가서 고이 죽어 가는 일이다.”라며 선지자적 예언을 누설한다. 그래서 사랑은 시이고 시이면서 사랑이라고 노래한다. 그러므로 간간히 입에서 흥얼거리는 유행가 가사 같은 시가 오래 기억될 수밖에 없다. 문병란 시인의 영혼 같은 시는 앞으로 더 험난한 시대에서도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것이다.
사랑이여, 내개 길을 묻는 사랑이여!
빛깔은 시들고 향기는 썩는다
머물다 가는 시간 앞에
오늘 고희를 위한 메모를 쓴다
인간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다만 죽을 뿐이다-헤밍웨이,
이 아침 초대받지 않는 손님
세월이 옆문으로 와서 노크를 한다.
-<내게 길을 묻는 사랑이여_ 고희를 위한 메모> 부분
이 시를 읽다 보면 비장감마저 든다. 삶의 먼 길을 떠나 목적지에 닿은 듯한 비감한 결의를 엿볼 수 있다. “여기 한 송이 꽃은/ 열흘 붉은 짧은 목숨이지만/ 그는 필 때보다/ 질 때가 더 아름답다”는 시행은 잠언箴言처럼 들린다. 누구든 엄숙하고 숙연한 시의詩意 앞에서 세상이 뒤집힌다 해도 다른 생각을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세상살이에 초연한 의지를 초극이라 한다. 초극의 경지에 든 시인이다. 삶은 생과 사로 구조되어 맞물려 간다. 안타깝게도 선생후사先生後死다. 시가 서정의 범주에 있느냐 마느냐의 시비가 더는 필요치 않다. 서정시의 본원적 형식논리와 “인간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다만 죽을 뿐이다-헤밍웨이,/ 이 아침 초대받지 않는 손님/ 세월이 옆문으로 와서 노크를 한다.”라며 누구에게나 죽음은 도래하는 슬픈 노래라는 명제를 차용하고 있다. 이 시를 일별 할수록 생전의 마지막이었던 2015년 5월 광주 망월동 구 묘역에서 열변을 토하시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멋도 모르고 선생님께 필筆을 들이댄 죄스러움이 클 뿐이다. “피는 꽃에 기약턴 마음/ 지는 꽃에 눈물 맺는 열매/ 맹세보다 사랑은 길다// 오래 오래 피려 하지 마라라/ 붉게 붉게 타려 하지 마라라”며 영혼을 울리는 듯한 전율의 송가를 읊조리는데 이미 고인이 되신 시인님의 유언 같아 가슴이 아프다. <시를 사랑한다는 것은>에서 “시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라는 복음 같은 인식으로 시에 다가감은 비로소 사람다운 삶에 이르고자 함이다. 역설적이지만 “그 속에서 인생은 짧고 시는 영원하다.”며 이 땅의 사람들에게 시의 영원성을 다시 환기시킨다. 그 시는 구호성 강한 시가 아닌 사람의 가슴으로 전달되는 따스한 시임은 더는 논할 필요도 없다.
전 생애를 관통하는 삶 속에서 우러나온 민족과 민중적 양심의 시적 발현은 특수한 시대가 만들어놓은 하나의 굴레였다. 그런 어둡던 시대 우리의 자화상을 부인할 수 없다. 구호로 불렸거나 저항의 중심에 선 시들은 과거로 저문 시대의 민중 속 가슴에서 아린 가락처럼 낭송되거나 노래로 불러지고 있다. 하지만 위에서 《장난감이 없는 아이들》에 수록된 80편의 시속에서 눈에 띄는 시어들을 헤아려보았다. 그런 시어詩語는 인간의 삶에서 사랑과 연민의 정서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에 60년대 반공 이데올로기 시대를 거쳐 80년대까지 사회 혁명의 시대에 살면서 시인이 언어적 텍스트에만 충실했다면 어떠했을까를 상상해본다. 두말할 것도 없이 서정성의 결여로 문병란 시인의 시적 세계는 대단치 않았을 것이다. 시대에 대한 민중의 분노, 고통과 좌절에 대한 저항의 생생한 ‘아우성’과 텍스트로서의 ‘죽은’ 언어 사이에서 절망적 간극을 탄탄한 정서로 메워왔음을 확인해보았다. 시인은 비록 <竹筍 밭에서>의 시에서 “아직도 낡은 연미복을 입은 시인詩人아/ 이제는 시들은 꽃다발을 던져 버려야 한다/ 가냘픈 피리는 내던져 버려야 한다/ 시詩는 시詩가 끝나는 데서부터 다시 시작돼야 한다”라며 반시反詩적 자세를 견지하기도 했다. 당시 민중의 순수하고 진솔한 의식에 맞닿기 위한 의도가 더 짙다. 더 나아가 그들과 동지적 연대를 이어가기 위하여 밀의密意같은 시를 거부하고 “불쌍한 백성의 밑구멍을 보아라/ 저 위엣 양반들이 먹고 싸지르는 냄새에/ 질식당하고 억눌린 밑바닥을 보아라”라며 <作別調>에서 민중에 대한 열정적 사랑을 시적 인식으로 드러냈다. 문병란 시에서 일관되게 민중 의식을 표현하는 시속에도 인간적인 삶에 대한 사랑으로의 천착은 굴지성인 땅에 닿아있다. 밑바닥은 하층 민중을 가리킨다. 밑바닥이란 상징을 통해 민중의 의식세계를 시로 형상화 하는데 성공한다. 따라서 순수한 삶을 이어가는 질박한 사람들과 서정적 연대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의 많은 창작시중 서정성이 배제된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되짚어본다면 민중의 서정적 삶을 복원해 내려는 강한 의지의 지향과 시적 세계는 결연하게 맞닿는다. 그러한 인식을 토대로 암울한 시대에서 치열한 서정 시인으로 살다 가신 시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첫댓글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텍스트를 꼼꼼히 읽고 쓴 노작 잘 읽었다. 하지만, 여러 한자 용어들이 부적절하게 쓰이고 있는 곳들이 나타난다. 하나의 예만 들자면 '전라도젓갈'에 대한 글에서 "...시인은 그런 불편부당한 외적 요소를 <전라도 젓갈>에서 고통스럽게 감내하던..."라고 썼는데 '불편부당'이라는 단어를 잘못 쓰고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평론에서도 지나치게 한자식 용어나 전문 용어를 많이 쓴다면 독자들의 상상의 여지를 제한시키거나 아니며 필자의 입장이 단정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문제가 생기더라. 아무튼 고생했다.
여하튼 고맙네
송시인이 지적한 것이 맞네그려 자네가 조언한 부분은 앞으로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될것이네
생각해봐도 앞으로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이어져야할 것이라고 보네.
축하합니다! 몇 일 시아버님 입원으로 까페에 못 들어왔더니 철영씨에게 좋은 일이 있었네요. 욕심 부려쌌더니 기어이 평론 등단을? 산문 쓰기가 즐거우니 좋겠어요! 시에 비해서 산문은 자칫 문장의 통일성이 흔들릴 수가 있더라구요. 꼼꼼히 읽어보니 다소 수정해야 할 문장도 눈에 띄네요. 아무튼 그 열정 고이고이 더 멋진 글로 꽃 피우시기를.....거듭 축하!!
민숙회장께서 보시고 올려주신 내용은 참고하겠습니다. 일부 생각이 달라 표현하는 방법이 다를 수 있을 것이고 문법적으로 문제가 된다면 앞으로 배워 고쳐가며 쓰면 되겠지요. 그런 것이 저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고 문학적 성장을 이룰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당연히 부족함이 있을 겁니다. 등단이란 절차는 완성이 아닌 시작이라는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