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해(河海)와 같은 은혜 갚을 길이 없습니다.” 이런 말들은 전제군주 시절에야 전혀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21세기를 사는 오늘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런 말들이 대통령 앞에서 오고갔다면 이건 좀 심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른바 ‘박비어천가’가 부끄럼 없이 나오고 있다면서, 모모 장관들이 부처 업무보고 자리에서 했던 말을 그대로 옮긴 신문기사를 보면서, 저래도 되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요즘도 아닌 전제군주 시대였던 정조 시절, 다산 정약용은 지엄한 임금의 지시에도 정면으로 거부하면서, 부끄럽게 해주는 일은 절대로 할 수 없노라고 단호히 물리친 사건이 있었습니다.
1795년 34세의 다산은 연초에 정3품 당상관인 동부승지에 올라 날개를 달고 임금과 승정원에서 머리를 맞대고 국사를 논하는 지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뜻밖에 중국인 주문모라는 천주교 신부가 몰래 조선에 들어와 포교활동을 한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세상이 참으로 시끄러워졌습니다. 다산은 그런 일에 전혀 관여한 바가 없으나, 반대파에서 비방과 모함을 일삼자, 하는 수 없이 임금은 다산을 충청도 홍주에 있는 금정도 찰방(역장)이라는 말직의 벼슬로 좌천시켰습니다. 다산은 20대 초 천주교에 관여한 잘못 때문이라고 여기고 순수하게 받아들이며, 그곳에 가서 충실하게 찰방 업무를 잘 수행했습니다. 그래서 그해 연말 바로 내직으로 들어와 서울 생활이 시작됩니다.
그 무렵의 일입니다. 상경하기 직전 다산은 이존창(李存昌,1752〜1801)이라는 열성 천주교 신자를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체포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이존창은 천주교 초기에 큰 공이 있는 거물급 천주교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다산은 일개 천주교 신자 한사람으로, 그곳 지역의 관리인 찰방이라면 의당해야 할 일로 여겨, 전혀 그것을 자랑하거나 공이 있는 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다산을 좋아하던 정조 임금은, 그 일을 크게 찬양하여 다산의 앞길이 열리는 발판으로 삼으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해가는 남인계의 대감인 이정운(李鼎運,1743〜?)이라는 분에게 지시하여, 충청감영에 부임하면 정약용과 상의하여 이존창을 체포한 공로를 찬양하는 장계를 올리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임금의 지시대로 이정운은 정약용에게 연락하여 장계의 초고를 써서 자신의 업적을 소상히 밝혀주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산은, 그 따위 신자 한 사람 체포한 일이 무슨 공로가 되느냐면서 펄쩍 뛰면서 완강하게 거절했습니다. “그자를 체포하려고 모의하거나 계획을 꾸몄던 것도 없이 아주 쉽게 체포했는데, 이제 와서 남보란 듯이 과장해서 찬양하여 임금의 혜택을 얻어내려 하는 일은 죽어도 못할 짓입니다.”라고 말하며 제발 자신을 부끄럽게 해주지 말라고 요구했습니다. 당시 승지이던 이정운의 아우 이익운(李益運,1748〜1817)까지 나서서 임금의 뜻에 따르라고 온갖 사정을 했으나, 다산이 끝내 거절하여 장계를 올리는 일은 성사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요즘 고관대작이 임명되는 계절, 온갖 비리와 부정을 몸에 가득 안고 있으면서도, 대통령이 후보자로 임명만해주면 아무도 거절하는 사람은 없고, 오히려 비리와 부정을 감추거나 숨겨서라도 고관대작에만 오르려는 사람들을 보면서 다산의 그 강직한 공직자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부끄러운 추태가 세상에 폭로되고, 그런 수모를 당하면서, 대통령의 뜻에는 일체 ‘노’라는 말을 못하고 만신창이의 몸으로 낙마하고 마는 모습이 너무나 안쓰럽습니다. 전제군주 시대에도 과감히 ‘노’라고 말하던 다산, 민주주의 시대에는 왜 그런 사람은 나오지 않을까요. 대통령이 전제 군주보다 더 무서운 존재인가 봅니다. |